[백호열] 여름 밤 탓

한 낮의 열기가 식은 밤에는

* 2023.03.09. 완성 백업본

여름 밤 탓

w. 탄산수

텅, 텅, 텅, 텅.

탄성 높은 주황색 공이 바닥을 박차고 올라 커다란 손에 감겼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받아 짙어진 초록의 나뭇잎은 무성하게 우거졌고, 반짝반짝 빛나는 잎사귀 사이로 맴- 맴-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텁텁한 공기를 타고 퍼지는 백색소음을 뚫고 공이 손에 감기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큰 키에 알맞게 뻗은 긴 팔과 다리, 농구공만큼 탄성이 좋아 보이는 다부진 몸의 빨간 머리 소년. 소년의 손을 떠난 농구공이 챡, 하고 그물을 흔들었다. 림 안으로 깔끔하게 들어간 슛. 

짝, 짝, 짝. 저를 향한 것이 분명한 박수 소리를 쫓아 시선을 돌리자 나무 그늘 밑에 앉은 이가 손을 흔들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굴러온 농구공이 툭, 운동화 끝에 닿아 멈춰 섰다. 공을 들어 옆구리에 낀 소년은 성큼성큼 나무 그늘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호열이 너 언제 왔어?"

"대남이가 너 여기 있을 거라고 하길래."

언제 왔냐는 물음에 어떻게 왔는지에 대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도 되묻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니까. 털썩. 호열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소년에게 자연스럽게 수건이 건네졌다. 목선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 땀이 그득한 목덜미를 하얀수건으로 훔쳐냈다. 축축해진 수건을 목덜미에 걸치자 달아오른 뺨에 차가운 것이 와 닿았다. 읏, 차갑다! 한여름의 태양과는 정반대인 온도가 온몸으로 번져갔다. 얼굴을 미지근하게 식혀낸 캔을 손에 쥐자 남아있는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을 감돌았다.

"이 천재님에게 주는 선물?"

"백호 너 주려고 사 온 거 아니다~"

괜히 한 번 튕겨보는 말에 백호는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농담인 걸 아는 모양이었다. 호쾌하게 웃는 소리가 주변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 뒤로 캔 따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호열은 제가 들고 있던 캔을 백호가 들고 있는 캔에 갖다 부딪힌 후, 챠칵하는 소리와 함께 캔뚜껑 고리를 눌러 내렸다. 시원한 음료가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텁텁하고 끈적한 공기에 땀줄기가 턱선을 타고 흘렀다. 이따금 더운 바람이 두 소년을 스쳐 지나갔다. 머리꼭지를 내리쬐는 햇살을 피해 나무 밑으로 숨어들었지만, 그리 시원하지는 않았다. 흘러내린 땀 위로 묵직하게 스며드는 뜨거운 공기 탓이었다.

소년들이 나고 자란 이 동네의 여름 공기는 바다를 닮아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바다를 닮아 더 짭조롬해지고 끈적해지는 공기는 도망갈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정수리를 뜨겁게 달구는 태양이라면 햇살 닿지 않는 나무 그늘로 피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텁텁하고 끈적한 공기를 피하려면 어디로 도망가는 게 좋을까?

공기를 피해서 멀리 도망간다면 바닷속이 가장 알맞을지도 몰랐다. 사람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으니까. 하지만 바다를 닮은 공기를 피하자고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알맞은 선택일지는 알 수 없었다. 부딪혀내야만 알 수 있었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일렁였다. 꿀꺽꿀꺽, 음료를 삼켜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콰직, 바닥까지 비운 음료캔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네! 강백호 선수 3점 슛!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빈 캔은 빈 통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공원 구석의 쓰레기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꼬오오오올!!!

"어떠냐, 이 천재의 실력이? 상양 따위 문제없겠지!"

진짜 3점 슛이라도 성공한 듯이 위풍당당하게 허리춤에 손을 얹고 호열을 내려다봤다. 짝, 짝, 짝. 장단 맞춰주듯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손뼉을 쳐준 호열은 제가 들고 있던 캔도 콰직 구겨들고 일어섰다.

백호가 쏘는 슛을 2만 번, 아니 그 이상을 바라봐 온 호열이었다. 눈을 감고도 백호의 슛을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이 봐 온 그대로만 하면 됐다. 그 정도 운동신경은 있었다. 양호열 선수! 공격합니다! 하나, 둘, 셋. 슛! 아까와 같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빈 캔이 탁, 하고 모서리에 부딪혔다가 그대로 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깔끔하지 못한 성공에 따라오는 약간의 아쉬움.

우오오! 호열이 너 이 자식 대단한데? 커다란 손을 맞부딪히는 소리가 공원의 코트 위로 흘러갔다. 백호는 주황색 공을 이쪽 손에서 저쪽 손, 다시 저쪽 손에서 이쪽 손으로 옮겼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혹시나, 혹여나 무슨 말을 할까 싶어서 제가 먼저 청을 했다.

"한 판 할래?"

"그럼, 슛 대결?"

슛 대결이라면 나쁘지만은 않았다. 사실 함께하는 이가 백호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공을 끌어안고 있던 소년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아! 좋은 생각이 났다.

주전인 농구부원이 농구부원도 아닌 학생을 상대로 전력으로 경기하는 건 역시 치사하다며 핸디캡을 걸었다. 백호는 제 키를 감안해서 백보드에서 더 멀리 떨어졌고, 왼손은 뒷짐을 졌다. 오른손으로만 하는 농구. 스포츠를 말하는 백호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니, 전문가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호열은 이 대결에 왜 핸디캡이 적용되어야 하는 건지 맞는 말만 골라서 하는 백호에게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 정도 빡센 핸디캡을 제게 줄 정도로 제 농구 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고교선수 앞- 백호 앞이니까 또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대신 결투신청을 했다. 와라! 강백호! 사나이 양호열이 그 정도로 농구를 못하진 않는다고!

텅, 텅, 텅, 텅. 공이 바닥을 튕기는 소리가 공원을 가득 메웠다. 공을 가진 상대의 움직임을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빼앗았다가 빼앗겼다. 공을 튕기며 몸을 부대끼는 소년들은 제법 즐거워 보였다. 뭐가 좋은지 연신 웃어댔다. 하아, 하아, 하아. 두 소년은 폐에 가득 찬 텁텁한 공기를 다 뱉어내려는 것처럼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비 오듯 흐른 땀은 입고 있는 티셔츠의 앞뒤 목둘레를 따라 깊고 진하게 물들어있었다. 다리 사이에 가두고 열심히 튕기던 공이 삽시간에 백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호열은 공을 놓친 자리에 그대로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겨우 바닥을 짚은 양 팔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체의 무게가 느껴졌다.

"하아, 하아- 푸하하! 백호야 너 지금 포즈 디게 웃기다!"

"아!!! 양호열이 웃지 마라! 천재님이 지금 한 손으로 슛 쏠 거란 말이다! 엉?"

엉거주춤하게 다리를 벌리고 자세를 낮춘 채 한 손으로 자유투를 시도하는 폼이 퍽 웃겼다. 호열은 진심으로 웃었다. 엉성하게 벌려져 있던 다리가 굽혔다가 곧게 펴지자 손끝을 떠난 공이 포물선을 그렸다. 불안정하게 착지한 공은 림 위를 뱅글뱅글 맴돌다 이내 쏙, 그물 속으로 떨어졌다.

슛, 골인.

*

따가운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 밑으로 피신 온 두 사람은 덥다고 하면서도 꽤 가까이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았다. 비닐봉지에 남아있던 말차음료로 입을 축이던 호열은 손등으로 입을 쓱 닦고는 페트병을 건넸다. 자연스레 건네받은 백호는 그대로 페트병을 입으로 갖다 댔다. 식을 줄 모르는 태양 아래서 한참 동안 흘린 땀에 온몸이 끈적거렸다. 목을 축인 백호는 손에 들고 있던 농구공을 이리저리 통통 튕기고 손가락 위로 빙글빙글 돌리며 신난 표정이었다.

주먹을 쥐고 싸우던 손에 농구공이 쥐어지면서 백호의 표정은 눈에 띄게 변화했다. 웃음이 많아지고, 밝아지고, 생기 가득한 얼굴. 백호의 얼굴을 슬쩍 보던 호열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맴- 맴- 하는 백색 소음이 귓가를 울렸다.

"남자도 남자를 좋아할 수 있대."

통, 통. 앉은 채로 한참을 손에서 손으로 공을 튕기던 백호는 그렇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말을 꺼내는 게 좋을 지, 공을 튕기면서 한참을 생각했을 것이다. 한참 감고 있었던 눈이 번쩍 뜨였다. 두서없이 불쑥 들어오는 백호의 본론에 당황하는 건 일상이었지만, 이번에는 받아 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사고가 정지한 탓인지 그 어떤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좋은 해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 말에 돌아오는 답이 없자 백호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남자끼리 좋아할 수 있대.

호열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제 친구가, 그러니까 강백호가 왜 제게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알았나? 들켰나? 아니면 얘가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나?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연이의 이름이 닳고 닳도록 노래를 불렀다. 그럼 혹시 남자한테 고백받았나? 그것도 아니다. 어디서 남자끼리 좋아하는 만화나 영화를 보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여자애들이 교실 구석에서 돌려보던 BL인지 야오이인지를 어쩌다 봤거나, 그게 아니면 지나가다가 그런 얘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땀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것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뭐라고 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 제발 좀.

"호열아, 듣고 있냐?"

예고도 없이 어깨를 감싼 커다란 손에 호열의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거렸다. 어깨를 짚은 손이 뜨겁고 묵직했다. 호열은 눈에 띄게 놀란 저의 행동을 숨기고 싶어 애써 침착했다. 겨우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마주한 얼굴은 저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하하, 하하. 어색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다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목이 말라왔다. 이렇게 어색한 연기라니, 아무래도 장래에 배우나 서비스직 쪽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 잠깐 사이에도 끈질기게 쫓아오는 시선이 얼굴을 홧홧하게 만들었다. 

"응, 알지."

호열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모으고 있던 무릎에 이마가 닿았다. 그대로 딱딱한 무릎에 제 이마를 퍽퍽 박고 싶었다. 뭐야, 너 알고 있었어? 나만 몰랐네. 뭐~ 이 천재님이 바빠서 좀 느렸던 것뿐이야! 종알종알 제가 그 '명제' 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떠드는 백호의 목소리가 아득해졌다. 명치께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식도를 타고 올라올 것만 같았다.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풀자 상체가 비스듬히 뒤로 넘어갔다. 고개를 젖히자 머리 뒤로 까끌한 나무 기둥이 느껴졌다. 

호열아 내가 영화를 보는데 말이야. 밑에서 올려다본 나무는 까마득하게 높아 보였다. 짙은 초록으로 물든 겉과 달리 아직 연둣빛을 품고 있는 나무의 안쪽. 불규칙하게 뻗은 나뭇가지와 셀 수 없이 많은 잎사귀 사이를 뚫고 햇살이 촘촘하게 떨어졌다. 그래서 송희한테 물어봤다? 농구 골대 너머로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몇 개가 둥실둥실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미지근한 바람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 갔지만, 뜨거운 목구멍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목울대가 일렁였다. 꼴깍,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삼켰다. 고백하지 않으려고 참아 온 그 많은 날들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백호야, 나 너무 졸리다. 잠깐 네 어깨 좀 빌리자."

조잘거리던 백호의 말을 끊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 정도가 양호열이 강백호의 친구 자리를 지키면서 낼 수 있는 최대 욕심이었다. 다른 얘기는 끝까지 다 들어줄 수 있어도 이런 얘기는 곤란했다. 그동안 모든 얘기를 다 들어줬으니 한 번쯤은 다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 뒤로는 질문공세가 퍼부어질 것이 뻔했다. 할 말이 없어서 도망치는 거냐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었다. 도망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은 뭐가 있는지 묻고 싶었다. 호열의 속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백호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 종알거렸다. 호열은 제 옆에서 종알거리는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내보이지 못하고 꽁꽁 싸맨 제 감정을 쿠션 삼아, 노곤해진 몸을 핑계 삼아 잠을 청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귓바퀴가 탄탄한 상완과 어깨 그 사이쯤에 닿았다. 귀에 맞닿은 피부는 의외로 미지근했다.

좋아해,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신나게 조잘거리던 백호는 별안간 콩, 하고 제 어깨에 기대오는 작은 머리통에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 어. 그러니까. 그래서 말이야. 말을 조금 더듬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머릿 속이 복잡하게 꼬여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당황한 탓이었다.

작은 머리통이 기대 온 제 어깨가 자꾸 신경 쓰여 눈길이 갔다. 제게 기대고 있는 머리통이 제 생각과는 달리 너무 작고 가벼워서 기분이 이상했다. 농구공보다 작고 가벼운 것 같았다. 이 녀석 이렇게 작은 녀석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제 말소리가 느려질수록 호열의 숨소리가 점점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잠들었나? 제 왼쪽 어깨를 빌려 잠든 호열의 머리꼭지를 바라보던 백호는 오른손을 호열의 머리 위로 펼쳐 가늠했다. 확실히 농구공보다는 작을 것 같았다. 손을 뻗어 호열의 눈앞에 휘휘 흔들었다.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잠든 호열을 훑었다. 호열이 신고 있는 운동화에 머문 시선을 따라 백호의 커다란 운동화가 움직였다. 슬쩍- 발을 옆으로 밀어 뒤꿈치의 위치를 맞췄다. 확연하게 드러나는 사이즈 차이가 웃겨서 푸흡, 웃음이 터졌다. 제 웃음소리에 호열이 깰까 봐 입을 막은 채 끅끅거렸다. 작다. 호열과 제 발치에서 방황하던 시선은 무릎 위를 가지런히 감싼 호열의 손에 머물렀다.

백호는 눈 앞에 손을 펼쳤다. 제 손이 큰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막 무지막지하게 큰 것 같지는 않았다. 흐음, 아닌가? 커다란 손이 천천히 호열의 손등을 덮었다. 거리를 조절하지 못하고 맞닿은 살갗에 놀라 화들짝 손을 떼어냈다. 작다.

작아도 너무 작았다. 유창수의 박력에 반해 유도부에 들어갔다는 1학년 어느 여자애의 손보다 더 작을 것 같았다. 호열이 녀석의 주먹이 작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제 눈앞의 호열이 제가 아는 호열이 맞는 건지, 혹시 귀신은 아닌 지 오싹해졌다.

*

여름의 태양은 하늘에 떠 있는 시간이 길었다. 농구코트를 뜨겁게 달구던 선명한 노란빛 태양은 어느새 파랗던 하늘을 파스텔톤 핑크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텁텁하고 미지근한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침묵이 흐르는 두 사람 사이로 색-, 색 거리는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나른한 기운에 깜빡 잠들었던 백호가 눈을 번뜩 떴다. 여전히 제 어깨를 빌린 채 새근새근 아이처럼 잠들어있는 호열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슬슬 배가 고파오는데 호열은 일어날 생각이 기색이 없었다. 대남이나 구식이, 용팔이 같으면 박치기로 깨워줬을 텐데. 요즘 아르바이트 늘렸다더니 피곤했나 봐. 아, 아닌가 그냥 너무 아기처럼 자니까 깨우기 좀 그런가. 아닌가, 그냥 하늘이 핑크빛이어서 그런가.

호열은 손도, 발도, 키도 다 작았다. 잠든 호열을 관찰하던 백호의 시선이 호열의 입술에 닿았다. 입술도 작을까? 입 안도 작을까? 저 입술은 말랑할까? 입 안도 말랑하겠지? 혓바닥은 핑크색이었던가? 정신을 놓고 상상을 하다가 제 상상에 화들짝 놀랐다. 오른손을 들어 냅다 오른뺨을 짝- 짝- 때렸다. 정신차려라 강백호! 친구를 상대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스스로 뺨을 때려 겨우 진정시켰지만, 상상은 더 강렬해졌다. 호열의 입술에 닿는 제 손가락, 저 입술에 입술이 닿는다면? 빨라지는 심장박동이 주체가 안 됐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꺾어 호열에게로 다가갔다. 잠든 입술 위로 떨고 있는 입술이 다가가고 있었다. 백호가 내쉬는 뜨거운 숨이 호열의 인중에 닿았다.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흡! 재빠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은 백호는 다시 한번 제 오른뺨을 후려쳤다. 얼굴이 붉어진 탓이 저 스스로 때린 뺨 때문인지 호열의 입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것은 호열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뺨을 때리는 백호의 호들갑에 이미 잠에서 깬 뒤였지만 눈 뜰 타이밍을 놓쳤다. 감고 있던 눈앞이 좀 더 어두워졌다고 느꼈을 때쯤에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입술 가까이에서 백호가 내쉬는 숨이 인중 위로 흩어지자 심장이 멎어버리는 줄 알았다. 반사적으로 발가락을 힘껏 오므렸다. 손이 축축해지고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눈을 떠야 할까? 밀쳐내야 할까? 그냥 감고 있어야 할까? 근데 백호가 왜 이러지?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 호열의 머리통이 별안간 중심을 잃고 기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야, 크흠! 야, 양호열이! 이제 일어나! 나 배고파!"

나무 옆으로 우뚝 선 백호가 눈에 걸렸다. 호열은 가늘게 뜬 눈으로 하늘을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는 하늘을 담았다. 빨간 머리를 쫓아 핑크빛으로 물든 제 마음과 닮아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뭘 기대했던 거냐. 아직도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이 뛰고 있었다. 

땀에 젖은 옷이 불쾌하게 몸에 감겨왔다. 간단하게 씻고 다시 만나기로 하고 서로의 집으로 돌아갔던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자주 가는 국숫집이었다. 분홍빛이던 하늘은 어느새 보랏빛을 품은 짙은 쪽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장님, 여기 메밀소바 2개 주세요. 하나는 곱빼기로 주시구요."

샤워 후 다시 만난 백호의 머리는 그대로였지만, 호열의 머리는 눈가를 찌를 듯 덥수룩하게 덮여있었다. 또 리젠트 머리를 하느라 시간을 쓰느니 빨리 고픈 배를 채우기로 한 모양이었다. 바가지 머리인가? 아닌데. 그냥 긴 머리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낮에 봤던 호열의 얼굴보다 더 어려 보이는 것 같았다. 앞머리로 이마를 가리자 호열의 얼굴이 더 자그마하게 느껴졌다. 그 사이로 핑크빛 입술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찬물로 샤워하면서 낮에 있던 일을 모두 씻어내 하수구에 처박은 뒤였다. 그랬다고 믿고 있었는데 또 호열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제가 나무 밑에서 하려 했던 행동이 생각이 났다. 호열이의 입술은 말랑할까? 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 하하! 야 호열아 덥다!"

백호의 덥다는 소리에 가게 사장님은 에어컨의 바람 세기를 더 세게 조절했다. 백호의 변화를 호열이 모를 리 없었다. 제 앞에서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히는 백호의 머릿속에는 아까의 그 상황이 떠오른 게 분명했다. 분명 제가 찬물로 샤워하며 떨쳐낸 그 상황. 그러니까 얼굴과 얼굴이... 아니 입술과 입술이 닿지 않을 만큼만 가까이 마주했던 그 상황.

사실 따지고 보면 분명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맞다. 근데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렇게 되어버렸다.

이럴수록 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굴어야 했다. 호열은 그런 쪽은 자신 있었다. 백호가 왜 그랬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일단 어떻게든 주어진 상황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음식이 나오자 호열은 평소처럼 행동했다. 백호에게 젓가락을 까서 건네고, 저도 젓가락을 까서 메밀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텅 비어있던 위장에 음식이 차기 시작하자, 다른 생각은 잊혀졌다. 소년들은 원래 단순한 법이었다.

"맛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크하하! 찌찌뽕! 평소처럼 그런 장난을 쳤다. 먹을 거 하나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 될 리 없었다. 

힐끔힐끔 호열의 입술을 곁눈질하던 백호는 천천히 젓가락을 들었다. 분명히 주문할 때까지만 해도 배고팠었는데. 이상하게 배고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평소와는 달리 천천히 젓가락질하던 백호는 문득 호열이 음식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느꼈다. 음, 많이 배고팠나 보군. 젓가락 가득 집힌 국수를 입에 밀어 넣으면서도 힐끔힐끔 호열을 쫓았다. 확실히 평소보다 속도가 빨랐다. 게다가 평소에는 깔끔하게 먹으면서 다른 녀석들을 챙기던 놈이었는데, 지금은 제 입술 위에 김가루가 붙어있는지도 모르고 식사 중이었다. 윗입술에 붙어 있는 까만 김가루가 영- 신경이 쓰였다.

거의 코를 박은 채로 국수를 흡입하던 호열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힉!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채 저를 매섭게 바라보고 있는 백호의 얼굴이 있었다. 순간 백호의 얼굴이 너무 가깝다고 느껴졌다. 인중 위로 뜨거운 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호열은 애써 침착하게 젓가락질을 멈추고 물었다.

"백호 너 다 먹은 거야? 에이~ 설마~ 실력 많이 죽었는데?"

"호열아."

아무렇지 않으려 너스레를 떨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진득하게 저를 쫓아오는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테이블 위로 잠깐 정적이 흘렀던 것 같기도 했다. 테이블에 비치된 냅킨을 쥔 커다란 손이 호열의 입술을 우악스럽게 훔쳤다.

"뭐 묻었어."

뭐지. 백호의 손길이 쓸고 지나간 입술이 화끈거렸다. 입술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화끈거렸다. 젓가락을 어떻게 쥐어야 하는지, 손가락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머리가 펑- 하고 터질 것 같았다. 호열의 얼굴 전체가 빨갛다 못해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귀 끝이 붉어진 백호는 차마 제 앞의 호열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커다란 손에 쥐어진 젓가락이 분주히 움직였다. 후루룩거리는 소리와 함께 메밀국수가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

아이스크림 먹자. 국숫집을 나선 백호가 내뱉은 말이었다. 백호군단의 식사 후에는 늘 아이스크림이 따라붙었다. 그러니 저녁 식사 뒤에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었다. 마음이 자꾸 이상했다. 심장께가 이상하게 자꾸 간지러웠다.

사실 호열은 식사 뒤에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집에 들어가 혼자 이불을 팡팡 찬다고 해도 혼자 있는 것이 무조건 최선이었다. 최대한 빨리 백호와 떨어져야 날뛰는 심장을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딱히 아이스크림을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호열은 태연한 척 백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래, 아이스크림만 같이 먹고 헤어지는 거야. 아무 일 없었으니까.

편의점에 들러 사이좋게 아이스바를 하나씩 입에 물었다. 차가운 것이 입에 닿자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달콤한 기운이 몸 안으로 퍼졌다. 배도 부르고 입도 달달하니 기분이 좋았다. 짙어진 하늘 아래 깔린 공기는 여름의 밤바다를 닮아 제법 선선해져 있었다.

두 소년은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퍼진 골목길을 걸었다. 이 길을 지나면 호열의 집이 나올 것이고,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백호의 집이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호열은 이 이상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돌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나 어제 알바하는데 진짜 미친놈 봤잖아."

사람들 다 줄 서 있는데 갑자기 등에 메고 있던 칼을 꺼내는 거야. 플라스틱이니 망정이지 진짜 칼인 줄 알고 경찰에 신고할 뻔했다니까. 근데 그 자식이. 

아이스바를 먹으며 조잘조잘 떠드는 호열의 입술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아이스바가 빨간 탓인지 차가운 탓인지, 그게 아니면 자꾸 호열의 입술만 눈에 들어오는 제 마음이 붉은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괜히 뱃속이 울렁거리고 귓불이 간지러워져 손끝으로 북북 긁었다. 귓불의 긁힌 자리가 심장박동을 따라 화끈거렸다.

제 아이스바는 이미 다 먹어 치운 뒤였다. 호열이 뭐라고 조잘거리는지 내용은 들리지도 않았다. 낮부터 계속된 입술 생각은 뇌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호열의 입술이 얼마나 말랑할지 궁금했다. 금방 아이스바를 먹었으니까 따뜻하기보다는 차가울지도 몰랐다. 어쩌면 아이스바를 닮은 딸기맛이 날지도 몰랐다. 붉게 물든 입술을 머금으면 제 입술도 붉게 물들지 궁금해졌다. 

한낮의 열기가 식은 아스팔트 위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섞였다. 미지근하게 식은 아스팔트가 괜히 사람을 들뜨게 했다. 낮에 있었던 일이 자꾸 떠올랐다. 그때, 그대로 입술을 갖다 대었다면 너는 어땠을까. 선 굵게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일렁였다. 입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 자꾸만 마른침을 삼켰다. 사나이 강백호는 궁금한 걸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 그건 핑계였다.

가로등 불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아니, 네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아서.

그냥, 그냥. 좋아서.

"호열아."

"응?"

손을 뻗어 무방비 상태로 비어있는 작은 손을 꼭 움켜쥐었다. 다른 손으로 턱을 감싸자 손안에 감긴 얼굴이 농구공보다 작았다. 무작정 입 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말캉하고, 부드럽고, 딸기맛이 났다. 머리 위로 천둥이 친 것 같았다.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전부 올라간 것 같았다. 다리가 바들바들 떨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입을 열면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심장이 터져서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별안간 뜨거운 것이 입 속으로 쑥 하고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혀가 마주 닿았던 것 같기도 하다. 커다란 손이 닿은 자리가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삐- 하는 이명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거 지금… 키스…? 그러니까 첫키스? 첫키스하면 종이 울린다며. 첫키스는 사탕처럼 달콤하다던데, 하늘을 나는 것 같다던데. 키스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간다던데. 연예인 누구는 키스를 몇 시간 동안 했다던데. 근데 이게 뭐냐고. 별똥별보다 빠르게 지나간 것 같은 첫키스라니 이게 뭐냐고.

급하게 떨어진 두 소년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호열의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바는 아직 뜨거움이 가시지 않은 아스팔트 위로 떨어져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강백호는 솔직했다. 묵직하게 가슴을 향해 던지는 직구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반응했다. 펄떡펄떡 뛰다 못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얼굴로 모자라 귓가와 목덜미까지 빨개진 커다란 소년이 호열의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커다란 손에 호열의 작은 손을 꼭 쥔 채였다. 안전벨트 같은 것일까. 제 손을 꼭 쥔 커다란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 죽는 거 아니냐? 경기 뛸 때보다 심장 더 뛰는 거 같은데?"

커다란 손이 잡고 있던 작은 손을 그대로 제 가슴팍 위에 갖다 댔다. 잡아당기는 힘에 이끌린 호열은 거의 안기다시피 백호의 앞에 쪼그려 앉고 말았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옷가지 밑으로 빠른 움직임이 느껴졌다. 쿵, 쿵, 쿵. 농구공인지 심장인지 모를 것이 코트로 내리꽂혔다가 바닥을 박차고 오르길 반복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심장박동에 온몸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작은 손이 가슴팍에 닿자 심장이 더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이토록 빠르게 뛰는 심장이 네 것인지 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쿵, 쿵, 쿵. 같은 속도로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나 너 좋아하나 봐."

호열은 아이스바를 잃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제 앞의 빨간 머리통에 사정없이 펀치를 날렸다. 뻑! 분명 뭐가 깨지는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휘청한 백호는 커다란 손으로 제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세상 억울하고 불쌍한 표정으로 호열을 바라보았다. 아! 왜 때려? 날아올 반격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던 호열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떴다.

달달 떨리는 다리로 엉거주춤 일어선 백호가 머리를 박박 문지르며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힘 조절이 진짜 안 됐는지 머리를 박박 문지르는 백호의 표정이 정말 아픈 표정이었다. 강백호였다. 호열이 너무나도 좋아하는 강백호의 모습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잔뜩 힘주어 쥔 주먹에 절로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푸핫! 하고 호열이 웃음을 터뜨렸다. 끅끅끅 소리를 내며 웃다가 주저앉았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다 났다. 기쁜 건지 웃긴 건지 슬픈 건지 모를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서 목구멍 밖으로 나왔다. 일렁거리는 호열의 눈앞에 엉거주춤하게 선 두 다리가 들어왔다. 커다란 손이 호열의 작은 머리통을 감쌌다. 눈가에 방울방울 맺히는 눈물을 뭉툭한 엄지손가락이 연신 훔쳐냈다. 

가늘게 떨며 울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내는 호열의 등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긴 팔을 뻗어 제 앞의 작은 사람을 감싸 안았다. 따끈하고 말랑한 것이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쿵, 쿵, 쿵. 또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호열이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호열이가 맨날 활짝 웃었으면 좋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호열은 쪼그려 앉은 채로 완전히 백호의 품에 갇힌 모습이었다. 온몸에 느껴지는 무게가 주는 압박감이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안정적이었다. 불안했던 감정이 일순간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품에 갇힌 소년은 제게 품을 내어준 소년의 하얀 반소매 티셔츠에 끝내 눈물 콧물 자국을 찍었다. 들썩거리던 어깨가 진정되자 백호는 제 품에 가뒀던 호열과 얼굴을 마주 보고 물었다.

"근데 호열아... 나 뭐 잘못.. 했어?"

침착하게 묻는 목소리와 달리 어깨를 감싸 쥔 두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사고를 치고 축 처진 귀를 한 채 시무룩해하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잘못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잘못했다.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 사나이 양호열도 첫키스는 사귀는 사람과 하고 싶다는 그런 로망쯤은 품 안에 하나 품고 있었다. 저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이 없는 짝사랑 상대와 이런 식으로 첫키스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상상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오십 번의 고백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전하면서 딱 한 번 상상해본 적 있는 장면이었다. 만일 저 고백을 내가 받는다면, 백호가 저에게 고백해온다면 어떤 형태일까. 그 한 번의 상상으로도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상상 속에서도 마음을 접고 넘겼는데.

현실은 늘 예상을 뛰어넘는다. 백호는 호열에게 냅다 키스했다. 그리고서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했다. 또, 나 너 좋아하나 봐, 라고 했던 것 같다.

"이거... 고백이야?"

몰라. 진짜 몰라. 모르겠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별안간 형제 같은 친구의 입술이 궁금해졌다. 말랑할지, 작을지, 입 안은 어떨지, 혀는 어떨지, 딸기맛이 날지, 제 입술도 같이 붉어질지. 그런 상상을 하다가 참지 못하고 입술을 훔쳤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아랫배가 뻐근해져 왔다. 오십 번을 고백해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게 진짜 좋아하는 건가 싶었다. 그게 아니면, 다 키스 때문일지도 몰랐다.

호열은 후보에도 없었던 예상치 못한 답에 머리가 멍해졌다. 모른다니. 모르겠다니. 고백인 것도 아니고 고백이 아닌 것도 아니고 몰라라니.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정신이 아득해졌다. 호열의 눈에 초점이 없어지자 백호는 어깨를 쥔 손을 다급히 흔들었다.

"야, 양호열."

"아, 어."

백호 답지 않게 낮게 깔린 목소리에 움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제 앞의 호열이 금방이라도 멀리 떠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라지지 마. 목덜미가 홧홧했다. 백호는 낮은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그,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잖아. 우린 친한 친구인데. 내가 그냥 해보고 싶어서 키스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 그, 그, 아 그리고 내가 너 좋다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잖아. 근데 어떻게 사귀어달라고 고백을 해. 그, 그리고! 키-, 킷, 키스는 처음이라고…"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구체적으로 뭐가 좋은지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굳이 말하자면 모든 게 다 좋았다. 호열은 꽤나 멍청한 폼으로 엉거주춤 서 있는 백호를 그대로 둔 채 집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쿵쿵 뛰는 심장이 왜 뛰는지 감추고 싶었으니까. 정신을 차린 백호가 제 뒤를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앞에서 잡힐 듯 멀어지는 호열을 향해 기를 쓰고 달렸다. 전속력으로 달려 따라붙어 어깨를 잡았다. 커다란 손에 돌려세워진 호열은 중심을 못 잡고 휘청였다. 바닥에 주저앉으며 그대로 넓은 품에 파묻혔다. 커다란 몸이 작은 몸을 끌어안으며 쪼그려 앉았다.

"양호열. 너... 도망가지 마. 어디 가지 마. 그냥 나랑 있어. 계속 같이 있어."

백호의 심장은 농구공을 닮아 있었다. 호열을 품은 심장이 텅, 텅, 텅, 텅. 뛰고 있었다. 그 울림이 호열의 작은 머리통을 콩, 콩, 콩, 콩하고 울렸다. 커다란 몸이 온몸을 감쌌다. 그의 떨림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백호가 소리를 내어 말하자 가슴에 콕 하고 박힌 호열의 옆머리가 웅웅 울렸다. 

"그, 그. 너랑 있으면 좋아. 너랑 맨날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 아, 그러니까. 나는 호열이 니가 내 친구인 게 너무 좋은데. 근데 니가 나만 좋아했으면 좋겠고. 나한테 숨기는 거 없이 다 말해줬으면 좋겠고. 근데 아, 너랑 놀면 좋고. 니가 맨날 웃었으면 좋겠고. 니가 울면 슬프고. 그리고 니가 우리 집 놀러 오면 좋고. 아침에 눈 뜨면 니가 옆에 있으면 좋을 것 같고. 같이 학교 가면 좋고. 어 그 가끔 그 아까.. 처럼 니 입술도 궁금하고. 음.. 그게 그러니까. 나도 그, 잘 모르겠는데 아직 이게 뭔지.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근데."

구구절절 바보 같은 고백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호열의 작은 손이 저와 같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쌌다. 머뭇거리는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뜨겁고 말캉한 혀가 서로를 옭아맸다. 말라붙었던 입이 촉촉해졌다. 심장이 또 쿵쿵 뛰었다. 입술을 뗀 백호가 벅찬 숨을 토해냈다.

"진짜 좋아해, 많이."

진짜 좋아해, 많이. 그 투박한 고백에 호열은 행복해졌다. 대답 대신 다시 입술을 포갰다. 네 심장과 내 심장이 같은 속도로 뛰고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기대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서툴러도 함께라면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열일곱 살이었고, 여름이었으니까.

- end.


Special Thanks to. 농넛님, 모레님

하 안사귀는데 충동적으로 키스하는 백호열 보고싶다 짝사랑한건 호열이고 키스한건 백호고... (논개연성) 키스하다가 백호 눈앞이 번쩍 하고 별 보여서 ?! 하고 보면 호열이가 당황해서 주먹부터 지른것 때문임 (철가방 쥐고 때려서 더 아팠을듯)

ㅋ ㅋㅋㅋㅋㅋ ㅜㅜㅜㅜㅜ 하... 저두요.... 누가 풀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탄산수님이랑 모레님 흘끔흘끔) 역시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백호가 음... 난 모르겠는데 역시 키스해보면 알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마음으로다가........(아니에요 우리 아기끼끼 신사적이에요

아니면 그냥.. 길거리 농구하다가 가로등 불빛 밑에 털썩 앉아있는데.. 눈이 딱 마주치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홀려가꼬.. 허허..히히..낄낄..헤헤..

트위터에서 주고받던 대화(일부 발췌)에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대화 내용과는 모든 게 살짝살짝 다르지만... 모든 걸 다 담을 수 없었어요 제 한계입니다. 이걸로 연성빚 청산이예요. 아시조.. 아셔야 돼...! 연성빚 완전 청산입니다. 예!!!

다시 한 번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압도적 감사!

봄이 성큼성큼 오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벼운 얘기가 더 땡기네요. 엄청 가벼웠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역시 청춘의 첫사랑은 여름이죠.

뜨거운 여름을 지나 단풍이며 은행잎 예쁘게 물드는 가을을 뚫고 하얀 눈 포근하게 쌓이는 겨울을 견디고나면 백호열은 더 단단한 커플이 되겠죠. 그때쯤이면 제대로 된 고백을 해줄지도...

열 여덟살에, 벚꽃 흐드러지고 사과꽃 피어날 즈음엔 간질간질 달달하고 풋풋한 연애나 해라 얘들아...

좋겠다 부럽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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