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회전

그 밤의 한편에

고죠우타

Dusk by 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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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땐 새벽 세 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아아, 또……. 우타히메는 누운 채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요 근래 깊이 잠들지 못하고 새벽에 깨는 일이 잦았다. 원인은 불명.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알고 있다.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하얀 머리카락이 커튼 새로 스민 달빛에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새벽에 눈을 뜰 때면 그는 자고 있기도 하고 깨어 있기도 했다. 깨어 있을 때 눈을 뜬 우타히메를 발견하면 그는 부드러운 미소로 몇 마디 말을 건네다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 따뜻한 손길에 집중하다 보면 금세 다시 잠이 왔다. 이럴 때 그가 건네는 말은 평소와 다르게 온화한 것들뿐이어서, 그가 어쩌면 정말로 자신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잠들어 있었다. 고개가 저쪽을 향해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집중하면 들리는 작은 숨소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럴 때면 잠 대신 상념이 밀려왔다.

우타히메는 알고 있었다. 불면의 원인은 확실히 몇 달 전부터 함께 자기 시작한 이 남자, 고죠 사토루였다.

 

 

덜컥 시작된 동거는 대단한 동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갈 곳이 없으니까, 재워줘. 눈이 내리기 직전의 흐린 하늘을 담은 눈동자와 함께 꺼내는 그런 말을 거절하기란, 이오리 우타히메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뿐이었다. 갈 곳은 있었을 텐데.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자신을 ‘선택’한 것이 기뻤던 걸지도 모른다. 한심한 일이지만.

그래도 어느 날은 무심코 물었다. 왜 나한테 왔어? 고죠는 대답했다. 음, 우타히메가 좋아서? 말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별로 신빙성 있게 느껴지진 않았다. 우타히메가 그래서 진짜 이유는 뭐냐고 묻자 고죠는 대답 없이 미소 짓기만 했다.

 

고죠는 평소와 같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얄미운 소리를 늘어놓다가 가끔은 진지해졌고, 그러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을 약올려대곤 했다. 우타히메도 평소처럼 그를 대하고 있을 셈이었지만, 잘 되고 있는지는 가끔 자신이 없었다. 그중 가장 평소답지 못한 것이 수면이었다.

고죠와 한 침대에서 자게 된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남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바닥이나 소파 말고 침대가 좋다며 칭얼대던 도련님이 결국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퀸사이즈 침대를 주문해버린 것이다. 덕분에 우타히메의 방은 방문이나 겨우 닫힐 정도로 침대로 꽉 차고 말았는데, 고죠는 그것에 대해 별로 잘못했다는 기색도 없었다. 우타히메 집이 너무 좁아서 그렇잖아, 내친 김에 넓은 집으로 이사 갈래? 그 뻔뻔함이 도리어 우타히메를 쉽게 포기시켰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쉽게 휩쓸린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었다.

고죠는 수면 시간이 짧았다. 육안과 함께 대부분의 능력을 잃은 후부터 반전술식을 제대로 돌릴 수 없어 잠이 늘었다는데도 그랬다. 우타히메가 자기 위해 누우면 고죠도 함께 누웠지만, 우타히메가 잠든 것 같으면 슬그머니 일어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은은한 보조등을 켜고 책을 읽곤 했다.

처음엔 그런 것 때문에 깨는 줄 알았다. 그러나 고죠가 이런 우타히메의 상태를 눈치채고 며칠 밤을 꼼짝도 않고 침대에 누워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우타히메는 이러나 저러나 똑같으니 그냥 네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고, 고죠는 별말 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우타히메가 누울 때 함께 눕는 것만은 계속했다. 우타히메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할 때까지 그렇게 함께 누워있는 게 좋다고 했다.

처음에 우타히메는 이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철들 무렵부터 혼자 잠자리에 들었으니, 누군가와 함께 자는 것이 익숙할 리 없었다. 그렇기에 출장 때문에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날엔 오랜만에 숙면할 수 있겠다며 내심 기대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한밤중에 깨어난 우타히메는 또 새벽을 긴 생각으로 채웠다. 그 날 우타히메는 처음으로 불면의 진정한 원인과 직면했다. 그 사실 자체에 상념이 끊이질 않았다.

 

잠이 부족한 만큼 낮에 힘들긴 했지만 ‘그 사건’ 후로 현장 임무가 급격히 줄어 버틸 만은 했다. 집에 가면 고죠가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편해도 되나. 우타히메는 가끔 생각했다. 예전보다 훨씬 줄어든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일이 줄어들게 해준 주역이 청소도 해놓고 빨래도 해놓고 밥도 해놨다. 주력이 없어졌을 뿐이지 비상한 머리는 어디 가지 않으니 하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당분간은 그냥 이런 삶도 살아보고 싶다고 하니 대꾸할 말도 없었다.

심심할 때마다 잔뜩 아양 떠는 얼굴로 내뱉는 ‘밥? 목욕? 아니면 나?’ 같은 소리도 이제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할 때면, 이제는 가릴 필요가 없어진 탁해진 눈동자와 자주 눈이 마주쳤다. 그것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지만…… 불편하지도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타히메는, 편했다. 단순히 집안일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고죠 사토루와 함께 있는 시간이, 그와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들이, 늘 그랬듯 짜증나면서도 어딘가, 편안했다.

자꾸만 잠에서 깨는 것은 그 반작용 같은 걸까.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땐 환청인 줄만 알았다.

우타히메는 고죠가 차려준 밥상 앞에서 바보같이 입을 벌린 채로 그를 바라만 보았고, 그 얼굴을 보고 고죠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선 어서 밥을 먹으라고 재촉하니 우타히메는 정말 잘못 들었나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며칠 후 우타히메를 따라 누운 고죠가 뒤에서 몸을 꼭 껴안아 오며 사랑한다고 속삭였을 때까지 잘못 들은 것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이제껏 한 침대에서 자면서도 두 사람은 닿은 적이 없었다.

너, 그거 그만해. 우타히메의 말에 고죠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런 장난은 안 좋아해. 우타히메가 내가 하는 장난 중에 좋아하는 게 뭐가 있다고.

그런 대화 속에서 고죠는 킥킥 웃었다. 우타히메는 도저히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고죠는 껴안고 있던 팔에 좀 더 힘을 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장난이 아니면 괜찮다는 거지? 그리고 팔을 풀고선 제자리로 돌아갔다. 잘 자, 우타히메. 평소에도 하는 그 인사가 그날따라 어쩐지 간지러웠다.

그 날 후로 간간이 듣게 된 고백과 함께 새벽의 손길이 시작됐다. 덕분에 수면 시간은 전보다 늘었으나, 우타히메는 고죠의 이것이 무엇인지 도저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고죠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믿어도 되는지 우타히메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신뢰하는 건 우타히메가 비교적 잘하는 일이었으나, 그 신뢰를 먼저 깨뜨린 것은 고죠였다.

 

 

“네가 금방 어디론가 떠날 것 같아.”

살짝 뭉개진 발음으로 우타히메는 말했다. 어쩐지 집에 오자마자 술상을 차려놨다 했더니, 취기가 오를 무렵 은근슬쩍 다가와 뭐가 그리 망설여지냐고 묻는 속셈이 뻔했다. 뻔한 걸 알아도, 술이 부추긴 충동이 기어이 그 말을 내뱉게 했다.

이길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던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타히메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약간의 사전준비와 커다란 운이 도운 덕이었다.

그의 사랑한다는 말을 덜컥 믿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지. 우타히메는 자신이 없었다.

“……왜 웃어?”

충동으로 내뱉긴 했어도 나름 진지한 말이었는데, 그것을 들은 고죠의 입꼬리가 한없이 올라가 있었다. 우타히메가 째려보자 고죠는 표정을 가다듬어 보려 했지만, 말을 하는 동안 결국 원상복구 되어 실패했다.

“우타히메가 내 생각보다 날 훨씬 더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고죠가 아는 우타히메는 나쁜 결과를 상정하고 발도 들이지 않는 타입이 결코 아니었다. 약하고 배짱은 없어도, 두려운 순간에 기어이 한 발짝을 내디디고 마는 것이 이오리 우타히메라는 인간의 성정이었다. 그런 사람을 이만큼 망설이게 하는 것이 자신이었다. 그 사실이 그는 무척이나――

“무슨 소리야, 갑자기.”

우타히메가 기분 나쁘다는 듯 말하고선 얼마 남지 않은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고죠는 그 앞으로 슬그머니 물잔을 밀었다. 우타히메는 잠깐 불만 있는 표정을 지었지만 자기도 이 페이스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순순히 두 손으로 잔을 집었다. 천천히 물을 마시는 그 옆모습을 지켜보던 고죠가 말했다.

“결혼하자.”

순간 우타히메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그대로 뱉을 뻔한 것을 간신히 멈추고 겨우 삼킨 뒤 켁켁대는 우타히메를 잠시 내버려 둔 채 고죠는 주머니 속으로 슬그머니 손을 넣었다. 한참 동안 가지고 다니던 이것을 이제껏 꺼내지 못했던 것은, 그에게도 답지 않은 두려움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고죠에게 우타히메는 언제나, 자질구레한 것들을 전부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리는 사람이었다.

“내가 어디 못 가게, 우타히메가 꽉 잡아줘.”

이런 말을 하기엔 상황이 우스운 것 같기도 했지만, 이쪽이 자신들답다는 기분도 들었다. 가만히 붙잡은 손을 우타히메는 뿌리치지 않았다. 케이스도 없이 덜렁 꺼내 왼손 약지에 끼워준 반지를 우타히메는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말이 없는 우타히메를 내심 긴장한 채로 바라보던 고죠의 귀에 특유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면 되는구나…….”

드디어 뭔가를 납득한 듯 우타히메는 중얼거리며 천천히 손을 맞잡아왔다. 터무니없는 부탁에도 결국엔 고개를 끄덕이곤 했던 그때의 모습 그대로. 이윽고 손이 꽉 맞물렸을 때, 고죠는 또다시 웃어버렸다.

“용감하네, 우타히메.”

놀리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우타히메가 그를 한껏 노려보다가 이내 시선을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다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어진 말은, 고죠에게 더없이 아쉽고 기쁜 것이었다.

“이제 새벽에 깰 일은 없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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