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장미 정원에 네가 다시 찾아오면
유료

이름 없는 장미 정원에 아침이 찾아오면

새는 천칭의 한쪽 접시 위에다 보석을 올려놓았다.

보석은 투명한 붉은색을 수천 겹 쌓은 것처럼 깊고도 맑은 색이다.

등불의 빛을 입고서 가만히 내려앉는 보석 아래로 불그스레한 그림자가 번져간다.

단단한 광물이 유리 위에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는 경쾌했다.

그것이 잦아들 때쯤 천칭의 접시를 매단 금속 사슬도 보석의 무게에 흔들리다가 멈추었다. 찰그락, 찰그락하는 소리가 몇 번 나다가 잦아들자 천칭의 보석을 보던 새는 기대 어린 시선을 현인에게로 향했다.

새의 눈은 접시 위 보석과 같은 붉은색이다.

짙은 색의 나무 책상 위에 앉아 현인을 마주 본 새는 얇게 깔린 구름에 걸러진 햇빛처럼 화려한 깃털을 가졌다. 하늘 저편에 있다는 낙원에만 비칠 듯 황홀한 색은 색색의 유리에 걸러진 달빛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침 새가 등지고 있는 창으로 달빛이 비치고 있다.

하늘이 어둡게 물들고 별이 올라오면, 하얀 달에 밤의 색이 번져 푸르스름한 빛이 된다.

가늘게 내리는 비처럼 달빛은 유리에 닿아 잘게 쪼개진다. 수없이 조각난 파편은 새의 몸 위에 내려앉아 깃털을 더 화려하게 보이도록 장식했다.

달빛을 입고 이쪽을 바라보는 새에게 한 번 눈길을 주고서 현인은 작은 잔을 손에 들었다. 정교하게 세공된 잔 속의 빛나는 덩어리는 유리잔의 색에 감싸여 있어, 얼핏 보면 그 안에 달이 또 하나 있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다.

현인은 한쪽에 보석을 얹은 천칭의 반대쪽 그릇 위에다 대고 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유리잔의 가장자리를 타고 흐른 따스한 등색이 달빛에 사르르 녹아들어간다.

마침내 잔에서 은색의 구슬이 툭 떨어진다.

유리잔 속 달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은 그릇 위에 동그랗게 맺혀 물방울 모양을 만들었다.

한 방울, 보석이 훨씬 무거워 천칭이 움직일 기색은 없다.

두 방울, 역시나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이번에 새가 가져온 보석은 상당한 무게인 것 같다.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그래도 천칭은 보석 쪽으로 훌쩍 기울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다.

현인을 바라보는 새는 즐거워 보였다.

가볍게 몸을 움직여 더 가까이 다가오기에, 현인은 달이 담긴 잔을 내려놓고 손을 새에게로 뻗어 창으로 흘러드는 달빛이 손 위에 맺히도록 했다.

삐익, 하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를 내고서 새는 현인의 손 위에 맺힌 달빛 알갱이를 쪼아 먹었다. 부드러운 깃털이 손에 스쳐 간지러울 정도로 새의 움직임은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새를 두어 번 쓰다듬고서 현인은 손을 거두고 다시 잔을 들었다.

여섯 방울, 이때의 한 방울이 접시 위에 방울져 있던 달의 조각들 사이로 엉겨 붙어 동그랗고 큰 원이 되었다.

일곱 방울, 기대되는지 아니면 지루한지, 새는 탁자에서 몸을 일으켜 날갯짓을 했다.

여덟 방울, 새는 날개 소리를 내고서 현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아직 천칭은 미동도 없다.

아홉 방울, 이 무게가 되어서야 천칭이 조금 기울었다. 그러나 평형이 될 정도는 아니다.

투명한 유리 접시 위에서 한데 뭉쳐진 아홉 방울의 달보다도 무거운 보석의 무게에 견줄 만한 것을 현인은 마침내 떠올렸다.

잔을 내려놓고 책상 왼편의 피워지지 않은 향로 옆으로 손을 옮기자 그곳에는 유리 덮개로 덮어놓은 장미 한 송이가 있었다.

덮개를 열고 금테가 그려진 하얀 접시 위에 정중하게 올려진 붉은색 장미를 집어 들어서, 현인은 천칭의 접시에 담긴 아홉 방울의 달 위에다 그것을 얹어놓았다.

그러자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 천칭의 양 접시가 비로소 평형이 되었다.

매일 밤 숲의 어둠을 머금고 설탕처럼 흩뿌려진 달을 머금은 장미는 새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밤의 서늘함에 달빛은 작게 결정으로 굳어졌다가 해가 뜨기 직전, 대기의 결을 타고 펴져 오는 온기에 녹아 달콤한 이슬이 된다.

이 장미는 밤에서 새벽으로, 그리고 새벽에서 아침으로 하늘의 색이 바뀌기 직전에 현인이 새를 위해 따다놓은 가장 아름다운 한 송이였다.

여느 아침처럼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짧은 노래로 전하고서 날아오른 새가 날이 밝아오는 구름의 저편으로 숨어 뒤돌아보지 않게 되었을 때쯤 꺾어둔, 날마다 새의 노래를 듣고 꽃을 활짝 피운 이 장미 한 송이야말로 보석의 무게에 합당했던 것이다.

 

현인이 말했다.

“이 보석은 네 이야기였구나.”

새는 현인에게로 몸을 기대고서 기쁜 듯이 머리를 문질러 댔다.

 

 

이 집에 있는 책들을 내가 다 읽으려면 어차피, 아무리 시간이 있어도 모자랄 테니 손에 잡히는 것만 읽어보려 했는데. 서재를 가득 메운 책들 사이, 책장 한 부분에 특이해 보이는 책들이 꽂혀 있지 뭐야.

그도 그럴 것이, 온갖 난해한 책이나 희귀한 책들로 가득한 이 서재에서 특이하게도 장정裝幀이 유독 투박한 책이었거든. 장식이 별로 들어가지 않아서 그렇게 보였는데, 책의 본래 기능에만 충실하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장정이라고 해야 하나. 사이즈가 그렇게 크지도 않고, 두꺼운 것도 아니고. 그런 책들이 한곳에 나란히 꽂혀 있는 거야.

이거 이상하다, 무슨 이유로 비슷한 종류의 책들이 이렇게 한곳에 꽂혀 있나 했어. 넌 책 정리도 잘 안 하잖아. 읽다가 만 책을 여기저기에 늘어놓는가 하면, 집 안 곳곳에 쌓인 먼지를 치울 생각도 안 하지. 이런 건 날마다 청소해야 한다고. 너도 알 거 아니야? 귀찮다면서 미룰 일이 따로 있지. 그게 못 본 척이 돼? 자고로 집이란 건 말이야,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니만큼 매일매일 관리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대체 내가 없을 때는 어떻게 혼자 살았어? ……혹시 너, 지금은 내가 해주니까 일부러 안 하는 거야?

못 들은 척하지 마! ──웃지도 말고! 나는 진지하게 불평을 말하고 있거든? 여기가 네 집이기는 하지만, 같이 생활하려면 적어도──아, 그래. 서재의 책장 한쪽에서 발견한 책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지.

그래서 너무 궁금한 나머지, 홀린 것처럼 나는 손을 뻗어 짙은 이끼 색 표지의 책을 꺼내 들었어.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건 무려 동화책이었지 뭐야? 더군다나 나도 읽은 적 있는 책이었어. 마을에 있을 때, 아이들이 동화 이야기를 하며 놀고 있기에 무슨 내용인가 싶어 물어본 적이 있거든. 그러니까, 처음에 접한 건 책으로가 아니라 마을에 사는 아이의 말로부터였지. 집에서 자기 전에 부모님이 읽어주신 책의 내용이었다던데, 종이책이 귀한 마을에서 책 이야기가 나오니 궁금할 수밖에. 그래서 나도 그 책을 빌려 읽어보았던 거야. 빌렸다는 말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왜냐고? 그야, 그 책은 주인이 없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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