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어제 그리고 내일에 관하여.
개인적인 감상 기록
본래 오타쿠 공간에는 오타쿠 글만 올리지만, 글은 읽히기 위해 쓰이기에 여기에 남깁니다.
나는 잘하는게 그리 없는 사람이다.
재주도 열정도 임기응변도 변변치 않다.
지식은 미천하며 사교성도 좋지 않다.
하지만 사람을 사랑하여 글을 쓴다.
기자도 작가도 아니고 나의 글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쓸 수 있어 글을 쓴다.
세상살이 라는 것은 어렵다.
내가 살아온 삶은 언제나 나의 좌절을 바라는듯 했으며 내가 선 자리는 곧잘 어떤 가장자리가 되고는 하였다.
어린시절에는 IMF를 겪었으며 경제가 회복되더라도 세상엔 안좋은 일들이 일어났다. 사람은 언제고 불합리한 이유와 크고 작은 불행으로 죽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그것이 보다 직접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사람을 알았지만 그뒤로는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는 했다.
나는 살기를 선택한 낙천주의자로서 동시에 죽음의 안식을 갈망하는 우울한 사람이면서도 결국은 죽지않기로 하였으나 큰일이 닥치면 스스로 거리로 나갈 여유가 없다.
그러니 지켜보았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소식에 귀기울이고 사회를 지켜보며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나쁜 일에 실망하고 좋은 일을 기억하였다.
나쁜 일과 좋은 일은 딱 떨어지는 일이 아니라 언제나 옆에 붙어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회고해보면 나는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어도 상관은 없는 주제에 몸을 사를 수 없어 여태 살아있다. 그러니 이 감상들 역시, 글 역시 얄팍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매번 세상의 잘못된 일이 일어날때마다 어떤 불합리한 일들이 일어나고 사람이 죽었고, 불구가 되거나 살아남았는지.
세세한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때의 공기를, 사람들이 토로해낸 언어들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아 이루어낸 것들을 기억한다.
여전히 세상은 어둡고 이기적인 사람이 많으며 잘못이 반복된다.
그러나 나처럼 기억하고 생존한 이들이 늘고있다. 세상은, 사람들은 공포를 알고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 우리가 당한 불합리, 자본주의라 이름 지어진 그럴싸한 폭력과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양심과 배려를 내다버려 실망한 경험은 잊혀지지 않고 때로는 사람을 바꾸기도 한다. 어떤 선한 이는 받은 폭력을 빌미로 폭력을 휘두르며 어떠한 이는 자신이 당한 착취의 수법을 타인에게 쓰기도 한다. 경험은 배움이 되는 까닭이다.
제각각의 선을 위해 우리는 자각하지 못한 무언가를 포기하고 살아가고 나역시 때로 그러할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어딘가에 선이 남아있음을 안다. 제각기의 트라우마와 두려움 실망으로 단련된 제각기의 누군가는 또 선을 갈망한다.
선하기위한 방법을 배우며 점차 진화해간다. 인류 최초의 선한 행동이 협동과 애착에 의해, 혹은 생존본능에 의해 행해졌다면 현재에도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우리는 계속 생각해왔고 배워왔다.
어떻게 하면 우리를 둘러싸고 억압하고 괴롭히는, 삶이라는 이름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어떻게하면 나를 둘러싼 세상이 덜 고통스러워지고 어떻게하면 세상에 내려앉은 어둠을 헤치고 일어나 아침해를 보고 옆의 사람을 확인하고 또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지.
긴지 짧은지 알 수 없는 삶을,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르면서 어제와 오늘을 거쳐 내일을 살 수 있는지 알기위해 노력했다.
나를 보호하고 옆의 사람을 보호하고 우리 모두가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불합리한 일에 사람이 죽지 않기 위해, 불구가 되지 않기 위해, 불구가 되더라도 어제와 다름없는 내일을 보내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좌절하며 때로는 포기했다가도 선함은 포기하지 못해 모여들고 선을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시위장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살아온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그들을 살게한 사랑을 토로하고 자신이 생각한 더 나아지기 위한 길을 저마다의 목소리로 성토한다.
내뱉지 않은 말은 혼자만의 것이 되지만 내뱉은 말은 누군가에게 지름길이 되거나 깨달음이 되며 인간이 인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이해할수 없음에 비난당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찾은 선을 말하며 함께 나아가자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누군가는 그것을 자기위로의 행위라 비웃을수도 있다. 나의 세계를 설파함은 그만으로 자기위안이 된다고 심리학적인 무언가를 들먹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서 선을 보고 인간을 본다. 개인이 우리가 되는 강한 연결을 느낀다.
제각각의 선은 다르다. 우리는 겪은 고통, 트라우마, 공포, 실망, 욕망. 이러한 것들이 다르기에 다른 인간으로 빚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동시에 상처입는 누군가를 줄이기해 공감하기위한 마음이 서로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이것이 사회이며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었기에 그 모든 것이 선이 되는 흐름을 나는 지켜보고 느껴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분명 나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홍사훈 기자님의 현장후기 클립¹ 을 보았다.
그분도 느꼈음을 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불합리하더라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경악하게 되더라도, 인간의 악의와 이기심, 욕심이 축적한 악이 우리를 두렵게 하더라도 우리는 끝나지 않고 실망은 거짓임을,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인류가 이제껏 추구한 선은 이어짐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를 이어지게 하는 것이 사랑임을 알게 했을 것이다.
혹자는 분노가 지속성이 짧다고 하고 우리가 언젠가 포기하고 순응하여 악을 추구하게 될 것이며 축적된 악의 무게에 깔려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노에는 여러 것들이 있는데 지금, 오늘의 우리를 덥게 만드는 분노는 애착과 희망이 얽혀 지속되어온 아주 오래되었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결코 꺼지지 않는 촛불이다. 이 초의 심지는 발화점이 낮아 스스로 불을 일으켜 꺼지더라도 다시 타오른다. 그리고 또다른 초를 찾게되면 서로가 서로를 더욱 뜨겁게 만든다.
불은 모이면 공기를 덥게하고 생겨난 공기층의 겹은 불을 보호한다.
우리의 선이 그러하다.
누군가의 선은 빨간색이고 누군가의 선은 푸른색이고 누군가의 선은 백색이거나 무색, 무지개색을 띌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우리를 갈라놓은 그 다름에도 사람들은 불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기러기의 비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나가고 화합한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차갑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이유를 위해 그러나 함께 살아남는다는 사회의 대의명제를 지키기위해 화합하게 된다. 나는 이역시 선의 흐름이라고, 도덕의 궤적²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는 나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누구의 탓이라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은 아주 고루하고 위압적인 방식으로 반복되었고 우리는 그에 벗어날 방법을 점차 배웠다.
가정폭력속에서도 아이는 자라고 언젠가 어른이 되어, 자신이 겪은 고통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처럼 우리는 폭력과 위압 공포 속에서 배우고 자라 현재에 이르렀다.
포기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지켜보았기에 알고 기억하기에 안다.
그리고 나보다 훨씬 많이 아는 사람들이 세상에 아주 많다. 점점 더 많아진다.
그럴수록 공기층의 겹은 단단해져 꺼지지않게 하며 고통속에서 자라난 어린아이가 고통을 베풀지 않는 어른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이 역시, 어쩌면 불합리하다.
그러나 이것은 선이기에 이루어질것이라고 믿는다.
¹
² 도덕의 궤적, 마이클 셔머
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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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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