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현힐데] 총사령관이 크리처빔을 맞았는데 - 2
“째 봐도 되냐?”
“마음대로 해….”
최윤은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다만 눈썹 한 쪽을 들어 올렸다.
“거기서 호르몬도 나오나 보다?”
“그건 네가 열어봐야 알지.”
예현이 소파에 파묻힌 채 웅얼였다. 그제야 윤은 고개를 들어 예현을 바라보았다.
“야.”
“응.”
“너 힐데베르트랑 무슨 일 있었냐.”
“없어.”
“내 앞에서 구라 치지 마라.”
“시끄러워. 수술실 날짜나 잡아.”
예현이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윤은 특유의 감정이 읽히지 않는 표정으로 예현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뭐, 서로 감정전이라도 했나 본데.”
“…!”
예현이 벌떡 일어나 윤을 쏘아보았다. 흰 얼굴이 순식간에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맞췄어? 어떤 기분이냐?”
“너, 너…! 파렴치한 소리 좀 하지 마!”
“얼씨구, 타이탄 다 됐네.”
윤이 낄낄거렸다. 예현은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우는 소리를 냈다.
“힐데가 성교육 하는 기분이라고 했을 때 그냥 그렇게 웃는 게 아니었는데.”
“그 정도로 민망해?”
“민망 같은 단어로 뭉갤 수준이 아니야….”
예현은 제 볼을 문지르며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아무튼, 샘플을 가져가든 째 보든 상관 없으니… 감정전이 제어하는 것 좀 도와줘. 네가 뭔가 규명해 내면 도움이 되겠지.”
“제어? 유지하려고?”
“전략적으로 봤을 때 사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특히 감지 능력 같은 거. 언제까지고 잭 블랙에게 의존할 순 없을 거잖아. 전력을 잃었을 때도 상정해야 하고. 내가 의외의 카드가 된다면 그 또한 좋겠지.”
윤은 잠시 눈을 굴렸다.
“칼을 대는 건 뭐가 어떻게 될 지 모르니 보류. CT 먼저 하자. 유양돌기 표면 외에 내부적인 기관에도 변화가 있는지 확인해야겠어. 뇌파검사 병행하고.”
“칼 대도 돼.”
“너… 아니, 아니다. 검사는 내가 결정해. 필요하면 하겠지만, 지금은 아냐.”
예현은 윤이 삼킨 말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힐데가 유양돌기를 잃었을 때의 일을 떠올린 거겠지. 예현은 기억을 더듬었으나, 그 기억들에 빈 곳이 많다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힐데를 찌른 후 발작이 오려는 것을 겨우 진정시키고 난 뒤 그에게 밀려온 의사결정 사항이 너무 많았다. 어떤 소요가 있었고… 힐데가 패혈증으로 며칠을 앓았던 것은 기억이 난다.
“알았어. 새뮤얼에게 언질해둘게. 가능한 한 빠르게 진행했으면 좋겠는데.”
“반가운 소리군.”
윤이 씨익 웃었다.
“우선적으로, 감정 전이를 감지할 수 있었으면 해. 당장 내가 해내야 하는 거니까.”
“그건 타이탄을 붙잡고 배우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겠어?”
예현은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안 그래도 힐데에게 물어봤는데 너무 오래돼서 어떤 식으로 시작했는지 기억이 안 나나 봐.”
“노친네들이란.”
“윤, 말을 좀…. 아, 내일 아침 일찍 이용 가능하대.”
“그래? 지금부터 금식해라.”
“알겠어.”
예현은 소리 없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나마 조금 마음이 놓였다. 어쨌든 그의 친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천재고, 환경이 주어지면 반드시 답을 찾아내므로. …갑자기 예현은 궁금해졌다. 만약 윤이 감정전이를 받게 되면 그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게 될까?
어찌 되었든 감정전이를 느끼지 못하는 친우의 옆에서, 예현은 홀로 제 감정의 움직임을 인지하는 연습을 했다. 안타깝게도 그걸 하려면 반드시 힐데가 제게 했던 감정전이를 떠올려야 했다…. 그 다정을 떠올리면 위가 쥐어짜듯 아파왔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이따금 작은 희망을 가지곤 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도 나를 좋아하니까. 같이 손을 잡고 걷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게 명확한데… 그저 나를 친애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강요할 자신이 예현에겐 없었다.
아무래도 위염이 재발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예현에게 타이탄의 기관이 생긴 지 2주가 지났다.
힐데베르트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힐데베르트는 단 한 번도 예현을 만나지 못했다. 애초에 배저 본부에서 그다지 자주 얼굴을 보는 편은 아니었거니와(사실 힐데 정도로 자주 총사령관의 얼굴을 보는 배저는 많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내면 한참 뒤에야 너무 바빠서 확인을 못 했다는 답변을 받곤 했다. 진짜 바쁜 것 같긴 했는데… 괜히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이거 자의식 과잉인가?
하지만 힐데베르트도 나름 제 걱정에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타이탄이 자신 하나뿐인 것은 아닐 터다. 그는 인간사회에 녹아든 타이탄이 블랙배저 본부에 없다는 보장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정이 맞는 경우, 여전히 감정전이 조절에 서툴다면 곤란하다.
좀 더 확실하게 네게 감정전이 제어를 가르치겠다고 했어야 했는데. 대자의 아직 미숙할 뿐인 감정전이가 뭐 어떻다고… 어릴 때 해주지 못한 보살핌이다 생각하면 되었을 것을 가지고 괜히 예민하게 군 것 같아 미안했다.
아니면… 역시 그날 아이가 흘린 감정 때문인 걸까.
그렇게 투명한 사랑의 감정을 넘치도록 흘려 받은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근래에 받은 동족의 감정들은 대부분 증오나 배신 따위의 것들이었으므로…. 그날 예현의 감정전이는 마치 구름을 헤치고 나온 빛과 같이 찬란했으나, 또한 온화한 모양새를 하곤 타는 듯이 뜨겁다는 점에서 마치 가을볕과도 같았다. 평기사 시절 받았던 추파 중에서도 그 정도의 강렬한 감정전이는 없었는데….
아직 제어에 서툴고 감정을 가장하는 법을 모르는 예현이다. 꾸며낼 수 없는 아이의 진심이, 그 고백에 가까운 감정전이가… 사실 힐데베르트에겐 다소 벅찼다. 그 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연애 한 번을 안 해 봤는데….’
아무튼 힐데베르트도 이젠 가만히 예현을 기다릴 수 없었다. 감정전이 제어는 어쨌든 혼자 깨우칠 수 없는 영역이니, 유양돌기의 기관이 자연 증발하지 않는 이상 제가 꼭 가르쳐주고 싶었다. 만약 예현이 자신을 불편해한다면 카이로스를 붙여서라도 지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에 대한 대답도, 그 애가 필요로 한다면….
어느새 일반인의 퇴근 시간은 한참을 지난 시간이었다. 힐데베르트는 오두막에서 슬쩍 나와 계단참에 털썩 앉았다. 오두막은 예현과 사수 남매가 지내는 집 바로 앞이니, 그가 퇴근을 한다면 반드시 그 앞을 지나게 된다. 힐데는 퇴근하는 최고상사를 붙잡고 읍소를 해볼 계획이었다. 예현은 아무리 일이 밀려도 며칠에 한 번은 꼭 집으로 퇴근을 했다. 힐데베르트는 며칠이고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예현을 기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소드마스터의 예민한 청력이 멀리서 달려오는 익숙한 자동차 소리를 잡았다. 힐데베르트는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쭉 빼서 울타리 너머를 살폈다. 헤드라이트가 번쩍이다 꺼지고 차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그리고 익숙한 발걸음 소리…. 힐데는 벌떡 일어났다.
“예현!”
오랜만에 보는 대자는 살짝 야윈 것도 같았다. 집을 향해 걸어오던 예현이 힐데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그 얼굴에 반가움이 스쳐 지나갔다.
스쳐지나갔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예현이 꺼지라며 소리를 질렀다면 이보다 덜 놀랐을 것이다.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힐데베르트를 덮친 것은 여과 없는 거부와 거절의 감정이었다. 힐데베르트가 일순 숨을 참을 정도로 그 감정은 되직하고 강렬했다. 힐데베르트는 어쩐지 화가 나 저도 모르게 예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예현도 놀라 몸을 움칠 물렸다. 겉으로 드러난 예현의 표정은 가벼운 난감함과 당황에 가까웠으나 유양돌기에 와닿는 감각은 결이 달랐다. 훅 진해지는 배타적인 감정과 순한 눈으로 그저 곤란해할 뿐인 시야의 괴리감에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예현이 잡힌 손목을 슬쩍 틀어 빼냈다.
“죄송해요, 힐데. 제가 좀 피곤해서… 제가 나중에 다시 연락 드릴게요.”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꾸벅이곤 도망치듯 집으로 가버렸다. 아이의 감정도 깜빡이듯 옅어졌다. 힐데는 멍청하게 서서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빈손을 툭 내렸다.
‘왜?’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 뒤통수에 대고 뭐라 소리치지도 못했다.
‘왜… 나를.’
빈자리가 그득하게 그의 곁을 채웠다. 그것은 너무나 거대해 힐데베르트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거기에 그대로 짓눌렸다. 늘 당연해 알지 못했던 명제가 폐부를 깔아뭉개고 있었다. ‘이예현은 힐데베르트를 좋아한다’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당당하며 오만한 명제. 오두막에서 생일선물을 주었을 때도, 검을 돌려주었을 때도, 배저로서의 삶을 권유했을 때도, 내가 새로이 눈을 뜬 이래, 너와 알게 지낸 이후 줄곧 너는 항상 내 편이었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거부해?’
네가?
너마저도?
‘너는 나를 좋아했잖아….’
끝내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 기어코 힐데베르트의 머릿속에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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