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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lex

당장 손을 안 뻗을 것 같은 잡문 모음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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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악성재고떨이, 디스크 조각 모음이라고 할 수 있는 귀한 시간

회전목마가 보고 싶었다.

같은 음악을 반복하면서 쉼없이 뱅뱅 도는 즐거운 놀이기구를 보고 싶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그런 놀이기구를 탈 나이는 까마득하게 지나서, 한순간의 비일상을 즐기고 있는 꼬마애들 사이에 끼어 느릿한 회전 운동을 만끽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역시 한밤 중의 회전목마에는 타고야 말 거다. 아니, 어쩌면, 내킨다면, 한낮의 회전목마에도 올라탈지 모른다.

지금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다만 회전목마가 보고 싶었다. 회전목마에 더덕더덕 달라붙은 잘고 귀여운 전구들이 절도 있게 반짝이면서 딱딱한 철제 백마를 채찍질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어린애들을 태우고 빙글빙글. 오디오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놀이공원의 음악과. 때묻지 않은 승객들의 행복한 깔깔거림과.

그러니 회전목마는 거대한 오르골이다.

한참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오다큐가 없어."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딘가의 벤치에 몸을 수그리고 앉아 그런 말을 뱉고 있었다. 귓가에 닿은 스마트폰은 다소 따뜻한 감이 있다. 누구한테 전화를 하고 있는 건가.

"뭐? 오다큐? 기다리면 오겠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생활 소음은 섞이지 않는다. 집에 있나.

아담은 필시 파란색 노선의 전철을 얘기하고 있는 걸 테다.

"그게 아니라......"

내가 고쳐 말하기도 전에 아담이 먼저 입을 뗐다.

"설마 백화점?"

이걸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하는지.

"하? 오다큐라면 작년 가을부터 때려부수고 있잖아."

아담의 말대로였다. 오다큐가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는 나도 어렴풋하게 들은 기억이 있다. 문제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식탁에 코를 박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씻고 옷을 걸치고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온 내가 그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집에서 신주쿠까지 온 경로가 영 떠오르지 않는다.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지만 이상하다고 느낄 정신머리조차 없다. 주머니를 더듬었지만 차 키는 잡히지 않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거다. 높은 확률로.

그리고 나는 신주쿠 역 근처까지 와서 오다큐를 목도했다. 오다큐가 있었던 자리에 설치된 가벽 너머에서 수많은 크레인이 열심히 건축 자재를 옮기고 있었다. 재건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큰 규모의 리모델링이다. 그렇다면 옥상에는 올라갈 수 없다.

나는 실의에 빠져서 계속 걸었다. 횡단보도를 몇 번이고 건넜다. 빨간 불이 파란 불로 바뀌는 걸 확실하게 확인하면서. 평일 낮인데도 거리에 가득한 행인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귀에 담으면서. 배고픈데 뭐 먹지. 오늘은 날이 흐린데. 우산 있어? 오다큐 언제 다시 열어?

무질서하게 몰아치는 음파가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미분음이 너무 많다.

자연이니까 어쩔 수 없다.

딱 떨어지지 않으니까......

어느 순간 아치 모양의 정문을 지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순간 온갖 소음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사람은 없다.

동물도 보이지 않는다.

있는 것은, 고요히 잠든 인골......

가지런히 선 묘비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실재하지도 않는 노기에 압도당해서, 쉬고 계신데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하다고 마음 속으로 사죄하면서, 힘이 풀린 무릎을 겨우 움직여 묘지 바깥에 덜렁 설치된 벤치에 풀썩 주저앉은 것이다.

"유우? 듣고 있어?"

대답을 해야 하는데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 어디야?"

바닥 아래로 한참을 꺼져들어가는 느낌......

"됐다. 움직이지 말고 있어."

왜 보고 싶었더라, 회전목마를.

아담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나는 식어버린 스마트폰을 계속 귓가에 대고 있었다.

"백화점 옥상의 회전목마라. 확실히 어렸을 땐 많았지, 그런 거."

운전석의 아담이 꼬나문 담배에서 연기가 시원하게 흩날렸다. 날이 흐린데도 선글라스를 착실하게 쓰고 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뭐가 보이긴 하는지 의문이다.

아담의 차는 신주쿠 시내를 의미 없이 빙빙 돌고 있었다. 스케일은 크고 멋은 없는 회전목마 같다.

"근데, 오다큐? 거긴 없지 않냐. 회전목마."

"없어."

"근데 왜?"

차가 멈췄다. 붉은 빛의 신호등이 가로막았다. 아담은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대충 눌러끄고는 나를 바라본다. 선글라스 너머의 눈은 보일 것도 같고 안 보일 것도 같고. 속눈썹의 어렴풋한 실루엣이 꿈틀거리는 모습을, 나는 포착했다.

"잘 모르겠어."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

"알아."

"술 먹을래?"

안승현은 아트센터의 카페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오늘의 마지막 공연이 진행 중인 아트센터의 로비는 조용하다. 표를 확인하고 MD를 사는 관람객들의 소란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본래의 고요한 얼굴을 내민 건물을 잠시 둘러보던 승현은 이내 노트북 액정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준비하고 있는 전시의 기획서를 오늘 안에 조금이라도 다듬어야 했다.

그러니까, 오늘 안에 끝내야 하는 일이 있고 더군다나 지금은 저녁이 깊었는데 왜 이런 장소에 있는가 하면. 아는 사람에게 공연의 표를 받았다. 원래는 희미하게 소리가 새어나오는 저 공연장 안 1열 좌석에 앉아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원체 공연을 보는 취미가 없었다. 청력을 거의 잃은 지금은 그런 취미가 더더욱 사라져서 실은 곤란한 참이었다.

"괜찮아. 어차피 초대받은 건 나고 너는 그냥 동행하는 거니깐. 일단 입장은 하고, 앉아있기 싫으면 중간에 퇴장해도 돼."

실질적인 초대자 오지민은 제 손목을 잡아끌면서 그렇게 말했다. 승현은 엄밀히 따지자면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단순히 예술가라는 이유로 작품 활동에 어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지민에게 동행을 제안받은 것이다. 승현은 지민의 제안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결국 따라나오게 되었다.

날은 좋았다. 인공 와우로 흘러들어오는 거리의 소음이 오늘따라 높게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지민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아무튼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승현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순전히 그녀를 위해 머리를 째는 수고를 한 승현이다.

승현은 그녀가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을 옆 좌석에 끌어앉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공연을 즐겨 보는 사람이라면 주변에 셀 수 없이 많았을 텐데. 예술가들은 자신의 전공이 아닌 예술도 즐겨 보고는 하니까. 승현은 예술가로서는 드물게 공연과 큰 연이 없었다. 차라리 음악회라면 관심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청력을 잃었을지언정 간질간질한 파동만은 온몸으로 느껴지니까.

"그 분이 배리어프리 공연을 준비하고 계시대."

공연을 기다리며 아트센터의 카페에 함께 앉아있던 지민이 이쪽으로 고개를 슬쩍 숙이고 말했다.

지민에게 공연의 표를 건넨 얼굴 모를 예술가의 이야기였다. 실은 이름도 모른다. 지민이 흘러가듯 얘기해줬던 것 같지만 전혀 기억에 담아두지 않았다.

"배리어프리."

승현은 그것이 익숙하지 않은 단어라도 된다는 듯이 되읊었다.

"영국에는 배리어프리 공연에 쓰는 스마트 안경이 있대. 그걸 쓰면 안경 렌즈에 공연의 자막이 떠오르는데, 공연장에 자막을 직접 띄우던 보통의 배리어프리 공연보다 집중에 도움이 되어서......"

바꿔 말하자면 자막의 신세를 져야만 공연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청각장애인 승현이 그 장비를 시험해줬으면 한다는 바였다. 어쩐지 오늘따라 잘해준다 했는데, 이런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다니.

"공연 중간에 나가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

"한 십 분만 보고 나가도 돼. 시야가 어지럽지는 않은가, 자막은 잘 보이는가 하는 걸 체크만 하면 되거든."

"그런 건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잖아."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궁금하겠지. 늘 그렇듯이."

작년 봄 목까지도 오지 않았던 짧은 보브컷은 어느새 어깨까지 닿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새치가 하나둘 보이는 머리카락에서 색색깔 꽃의 향기가 풍겼다. 지민은 철쭉과 개나리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후각만은 지민과 온전히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새삼스레 그녀의 향기를 뒤쫓고는 한다.

"그래."

승현은 가볍게 눈을 감고 대답했다. 눈꺼풀을 닫으면 불필요한 시각 자극은 사라지고 관자놀이의 와우를 떼면 억지로 되살렸던 청각조차 전원을 끈 무전기의 신호처럼 뚝 끊어진다. 남는 건 애매모호한 촉각과 갈수록 희미해지는 후각.

이감二感의 상태에서 손을 잡으면 승현은 자신이 그녀의 향기로운 내부로 접속한 듯한 착각을 느끼곤 했다.

손바닥 안에서 맥이 뛰고 있었다.

숨통을 틀어막힌 그는 우선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생명활동에 직결되는 호흡을 금지당한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얼굴에 떠올랐다. 반사적으로 작게 숨을 들이키지만 기도가 막힌 채로는 허사다. 목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숨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따뜻한 숨이었다. 그새 덥혀진. 그제야 그는 눈앞의 상대에게 저항할 마음이 들었다. 제 목을 조르는 두 손을 떼어내려 했다. 그런 제스처였다. 하지만 상대는 거부한다. 목젖이 만져지는 손에 힘을 실어 혈류를 방해한다. 그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한순간 뺨이 하얗게 질린다. 쉬지 못하는 숨이 가빠진다. 목에서 떨어지지 않는 두 손을 꽉 잡는다. 손바닥 안의 목젖이 움직였다. 으윽, 하고 신음했다. 그것만이 현에게는 간지러웠다.

발버둥친다. 일차적인 원인을 해결할 수 없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하니 손가락에서는 힘이 빠진다. 손목인지 소매인지를 잡고 있던 도진의 손이 서서히 떨어져나간다. 오른발이 골반을 힘없이 건드리곤 아래로 떨어진다. 복부를 걷어차려고 했었던 것 같다. 왼발은 무릎을 밀어내고 있다. 밀어낸다기보다는 기대고 있다는 게 옳은 표현 같다. 얼굴은 어느새 파랗게 질려온다. 허투른 곳에 힘을 쓴 탓이다.

침대 위에 떨어진 그의 손을 본다. 저항을 포기한 두 손은 손바닥을 보인 채 손끝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이불 위에 누운 그의 새파란 얼굴을 본다. 초점을 잃어가는 까만 눈을 마주한다. 조금 벌어진 입술에서 발작적으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해독한다. 왜, 라고 그는 물었다. 대답은 않았다. 손바닥 안의 숨이 약해져 가는 꼴을 현은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끊어지기 전에 현은 손을 떼어냈다.

천천히 감기던 도진의 눈이 흠칫 뜨였다. 압박에서 자유로워진 목젖이 급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가쁘다 못해 콜록이는 숨을 현은 조정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죄송해요.”

씨근대는 숨, 자신을 밀어내는 손, 비난조의 목소리. 현에게는 또한 그들을 무시할 수 있는 압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끌어안는다. 누워있던 도진의 몸을 일으켜서. 어깨에 도진의 얼굴이 파묻힌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뺨을 스쳤다. 익숙한 샴푸의 향이 났다. 동시에 익숙하지 않은 체취가 느껴졌다. 그에 대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현에게는 부재했다. 등을 쓰다듬으면 얇은 옷가지 밑으로 척추뼈가 만져진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날개뼈를 더듬는다. 조금 더 위로 향하면 푹 파인 뒷목의 홈이. 손가락이 닿자 도진은 몸을 떨었다. 이를 악무는 소리가 났다. 오른손은 주먹을 쥐고 있다. 현은 그 주먹을 감싸쥐었다. 하얗게 질렸던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천천히 느슨해지고 있었다.

“죄송해요.”

말뿐인 사과를 거듭한다. 부풀었던 도진의 가슴이 현에게 닿았다가 떨어진다. 귓가에서는 여전히 씨근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어깨에 파묻은 입술이 고통스럽게 비틀렸다가 제자리를 찾는다. 주먹을 쥐었던 손은 오그라든 채로 열려 침대의 이불을 짚고 있다.

“죄송해요.”

“응.”

“괜찮으시죠?”

“응.”

그리고 도진은 그의 가슴팍을 조심히 밀어냈다. 겹쳐졌던 몸이 떨어지자 느슨하게 풀린 검은 눈이 보였다. 발갛게 물든 눈가가 보였다. 애매한 난색을 띠는 뺨이 보였다. 헐렁한 옷깃 사이로 무방비하게 드러난 목덜미에 새겨진 손가락 자국이 보였다. 곧 사라질 자신의 자국. 그 붉은 기 아래에는 사라지지 않는 흉터가 한 줄 있다. 보존과 상실이 복잡하게 뒤얽힌 추억 속에서 그나마 보존의 형태로 남은 하나의 기억. 그것을 매일 아침 되새기게 하는 한 줄의 흉터.

도진의 시선이 어깨 너머로 향해 있었다. 벽을 따라 길게 놓인 침대 앞으로는 전신 거울이 서 있다. 이 장소의 주인인 현은 알고 있다. 자신과 같은 상을 보고 있는 도진의 시야를 상상했다. 발간 얼굴을 본다. 목에 남은 남의 손자국을 확인한다. 약간 당혹스러운 얼굴로 목을 더듬는다. 긴 손가락이 목젖에 가 닿으면 반사적으로 기침이 터져나온다.

“밤까지는 없어져야 할 텐데…….”

괜한 걱정이라고 현은 생각했다.

겨울의 에는 바람이 기승을 부리다 못해 한파를 끌고 온 십이 월 이십 몇 일 토요일의 일이다. 당시 서울에는 구를 가리지 않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기록적인 대설까지는 아니었지만 길거리의 통행을 방해하기에는 충분한 양의 눈이 도로 위에 매섭게 쌓이는 중이었다. 연말의 들뜬 기분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조금 이른 송년회에 참석하기 위해 눈더미에 발을 푹푹 쑤시며 거리를 나아갔다.

화학과 교수 도천영과 그의 연구실에 무사히 박사후연구원 신분으로 자리잡은 윤서천은 그런 송년 행렬 안에 있었다. 두 사람이 거주하는 빌라에서 걸어서 이십 분은 걸리는 육류 전문 식당이 목적지였다. 이런 날 차를 끌고 나오는 건 자살 행위라는 판단이 선 그들은 눈발을 뚫고 이십 분을 걸어 식당 바로 앞 횡단보도까지 당도했다.

실상 송년회에 초대받은 이는 천영 혼자였다. 그와 오래도록 알고 지내는 친구 중 하나인 화학 강사 주경태가, 연말인데 약속 없으면 같이 고기나 구워 먹자는 말을 꺼낸 것이었다. 번잡한 인간관계를 질색하는 천영은 정말로 연말 약속이 없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경태가 선뜻 손을 내미니 천영은 왠지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와는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관계로 엮여있는 것이다.

한 가지 문제는 경태의 제안을 수락하는 답장을 보내던 천영의 바로 뒤에 서천이 서 있었다는 점이다. 서천은 경태를 눈에 띄게 경계하고 있었다. 두 분이서 저녁을 드시려고요? 서천이 등 뒤에서 투덜거렸다. 말끝이 선명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도 생각되었다. 왜, 이 날 저녁 먹으려고 했었냐? 천영이 등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건 아니라고 서천은 웅얼거렸다. 그리고 뒤이어 말했다. 구워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런고로 서천은 천영과 경태의 작달막한 송년회에 끼어들게 되었다. 경태는 영 내켜하지 않는 듯했지만 이내 재미있을 것 같다며 서천의 침입을 허가했다. 어느 부분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건지 천영은 파악하지 못했다. 가게 바로 앞까지 온 지금도 그러했다. 붉은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천을 흘겼다. 이십 분 거리를 걸어오는 통에 외투며 머리칼에 온통 함박눈이 내려앉은 서천은 꼭 눈사람을 닮아 있었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물고 그저 신호등의 점멸을 기다렸다. 보도블럭에 쌓인 함박눈은 훌륭한 흡음재로 작용했다. 고요라고 하기에는 당치도 않지만 평소의 서울보다는 확연히 조용한 소음이 부우웅 소리를 내며 두 사람 앞을 지났다.

“춥네요.”

도로를 달리는 시커먼 사륜차들을 지켜보던 눈사람이 말했다. 혼잣말에 가까운 목소리에 천영은 잠시 반응을 고민했다. 그 사이 횡단보도를 관통하는 차도의 신호등은 붉게 물든다. 정지선 앞에 일렬로 선 자동차들이 혀를 차며 대기한다.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이윽고 파랗게 물들어 어깨에 눈이 쌓이기 시작한 보행자들의 이동을 허가했다.

“아직 안 온 것 같은데.”

경태에게서 도착 문자를 받지 못한 천영이 식당 앞에서 중얼거렸다. 머리카락이며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내던 서천은 고개를 훌훌 젓다가 외투 주머니에서 묵직한 전자담배를 꺼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에는 눈이 거의 쌓여있지 않았다. 연초에 불을 붙인 천영이 고개를 들어 위를 살피자 건물 옥상의 차양이 보였다. 두 사람 분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차양을 향해간다.

“저 사람 아니에요?”

묵직한 전자담배 기기를 입에 물고 있던 서천이 식당 건물 앞의 횡단보도를 턱짓했다. 몸을 조금 내밀어 살피니 분명 주경태가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키가 큰 남자와 함께였다. 이 거리에서도 귀에 매단 치렁치렁한 악세사리가 눈에 띄는, 머플러를 두른 남자였다.

횡단보도 너머의 경태는 그를 보고 서서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표정이 썩 좋지가 않았다. 악세사리를 귀에 두른 남자는 무표정하게 경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플러로 가려진 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천영의 시야에서는 보이지가 않았다.

“저쪽도 한 명 데려오려나 본데요.”

풍성하게 연기를 내뿜으면서 말하는 서천의 저의를 천영은 무시했다.

따끈한 보닛의 사륜차들은 한겨울의 차디찬 도로를 열심히 달린다. 횡단보도 너머의 경태와 남자는 그런 자동차들에 가려 보였다가 말았다가를 반복했다. 첫 씬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던 경태가 다음 씬에서는 입가를 비틀어 언짢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 다음 씬에서는 손을 들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다가 최후에는 결국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군다. 눈더미와 배기음에 삼켜진 그의 목소리는 결코 들리지 않는다. 활동 사진처럼.

신호등이 바뀐다. 경태를 포함한 보행자들이 도로를 횡단한다. 남자는 횡단하지 않았다. 경태는 횡단보도의 절반까지 와서 그를 한 번 돌아보았다. 남자를 바라보는 옆얼굴에서 이상한 절박감이 느껴졌다. 횡단보도 너머의 남자는 제 얼굴을 덮은 머플러를 만지작댔다. 경태는 그에게서 쉽사리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보행은 느려지고 남은 횡단 시간은 줄어든다. 횡단 시간을 알리는 역삼각형이 겨우 하나가 남았을 때 경태는 이편에 발을 붙였다.

그리고 저편의 남자는 횡단보도로 몸을 기울였다.

정지선에 멈춰 다음 신호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자동차들이 주행을 시작한 시점의 일이었다.

서천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경태는 깜짝 놀라 횡단보도에 뛰어들 것처럼 다가갔다.

천영은 입술에 매달고 있었던 담배를 눈 하나 쌓이지 않은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남자의 체크무늬 머플러는 충돌의 충격으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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