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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다 (6)

K=Potassium by KP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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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이는 조금 계산에 서툴렀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아침약을 먹지 못하고 넘기면 해가 저물고 저녁약과 함께 먹는 식이었다. 한번에 스무 포 씩 먹는 것도 아니니 몸에 아주 해로운 영향은 없었지만 좋은 영향도 딱히 없었다. 그렇게 두 포를 먹는 날이면 이따금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하다가 벽 모서리에 부딪혀 멍이 들거나, 가만히 앉아있어도 어지럽다고 칭얼대거나, 기분이 이상하게 좋아져선 자꾸 신발도 신지 않고 현관 밖으로 나가려 들거나…… 했다.

기도회에서 돌아온 후 언젠가의 주말에 도진이는 어김없이 두 포를 먹었다. 약의 독성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침대에 누운 내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말다가 펴다가를 반복하며 뒤척였다.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체력이 남았다는 뜻이었으므로 나는 그를 와락 끌어안고 더듬었다. 품 안에서 바르작대는 애인의 신체가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다.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달궈진 피부 이곳저곳에 손을 대고 있으면 괴롭다는 듯이 끙끙댔다. 허벅지 안쪽에 손이 닿으면 솔직하게 신음했고 입을 맞추면 잠시 조용해졌다. 혀끝에 남은 정제의 쓴맛을 느끼면서 나는 문득 이렇게 물어야만 했다.

“무슨 악몽이었어?”

취약한 인간은 솔직해진다. 그리고 자신의 발언에 아무런 의심과 저항을 갖지 않게 된다.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꿈속의 뒤틀린 이치에 순순히 따르는 매일 밤중의 너와 나처럼.

살짝 충혈된 도진이의 시선이 공중을 휘몰다가 나에게 닿았다.

“목을 매달았어요.”

나는 시선을 피해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누가?”

나와 닮은 체취가 나서 나는 만족했다.

“교주님이.”

허리춤에 손가락을 걸어 바지를 벗겨냈다.

“악몽이었어?”

긴장한 허리가 잠깐의 터치에 기민하게 반응한다.

“네…….”

싫은 기색은 없었다. 그 일을 악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도, 내가 그를 범하는 것에도.

“이대림 씨.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거예요? 전남친의 터치가 아무리 기분 좋았다고 해도요, 슬슬 일어나야죠. 비 와서 차 막히기 전에 갑시다.”

상호의 부름에 대림은 그제야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부옇게 흐려졌던 현실 인식이 재빠르게 되돌아온다. 방금 전까지 이 폐기도원에서 과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작가 두 명은 대림의 진상 해설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떴다.

왼눈을 가린 기이한 스타일의 호러 작가는 작별 인사를 했던 것도 같았고 도진이는 하지 않았던 것도 같았다.

인사 하나 없이 매몰차게 사라진 도진이. 작년 여름에 봤을 때보단 머리카락이 길어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말 한 번 해 주지 못하고 떠나보내버린 도진이.

대림은 1층 정문을 넘어 사라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4층 난간 너머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호가 뒤에서 진상에 대한 불평을 어느 정도 터뜨렸지만 어절의 구성이 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들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다. 그저 양옆으로 흔들리는 도진이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대림은 망연히 바라보다가 한순간 회상에 빠지고 말았다.

몸을 일으켰다. 상호는 눈을 번쩍 뜨고 대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대림은 부러 고개를 돌리곤 4층의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으로 들어올 때 건넜던 짧은 다리는 무너지는 일 없이 멀쩡하게 이어져 있었다.

“즐거우셨습니까? 형사님.”

대림이 뒤따르는 상호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그야 즐거웠죠. 이대림 씨의 출제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꼴이니.”

왔던 때와 같이 상호는 운전석에 앉았다. 돌아가는 길은 제가 운전하겠다고 해 보았지만 이건 자기 차니 제가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며 극구 거절한 상호다. 대림은 왠지 불편한 마음으로 조수석에 등을 기댔다.

폐기도원에 들어가기 전에도 먹먹했던 하늘은 이젠 하얀 구석마저 잃고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쏴아아 하고 숲을 할퀴는 바람이 마치 폭풍전야를 연상케 했다.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전에 서울 경계선을 밟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 대림은 생각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비게이션 경로 안내도 켜지 않아 조용한 차내에서 상호가 대뜸 물었다.

“예.”

“이대림 씨는 왜 출제를 안 한 거지?”

“무슨 뜻이시죠?”

“서도진 씨랑 만날 때 쯤엔 나랑 놀고 있었던 거 아닌가.”

“아아, 뭐. 그렇죠.”

“그럼 기도원에서 있었던 사건을 출제하면 됐을 거 같거든. 이대림 씨가 직접 손을 더럽힌 건 아니지만 어쨌든 사건에 개입한 건 맞으니까. 이 사건을 출제 안 하고 다른 살인자들의 은근한 눈총을 받으면서 뻐긴 이유가 있나?”

그거야, 당연히.

대림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죄송합니다. 아깐 뭐라뭐라 열심히 설명했지만, 실은 제가 개입한 게 없는 사건이라서요.”

“뭐라고?”

두꺼운 회색 눈썹이 구겨지는 모습을 대림은 백미러로 엿봤다.

“제가 아니라 도진이가 벌인 사건입니다, 그건.”

상호에게 과거 사건의 재수사를 하러 가자는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단순했다. 그 건물의 현재 상태가 어떠한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도원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그곳의 독특한 구성이 마음에 들었던 대림은 주인을 잃고 폐건물이 된 기도원의 경과를 호시탐탐 지켜보았다. 자살 사건이 일어난 사이비의 기도원은 상당한 수준의 사고 매물 취급을 받았다. 다음 주인을 찾지 못하고 법적 구속에 묶여 그저 산속에 방치된 폐건물을 대림은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두고 있었다.

한때는 사이비 종교의 기도원이었던 5층 건물. 출입구는 1층과 4층에 있고, 천장이 뚫려있어 5층에서 내려다보면 기도원의 모든 곳이 샅샅이 보인다. 그것도 어린양을 맞이하듯 양팔을 벌린 예수상을 등에 업은 채 말이다.

신성한 공간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모독의 공간은 그러하지 않다. 오히려 제 성질을 숨겨 보다 많은 인간을 불러모으고자 한다. 모독의 신자가 늘어날수록 파괴하고자 하는 대상인 신성을 침범하기 쉬워지니까.

신성을 파괴하기 위해 길러진 모독의 신자를 한곳에 그러모아 감시하고자 하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었다.

신성의 파괴, 신살……. 아주 어감이 좋은 말이라고 대림은 생각했다.

왜냐하면, 대림은 여태 자신을 신으로 추앙하는 신자들만을 곁에 두었으니까. 신은 커녕 인도자조차 되지 못하는 대림을 추앙하던 그들은 끝내 삿된 신인 대림을 파괴하지 못하고 스스로 스러져 갔으니까. 자신은 평생을 가짜 신으로 살았지만 이미 세상을 등진 그들 중 누구도 가짜 신을 머리 위에서 끌어내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맹목으로 받들었으니까.

나는 현실에서 눈을 돌린 신자가 아닌, 삿되고 부정한 신을 진창으로 끌어내어 감화하는 신부를 만나고 싶었을 뿐인데. 그분을 만나 진창 바닥에 이마를 문질러 따뜻한 성령의 말씀을 전해듣고 싶었을 뿐인데.

그래서 대림은 생각했다. 이제는 폐건물이 다 된 그곳을 손에 넣어 어떤 방식으로 개조한다면 왠지 좋은 인연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분명한 근거나 까닭은 하나 없이 단순한 느낌에 지나지 않았지만 반생을 되돌아보니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그곳은 이전 사이비 종교의 기도원이었고 자신은 가짜 신으로서의 인생을 줄곧 살아왔기에.

폐건물 탐사에 강상호를 꼬셔낸 건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현재에 이르러 그 건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대림 뿐이었고, 그렇기에 동행할 사람은 없었고, 강상호에게는 지난 겨울에 진 빚이 하나 있기 때문에 과거의 기묘한 사건을 소개시켜 주는 걸로 쌤쌤 쳐버리자, 혼자 가는 것보단 둘이 다니는 게 차라리 즐거우니까. 이상의 간단한 사고의 흐름이 있었다.

그곳에서 도진을 마주친 건 대림에게 있어서 엄청난 이변이자 행운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헤어스타일의 동행인이 딸려있는 건 소소한 불운이었다. 만일 도진이 홀로 그 폐허에 있었다면 대림은 어떤 억지를 써서라도 자신들과 동행하게 만들었으리라.

도진은 대림을 경계했다. 대림이 막 한국으로 돌아온 작년 여름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경계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을 터였다. 그 때 끼고 있었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가 여전한 게 대림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이상한 헤어스타일의 호러 작가라는 동행도 있고 하니 대림은 자신을 강 형사의 후배로 소개했다. 호러 작가가 도진을 어디까지 아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대뜸 전남친이라는 말을 꺼내는 건 곤란했다.

원래 대림의 계획은 이러했다. 상호와 함께 폐건물에 도착해 과거 사건을 설명한 다음 그가 자유롭게 추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진상을 해설한다. 등장인물은 피해자인 교주와 범인인 신자 A, 최초발견자 신자 B 그리고 외부의 해설자인 이대림 그 자신이다. 피해자와 범인은 확실한 일종의 도서추리물이므로, 범인이 어떻게 살인을 거행했는지만을 맞추면 되는 단순한 문제다.

대림의 사건 설명에서 신자 A는 교주를 살해하고 신발을 회수하는 두 가지 행위를 어떤 방식으로든 완수할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그녀에게는 공범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대림을 제외한 등장인물이 셋에 피해자가 하나 범인이 또 하나니 공범은 자연스럽게 최초발견자인 신자 B일 수밖에 없다. 대림은 상호에게 그렇게 해설하려고 했다. 사건이 일어나던 새벽 자신이 보았던 사실을 덧붙여가면서.

그러나 신자 B, 서도진은 갑작스럽게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대림은 세 명으로 불어난 추리 게임의 참가자들에게 사건을 설명하면서도 진상을 어떻게 제시해야할지 당혹스러웠다. 호러 작가는 취재를 위해 이곳에 왔다곤 했지만, 도진이 이곳을 잊고 있을 리 만무하니 여기까지 오는 차 안에서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사건을 이미 얘기했을 수도 있었다. 얘기했다면 어디까지 이야기했을까. 설마 자기가 교주의 살인 사건에 관여했다는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겠지. 도진이도 그 정도의 분별은 되는 애니까. 그렇다면 도진이의 동료 작가가 있는 이곳에서 부러 진짜 진상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도진이가 숨기고 싶어한다면 숨겨주고, 나중에 강 형사님한테만 몰래 말해주자. 다중 추리라는 거, 좋아하니까. 이 인간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도진은 갑작스레 대림이 즉석에서 꾸며낸 허구 한 줄을 사용해 상황을 역전시켰다.

“수사를 위해 잠입했다고 주장하는 당신이 바로 그 공범자야.”

도진은 대림을 사건의 등장인물이라고 재정의했다.

해설자에 불과하던 그를 용의선상이라는 진창으로, 막무가내로 끌어내렸다.

그리 말하며 대림의 심장 부근을 두 번째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도진은 명백하게도 화가 나 있었다.

순전히 지적 유희를 위해 남의 치부를 팔아먹는 짓을 하고 있는 대림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도진은 대림을 범인으로 정의하며 벌을 내렸다.

네 입으로 네가 범인이라는 성명을 내라며 압박했다.

왜냐하면, 이런 짓을 벌이는 너는 그런 벌을 받아 마땅한 인격체니까!

그런 너의 죄악을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순간 머리 위로 빛이 내려쬐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색이 다 바랜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해 투명하게 내리쬐는 백색광은 그의 바로 앞에 선 도진의 곱슬머리까지 닿았다. 하얗고 가는 고리가 뿌옇게 떠올랐다가 먼지처럼 녹아 사라지는 환상을 대림은 눈에 담고 있었다.

천사의 손가락이 닿은 부근이 쿵 하니 떨어지는 듯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야만 하겠다…….

대림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사건의 해설을 줄줄 읊었다. 그 안에서 신자 B는 시신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뿐인 불우한 신자였고 대림 그 자신은 정신이 썩 좋지 않은 인간을 애인으로 삼기 위해 신발을 대신 옮겨준 악동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도진이 네 말을 듣겠다는 복종의 표현이자 일종의 고백 성명이기도 했다.

물론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낀 도진은 그의 고백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동료 작가와 함께 폐건물을 나섰다.

하지만 대림은 이상하게도 그리 슬프거나 허탈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는 살아만 있다면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그런 확신이, 이상하게도 강렬히 들었다.

양팔을 벌린 예수상은 대림을 긍정하듯 도진이 지나는 길에만 그림자를 드리웠다.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라고, 그는 조수석에서 가볍게 눈을 감으며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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