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에 던진 기억의 파편이 꽃을 피우기 위해 술잔 위로 떨어지는 보름 동안에

이것은 그를 위한 공양이다.

나는 빈자리 앞에 놓인 빈 술잔에다 병을 기울였다. 유리병 안으로 왈칵 흘러드는 공기의 저항감과 함께 작은 폭포가 부드럽게 쏟아져 내려 잔 속에 부딪치는 소리가 청량하다. 금속에 액체가 부딪치면서 울리던 소리는 점차 둔탁해진다. 단단한 금속의 땅에 쏟아지듯 낙하한 술이 고여서 만들어진 웅덩이 속으로 소리는 가라앉고 가라앉는다. 웅덩이 속으로 파고든 액체가 잔의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라 결국에는 잔을 가득 채워 찰랑일 때까지.

밤의 어둠을 머금었기 때문인지 일견 검게 보이는 짙은 자주색 표면에 비친 달이 일렁인다. 기울였던 술병을 다시 천천히 세우고 살짝 돌리자 술의 폭포는 가늘어지다가 이내 끊겼다. 줄기가 끊어지기 바로 직전의 한 방울이 술잔 속 달에 맺히기 위해 떨어졌다. 액체가 일으킨 파문에 달은 또다시 흔들린다.

원래 잔에 술을 따를 때 이런 식으로 가득 채우는 건 적절하지 않다. 절반이 안 되게 채워야 향을 즐기기 위해 잔을 돌릴 때 술이 넘치지 않는다. 기왕 마시는 술이니 적당히 따라서 적당히 마시며 즐겨야 의미가 있지만, 내가 마실 술이 아니므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잔이 가득 차도록 부었다.

옛 추억이라 함은 처음으로 술을 마셨던 날의 기억이다.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한 나이이기도 해서 술 같은 기호 식품에 관심이 옅었던 나는 그저 ‘언젠가 흥미가 일면 마셔보겠지’라며 별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는 간접 체험으로 충분했다.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면 술이라는 것이 인간과 얼마나 밀접했는지와, 그리고 술을 마시고 얻은 취기 속에서 영감이 생기는 부류도 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알코올을 섭취함으로써 평소의 행동을 제어하는 나사가 한두 개 풀릴 뿐이겠지만 이런 것들이 필요한 사람도 세상에는 있고, 어차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와는 거리가 멀다.

이렇게 해오던 생각은 그의 변덕으로 인해 끝이 났다.

그와의 접점은 주로 아카데미아 안에서만 이루어졌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너희 집에 가보고 싶다’라고 했다. 얼굴을 보니 벼르고 벼르다가 한 말이 아니라, 그저 즉흥적으로 치밀어 오른 감정이 목소리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뜻밖의 요청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을 크게 뜬 채 어쩔 줄 모르는 그가 방금 내뱉은 말에 대한 변명을 시작하기 전에, 둔탁한 마찰음이 꽤 크게 들려왔다. 허공을 헤매다 바닥을 향한 시선을 그대로 고정한 채 짧게 비명을 지르고서 몸을 굽혀 떨어진 책을 줍기 시작하고, 그런 그의 등을 잠시 내려다보던 나도 이윽고 다가가서 수습을 도왔다. 집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해버린 것이 어지간히 쑥스러웠는지 귀까지 달아올라 있어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다소 어색했기 때문이다. 이런 반응을 보면 무심코 내뱉은 말임이 틀림없다. 귀까지 빨갛게 물들인 채 어수선한 손놀림으로 책을 수습하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기가 어색했다. 그때는 몸을 굽혀 돕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그를 더 방치했다가는, 아마 책을 다 줍고 나서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얼버무린 뒤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도망가버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요청을 왜 수락하고 함께 돌아왔는지를 설명하려면 많은 문장이 필요하다. 간단히 요점만 쓰자면, 기분이 시시각각 바뀌는 그를 거절했을 때 돌아올 상심한 얼굴을 보기가 꺼려졌다는 것이 첫 번째, 타인의 영역에 솔선해서 발을 들이지 않는 그로부터의 드문 요청이라서가 두 번째 이유이다.

아니면 단순히, 그의 변덕이 옮았는지도 모른다. 심적인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인간관계를 향한 일종의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에 호기심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항상 웃는 얼굴로 곤란한 일을 도맡으면서도 그의 사방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타인을 향한 선의를 보내더라도 돌아온 것들은 벽에 부딪쳐 땅에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남들과 섞이고 싶어 하면서도 고독했다. 자신을 감싼 벽 너머, 깨져서 발치에 널브러진 것들, 선의였던 그 무언가의 잔해를 내려다볼 때의 그는 세상 누구보다 외로워 보였다. 외로움과 쓸쓸함과 상실과 죄악 같은, 잃어가는 계절에 어울릴 법한 심상들을 좋은 비율로 뒤섞어 굳힌 것으로 만들어놓은 조형물 같았다. 위태로워 보였다. 겉보기에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는 데만도 많은 에너지가 들어갈 텐데 내색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투명한 유리의 벽을 방패 삼아 자진해서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다. 그러니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고 엮일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가둔 벽 안에 머무르면서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형벌이라도 받는 것 같았다. 자신을 역경에 몰아넣어 인내를 시험하면서 심적인 위안을 얻는 자들도 종종 있지만, 그의 경우에는 고난이 위안으로 치환되지 않았다. 오히려 짐이 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가둔 벽 안쪽의 중력만이 무거웠다. 저 상황에서 잘도 웃는 낯으로 지낸다고 생각했다.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기는커녕, 더 옭아매고 무거운 짐을 메어놓는 것처럼 보였다.

‘벗어나다’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일까? 그를 옭아매고 있는 구속과 곤경과 우울은 대부분 자초한 것들이므로 ‘깨뜨리다’ 혹은 ‘바뀌다’가 보다 어울릴지도 모른다.

타고난 성격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그는 아마도 변하지 않을 테고, 그로부터 비롯된 불행을 원죄처럼 짊어진 채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그가 스스로를 가둔 감옥의 벽은 나름대로 견고하여 조금이라도 허물어지거나 두께가 얇아지는 일은 없었다. 그 안에서 항상 화사하게 웃고 있으니,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유리관 안에 보관하여 전시하는 희귀 화종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외로운 그의 곁에서 결국에는 모두가 떠나갔다. 유리관 속에 자신을 가둔 그를 중심으로 강이라도 흐르듯 지나가는 구경꾼들 너머는 텅 비어버렸다.

그래서 그의 주변은 조용했다. 다가올 때의 발소리, 옷이 스치는 소리, 좁혀지는 거리마다 조심스러워지는 호흡까지도 선명하게 전해졌다. 남들에게 말을 걸 때는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워하는 법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가와 내게로 향하는 음성은 아주 또렷하고 매끄럽게 귀에 흘러들었다.

평생 엮일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그가 눈앞까지 걸어와 말을 걸었을 때, 그의 발치에 흩어진 선의의 잔해를 떠올렸다. 무참하게 깨어진 잔해의 폐허 위에서도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견고한 유리벽의 안쪽은 미지의 영역이다.

관찰한 결과 성립한 가설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이 벽을 허물고 안쪽에 서 있는 그와 접촉해야 알 수 있다.

자신이 있었다. 확신도 했다.

그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처음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접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로 그가 일방적으로 찾아왔다. 먼저 말을 거는 것도 그였다. 처음에는 길게 상대하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상대하지 않으려 하다가도 대꾸하는 패턴이 반복되면서 깨달은 점은, 그 역시 소문 이상의 천재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주변에 널브러진 선의의 잔해, 중심에 그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버리는 사람들, 유리의 벽을 두르고서 완벽을 연기하는 그의 외로움은 거기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한 공간에서 일부의 시간을 공유하는 하루하루가 당연해졌다. 오랫동안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가 걸어오는 말에 대꾸하는 일도 잦아졌다. 의견이 오고 갈 때마다 언성을 높이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충족이 동반되었다. 이따금 실없는 대화를 나누어도 싫지 않았다. 그와는 그렇게 해도 될 것 같았다.

실없는 대화라고 하니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도 둘이 마주 앉아 각자 할 일에 열중하는데, 가벼운 무언가가 머리카락을 툭 건드리고 책상 위로 떨어졌다. 시선을 옮겨 확인하니 그것은 종잇조각이었다. 날개를 흉내 낸 모양으로 접어놓은 새. 맞은편에서 이런 것으로 장난칠 만한 사람은 그밖에 없다. 어차피 방에는 둘뿐이었으니까. 지루해져서 장난을 쳤겠거니, 다시 책을 읽을까 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고개를 들고 응시하자,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의 눈이 더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리고 다른 한쪽 손을 들어 내 쪽에 떨어진 종이를 가리켰다.

이것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종이로 접은 새를 집어 내밀어봐도 돌려달라는 기색이 없었다. 지금 네 표정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느냐, 집중하다가도 가끔 주의를 환기해야 한다며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고서 다시 한 손으로 내 쪽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까딱 움직였다.

펴 보라는 듯한 움직임에 응해야 할지 말지는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한 이상 결정 사항이나 다름없다. 직접적인 목소리든 손짓이든, 그리고 시선도 포함해서 그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내게 말을 전했으므로, 그를 마주할 때는 잘 보고 있어야 했다.

접힌 종이를 하나하나 펴는 손끝과 얼굴에 번갈아 가며 시선이 닿았다. 그의 시선은 항상 온화해서 부담스럽거나 불쾌하지 않다. 종이를 펴 본 나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이 흥미진진한 모양이다.

깨끗하게 접어 내게 날려 보낸 종이 새의 안쪽에는 그림이 숨겨져 있었다. 섬세하게 다듬지 않아 낙서라고 해야 할 만한 것이었으나 딱 보기에도 잘 그려진 그림이다.

“내 말이 맞지?” 하고, 펼쳐진 종이를 내려다보는 내게 그가 다시 말을 건넸다. 동의할 수 없었다. 종이에 그려진 인물은 전혀 심각해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후의 빛 속에서 가만히 앉아 책을 읽어 내려가는 정적인 인물의 낙서는 그린 사람을 닮아 부드럽고 따스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시선이었다. 나도 눈치가 없지는 않다.

그때의 그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손끝으로 시선을 그려낸 그림에서는 잘 보였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이야기의 시점을 되돌려보자.

나와 그가 알고 지낸 지도 몇 달이 흘러 ‘너희 집에 가보고 싶다’라는 말을 꺼낸 그때로 돌아간다. 주워서 다시 쌓아 올린 책더미를 안아 들기 위해 팔을 움직일 때 내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두 팔에 책을 안은 채 일어선 그가 손에 힘을 주었다. 꾸욱 힘을 넣어 오그라드는 손가락과 손등에 도드라진 가느다란 골격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힐끗 보고 나서 그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입술을 이로 지그시 깨물었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이리저리 굴렸다. 대답하기 곤란한 말을 꺼내버렸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깨물다 말고 소리 없이 숨을 한 번 내쉰 그가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입을 연 순간에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승낙하는 말로 그가 할 말을 자르지 않았다면, 곤란한 제안을 해서 미안하다는 사죄를 짧게 던지고서 이 자리를 떠나버릴 테니 그 전에 선수를 쳤다. 나의 영역에 들어오고 싶다고, 함께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 그를 굳게 감싸고 있던 유리의 벽이 걷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좋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는 눈에 빛이 떠올라 있었다. 책은 또다시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졌고, 이번에는 떨어진 책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아주 기쁜 듯 환하게 웃으며 내 목에 양팔을 둘러 왔다.

그의 집에는 술이 없다고 했다. 우울감에 빠진 어머니에게 독이 될 것이 분명하니 그럴 만한 위험 요소들은 전부 치웠단다. 모친이 외국으로 떠나 혼자 남은 집에 오늘은 유독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인데도 불구하고 승낙해줘서 고맙다. 머뭇거리면서도 집 안에 발을 들여놓은 그가,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편하게 앉아 이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덧붙여서 그 술이라는 걸 한번 마셔보고 싶다는 말도.

그럼 마실까? 내가 제안했다. 그는 놀라면서도 집에 술이 있었냐고 되물었다. 집에 보관해둔 술을 여태 딱히 마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굳이 미성년의 나이에 경험해야 할 필요도 없고 호기심도 없었다. 그러나 안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궁금해한다면 못 내줄 것도 없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의 호기심을 이유 삼아 함께해도 나쁠 것 없는 경험이다.

처음 마시는 술은 특별한 맛이 아니었다. 둘 다 마시는 법을 몰랐다. 어디에선가 주워듣고 읽은 건 있어도 경험은 처음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술병을 맡기자 그는 잔에 한가득, 술이 찰랑거릴 정도로 채워 넣었다. 이게 아닌가, 하며 곤란한 듯 웃었다. 뭐 어때, 많이 마셔서 네가 뻗으면 이 선배님이 돌봐주겠다고 말하면서. 그가 했던 것처럼 내가 그의 몫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주자 “똑같이 하면 어떡해” 하는 불평이 들려왔다. 그래도 웃고 있었다. 처음으로 술을 마시는 특별한 경험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가득 차서 묵직해진 술잔을 서서히 옮기는 동안 표면에는 달이 비쳤다. 찰랑거리는 술이 흘러넘칠 것 같아 잔을 기울이는 대신 입을 잔에다 직접 대고 액체를 천천히 머금었다. 술 자체의 맛도 향기도 잘 알 수 없었지만, 잔 속에 담긴 달을 마시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올해에도 폭풍이 찾아왔다.

가장 생명력으로 가득 차 빛나는 계절에 폭풍은 불어닥친다.

천둥이 치고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진 자리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내가 그것을 찾은 날도 폭풍이 지난 후였다. 라잔 정원의 입구 근처, 신성한 나무 아래 작은 풀밭에서였다. 흙과 나무의 경계를 뒤덮은 풀이 흙째 뒤엎어지고 나뭇잎이 흐트러져 드문드문 패인 나무 아래에, 그곳에 있을 리 없는 것이 묻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무릎을 굽히고 살펴보니 머리카락에도 윤기가 감돌고 피부 역시 진주색이라 도무지 시체로는 보이지 않았다. 뺨에는 희미하게 장밋빛의 생기도 비쳤다.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어도 호흡하는 기색이 없고, 흙을 조금 치운 뒤 어깨에 손을 얹어 흔들어보아도 미동조차 없어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비마르스탄과 풍기관 쪽에 연락을 넣는 것이 바람직한 판단이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이 생생한 시체가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가는 일대 소동이 일어날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 없는 사람이다. 몇 년 전에 아카데미아를 졸업하고 수메르성을 떠나버렸다. 가령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몰래 돌아온 그를 누군가가 살해했고, 범인이 나무 아래에 묻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으나 이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카데미아 교복이 입혀진 채 가슴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가만히 묻혀 있던 시신은 청년이 되기 직전의 소년으로, 기억 속 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들고 집에 돌아왔다. 평소 눈에 안 띄게 다니는 데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거실의 소파에 그것을 눕히고서 정중히 흙을 털어낸 다음 찬찬히 살펴보았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새로 이사한 집에 그의 소년 시절과 아주 비슷한 무언가가 누워 있었다. 그가 졸업한 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눈앞의 시체처럼 앳된 모습은 아니었다. 집의 명의 문제로 아카데미아에서 연락을 취했을 때 곧바로 권리를 포기해 버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후 그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에게 충고를 했던 날, 유리의 벽 안에서 연기하던 완벽한 모습을 내 앞에서만큼은 무너뜨리게 되었을 무렵에 닥쳐온 폭풍은 모든 것을 휩쓸어버렸다. 전조는 있었다. 모든 것이 삐걱대며 비명을 지르던 시기였기에 그에게는 가혹한 말이 필요했다. 현실을 일깨워줄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그의 곁에는 나뿐이었다고 쓰는 쪽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신뢰하던 사람이라서, 이 사람에게만큼은 상처 입을 일이 없으리라 믿어서 벽을 허물고 무방비해진 그였기에 나의 말들은 그대로 그의 맨살에 꽂혔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를 예상 못 하지는 않았다. 그는 믿고 싶어 했다. 나와 그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걸 인정하기 힘들어했다.

그는 진심으로 슬퍼했다. 나를 향하던 부드러운 미소가 슬픔으로 바뀌고, 분노와 절망으로 뒤섞여 엉망진창이 된 목소리가 마지막을 고했다.

화가 났다. 그가 나의 충고를 귀담아서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실망해보았다. 그래서 절망하며 곁에서 떠나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가 졸업하는 그날까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주치면 분명히 언성을 높이게 될 테니 피곤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습을 한 시체가 집 안에 누워 있다니.

어떻게 해야 할까, 시체라면 우선은 부패 걱정을 하는 것이 우선이나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피로가 풀릴 때까지 실컷 자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쏟아지는 햇살에 얼굴을 찡그릴 듯 생생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 그러하듯, 그저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것처럼.

생론파의 지인에게 이 시체에 대해 물어볼까도 생각했지만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다. 생론파의 지인 역시 그를 안다. 이것을 보았다가는 지인 역시 혼란에 빠질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는 상식이나 정보를 총동원해봐도 눈앞의 시체가 대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옳은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취한 행동은, 방치였다.

논문이나 관련 서적을 더 조사하는 동안 거실에 그대로 눕혀둔 채 관찰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가 되어도 그것은 부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깨어나지도 않았다.

나흘째 확인했을 때 비로소 작은 변화가 보였다. 피부에 비치던 장밋빛이 옅어졌다. 처음 발견했을 당시에 차올라 있던 생기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대로 방치해 두면 정말로 죽어버릴 것처럼.

나는 그렇게, 발견한 지 나흘 만에 그것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물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 수분이다. 한쪽 팔로 그것의 상체를 받치고서 입을 통해 조금씩 물을 흘려 넣자, 어느 순간 목에서 작은 움직임이 보였다. 흘려 넣은 물을 받아 삼키면서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 후로 며칠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거실에 눕혀둔 그것을 관찰하고 수분을 보급하는 일을 반복했다. 물이 들어가자 생기는 금세 돌아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스스로 움직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면 아침 그대로의 모습이고,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지난밤 그대로 누워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을 뜰 것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그렇게 영원히 잠든 채 살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관찰하고 물만 주는 간단한 케어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면 식물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것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처음 발견했을 때 숨을 쉬는지 확인했는데, 상식 밖의 존재라면 인간의 모습이면서도 다른 방법으로 호흡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날 조금 다른 시도를 해보았다. 식물이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려면 양분이 필요하다. 과일을 종류별로 하나씩 준비해서 맑은 즙을 내어 조금씩 공급해보기로 했다. 과일의 당분과 영양분을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이 있으니, 아주 조금씩만.

그리고 다행히도, 과일은 그것에게 잘 맞는 모양이었다. 매일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 온 과일의 껍질을 벗기고 으깨어서 맑은 즙을 내어 마시게 하는 일은 상당히 번거로웠지만, 단순 수분보다 나은 영양을 공급해주자 그것은 나날이 자랐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나자, 소년의 앳된 모습이던 그것은 어느새 성인만큼 자라서 발견 당시 입고 있던 교복이 맞지 않게 되었다.

정체도 모를 생물을 집 안에 들여놓고 이렇게 신경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도저히 정의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본질을 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슬픈 얼굴을 보여주기 전의 온화하고 따스한 표정을 띠고 있어서, 과거에 함께했던 기억에 미련이 남아서, 혹은 무방비한 그를 상처입혔다는 일말의 죄악감으로부터 비롯된 속죄가 이성의 밑바닥에서 뒤얽혀 본질의 파악을 뒤로 미루고 있었다.

내가 주는 양분을 받아들여 그것이 점차 몸을 키워가는 동안, 나는 어떤 학술지에 짧은 투고를 했다. 그가 본다면 반드시 반박할 내용이었다. 답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았다. 이때만큼은 나조차도 모순을 느꼈던 것이다. 모순은 얼마 가지 않아 깨졌다. 내 의견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그의 투고가 실렸기 때문이다. 진짜 그는 다른 곳에 있다. 나는 현실을 곧바로 인지했다.

그렇다면 내 집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는, 식물처럼 누워 있는 이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는 성인만큼 자란 그것을 내려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이내 한숨을 쉬고 나서 옷을 갈아입히기로 했다.

내 것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헐렁한 옷을 입혀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살아 있고, 성장까지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거실에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어 남은 방에 침대도 들여놓았다. 내가 쓰고자 고른 침실보다 빛이 잘 드는 방이었다. 그것이 식물과 같은 원리로 생존한다면 그 방이 제격일 것이었다. 침실로 삼은 방에 그것을 눕혀두고 매일 관찰하며 수분과 영양을 공급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언제까지, 라는 의문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미지의 무언가를 관찰하고 경과를 지켜보는 일이 나름대로 즐거웠던 것 같다. 그가 아니라고 정의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는 쪽이 더 가깝다. 그것은 살아 있었다. 피부는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윤기 있는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언젠가 눈을 뜨면 그것의 입으로부터 직접 어떠한 존재인지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음 및 발성기관이 제대로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얼핏 확인한 바로는 구강에 이상이 없고, 겉보기에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갖추어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큰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반드시 전조가 있는 법이다. 폭풍만큼 격렬하지는 않더라도, 산들바람이 불어와 물 위에 파문을 그리는 것처럼 오랜 기다림에서 비롯된 조바심이 그것에게 전해졌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것의 침실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 없이 옆에 앉아 내려다보며 이따금 감촉을 확인하거나 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 위에 손끝을 올리고 있으면, 이것이 살아 있다는 확신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깨어나기를 바라고 있었을까, 혹은 그와 똑같이 생긴 그것이 눈을 뜨고 나와 마주하기를 바랐을까. 그가 아닌 너는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커진 끝에 무심코 흘러나온 말은 분명히 귀에 익은 내 목소리였다.

강한 바람은 목소리가 되어 바깥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언제 일어날 거야, 라고.

그것에게 처음으로 들려준 말은, 늦잠을 자는 그에게 툭 던지기라도 하듯 무심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휴일, 거실에서 평소처럼 책을 읽는데 무언가 크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책이 쏟아지는 소리는 아니다. 큰 소리는 그것의 침실 안에서 났다. 읽던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려 그것의 침실 문을 잠시 바라본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습관처럼 침대 위를 확인하자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방에서 빈 침대를 보는 건 두 번째다. 침대를 들여놓고 그것을 옮기기 전을 제외하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어서 시선을 바닥 쪽으로 내렸더니, 넘어진 채로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는 그것이 있었다. 양팔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서려다가 힘이 풀려 엎어지고, 다시 온몸에 힘을 주어 일어서려다 쓰러졌다. 의식을 찾은 그것이 몸을 일으켜서 걸으려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모양이었다. 침대 모서리에 부딪치고 여린 살이 바닥에 쓸려 이미 생채기가 나고 멍이 들었을 텐데도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이 나를 향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끝까지 혼자 일어서려 했다.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몸을 지탱하고 일어나 걸음을 뗄 때까지 문 앞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프고 힘들 텐데도 신음조차 흘리지 않는 것을 보면, 발성은 아직 무리인가 보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관절과 근육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아 힘이 풀린 끝에 쓰러지고 바닥에 머리를 박고, 무릎까지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가 두 발로 땅을 디디지 못해 다시 넘어지는 등 수많은 실패를 반복한 끝에 그것은 마침내 일어서서 나를 보았다.

기쁘다는 얼굴이었다. 상당한 고통과 피로가 쌓였을 텐데도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 걸음을 내디디자마자 그것은 다시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아니, 넘어지지 않았다. 내가 곧바로 받쳐 주었으니까. 걸음을 떼자마자 넘어질 뻔한 이유는 몸에 맞지 않게 길고 헐렁한 내 옷 때문이었다.

품에 안은 그것에게서는 나뭇가지에 갓 맺히기 시작한 꽃의 향기가 났다. 기억에 있는 향기였다. 기억에 남은 과거가 몸에 제동을 걸어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등을 감싸는 그것의 양팔이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그것과 마주 끌어안은 채 가늠할 수 없는 시간 동안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의 의식이 깨어난 후로 기묘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동거라고 해야 할까,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러운 무언가와 한 공간에서 사는 것을 동거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의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집 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함부로 밖에 나갔다가 누군가의 눈에 뜨이기라도 하면 귀찮은 일로 번질 것이었다. 정체가 확실하지 않은 이상 얼버무리기도 마땅치 않다. 집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말로 당부를 하지도 않았는데, 어쨌든 그것은 집 안에서 얌전히 지냈다. 내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현관까지 나오기는 해도 따라나서려는 기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으며, 귀가했을 때도 웃는 얼굴로 조용히 맞아주었다. 내가 없는 낮 동안에는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다. 이러한 행동을 위한 기본 소양 및 상식은 갖춘 모양으로, 이에 관한 기본 지식을 내게 물어보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온 무엇인지 점점 더 의문이었다. 성인의 크기로 몸을 다 키운 그것은 이제 지식욕을 채우고 있었다. 부정하려고 해도, 시간이 갈수록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의 모습과 비슷해져 갔다. 햇빛과 물, 과일만이 아니라 내가 마시는 커피에도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밤에 꺼내놓은 책이 다음 날에는 제자리에 꽂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집 안은 정돈되고, 커피를 내리는 일은 아예 맡기게 되었다. 적응되어 갔다. 당연해져 갔다. 아침에 일어나 함께 커피를 마시고 집을 나서기 전에 시선을 마주치고, 귀가해서 머리카락과 뺨을 쓰다듬으면 마치 허락이라도 얻은 것처럼 품에 안기는 패턴이.

어느 날 아침, 침대 위에서 눈을 뜨자 옆에 그것이 잠든 채로 누워 있어서 한동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 방에서 같이 잠들었던가? 어쩌다가. 그것 역시 밤늦은 시간까지 무언가를 하느라 잠들지 못하는 듯하기에 우유에 벌꿀을 넣어 따뜻하게 데워주는 동안 그것은 옆에서 과정을 지켜보았다. 허브티와 우유를 들고 침실에 들어와 함께 같은 책을 읽었다. 내가 페이지를 넘기려고 하면 팔목을 잡아 제지하기에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페이지를 넘겼다. 팔목을 잡아 페이지를 못 넘기게 하던 행동은, 책을 잡은 나의 손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놓았다가 다 읽으면 가볍게 물리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지난밤의 경위를 떠올리며 옆에서 잠든 얼굴을 응시하는 동안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마주 바라보기에, 나는 무심코 “잘 잤어?” 하고 말을 걸었다. 잠에서 막 깨어나 흐릿하던 그것의 눈이 점차 커졌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는 이유를 곧바로 특정하지 못했으나 이내 알아차렸다.

“응, 너는?”

몇 년 전까지는 가까이에서 듣는 것이 당연했던 목소리였다. 그래서 대답할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이 그가 아니라는 인지와 고막으로 흘러든 목소리의 간극에서 혼란에 잠겨 있었다. 그가 아니다. 그러나 똑같다. 그가 아니다. 그러나 웃는 얼굴도 향기도 목소리도 똑같았다. 몇 년 전 매일같이 곁에 있던 그와.

결국 나는 혼란에 빠지기가 싫어 피했던 것이다. 일어날 리 없는 현실을 가장 가까이에 두었으면서도 시간을 끌며 결론으로 도달하기를 피했다.

그래서 그것이 깨어난 후로는 단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이 세상에 없어야 할, 내 곁을 떠난 그와 같은 모습의, 그러나 분명히 눈앞에 존재하는 무언가와 사는 건 그런 일이었다.

함께하는 하루하루의 반복이, 나만의 것이었던 공간에 들어온 무언가와 상당한 기간을 함께 지냈어도 말 한 마디조차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어느새 당연해져 있었다. 혼자 있을 때 다소 넓었던 이 집이 둘이 살면 쾌적하다는 것도 알았다.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옆에 있었던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삶에 섞여든 이 초현실적인 존재는 그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을 때, 이성에 섞여드는 혼란을 자각하고 위기를 느낄 때마다 학술지에 투고를 해왔다. 다른 곳에 있는 진짜 그를 확인하기 위해서, 내 옆에 있는 무언가를 부정하기 위해서. 그는 어딘가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다. 그가 세상에 둘이나 있을 리 없다. 내 옆에 있는 무언가가 그와 완전히 똑같다고, 같은 외모와 향기와 목소리와 지성을 지녔다고 인정하는 건 유일한 그의 존재와 더불어 세상의 이치에 반하는 일이었다.

이제 물어야만 했다. 너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왜 그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만월 밤의 산책은 오랜만이었다. 바로 옆에서 걷는 그것이 뒤처지지 않도록 일부러 느리게 걷자니 옛날 일이 떠올랐다.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때는 주로 낮이었지만, 그와 이렇게 아카데미아의 좁은 나선형 길을 함께 걸었다.

너는 누구지, 라고 물었을 때 질문에 답하는 대신 ‘오늘 밤에 밖으로 데려가달라’고 하는 부탁이 아니었다면 늦은 시간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말 없이 한참을 걷다가 그것을 처음 발견했던 곳에 도착했을 때, 그것은 난간에 기대고 서서 나를 바라보고 마침내 입을 열어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기다려달라고 했다.

여태 말 없이 곁에 두어줘서 고마웠다.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하니 함께할 수 없다. 계속 이렇게 지내다가는 정말로 다른 무언가가 되어버릴 것이다. 내가 여기서 더 독립된 개체로 완성되기 전에 돌아가겠다.

너는 아마 계속 궁금했을 것이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그러나 본질을 혼동하지는 않았다. 나를 단 한 번도 그 아이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하늘로 뛰어내려 돌아갈 테니 혹시라도 땅 위에 내가 떨어져 있지 않은지 찾는다면 헛수고이다. 당장은 사라졌다고 여길지 몰라도 얼마간 기다리면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때 만나는 건 내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는 두 번 다시 너를 볼 수 없다. 나와 함께했던 시간을 조금이라도 즐겁다고 느꼈다면, 나를 위해서 매일매일 술을 따라주었으면 한다. 그러면 위안이 될 것 같다.

여기까지 말하더니 “즐거웠어”라고 했다.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그저 한 공간에 두 사람이 존재하기만 했던 시간을 즐거웠다고 말하며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함께할 수 없다고, 하늘로 뛰어내리겠다고 방금 선언한 사람치고는 대단히 밝은 표정이었다.

말을 할 줄 알면서도 왜 하지 않았는가를 묻자, “네가 싫어할 것 같았으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몸을 돌려 난간을 붙잡았다.

제지하기 위해 팔을 뻗으며 한 걸음 내디디는 나를 뒤돌아보는가 싶더니, 마지막 말이 닿았다.

아참, 술이 떨어지면 꼭 데리러 와줘야 해, 라고.

그리고 그것은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하늘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것이 있던 자리, 저 너머의 밤하늘, 하늘에 뜬 만월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던 나는 홀로 집에 돌아왔다.

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서 내 방으로 향하다가 시선을 돌려 옆에 있는 문을 보았다. 그것이 침실로 쓰던 방이다. 직접 들은 대답에 따르면 그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미련 역시 버려야 했다. 내일은 방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지나치려다, 여태 저 방의 문을 열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발길을 돌려 방 앞에 다다른 나는 문고리를 잡고 부드럽게 돌렸다.

방 안을 확인하고 곧바로 닫을 생각이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새가 가득했다. 바닥도 침대 위도 다른 가구들 위에도 종이로 만든 새가 내려앉아 있었다. 과거에 한 번 보았던, 날개를 흉내 내어 접은 종이 새였다. 켜놓은 등이 없어 어둑어둑한 방 안에는 달빛만이 전부였다. 조금 전에 밤하늘 한가운데로 뛰어내려 사라진 그것만큼이나 초현실적인 광경을 그저 한동안 바라보았다. 생각하기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발치에 놓인 새를 집어 들어 천천히 펴 보니 안쪽에는 그림이 숨겨져 있었다.

잘 그려진 그림이었다. 그때 본 것과 같았다. 방을 가득 채운 모든 새들은 안에 이런 그림을 품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일부였다. 가장 따스하고 포근했던 기억을 양분 삼아 자라난 가지 중 한 줄기였다. 그는 이것을 잘라서 땅속에 묻고 떠났다. 가지를 쳐내는 것처럼, 잊고 싶은 기억과 마음을 잎과 함께 잘라내고서 스스로 겨울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방을 정리하겠다는 애초의 생각을 접어야 했다. 손에 든 종이 한 장을 그대로 들고 나와 방문을 닫고서 거기에 기댔다.

하늘로 뛰어내린 그것을 위해 잔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것도 그날 밤의 일이었다.

 

해와 달이 떴다가 지고 시간이 흘러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술도 떨어져 갔다. 술이 떨어지면 데리러 와달라고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답도 모른 채 매일 밤 공양하듯 술을 따랐다.

마침내 마지막 술을 따라낸 다음 날, 집에 혼자 돌아온 그날로부터 보름이 지나 다시 만월이 걸린 밤에 새 술을 사기 위해 들른 주점에는, 술에 취한 채 테이블에 엎드린 카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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