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날조
티투
슬슬 날이 풀리는구나.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이 바닥을 굴러다녔던 것 같은데, 어느새 제법 초록빛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테시마는 그런 봄의 기척을 느끼려다가도 눈치를 봤다. 분명 운동하라고 만들어둔 공간인데 왜 내가 피하는 거지? 그런 의문을 표하면서도 자리를 옮길 준비를 했다. 모처럼 과제도 시험 준비도 훈련도 없는 주말, 여유롭게 공원이나 한 바퀴 돌며 몸을 풀려고 했더니만 역시 글렀다.
고등학교 때 열심히 페달이나 밟던 공원이 언제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유명해진 건지. 근래 대학 때문에 동네의 변화를 빠삭하게 알아채지 못한 제 탓이라 생각하며 되려 제 낌새를 살피는 남자와 여자에게서 슬쩍 벗어났다. 항상 둘이 오던 장소에 혼자 오니 어색했다. 아오야기랑 있었을 땐 이런 기분 아니었는데. 설마 아오야기랑 있어서 주변의 기운을 눈치채지 못했던 건 아니겠지? 머리 한구석이 복잡했다.
그러고 보니 아오야기는 지금 뭐 할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지금 뭐 해? 라는 질문이 무색했는데 지금은 필요했다. 테시마는 괜히 아오야기와 나눈 문자를 다시 읽었다. 이틀 전 정체불명의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과 함께 이제 연습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마지막이었다. 이 사진 분명히 잘못 보낸 거겠지.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에 허겁지겁 문자를 마무리하고 나가는 아오야기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바쁜 게 충분히 느껴져 테시마는 그 뒤로 더 얘기를 잇지 않았다. 그래, 바쁠 거다. 그것도 엄청. 츠쿠시바는 인원도 몇 없으니까 신입이어도 아오야기가 맡은 일이 엄청 많을 거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쉽진 않겠지. 말이 없는 편이니 선배들이랑 얘기하는 것도 힘들 수도 있고, 토도 선배의 친구라는 그 사람도 뭔가 엄청 외향적으로 보이던데 아오야기랑은 잘 맞지 않는 타입일 수도.
테시마는 몇 분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문 추측을 계속하다 곧 말았다. 이것 또한 다 제 상상. 내가 실제로 본 것도 아니고. 현실은 내가 생각한 거와 죄다 정반대일 수도 있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고. 선배들이랑도 어렵지 않게 얘기하고...
어쩐지 아쉬웠다. 같은 고등학교에 같은 운동부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굳이 전하지 않아도 서로의 일상을 공유받을 수 있었던 것뿐인데. 앞으론 더욱 빈번하게 일어날 소통의 여백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테시마는 스크롤을 위로 올렸다. 츠쿠시바는 이상하게 입학 날짜가 빨라 이번 아오야기 생일엔 얼굴도 못 봤다. 위치가 근처였다면 잠깐이라도 가서 축하해줬을 텐데 거리상으로 무리였다. 2월 24일에 나눈 대화는 자정에서 새벽 한 시 사이에 나눈 문자 몇 통이 고작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날 나도 서류를 준비한다고 전화조차 못 했구나.
아무리 친한 사이어도, 이렇게 멀어지는 건가? 시간이 흘러 주변 환경이 변하고 그에 따라 인간관계가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어쩐지 테시마는 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아오야기가 항상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리적인 거리는 깊게 고민해보지 않았는데, 다시 생각하니 확실히 제가 오만했다. 테시마는 어쩐지 허무했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건 찰나의 순간이고, 그 순간을 잇는 건 아주 많은 노력과 하늘이 돕는 운이 필요하구나. 다음 휴일엔 츠쿠시바 견학이라도 가볼까? 테시마는 언제쯤 제가 한가해질지 가늠했다.
“준타, 뭐해!”
마음속으로 한창 달력을 그릴 무렵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환청인 줄 알았는데 저 멀리서 빠르게 달려오는 남자는 너무나도 제가 잘 아는 사람이라 테시마는 숨김없이 놀랬다. 아오야기! 자리에서 일어난 테시마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그야 믿을 수가 없으니까. 할 말은 많은데 튀어나온 건 ‘아오야기가 목소리 크게 내는 거 진짜 오랜만에 들어봐.’ 였다.
“준타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
“전화 했었구나... 미안 다른 생각 하다가.”
“무슨 생각?”
“아오야기 생각.”
아니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표정이 이상해진 아오야기를 앞에 두고 테시마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져 손을 내저었다. 틀린 건 아닌데 왜 말이 저렇게 나갔지?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둘은 근처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를 하나씩 손에 쥔 뒤 테시마가 먼저 말했다.
“왜 여기 있어?”
“이쪽도 오늘 별일 없어서. 타도코로 선배가 본가에 들리신다길래 같이 올라왔어.”
“고생했네. 안 힘들었어?”
“예전에는 많이 긴장했는데 오늘은 괜찮았어.”
준타 얘기를 하면서 올라왔으니까. 으읏, 이 자식 그런 부끄러운 멘트를. 고작 두 달 못 봤다고 엄청 반가웠다. 아오야기가 하는 말이 평소의 배로 달게 느껴졌다.
“방금 도착했는데 짐만 놔두고 바로 온 거야. 오늘 여기서 자전거 탄다고 며칠 전에 문자 했었잖아.”
맞지?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지만 테시마의 귀에는 들렸다. 괜히 들떴다. 며칠 전에 얘기한 걸 기억하고 있는 것도. 굳이 여기까지 올라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나라는 것도. 몇 분 전의 고민이 무색하게 테시마는 이것저것 물었다.
“츠쿠시바는 어때?”
“걱정한 거에 비해선 괜찮다고 생각해.”
“기숙사 생활은?”
“지낼만해. 요리는 노력해야겠지만...”
“다른 선배들이랑은?”
“그것도... 노력 중이야.”
아오야기의 얼굴 위로 어두운 낯이 살짝 스쳤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되는데. 솔직히 안심이다. 미안 아오야기. 속으론 사과했지만, 마음이 놓여 얼굴이 풀리는 걸 막을 순 없었다. 테시마는 그런 제가 좀 질린다고 생각했다. 다소 부산스러울 정도로 그랬냐며 위로의 말을 꺼내는 테시마에게 이번엔 아오야기가 물었다.
“요난은 어때?”
“힘들어- 부원 수는 소호쿠랑 비교도 안 되게 많지. 선배들은 무섭지. 나는 아직 멀었구나- 라는 생각이 자꾸 드네.”
“연습을 얼마나 하는데? 주로 어디 코스로 돌아?”
“아오야기. 요난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그쪽에서 보낸 첩자인가?”
“요난에 관심이 많은 게 아니라 준타 너한테 관심이 많은 거야.”
“그...렇게 아부해도 이런 기밀은 자세히 못 알려주거든?”
살았다- 테시마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오야기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해가 지려 했다. 저녁 같이 먹을 거지? 별거 아닌 말인데도 오랜만에 하려니 뭔가 느낌이 달랐다. 아오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준타가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내가?”
“무슨 일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테시마는 조금 고민했다. 오늘 낮에 했던 생각. 너무 아오야기에게 부담을 주는 거 아닌가? 친구 사이야 얼마든지 멀어지고 가까워질 수 있는 건데. 하지만 아오야기는 항상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니까. 그래서 그냥 말했다.
“최근에 연락이 뜸해진 것도 사실이고, 뭐 서로 바빴지만? 이대로 가면 사이가 조금씩 멀어져가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했어.”
“! 더 자주 할게.”
“그런 문제가 아니고! 원래 거리가 멀어지고 각자 대학 생활을 하다 보면 뭐랄까... 고등학교 때처럼 붙어 지낼 순 없는 거잖아? 그게 당연한데 아직 내가 적응이 안 된 것 같아.”
이것도 익숙해지겠지? 테시마는 애써 웃었다. 아오야기는 노을이 드리운 얼굴을 잠시 감상했다.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준타가 갖는 모든 의문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아오야기는 그저 테시마가 품고있지 않아도 되는 걸 덜어주고 싶었다.
“괜찮아. 아무리 우리 둘 사이가 멀어져도. 나한테 가장 가까운 건 준타 너일 거야.”
이제 괜찮을까? 자전거 핸들을 잡던 손 하나를 떼어 테시마에게 내밀었다. 테시마는 잠시 멈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아오야기가 괜찮다고 했으니 다 괜찮을 거다. 시간이 지나도 언제나 이 손은 항상 똑같을 것 같아서, 하늘에게 감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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