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차, HBD

B에게 by H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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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고 우는 놈 앞에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냐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같이 울어 줘야 하냐

사랑과 공상과 시와 마음에 대해 떠드는 것들은 전부 다 위선자야

사람은 그런 것들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어

네가 시니컬한 웃음과 함께 펜촉을 손날 위에서 휘휘 돌리고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데 같은 스물이 되어도 너와 나는 이렇게나 다르네

졸업식 날 카메라 렌즈 앞에서 네 생각을 너무 오래 하느라 어떤 표정도 짓지 못했다는 걸

그가 알아야 할 텐데

열심히들 하네

그렇지, 그래 보여

왜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나는 충격받은 얼굴로 그를 돌아본다 왜, 그런 말을 해 자꾸

그러면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애써 꾸며내며 무릎으로 바람 빠진 축구공을 퉁퉁 쳐올리고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면서 왜 너만 여전히 열다섯 언저리에 머무르고 있는 거냐고

집으로 돌아간 너희 집 현관문 앞에서 차임벨을 누를까 말까 오래 고민했다는 것

그걸 그가 알아야 할 텐데

네가 또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있길래 나는 아무 이유 없이 공원에 나가 걸었어

그렇게 의미도 방향도 없는 일을 하고 있어도 너는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어서 그것을 부정하고

뜀박질해 봤자 달아날 수가 없는데

사실 나는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는 걸

그걸 네가 알아야 할 텐데

어느새 성인이 된 너는 조금 지친 얼굴로 내게 살짝 다가온다

있잖아, 사실은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 여유도 인정도 안정과 인내 그 무엇도 내게 없어서 그랬어

이제야 좀 솔직하게 울며 고백하는 너를 보면 드디어 나도 자세를 갖출 수 있게 돼

아무것도 몰라도 좋아

누구에게도 더 용서 구하지 않아도 좋아

그냥 죽어

왜 남의 뺨을 쳐도 내 손이 더 아픈 걸까

네가 충격받은 얼굴로 이쪽을 보고

그딴 건 나도 알아 이 빌어먹을 새끼야

그냥 웃어 예쁘게

그러면 네가 소리 죽여 어깨를 떨며 운다

음, 이제야 좀 조용해졌군

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감상하는 대신 그를 몇 번이고 더 후려친다


누굴 이렇게 미워하면서 썼냐고 물어보신다면 주체와 대상 모두 ‘나’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자학을 허락받을 수 있다니 예술이란 건 좋은 거군요…… 이번 회차 마감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감상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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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댓글 3


  • 즐거운 새우

    이 시평을 쓰기 위해 삼 주가 밀렸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냥 게으른 거잖아) 그렇지만 정말 좋은 부분도 많고,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좋은 부분을 하나하나 나열하자니 시의 오 할을 기재할 것 같아 정말 많은 고민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내린 총평은 우습지만 강렬하다!쯤 되는 것 같아요 처음엔 화자의 짝사랑이 너무 좋았어요 화자는 시간이 갈수록 상대와의 성장의 차이를 느끼고 있는데 제가 최근에 성장의 차이로 틀어진 관계가 있다 보니... 솔직히 포기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화자는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고 해서 처음엔 정말 순애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그냥 죽어 하면서 뺨을 내려치는 장면에서 느꼈던 강렬한 색감은 솔직히 잊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드디어 눈높이가 맞아진 시점에서 거진 이별을 고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게 솔직히 신기했어요 자가 반성을 원했나? 라고도 생각했었는데 하단에 별첨해 주신 설명을 듣고선 정말 감탄했습니다 너무 잘 읽었어요 제 기준 제가 본 HBD 님 시 중에선 제일 최고인 것 같아 나중에도 종종 읽으러 이 게시글을 들릴 것 같다는 예상이 듭니다 수고하셨어요!

  • 퇴근하는 산양

    이 시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꼽으라면 "사실 나는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는 걸 / 그걸 네가 알아야 할 텐데" 인 것 같아요. "남의 뺨을 쳐도 내 손이 더 아픈" 이유와 일맥상통 하는 것 같아서요. 주체와 대상이 모두 '나'라는 해석을 보니 사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는 느낌도 들어요.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스스로를 타자화 하는 시각은 신기하고 자유로우면서도 결국 나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점이 답답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의 싫은 부분도 잘 달래서 어떻게 잘 사는 것 같은데, 싫은 부분이 너무 싫어서 가끔 살기조차 싫어지는 느낌을 어떻게 해야할 지... 그걸 알아야 어른이 되는 걸까요? '자학을 허락받는다'는 후기가 재밌어요. 자학을 누구한테 허락받는 걸까요? 결국 스스로에게 받는 걸까요? 쓰다보니 감상이 아니라 뭔 일기 같은 걸 줄줄 쓰게 되어버렸지만 그만큼 재미있게 읽고 곱씹어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수집하는 나비

    사랑과 공상과 시와 마음에 대해 떠드는 건 다 위선이라니... 창작자들은 모두 위선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이 세상에 위선자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다고 싶었다가 요즘은 그 위선도 지키지 않는 사람도 잔뜩 있구나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위선이라도 꾸며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생을 창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게 되네요 시간은 ~ 그가 알아야 할 텐데 < 이 부분 진짜 최고 ㅋㅋㅋ 예요 개님이 저한테 ‘우리는 같은 감성을 공유하는 사람‘이라고 많이 말씀해주셨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데 제가 개님의 문장에 영향을 받으며 지나온 날들이 있다고도 느낍니다 그러니까 제가 개님과 같은 감성을 갖게 된 원인이 개님일지도 몰라요...♡ 전 예전부터 개님만의 이런 표현을 너무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건 언제나 너무 혼란스럽고 어려운 일 같습니다 뺨을 내려치는 화자의 감정이 이해 되면서도 어쩐지 상대가 맞대응을 했으면 더 흥미로운 전개가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돼요!! 이번주도 재미있는 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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