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는 남자
후쿠신
어수선하다. 그러나 싫지 않았다. 신카이는 어느새 제 이름표가 빠진 부실 사물함을 의미 없이 열고 닫았다. 인터하이가 끝나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후배들의 연습을 봐주러 들리나, 현저히 발걸음이 줄어든 건 사실이었다. 고맙게도 귀여운 후배들 몇 명은 아쉬워하며 계속 들려 달라 졸랐지만 슬슬 제가 자리를 비워주는 것이 그들에게도 더 도움이 된다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 씁쓸함을 삼킬 정도로 뻔뻔하진 못 했으니 저와 시선이 마주치고 눈에 띄게 당황한 일학년들의 표정을 보고 미련을 마저 털어 내는 것이다. 허리를 숙여 크게 인사를 건넬 타이밍을 놓친 후배들을 배려해 신카이는 이제 곧 나갈 참이었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곤 발걸음을 돌렸다. 야, 삼학년 선배들 이제 안 오는 거 아니었어? 나중에 혼나면 어떡해. 걱정이 잔뜩 묻은 목소리를 들으며 신카이는 생각했다. 우리가 그렇게 무서운 편이었던가? 잘 모르겠는데. 로드 레이스는 속도의 승부. 하코네에서 가장 빠른 남자를 나무랠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니 신카이가 엄격한 규율 안에서 느끼는 후배들의 공포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시간은 흐르고 이 자리를 물려 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아직 실감이 안 났다. 새벽부터 땀을 흘리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것. 매일 보던 얼굴들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 책상에 앉아있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것. 그리고 사물함에 제 물건이 점점 줄어드는 것 모두...
뭘 그렇게 징그럽게 굴어. 그렇게 말하며 이틀 전 아라키타는 3학년들의 이름표를 모두 떼어냈다. 안은 거의 정리됐는데 3년간 붙어 있던 이름을 떼는 건 다른 문제라 모두가 아쉬워했다. 미루고 미뤘지만 언젠간 했어야지. 차라리 아라키타가 총대를 매서 다행이었다. 저 성질을 가로막기란 쉽지 않으니까.
"아! 함부로 떼면 어떡해! 마지막 사진도 못 찍었잖아!"
"시끄러! 너네가 자꾸 꾸물대니까 답답해서 그러는 거 아냐! 어디 팔려가냐?"
"하여간 낭만이 없어 낭만이. 무드가 전혀 없다고! 그렇게 배려 없이 생겼으면 마음이라도 좀 곱게 먹어야지."
"이 자식 말 다 했어?"
대학 입시 상담으로 후쿠토미는 자리에 없었지만 세 명으로 충분했다. 부실에서 할 일을 하던 후배들이 아라키타와 토도의 언성이 높아지자 눈치를 보며 자리를 비운 건 아직 신카이만 눈치챈 모양이다. 아직 졸업도 안 했으니 조금은 뻔뻔하게 굴어도 될까? 잠깐 들렸다 다시 교실로 올라갈 예정이었으나 바닥에 깔린 매트 위로 풀썩 누워버린 아라키타를 따라 나머지 둘도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먼저 누웠어. 좁아. 비켜."
"그 못된 심보 언제 고칠래? 나같은 미남은 논외지만 섬세하게 굴어야 나중에 애인도 만들 거 아냐?"
"뭣, 애인. 무슨 소리야? 대학에 여자 사귀러 가냐?"
"야스토모 입시 준비는 잘 돼가?"
"아- 몰라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계속 책상 앞에만 붙어 있으려니 죽겠다고! 신경질적인 투정이 이어졌다. 그동안 어느 정도 눈 감아줬던 선생님들의 배려도 이젠 기대하기 어려울 거다. 자잘한 대회들은 아직 남았지만 대부분은 후배들에게 출전을 양보한 터라 다음 레이스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못내 어색했다. 셋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일학년에 누가 요즘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말을 했다가, 입시를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누릴 대학 생활에 대한 운을 띄었다.
"진파치도 메이소?"
"응-"
"엑, 설마 걔 때문이냐?"
"니가 뭘 알아? 생각만 해도 떨리는데. 흥분되는 게 당연하다고? 마키쨩네 2번한테 얻은 정보니까 확실해."
"진한테 물어봤구나."
결국 자전거 타는 얘기잖아. 토도는 신나서 떠들었다. 거긴 우리 학교 선배들도 많이 진학했을 테니 내가 마키쨩을 잘 소개시켜 줘야지. 누군가와 함께 누릴 미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보여서 신카이는 웃었고 아라키타는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신카이. 뭐 할 말 없어?"
"할 말이라니?"
"다 봤다고! 어제 걔가 고백했잖아."
"눈도 좋아, 야스토모는."
왜 얘기가 여기로 튀는 거지. 신카이가 고백받는 거 드문 일도 아니잖아? 라며 심드렁했던 토도도 그 여자앤 뭔가 달랐다는 아라키타의 허풍에 관심을 보였다. 확실히 기억에 남긴 했다. 신카이도 아는 애였다. 1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고, 3년간 한 사람을 바라보는 건 쉽지 않으니까. 그 곧은 마음이 고마웠지만 그뿐이었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아무 일도 없어. 거절했으니까."
"뭐, 왜?"
"신카이. 나는 이해해. 추남은 이해 못 할 얘긴 하지 말자."
또 몇 분간 언성을 높이던 둘은 평소라면 굳이 꺼내지 않을 얘기로 주제를 옮겼다. 그 안경 낀 여자애는 마나미랑 무슨 관계아? 오늘도 찾아왔다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너는 진짜 너 따라다니는 여자애들 중에 관심 가는 애가 한 명도 없냐? 셋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무도 없는 부실의 주의를 살폈다. 이런 얘기는 일학년 때도 해본 적이 없었다. 큰 대회를 하나 넘으니 별생각이 다 드는구나. 가슴이 조금 찔렸지만 신카이는 아무렴 좋다고 생각했다. 과거에만 얽매여 사는 것도 좋지 않고, 앞으로 나갈 사람들은 나아가야 하니까. 여자에게 관심은 없으나 억지로 이상형을 쥐어짜던 도중 문뜩 이런 질문을 던졌다.
"주이치는 인기 있을까?"
"상상이 안 가는걸."
"초콜릿 받은 적 있었나?"
"그거 우정 초코 아니야?"
신카이는 난감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지. 별걸 다 물어본다며 넘기면 좋을 텐데 의외의 인물이 입 위에 오르자 둘은 열띠게 얘기했다. 토도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후쿠토미는 무리야 무리."
"엑 왜? 후쿠쨩 남자답잖냐."
"그야 로드밖에 모르니까."
"그건 니녀석도 마찬가지잖아."
"나와는 다르지. 나는 자전거가 애인이고, 후쿠토미는... 애인을 굳이 둘까? 여자쪽에서 버틸 때까지 데이트에서 로드만 탈걸? 그 고집을 다 맞춰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면 절대로 무리야 무리! 후쿠토미는 무조건 져 주는 여자를 만나야겠네."
"잘난 듯이 떠드는 너도 결국 여자 경험은 없잖아! 전문성 제로야."
"나는 안 사귀는 거라고!"
*
"오늘 재밌는 얘기를 했는데 들어볼래?"
해보라는 눈빛이 닿았다. 아무리 어른스러워 보여도 학생은 학생이고, 애는 애다. 이런 이성과 관련된 얘기 전에 안 나눠본 것도 아니지만 신카이는 괜히 긴장됐다. 예전에 다같이 보러간 영화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지. 다들 주인공 말고 동생으로 나왔던 조연이 더 귀엽다고 했었는데 주이치는 뭐랬더라, 갑자기 기억이 안 나. 정신은 다른 데에 두고 입술만 움직였다. 아라키타가 이름표를 결국 다 떼어냈고, 토도는 소리를 질렀고, 갑자기 발렌타인까지 거슬러 올라가 심기를 건드렸고, 대학에 가면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도 고민했다고...
"진파치가, 주이치는 무리일 거라는데?"
"왜지?"
"그야... 로드밖에 모르니까."
"그건 다 마찬가지 아닌가."
야스토모도 그렇게 말했는데. 그 샐쭉한 눈과 후쿠토미가 겹쳐 보여 신카이는 그만 웃었다. 왜 웃는 거지? 후쿠토미는 정말 궁금해서 물었고 신카이는 그걸 알았다.
"주이치는 다 좋은데 그런 말투는 좀 조심할 필요가 있겠어."
"어떤 말투를 말하는 거지?"
"봐봐 지금도. 그런 얼굴을 하고 왜 웃냐고 물어보면 상대방이 당황스러워하거나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니까."
"신카이. 기분 나쁜가?"
"안 나빠.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들었을 때 말이야. 이제 대학에 가면 새로운 사람들이 잔뜩 있으니까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잖아."
"그건... 깊게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군."
미세하게 걸음이 느려졌다. 신카이는 그 보폭에 맞춰 걸었다. 후쿠토미는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신카이는 그 작은 속도의 변화를 느꼈다. 후쿠토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길 때면 잠깐 멈추거나, 이렇게 느려졌다. 무시하지 않고 제 말을 생각해주는 모습이 티가 나서 좋았다. 대화가 잠시 끊긴 사이 머릿속에 토도의 목소리가 둥실 떠올랐다.
"주이치는 상대가 맞춰주는 게 좋아?"
"무슨 소리지?"
"데이트하는데 먹고 싶은 것도 멋대로 정해오고. 상대가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만 하자고 하면 어떨 것 같아?"
"난 그런 쪽으론 센스가 전혀 없어서 고마울 것 같군."
제멋대로 구는데 고맙다니. 신카이는 작게 웃었다. 왜 웃는 거지? 라는 표정이 주이치의 얼굴 위로 떠올랐으나 이번엔 입이 열리진 않았다. 난 정말 그런 점이 좋다니까. 누구는 답답하다 느낄 그 침묵의 무게를 신카이는 잘만 버텼다. 세상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게 있고, 신카이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아챌 자신이 있었다. 살짝 벌어진 걸음의 차이를 얼른 좁혔다. 왼쪽으로 살짝 비켜주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팔만 내리면 손등이 스칠 거리였다. 신카이는 평생까진 아니더라도 둘이 함께인 미래에선 항상 이렇게 본인을 맞추고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상대가 주이치한테 다 져 준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져 준다니?"
"자기가 싫은데도 주이치가 하자고 하면 다 해주는 거야 내색 않고, 편할 것 같지 않아?"
"상대가 억지로 한 수 굽혀 준다는 건 별로 내키지 않는데."
"주이치다워."
"애초에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지고 들어간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이겼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클 수도 있지."
"신카이 니 의견도 궁금하군."
"나?"
나는...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주이치라면...
이 말은 하지 말자. 신카이는 까딱하면 입 밖으로 내돌 말을 겨우 삼켰다. 그리고 열심히 변명했다. 난 주이치랑 안 지 오래됐으니까 그 정도는 맞출 수 있다는 얘기지. 별로 어렵지도 않고 말이야. 신카이는 순간 정신이 없어서 열심히 걷던 후쿠토미의 다리가 멈춘 지도 몰랐다. 주이치?
"신카이. 지고 싶나?"
"억지로 지고 싶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겨라."
"응?"
나도 신카이, 너라면 괜찮으니까.
여러 가지 얽힌 감정을 한 겹 두 겹 들추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명확한 한 가지라 그걸 함부로 보이지 않으려 애쓴 적도 많았다. 허나 아무렇지 않게 두꺼운 덮개를 한 번에 치워버리는 남자 때문에 신카이는 마지막엔 항상 지금처럼 아무것도 못 했다. 신카이의 다리가 먼저 멈추고 후쿠토미가 뒤이어 멈췄다. 왜 그래? 라는 말도 없이 숨을 죽였다. 주이치의 가장 친한 친구라서? 신카이의 목소리는 떨렸고 후쿠토미는 떨지 않았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그런 거다만. 아 정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뛰었다. 오늘 밤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다. 내일 아침 일찍 훈련이 없으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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