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장미 정원에 네가 다시 찾아오면

이름 없는 장미 정원에 네가 다시 찾아오면

선생님처럼 다정하시고 아는 게 많으시고, 또 예술이라는 것에도 조예가 깊은 분의 말씀이라 저로서도 다른 말을 하기가 싫습니다만 선생님, 선생님께서 찾으시는 붉은 장미란 없습니다.

제가 비록 평생 마을 밖으로 멀리 나가지 못하여 견문이 좁은 것은 사실이나,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봐온 장미들은 보통 연한 보랏빛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장미가 아니라고 합니다만, 이 마을에서는 그 꽃을 보통 장미라 부르고 있다는 걸 선생님께서도 아실 터입니다.

꽃의 색이 아무리 여러 가지라 한들 우리 같은 사람이 평생 볼 수 있는 건 많아봐야 몇 가지가 전부 아니겠습니까. 들리는 소문으로, 또는 이야기책으로 아무리 많은 꽃을 듣고 본다 한들 내가 눈으로 직접 보고 그 아름다움을 새길 수 있는 꽃이란 인생에서 몇 개가 되지 않는 법입니다.

조금 특이한 색이라고 해봐야 사막 저편 어딘가에 있다는 황금의 색, 그래 봐야 노란색이지만요. 어쨌거나 붉은 장미란 세상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환상의 꽃이란 뜻이죠. 아주 먼 나라에는 피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 속에서 그 장미를 알게 되신 것 같습니다. 제 말이 맞지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붉은 피를 마시고 사는 흡혈귀의 전설이 사람의 입에서 사람의 입을 통해 쭈욱 전해지고 있기는 합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죠. 이 마을 바깥쪽, 외곽 어딘가에 있는 흡혈귀의 집 정원에 붉은 장미가 피었다는 그 이야기 말입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들으며 자랐습니다. 밤늦게 혼자 나다니는 행실 안 좋은 아이가 이따금 행방불명되는데, 그 아이는 흡혈귀에게 잡혀간 것이라느니, 사로잡힌 아이가 흡혈귀의 먹잇감이 되어 피를 다 빨린다느니, 잡아 간 아이의 피로 흡혈귀가 정원의 장미를 붉게 칠한다느니 하는 내용이죠.

물론 어릴 적에 어른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저도 무서워서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만, 다 자라고 나서 한 사람 몫을 다하게 되었을 무렵 문득 떠올려보니 이것은 아이들이 제시간에 집으로 돌아가게끔 만들어진 이야기겠구나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도록 이 마을에는 사라진 아이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평생을 살았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여태 행방불명되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거나 한 아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흡혈귀 같은 건 그저 이야기 속 환상에 불과합니다. 미지의 괴물 이야기를 들려주어,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얌전히 돌아오는 착한 아이가 되도록 만드는 마법 같은 것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주문이지요. 주문이란 원래 사람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자세히 뜯어볼 무엇도 없이 근거라고는 없어 아주 허무맹랑합니다만, 어린아이에게 약간의 공포를 심어주어 버릇을 잘 들이게끔 만드는 데 이만한 약도 없습니다──그래서 선생님이 처음 물어보신 장미 이야기로 돌아와보자면, 이 옛날이야기에서도 ‘흡혈귀는 잡아 간 아이의 피로 정원의 장미를 붉게 칠한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 역시 평생토록 붉은 장미를 못 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칠한다는 말을 썼겠지요.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이니 이 마을에 붉은 장미는 없다는 뜻이나 똑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붉은 장미를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오랜 세월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진 이야기인 것입니다.

있다면 저도 꼭 한번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평소에 두르고 다니시는 그 옷처럼 선명한 빛을 띤 붉은색 장미 말입니다. 분명히 아주 예쁘겠지요. 혹시, 선생님께서는 재주가 뛰어나시니 직접 만들 수도 있는 게 아닙니까? 조화라. 조화도 시들지 않으니 좋지요. 선생님의 손재주라면 살아 있는 꽃과 똑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장미를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생화는요? 학자 선생님들께서 간혹 품종을 개량한다느니 새로 만든다느니 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있는 걸 파헤치는……. 아니, 조사하는 일 또한 학자분들이 좋아하시긴 합니다만 새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붉은 장미를 피워내는 데 성공하시면 자기 이름을 붙일 수도 있잖아요.

 

“하하, ‘카베’라고요?”

“그럼요. 선생님을 닮아 분명 미인일 겁니다.”

“꽃이 미인이라니, 참신한 표현이네요. 새 품종에 관한 이야기는 제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물어봐야겠어요. ……장미 이야기는 이쯤 하죠.”

  

조심히 돌아가세요.

웃는 얼굴로 환자를 배웅하고 나서 문을 닫는 소리가 귀에 까끌하게 달라붙었다. 목제 틀과 문끼리 마찰하여 울리는 평범한 소리가 이토록 불안하게 들리는 이유는, 오늘 밤의 특별한 계획 때문이다. 일상으로부터 아주 조금 벗어날 결심을 했을 뿐인데 매일 듣던 소리도 물건의 감촉도, 모든 것이 생소하다. 방금 돌려보낸 환자가 했던 말처럼 자신에게도 주문이 걸려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착한 아이를 만드는 이야기 주문이라.

그렇다면 카베는 오늘 밤, 나쁜 아이─아이의 범주에 들어가는 나이를 훌쩍 넘기기는 했지만─가 할 만한 짓을 저지르는 셈이 된다. 모두가 잠들고 바람마저 잦아들어 서늘하게 가라앉은 밤을 가로질러서, 하늘에 걸린 달을 의지하여 이야기 속 환상을 찾으러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카베는 이 작은 마을의, 이른바 ‘선생님’이었다.

잠깐은 공부를 위해 떠난 적도 있으나, 나고 자란 이 마을의 포근함이 그를 다시 돌아오게 했다.

번화한 도시에는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도 집을 만드는 사람도 병자를 치료하는 사람도 각각 따로 있지만, 작은 마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애초에 사람이 적은 마을이었고 그나마 배운 사람들은 마을을 떠났다. 결국, 소위 ‘전문가’가 해야 할 일들은 조금이나마 그 분야의 지식을 가졌거나 겉핥기 정도라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해야만 했다.

이런저런 잡일을 떠맡기 시작하다 보니, 마을 사람들은 교육자가 필요하거나 집에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하거나 몸이 아프고 다쳤을 때 자연스럽게 카베를 찾아오게 되었다. 작은 마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카베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고 여긴 카베 역시 그들을 거절하지 못해 그런 일들을 떠안은 결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이 마을의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선생님’이 된 경위를 생각하기 위해 잠시 과거를 돌이켜보던 카베의 사고는, 이제 ‘이 마을에서 선생님이 사라졌을 때 일어날 일들’로 옮겨 갔다.

모두가 나서서 찾을까. 하루아침에 사라진 ‘선생님’을 찾아 마을 사람 모두가 카베의 이름을 부르며 온 마을을 헤맬지도 모른다. 혹은, 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은 마을에 있기가 질려 간밤에 떠났구나 하고 각자 짧은 원망을 내뱉은 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보낼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흡혈귀에게 잡혀갔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조금 전에 이곳을 나선 환자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했다. 붉은 장미를 키우는 흡혈귀가 어딘가에 살면 재미있겠다고 여긴 누군가의 상상력이 지어낸 환상에 불과한 이야기. 언제부터인가 머릿속에 어렴풋하게 자리 잡은 붉은 장미의 환영처럼,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지던 모호한 전설이 무의식 속에 뿌리를 내리고 상상력과 희망을 양분 삼아 꽃을 피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환상을 찾으려면 직접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든 아니든 간에 찾으면 환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환희를 얻을 것이고, 찾지 못하면 ‘어딘가에 환상은 있다’라는 꿈을 안고 그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종류의 환상을 찾아 떠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 학자들의 이야기를 카베는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래도 길을 떠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 마을에 오래도록 전해져 온 이야기의 ‘근거 없는’ 부분이야말로 학자로서의 카베를 끊임없이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붉은색 장미가 기괴한 옛날이야기에 몽환적인 예술성을 부여한다는 점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이야기대로 흡혈귀가 마을에서 납치한 어린아이의 피를 마시고 살아간다면 그가 정원에 장미를 키운다는 낭만적인 부연 설명은 붙지 않았을 테고, 아이를 잡아갈 정도로 극악무도한 괴물이 꽃을 물들이는 일에 소중한 양식을 낭비할 리도 없다.

그 옛날이야기는 모순이다. 전부.

오래도록 이 마을에서 불온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온화한 소수의 주민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아이가 없어지는 사건이라도 일어났다간 온 마을이 뒤집힐 테고, 그 기억은 모두에게 남아 흡혈귀에 얽힌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보태졌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처럼 옛날이야기만이 전해질 뿐 그에 얽힌 실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 이 마을에 흡혈귀를 두려워하는 자 역시 없었다. 이제 흡혈귀와 붉은 장미 이야기는 어린아이에게 모호한 공포를 심어주어 좋은 습관──즉, 어른들이 아이를 돌보기 쉽게 하는 주문이 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 속에 흘러든 주문은 씨앗처럼 카베의 내면에 파고들어 싹을 틔웠다. 뻗어 나온 줄기에서 잎이 자라고 그 끝에는 어린 망울이 맺혔으나 꽃이 피는 일은 없었다. 피울 수 없었다. 카베의 기억에서 붉은색 장미는 그 앞에 안개라도 낀 듯 모호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환상을 부디 찾을 수 있기를, 그렇게 바라며 카베는 여행 준비를 마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을 향해 깊어가는 시간에 집을 떠나 숲으로 나아가고 있다.

무성한 나무들의 저편으로 지는 해가 하늘에 붉은빛을 퍼뜨렸다. 하늘의 잔에 담가놓은 해로부터 붉은색이 배어나 잔이 온통 물드는 듯 잔잔한 구름의 물결을 타고 은은하게 색이 퍼져간다. 저 색을 붉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설탕처럼 투명한 빛과 구름 섞인 대기의 우유를 섞어 부드럽게 희석된 저 빛은, 카베가 찾는 붉은색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붉은색은 이보다 더 강렬한 빛이 아니면 안 되었다.

석양의 찬란한 빛 아래에 붉은 장미가 피어 있다면, 지금 눈에 보이는 풍경은 꽃을 위한 훌륭한 배경이 될 텐데 하고 생각했다.

휴식도 할 겸 근처에 걸터앉아 이 근사한 풍경을 스케치하기로 마음먹고 수첩을 펼쳐 들었으나 숲과 하늘의 구름과 지는 태양 아래의, 장미만큼은 그릴 수 없었다. 그렇게 여행길에 그린 첫 그림은 시시한 풍경화가 되었다.

물론 이 풍경도 아름답다. 그러나 카베는 오랜 환상을 찾기 위해 느지막한 시간에 집을 떠나 여행길에 올랐다. 근거는 없어도 세상 어딘가에는 선명한 색의 붉은 장미가 피어 있으리라 믿었다. 환상을 향한 동경과 갈망이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 피로가 가시는 것 같았다. 수첩을 가방에 집어넣고 일어서서 고개를 들자, 종이 위에 석양을 옮기는 동안 해는 완전히 넘어가 하늘에는 짙은 감색의 융단이 깔렸다.

매일을 바쁘게 살다 보니 여유롭게 숲길을 걷기도 오랜만이라, 낮의 열기가 식어 서늘하게 가라앉기 시작한 대기를 폐 속에 채우는 느낌마저 신선하고 즐겁다. 가슴에 담았다 내보내는 숨결의 온기가 밤의 찬 공기에 녹아드는 순간, 그때 눈을 감았다 뜨면 미세한 이슬이 피부를 스쳤다 가는 감촉도 느낄 수 있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싱그러운 풀이 밟혔다가 다시 일어나는 부드러운 탄력이 간질간질하다. 풀이 닿은 발끝부터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공기를 가르면서 계속 계속 걸어간다.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을 찾으러 가는 길은 이래야 하는 법이다. 걸을 때마다 피로를 달래주듯 부드럽게 사그락거리는 들길과 빽빽한 나무들과, 그 나무들이 밤의 색에 어둡게 물들어 액자처럼 하늘을 장식하면 그 한가운데에 떠 있는 은빛 달이 여로를 밝혀주는 것이다. 옛날이야기처럼, 동화에서처럼.

신선한 밤공기를 만끽하며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던 카베는 어느덧 자신이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숲의 밤은 까만 잉크라도 부어놓은 듯 새카맣다. 무작정 나선 여행길이 여태까진 순조로웠다 할지라도, 온통 새카만 숲속에서의 노숙은 아무래도 위험하다. 어떤 굶주린 짐승이 튀어나와 공격할지 모르고, 무엇보다 깊어진 밤의 서늘하다 못해 쌀쌀해진 공기에 몸을 떨어가며 잠을 청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얼어 죽었다간 환상을 찾아 막 길을 떠난 어느 학자의 이야기가 첫날에서 막을 내리고 말 테니까.

깊은 숲속 어디엔가 산장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달리 시선은 자꾸만 하늘을 향한다. 온 하늘을 뒤덮은 짙은 융단 한가운데를 둥글게 오린 것만 같다. 저편에서 쏟아지는 찬란한 은빛이 밤이슬에 맺혀 차갑게 떨어진다. 한 방울 한 방울, 대기를 타고 천천히 쏟아지는 빛을 따라 시선을 내린 카베의 눈앞에는 그야말로 꿈속의 한 장면을 옮겨놓은 듯한 붉은 장미 정원이 있었다.

자연스레 멈추는 걸음을 따라 호흡마저 느려지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의 이슬도 속도를 늦추어 대기에 맺히듯 잔상을 남겼다. 새카맣게 물든 녹음 한복판, 그 저편에 환상처럼 피어 있는 붉은색 장미가 선명하게 각막 위로 달라붙었다. 스며든다. 천천히, 붉은 눈 위로 새겨진 장미의 잔상이 머릿속에 파고들어 심장까지 도달하고, 꽃의 향기를 머금은 피가 내뿜어지는 순간에 카베는 홀린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 꽃의 향기를 알고 있다. 아는 것만 같았다. 저 선명한 꽃잎 위에 맺히는 은빛의 이슬 말고도 다른 색을 알고 있다. 밤에만 뜨는 달빛을 머금어 초연하고 차분한 색을 띤 저 장미의 더 선명한 색을 알고 있다. 아침 해처럼 눈부시고 이슬의 습기를 머금어 싱싱하고 피처럼 부드러운 저 꽃에서 나는 향기가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간절하다. 찾고 있다. 눈앞에 현실로 찾아온──아니, 드디어 찾아낸 환상을 향해 내디디는 발걸음이 점점 속도를 더해간다. 바스락거리는 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멈춰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장미를 향해 다가가던 카베를 다시 멈추게 한 것은 정원에 홀로 서서 꽃을 돌보던 한 남자였다.

남자, 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주변이 온통 어두워서 윤곽만이 보였기 때문이다. 꽃을 돌보느라 허리를 약간 굽힌 자세여도 그의 키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붉은색으로 도드라진 장미를 제외하면 온통 검게 물든 녹음 속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남자 역시 짙은 이끼 색의 옷을 걸쳤기에, 얼핏 보았다가는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게 아닐까 싶은 옷차림이었다. 하얗게 내리쬐는 빛 아래에서도 그의 머리카락은 밤의 어둠을 한 스푼 정도 덜어다 녹인 것처럼 잿빛이 섞인 색이었다. 큰 키가 아니었다면 카베 역시 여기에 사람이 서 있는지 몰랐으리라 생각했다. 환상 같은 장미 정원의 문 앞에 서서 카베는 남자를 한동안 지켜보았다. 고요한 밤의 한복판이다. 카베가 걸어올 때 울리던 풀 소리가 제법 요란했을 텐데도 남자는 장미에만 집중할 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나 아끼는 장미인 건지, 혹은 한밤중의 방문객을 무시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카베는 쌀쌀한 밤공기를 한 번 들이쉬고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실례합니다. 숲을 지나다가 길을 잃은 자입니다. 죄송하지만 하루만 묵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라는 말을 소리로 만들어 다 꺼내지 못한 이유는, 카베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에 맞추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이쪽으로 돌린 남자의 눈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다시 다리가 움직였다. 문을 지나 짧은 길을 걸어 표정이 없는 남자의 바로 앞에 선다.

희귀한 꽃을 기르는 사람답다고 생각했다. 모양도 색도 특이해서 계속 들여다보게 되는 특이한 동공이었다. 변덕스러운 여행의 첫날, 달밤에 운명적으로 찾아낸 장미 정원의 주인이 드디어 입을 열어 카베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용건이지?”

그제야 카베는 자신이 실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인사를 하기도 전에 처음 보는 사람을 지나치게 빤히 응시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으로, 무표정 그대로 카베를 바라보았다.

카베의 짧은 부름과 긴 시선의 대답으로 돌아온 목소리가 날카롭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누구냐느니 왜 함부로 들어왔냐느니 추궁할 만도 한데, 남자는 억양의 높낮이가 적어 듣기 좋은 목소리로 짧게 용건을 묻기에 카베는 인사를 미루고 본론부터 말하기로 했다.

“숲에 산다는 흡혈귀를 알아?”

깊어진 밤을 따라 기울어진 달의 그림자가 드리워서인지, 때마침 지나간 바람이 한쪽 눈을 거의 가리다시피 한 머리카락을 살짝 치워서인지, 표정이 없는 줄 알았던 남자의 눈이 아주 조금, 아까보다 깊은 색을 띠었다. 달이나 바람의 탓이 아니라 그의 눈을 직접 들여다보는 카베의 마음이 동요해서인지도 모른다. 굳이 겉치레로 정중한 인사를 건네지 않아도, 긴말과 제스처로 여기까지 온 경위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카베가 가진 본질적 의문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초조하지 않았다. 조용히 응시하는 눈이 앞으로 할 말을 미리 알려주는 것 같았다. 정원에 가득 핀 장미가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숨을 들이쉬자 싱싱한 향기가 폐를 채웠다. 카베는 몽환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꿈에서 깬 듯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 따위는 눈앞의 남자로 인해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응, 알지.”

그의 실체는 확고하다.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을 때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여태껏 잠잠했던 가슴 속에서 고동치는 심장의 소리가 크게 울렸다.

눈으로, 폐로, 피부로 침투한 향기가 혈류에 섞여 온몸에 환희를 흩뿌렸다.

 

──찾았다.

남자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인 카베는, 지금 자신의 뺨이 분명 상기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의 이름은 모른다.

그가 먼저 알려주지도 않았으며 카베 역시 묻지 않았다.

서로 이름을 주고받지 않았어도 지내는 데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카베가 다가가서 말을 걸고자 할 때 남자는 반드시 들어주었고, 카베 역시 마찬가지로 그를 대했다.

카베가 그와 만난 첫날, 집 안에 들어와도 좋다는 의사를 말없이 시선으로만 전하기에 눈치껏 따라갔더니 남자는 가벼운 식사를 권했다. 오래 걷느라 지친 탓에 사양 않고 식탁에 앉아 빵을 집어 드는 카베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 앞에는 포도주 한 잔만이 놓였다. 등불 옆에서 한쪽 턱을 괴고 다소 거만한 자세로 책을 읽으며 이따금 한 모금씩 술을 머금는 그는, 사람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책이나 읽는 것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남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정원에서 만났을 때도 생각했듯 굳이 겉치레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오히려 카베에게는 편했다. 여태 마을에서 뭐든지 할 줄 알고 다정하게 웃는 ‘선생님’을 연기하느라 지친 걸까. 손님을 집에 들이고서도 눈치라고는 전혀 안 보는 남자를 대하니 어깨를 누르고 있던 짐이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나누지도 않은 남자를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말이 없어도 괜찮았다.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둘 사이의 공기에 긴장이 감돌거나 어색함이 섞이거나 딱딱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조용히 식사하는 동안 맞은편에서 자리를 지켜주는 그에게 이따금 시선을 힐끗 보내며 카베는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어둠 속에 밝혀진 등불 옆에서 책을 쭉 읽는 게 피로하지도 않은지, 남자는 그동안에도 카베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식사 후 목욕을 권하기에 욕실에서 하루 동안의 여독을 씻어내고 나오자 남자는 갈아입을 옷까지 건네주었다. 카베에게는 제법 헐렁한 것으로 보아 그의 옷을 내어준 모양이었다.

그가 카베에게 흡혈귀를 왜 찾는지 묻는 일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카베가 질문을 할 때에만 필요한 대답을 해주었다. 언제까지 머물러도 좋다느니, 언제 떠날 거냐느니 하는 당연하고도 식상한 요구 혹은 의문조차 그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서 카베는 그 집에 당분간 묵는 대신, 날이 밝으면 정원으로 나가 꽃에 물을 주거나 잎을 솎아내거나 집 안 청소 같은 잡일을 해주었다. 간밤에 내린 이슬을 받치고 아침에 쏟아지는 빛을 머금은 장미의 선명한 색을 바라보던 어느 날, 카베는 오래도록 모호하게 그려오던 환상이 일상으로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식사 준비는 번거롭지 않았다. 식사는 2인분, 카베의 몫과 남자의 몫. 그러나 둘이 함께하는 식사는 하루에 단 한 번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카베 혼자 식탁에 앉아 식사해야 했다. 조용한 실내에 이따금 달그락하고 울리는 식기 소리가 귀에 달라붙어 거슬렸다. 맞은편에 남자가 앉아 있을 때는, 똑같은 소리가 울려도 별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아침에는 정원의 장미를 손보고 집 안을 청소하고─간밤에 남자가 읽다가 그대로 어질러둔 책도 정리 대상에 포함된다─식사 준비를 하고, 시간이 남으면 다시 정원으로 나가 풍경화를 그렸다. 깊은 밤에 뜬 달빛도 하얗지만, 밝은 낮에 뜬 해에서 쏟아지는 빛 역시 흰색이다. 그러나 달보다는 태양의 빛이 압도적으로 강렬하다. 밤의 융단을 서서히 밀어낸 태양이 검게 물든 숲의 녹음을 되돌리고 찬란한 빛을 떨어뜨리는 아침의 정원을 종이 위에 옮기기 위해 카베는 노력했다. 그는 아침을 모른다. 평생 아침을 본 적 없는 그가 그림으로나마 아침을 느낄 수 있도록, 어떻게 빛을 그려내야 하는지 붉은 장미 사이에 앉아 고민했다. 누군가를 위한 그림은 오랜만이라 카베는 그 시간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밤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침실의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향해 아침 인사인지 밤 인사인지 모를 말을 건넨 뒤 함께 식사하고 나서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네가 자는 동안의 세상은 이런 모습이라고, 아침 해의 빛 속에서 네 정원의 장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야기했다. 아침을 모르는 그를 위해 어떤 말을 써야 할지 고심했다. 그래서 카베는 집 안을 가득 채운 책들을 낮에 뒤져 보기도 했다. 남자가 자는 동안에 그려놓은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수첩을 가져와 다른 그림을 휘갈기기도 했다. 여행을 떠나 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그렸던 그림도 그에게 보여주었다.

고심을 거듭한 미사여구와 쌓여가는 그림들, 달이 뜬 깊은 밤에서부터 해가 뜨기 전까지의 짧고도 긴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단 한 사람에게 아침을 알려주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매일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카베가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를 밤에서 꺼내고 싶다.

오랜 세월 기나긴 밤에 홀로 갇혀 살았을 그가 아침을 맞게 해주고 싶다.

여느 때와 똑같은 어느 날 밤, 밤을 함께 지새우고 침실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카베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카베는 밤을 기다렸다.

밤이 되어야 비로소 잠에서 깨어난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으니까.

그 아이는 햇빛을 볼 수 없다.

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뜬 깊은 밤이 되어야 함께 놀 수 있다.

밤을 기다리는 동안 카베는 정원에 앉아 아침을 그렸다.

같은 정원을 보고 그렸어도 매일매일 찾아오는 아침의 빛은 달랐다.

맑은 날, 하얀 구름에 잿빛이 도는 흐린 날, 바람이 불어 정원의 꽃들이 술렁이는 날, 비가 내리는 날.

자신이 겪는 모든 아침을 그림으로 옮기기 위해 카베는 매일같이 정원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다가 졸음이 몰려오면, 찾아올 밤을 그 아이와 함께하기 위해 낮잠을 잤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의 정원은 아름다웠지만 쓸쓸했다.

숲의 저편으로 해가 들어가기 시작하는 석양을 구경하는 것이 좋았다.

가장 설레는 시간이었다.

곧 그 아이를 볼 수 있으니까.

해가 저물어가는 사이 늦은 저녁을 준비하는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할머니와 카베를 위한 것이고, 아이의 몫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는 딱히 필요한 음식이 아니라는 것 같다.

 

어째서?

 

식탁에 세 사람의 식기를 준비하는 할머니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짓기만 할 뿐이었다.

할머니.

그 아이의 할머니다.

그 아이와 같은 잿빛 섞인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카베는 매일매일 저녁 식사 시간마다 물었다.

그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왜 나와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없는지.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법에 걸려 있어서란다.」

 

아침 해도 볼 수 없고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없는 마법이라니.

이 얼마나 무서운 마법인가.

카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물었다.

 

「무슨 마법이 그래요? 풀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풀어줄래요.」

 

할머니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몸을 굽혀 카베에게 시선을 맞추고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둠을 밝힌 등불 너머로 그 아이가 보인다.

카베의 관심은 금세 그 아이에게로 옮겨 간다.

보고 싶었다는 인사와 함께, 오늘 낮에는 이런 날씨였다고 말해주었다.

 

식사가 끝나면 집 안에서 함께 책을 읽기도 하고, 달이 뜬 정원으로 나가서 놀기도 했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짧다.

그때의 카베는 어려서, 달이 떠 있는 모든 시간을 그 아이와 함께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저 슬펐다.

어른이 되면 온전히 밤을 함께 보낼 수 있을까?

네게 잘 자라는 인사를 해줄 수 있을까?

왜 너는 아침의 빛에 닿지 못하는 마법에 걸린 걸까.

 

카베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넌 마법에 걸렸다고 들었어.」

 

그 아이의 대답은 없다.

자주 있는 일이다.

대답하기 싫은 화제가 나오거나 귀찮거나 하면, 그 아이는 종종 입을 닫아버리고는 했던 것이다.

카베는 이어서 말했다.

 

「네게 걸린 마법은 내가 풀어줄게.」

 

 

밤을 기다린다.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의 정원을 눈에 담기 위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면, 눈앞에는 밤의 이슬을 머금고 선명하게 핀 붉은 장미들이 있다. 숨을 들이쉬어 꽃의 싱싱한 향기로 가슴 안을 채운다. 햇빛의 온기를 품기 시작한 대기가 정원을 데우면 꽃은 더 화사하게 피어난다. 오늘도 이 축복받은 아침을 잊지 않도록, 빠짐없이 눈과 가슴과 그리고 종이에 담아 밤에 눈을 뜬 그에게 이야기해줘야 한다.

오늘은 말해보려고 한다.

달이 중천에 뜨면 깨어날 남자가 침실의 문을 열고 나오면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낮 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오늘 아침은 아주 맑아서 따스한 햇살을 실컷 머금은 네 장미도 활짝 피어 있었다고, 새로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숲의 저편에 떠 있는 물방울이 빛을 받아 일곱 개의 줄로 원을 그려놓은 풍경이 아름답다고, 녹음 사이사이 물줄기처럼 쏟아지는 투명한 햇살과 따스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소리가 기분 좋다고, 그러니까 네가 아침을 맞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고.

눈부시도록 빛나는 아침의 정원에 가기 위해 문을 열 때 네가 옆에 있으면 눈앞의 풍경이 더 아름다울 것이라고, 등색의 인공적인 불빛이 아닌 태양 아래에서 너를 보고 싶고, 햇빛으로 충만해져 기분 좋은 온도로 따스해진 실내에서 꾸벅꾸벅 조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네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너를 아침으로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내가 할 수 있다면.

 

 

“매일 밤 붉은 장미를 보면서 머릿속에 그 색을 각인하고 향기를 들이쉬고 꽃잎을 먹는 것은 연명에 가까워. 보통 사람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축복이겠지만, 내게는 연명의 수단이야. 그래서 나는 오래도록 장미를 키워왔어.

피와 닮은 강렬한 색과 그윽한 향기를 가진 꽃을 가까이하는 것으로 몸이 착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무엇으로 착각하게 만드는가는 뻔한 이야기야. 사람의 피를 말하지. 이런 외진 곳에 은둔하듯 사는 이유도 사람의 피를 마시지 않으려는 노력이야.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가는 언제 본능이 이성을 누를지 모르고, 가까스로 식욕을 억누른다 할지라도 한 번 겪은 포식의 공포는 전염병처럼 온 마을에 퍼질 거야. 나는 애매했던 공포의 실체로서 두려움의 대상이 될 테고,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의 평화는 살얼음처럼 위태로워지겠지.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산다고 할지라도 말이야.

나는 그걸 바라지 않고, 어른으로부터 그렇게 배웠어.

이제는 옛날이야기처럼 모호하게 전해지는 모양이군, 차라리 잘되었어. 나 같은 존재는 실질적인 공포의 대상이기보다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이 나아. 그래야 아무도 찾을 생각을 안 하거든.”

달이 뜬 밤, 장미 정원으로의 산책을 권한 카베가 남자의 손을 잡고 호소하자 이번에는 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난? 난 너를 찾다가 여기에 왔는데…….”

“그건…….”

남자는 중간에 말을 흐리더니 조용히 카베를 내려다보았다. 큰 키 때문에 카베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남자의 등 위로 뜬 달이 쏟아낸 빛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카베는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지 않는 이유에는 한 가지가 더 있어.”

“뭔데?”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쉬워. 폭풍이 몰아칠 때 이리저리 흩날리는 빗방울처럼 감정의 변화가 격렬하지. 너도 상당히 감정적인 타입이잖아,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그게 왜 네가 여기서 사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는 거야?”

질문에 질문이 이어진다. 눈을 들여다보기 위해 카베는 남자의 옷깃을 잡고서 더 고개를 들었다. 천 아래로 확실한 체온이 전해진다. 점점 차갑게 내려앉는 밤의 대기 한가운데에서 맞닿는 체온이 생생하다. 다시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남자의 팔이 카베의 몸에 살며시 닿아 등을 지탱해주었다.

“사람의 감정과 마음의 변화가 격렬하다 할지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 건 존재하지. 하지만 그걸 가려내기도 선택받기도 아주 어려워서, 실제로 그 대상이 되기란 기적에 가까워. 그래도, 운명의 시험을 통과하면 나는 네 바람대로 아침을 맞을 수도 있어.”

그게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굳이 되묻지 않아도 그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너는 그래서 지금 이곳에 있는 거야.”

앞으로 일어날 일은 두렵지 않다. 그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며, 이야기 속 환상에 묻혀 조용히 살아가길 원하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가 평생 피해왔던 아침, 곧 맞이해야 할 빛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카베는 양팔로 남자의 몸을 끌어안았다.

“꿈을 꿨어.”

대답이 없다.

꿈에서 보았던 그 아이처럼 말이 없었지만, 대답을 피하거나 곤란한 주제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는 기다리고 있다. 카베가 매일 밤마다 이야기해주는 아침을 고대하는 것처럼 조용히 온기만을 보내 왔다.

“꿈속의 그 아이도 너처럼 밤에 일어나더라. 마법에 걸려서 그렇다고 했어. 나는 매일매일 밤을 기다렸지. 같이 있는 시간이 좋았거든. 그 아이에게 아침을 알려주고 싶어서, 날이 밝자마자 눈을 뜨면 문을 열고 정원의 장미를 그렸어. 내가 이곳에 온 후로 그랬던 것처럼.

밤이 오고 그 아이가 일어나면 반갑게 달려가 끌어안고서 잘 잤냐는 인사를 했지.

그런데 잘 자라는 인사는 해준 적이 없어. 나는 너무 어렸거든. 그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 함께 있어줘야 하는데,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어버리는 나 때문에 외로워할 그 아이를 떠올리니 너무 슬펐어.

그래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말했지. 네게 걸린 마법은 내가 풀어주겠다고.”

“……그랬지.”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왔다.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을 바로 떠올려주길 바라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서서히 잊어갈 근거 없는 이야기를 굳게 믿고 카베는 이곳으로 다시 찾아왔다. 무의식 속에 뿌리내린 꽃과 그 꽃의 주인을 찾아낸 환상의 증인을, 남자는 그저 끌어안고 있었다. 남자의 등을 감싼 팔과 손 아래에서 호흡할 때마다 오르내리는 작은 움직임을 의식한다. 귓가에는 따뜻한 숨결이 규칙적으로 닿았다.

그는 확실히 이곳에 있다. 밤에 갇힌 채 오랜 세월을 홀로 장미를 가꾸며 살았다 할지라도, 카베가 그를 아는 한 이야기에 나왔다 잊혀지는 허구 속 인물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줄 시간이다.

긴 세월과 기억을 돌아서 이 정원에 서 있다.

그를 아침으로 데려가야 한다.

“나만 기억을 못 하니까 억울한걸. 또 너를 잊는다든가 하는 건 아니지?”

“글쎄, 어떨까.”

“이런 때인데도 여유롭긴. 뭐, 상관없어.”

등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넣고 카베는 말했다.

“잊는다고 해도, 이곳에 돌아와서 다시 널 좋아해줄게.”

“……여전하네.”

“무슨 소리야?”

“넌 그때도 같은 말을 했거든.”

귀에 닿던 숨결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그 숨결이 작게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가볍게 귀의 윤곽을 확인하듯 누르던 입술이 목 언저리로 내려가더니 가볍게 소리 내어 피부를 빨아올렸다. 등을 받치던 손으로 목을 감싸고, 셔츠의 깃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피부가 드러나도록 했다. 토해내는 숨결에 열기가 어려 있다. 남자의 어깨 저편에 보이는 하얀 달이 눈부시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저 빛을 머금어 한창 아름다울 장미가 눈꺼풀 너머로 보이는 것 같았다. 목의 얇은 피부에 천천히 파고드는 감촉은 통각이 아니었다.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만 같다. 힘주어 남자를 끌어안고 있던 팔에서 힘이 풀려간다. 싱싱한 장미 향기가 둘의 체온에 녹아 눅진하게 달라붙었다. 온몸에 저릿하게 퍼져가는 전율이 달콤하다. 이성이 가라앉는다. 안개 낀 듯 모호한 과거의 기억과 장미의 향기와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황홀감이 뒤섞인 밤의 밑바닥에 빠져버리기 전에, 카베는 탄식처럼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알하이탐…….”

 

 

「넌 내 이름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될 거야.」

 

마법을 풀어주겠다고 말하자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카베는 아직도 그 아이의 이름을 몰랐다.

이름을 몰라도, 부르지 않아도 서로가 언제 필요한지 알아챌 수 있었기에 달리 의식하지 않았다.

 

「내가 네 이름을 알면 마법을 풀 수 있어?」

「응.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 너만 알고 있어야지.」

카베는 웃었다.

「그럼 네 이름은 나만 부를 수 있겠네.」

맞아, 하고 대답한 그 아이가 말을 이었다.

「날이 밝으면 넌 일단 집으로 돌아가. 집에서 널 걱정할 테니까.」

「너도 같이 가면 안 돼? 내가 네 이름을 알면 마법이 풀린다면서.」

「그건 안 돼. 마법을 푸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거든.

우리가 다시 만나는 건 훨씬 나중이야.

내가 네 목에 송곳니를 박아 넣고 피를 마시면 잠이 쏟아질 거야. 평소처럼 자고 일어나서 너는 집으로 돌아가.

집으로 돌아간 너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살아가며 이름 없는 나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겠지.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너는 날 잊어갈 거야. 그렇게 되어 있어. 흡혈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망각하게 되어 있거든. 너 말고 다른 누군가가 내 이름을 알면 안 되니까, 그걸 위해서야.

너는 마을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 날 이 붉은 장미가 그리워지면 나를 찾아와.

나는 내 이름을 아는 단 한 사람의, 그러니까 네 피를 마시고 여기서 기다릴 거야.

이건 약속이야.

네가 다시 이곳에 와서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아침을 맞을 수 있어.」

「잊는다니…….」

「반드시 그리워질 때가 올 거야.」

믿을 수 없다.

눈앞의 그 아이를 잊은 채로 어른이 된다니.

하지만 틀림없을 것이다. 그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카베 역시 붉은 장미 정원의 흡혈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쁜 짓을 했을 때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앞선 것은 호기심이었다.

그 이야기에는 흡혈귀의 이름조차 없다.

실체를 모호한 두려움으로 가린 채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숲 어디에선가 붉은 장미를 키우는 흡혈귀 이야기를 어린아이들에게 전했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이름 모를 누군가를 향한 두려움과 함께 존재조차도 잊어간다. 장미가 붉은색일 리가 없다고, 그렇게 환상을 부정하면서.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이름 없는 그 누군가의 이름은 누가 불러주지?

카베는 그날 곧바로 길을 나섰다.

걷고 또 걸어서 주변은 새카만 어둠으로 물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디인지 찾지 못해 두려워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카베의 눈앞에 보인 것은 붉은 장미 정원이었다.

그렇게 카베는 외딴집에 사는 아이와 만났다.

「금방 다녀올게.」

그 아이는 대답이 없다.

「집에 갔다가 금방 다시 올 테니까 기다려.」

그 아이의 말대로다.

마을 사람들과 부모님이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밤이 가고 나면, 날이 밝으면 집으로 돌아가 숲에서 붉은 장미와 거기에 사는 아이를 보았다고 이야기한 뒤 이곳으로 돌아오면 된다.

그 아이의 마법을 풀어주러.

 

잊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있었다.

잊는다 해도 다시 떠올리면 된다.

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밤의 정원이 아침의 빛으로 물들 때, 그 아름다운 풍경을 그 아이에게도 보여주고 싶으니까.

「잊는다고 해도, 이곳에 다시 돌아와서 너를 좋아해줄게.」

 

 

눈을 뜨니 온통 새카만 어둠이었다.

밤의 한가운데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한숨을 토하며 손끝을 움직이자, 바로 옆에 온기를 가진 누군가가 있었다.

이윽고 따뜻한 것이 얽혀 오기에 손가락을 굽혀 마주 잡았더니, 옆에 누워 있던 온기가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천이 마찰하는 소리, 체중 때문에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 중간에 가벼운 한숨이 섞이고, 뺨과 이마에 내려앉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매끄럽다. 곧이어 부드럽고 말랑한 것이 이마를 가볍게 누르고 떨어졌다.

얽힌 손에서 천천히 손가락이 풀려간다. 천이 마찰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삐걱대는 나무의 소리가 아까보다 크게 울렸다. 지척에 느껴지던 체온이 멀어져 가는 걸 보아 그는 침대에서 일어난 것 같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지금은 아침일까, 밤일까. 방 안에 빛 한 줄기조차 들어오지 않아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그때 큰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 느닷없이 울린 그것은,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저 멀리서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윽고 한가득 쏟아져 눈부신 온기로 방 안을 채우는 햇살에 눈을 찌푸린 카베는 그것이 커튼을 걷는 소리였음을 깨달았다.

눈앞에는 창밖의 아침을 바라보고 선 알하이탐이 있었다.

꿈같은 광경이었다.

쏟아지는 빛의 파도 속에서 창밖의 정원을 내다보던 그가 카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잿빛 섞인 은색의 머리카락도 그 아래의 눈도, 달빛에서 볼 때보다 훨씬 밝고 따스한 색이다.

“카베.”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 카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 너머로 펼쳐진 아침의 풍경 앞에 선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넌 내게 이걸 보여주고 싶었구나.”

마법은 풀렸다.

카베는 뛰어내리듯이 침대를 벗어나, 아침의 빛 속에 선 알하이탐에게로 팔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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