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와 여성주인공의 계보 (3)

로판의 시초, 2세대

판타지 소설 여성주인공의 계보에서 지금의 로판과 가장 유사한 스타일을 찾아보자. 지금의 로판을 무어라 정의할 거냐는 질문 자체가 아마 싸움판을 만들수도 있지만 어쨌든 '기본 골조는 모험물이나 그 구성에 로맨스 서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여성주인공 소설'을 현재 로판으로 본다면 그 시조가 이 계보 어디에 존재하냐, 바로 박이수 작가의 '달의 아이'다. 

'달의 아이'도 개정되어 웹소설로 서비스하고 있으니 오늘날 읽은 사람이 있을 테고 오래된 작품이라 따로 스포일러 주의를 달진 않겠다. 이게 나올 당시에 읽어서 살짝 내용이 가물거리긴 한데... 거칠게 요약하자면 천민인 주인공이 강간당할 뻔 하는데 남자 주인공이 나타나 구해주긴 하지만 할머니가 살해당한 복수를 하고 싶은 주인공이 남주와 딜을 쳐서 계약조건을 들어주기 위해 아등바등하는데 그게 황실과 연관되어있었고, 권력 얌전히 내놓는 놈이란 존재할 수 없으니 종교도 얽히고, 주인공도 알고 보면 왕족이었고 하는 뭐 그런 내용이다. 

이 소설의 특징이라면 로맨스 서사에서 가장 애용되는 남자 주인공과 서브 남자 주인공의 구도를 알차게 활용해먹지만 그래도 기본 골조가 모험물이란 점과 사랑에 대한 운명론적인 태도다. 엔딩도 당시엔 색다르고 좋았는데 가끔 오픈 엔딩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긴 하더라. 운명론적 태도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 시절에 읽었던 기억으로는 그렇게 취향이 아니었지만 '남의 집 망한 사랑 구경 꿀잼ㅋ'이란 태도를 숙지하게 해준 추억이 있달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남의 집 망한 사랑은 재밌다. 달달한 해피 엔딩도 좋지만 이렇게 매운 맛도 가끔 먹어줘야 한다. 따지면 이 매운맛이 장르소설에선 좀 전통적인 흐름이니 너무 싫어하진 말자. 무엇보다 이런 매운 맛 엔딩도 재밌다.

여하튼 '달의 아이'의 읽어보면 잘 알겠지만 놀라울 정도로 요즘의 로판 공식과 흡사하다. 로판이라는 장르를 대충 웹툰으로만 본다면 황궁 배경으로 모두에게서 사랑 받고 연애도 하는, 하이틴 로맨스 같이 로맨스의 하위 장르로 착각하는 층들이 있는데... 여성주인공의 판타지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기본 골조는 새로운 세계를 배경으로 한 모험물에다가 로맨스 서사를 적극적으로 넣는 편이었다. 

고로 기존의 여성 주인공 판타지 소설의 맥은 끊어진 적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정작 이 장르를 읽지 않는 사람들이나 로맨스판타지 장르가 로맨스의 하위 장르라고 멋대로 착각한다. 물론 웹소설 플랫폼의 구조 때문에 로맨스 독자 중 로판도 읽는 독자층이 생겨났긴 한데 이건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는 평범한 일이다.

또 2세대에서 특징적으로 꼽아야 하는 작품으로 '달의 아이'만이 아니라 '마족의 계약'과 '정령왕의 딸'이 있는데 이 둘을 넘겨선 안 된다. 사실 이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 두 작품 또한 현재 발행되고 있는 로판의 특징을 생각하면 이 작품들도 영향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먼저 김윤경 작가의 '마족의 계약'부터 얘기해볼까 한다.

내용면에서 '마족의 계약'은 당시엔 센세이션했다. 먼저 여성주인공이 아니더라도 판타지 소설의 1세대부터 쭈욱 내려오다보면 아무리 기독교적 메타포로 범벅되어있어도 의외로 악마나 마족을 주인공으로 설정하는 고딕 계열이 적다. 전통 고딕이 아니라 나름 한국식으로 경량화한 고딕을 말하는 거다. 세기말 분위기와 함께한 장르소설의 탄생이라지만 어쨌든 밀레니엄이고 당시 시대 분위기 자체가 위악을 찬양하는 기조 같은 게 없었다. 

그런 고로 왜 여성향에서 마족 설정의 작품이 나왔고, 또 이런 주인공으로 히트쳤는지는 아주 중요하다. 중요하긴 하지만 사실 이유는 별 거 없다. 여자애들은 착해야 된다는 사회적 압력이 동년배인 남자애들에게보다 훨씬 강했으니까 그렇지 뭐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1990년대 중반쯤이었나 '된장녀'란 단어가 유행했는데 분수에 넘게 사치하는 여자를 비꼰다 뭐 어쩐다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여성혐오 발언이었다. 이런 말이 유행하던 시대를 상상해보자, 젊은 친구들. 그 시절에 고딴 말을 하고 다녀도 오함마로 뚝배기 깨고 다니지 않은 것만으로 당시의 페미니스트들이 얼마나 선량한 사람들인지 알만하지 않은가. 이게 2000년대로 넘어오면 인셀들의 적극적인 사용으로 여자가 지 맘에 안 들게 굴면 튀어나오는 일종의 자동반사가 되는데 이걸 당연하거나 편하게 여길 여성은 세상에 없을 거다. 하지만 알다시피 여성인식이라는 게 지금보다 더 암담했던 시절이란 말이다. 당시의 여성들이 취한 대응은 자기검열과 자신은 된장녀가 아니라는 부정이었다. 

이런 시절에 누가 된장녀! 라고 하면 말로 명확히 왜 빡치는지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이새끼 이거 X 같은 말 하네' 정도의 생각을 하는 여성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 나 니가 생각하는 착한 여자 아닌데 뭐 어쩌라고?'라는 태도가 소설로 넘어와서 생긴 설정이 바로 요 자칭악역형이다.

원래 사람은 이기적인 생물이고, 개인의 철학에 있어 선악은 어지간히 고찰하지 않는 이상 두루뭉술한 상태로 둔 채로 성장하기 마련이며 무엇보다 사람은 자신을 실제보다 훨씬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들도 그런 편이긴 하지만 사회적 압력 때문에 남성에 비해선 현저히 이런 경향성이 떨어진다. 관련 논문이 차고 넘치니 부연 설명은 체력을 위해 생략한다.

오늘날의 악녀 유행 자체는 이렇게 '마족의 계약'이 첫 출발선을 끊었다. 이런 흐름을 확인할 수 있으나... 솔직히 오늘날 이 코드에 가진 사소한 불만은 많은 작품들 속 주인공들이 자신이 이기적이란 이유로 악역을 자처하나 그런 것치고 진짜 나쁘긴 커녕 제대로 이기적이지조차 않은 게 아쉽다. 물론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소설 속 주인공이 선량한 걸 대중이 선호하기 때문인 건 잘 아는 바이나 좀 제대로 막 가는 타입의 여성주인공도 히트를 못 치는 건 아니다. 미국의 코믹북에서 예를 들자면 탱크걸, 할리퀸 같은 타입들 말이다. 이미 '치트라', '내 동생 건들면 너희는 다 죽은 목숨이다', '여고생, 귀환 신고합니다'처럼 주인공이 약간 돌아있어도 재밌지 않은가. 펜들턴 혁명의 주인공 에드를 넣을까 말까 잠깐 고민했는데 에드는 음... 약간 돌아있다기보단 그냥 사회적 제약을 부수길 거리끼지 않는 망나니라서 제했다. 뭔가 변명 같지만 나쁜 애는 절대 아니다. 

왜 이 부분을 짚었냐면, '마족의 계약'이 마족이라는 설정은 사용했지만 딱히 그래서 마족이나 주인공이 확고한 악인 성향을 확고히 보이냐면 전혀 그렇지 않아서 그렇다. 오히려 일부 악랄한 수를 두는 거 가지고 대단히 악인 취급하면 황당한 게 '마족의 계약'은 동시에 황실 안에서 소설이 진행되는 걸 채택한 작품기도 하기 때문이다. 권력이 장난도 아니고 때로는 과격한 수도 필요한 거지 엄살 부린다 싶어진다.

게다가 주인공인 유리시나가 계약을 하게 된 계기 자체는 설정과 같이 생각해본다면 그저 자아실현의 발로에 불과하다. 이 지점이 바로 여성주인공의 모험물에선 좀 새로운 흐름이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마족의 계약'은 '직업 혹은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에서 시작했다는 말이다. 

이 부분에서 응? 싶을 사람을 위해 설명을 좀 더 붙이자면 모험물에서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게 되는 이유는 1. 자신이 살던 환경이 박살나서 가던지 2. 기존의 생활에 신물이 나서 떠나던지 3. 세계가 망하는 걸 막아야해서 가던지 정도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마족의 계약'의 경우, 2의 번형에 가깝긴 한데 분명히 기존의 생활에 신물이 났다고는 할 수 없다. 유리아나는 보호자가 마왕이라 자신 또한 당당한 마족으로 인정 받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계약을 갈망했으니 말이다. 

자, 잘 생각해보자. 유리아나는 마족이다. 유리아나의 보호자가 마왕이라 유리아나는 이미 강하다. 그리고 나름 똑똑하고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호승심도 있다. 그리고 성년이 된 거랑 좀 비슷한 감각으로 다가오는 첫 해방을 겪으면서 계약을 할 수 있게 된 거고 으레 성년이 된 친구들이 그 전보다 자유롭게 이 사회에 들어와 꿈과 희망에 젖어 취업이나 학업에 매달리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은 대부분이 주먹구구고 불합리로 가득하지만 이걸 온 몸으로 체감하게 되는 게 필연인 것처럼 계약을 통해 유리아나가 세상을 배우긴 한다. 그리고 유리아나는 평범하게 자신의 보호자처럼 멋있는 어른이 되고 싶어하지, 미디어 안에서 잔뜩 미화하는 사랑에 자신의 인생의 모든 걸 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평범한 여성들의 희망을 주인공의 형태로 구체화한 이야기가 그간 잘 없었다. 있긴 있었...는데 이 부분을 너무 파고들면 아동용 서적과 해적판 얘기를 안 할 수 없으니 과감히 건너뛰겠다. 그런 의미에서 '마족의 계약'은 성장물이고 로맨스 서사 함유량이 낮은 여성주인공 판타지의 흐름을 크게 살리고(굳...이 따지면 최초는 아니다) 악인을 자청하는 코드와 황실 코드의 시초기도 하다. 개정판도 나왔는데 분량이 늘은데서 불안감을 느껴 아직 읽지 않았다. 구판 기준으로 얘기할 필요도 있었으니 양해해달라.

인기로 보면 '마족의 계약'이 '달의 아이'보다 더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이런 로맨스 서사 비율이 낮고 모험물 특성이 높은 여성주인공 판타지로 2세대 안에서 송정하 작가의 '카르마의 구슬'도 있는데 발간이 딱 한 달 늦어서 같이 언급이 안 되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수작이다. '마족의 계약'을 재밌게 봤다면 '카르마의 구슬'도 분명 재밌게 볼 거다. 이쪽도 웹소설로 개정되길 기원하고 있다.

그럼 마지막으로 박신애 작가의 '정령왕의 딸' 얘기를 해보자. 작가 이름을 주목해달라. '아린 이야기'를 쓴 그 박신애 작가 맞다.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수영장에서 하다가 물살에 휩쓸려 이세계로 넘어간 주인공 해인은 태어나길 이세계에서 정령과 엘프와 인간의 혼혈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주인공의 어머니가 죽었단 이유로 다른 세계에 내다버렸다. 뭐 이런 개새끼가 있나 싶은 당신, 심지어 이 애비놈은 잘 못한다고 구박도 하고 여자라고 정체화하고 있는 해인을 아들 취급한다. 죽은 아내가 남긴 편지를 보고 데려올 거면 보호자답게 굴기나 하던가 요즘 인식으로는 그냥 그 집구석 나오는 게 주인공 인생에 낫지 않을까 싶어질 거다. 

까놓고 말해서... 자신이 이제껏 살던 세계에서 완전히 다른 낯선 세계로 멋대로 데려온 탓에 이제껏 쌓아왔던 인간관계도 다 끊긴 주인공 해인이 제멋대로 굴다가도 우유부단해지고 왜 이렇게 방어적인가 싶다가도 우울해지는 등의 성격이 널뛰는 모습은 퍽 리얼하다고 생각한다. 여기가 당시에도 호불호를 타긴 했다. 그렇지만 사이비들이 제일 잘 써먹는 것도 딱 이런 방식이지 않던가. 포교할 대상에게 급속도로 친해져서 의존하도록 해놓고 주변인들에게 포교하게 만들어서 인간관계를 박살내놓게만 하면 다신 그 사이비 종교에서 도망치지 못한다. 이 종교 관계마저 정리해버리고 나면 주변에 남는 인간관계가 없으니 외로워서 돌아오게 되니 말이다... 소설에서 해인의 성격이 날뛰는 건 나름의 적응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아직 10대인만큼 이런 성격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17세 학생의 망나니력이 하루이틀이던가.

이 작품의 특징이라면 별다른 목숨의 위기가 없다는 점도 꼽을 수 있다. '마족의 계약'은 주인공에게 나름의 목숨의 위기가 있는데 '정령왕의 딸'은 그런 맥락에선 '아린 이야기'의 특징을 그대로 빼닮았달까 이것도 요즘 일부 로판에서 보이는 경향성의 시초가 박신애 작가기는 하다... 개인적으론 쪼끔 죽이는 게 긴장감을 줘서 좋은데 아쉽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이 소설의 주인공이 자신의 성별을 되찾는다는 점이다. 이 부분이 굉장히 퀴어소설적이라 특히 맘에 들어하는데, 주인공 해인은 한국에서 살던 17년의 세월동안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했기 때문에 이세계로 넘어오게 된 후 애비로부터 아들 취급 받는 걸 싫어한다. 몸은 설정상 중성에 가까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부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여하튼 이런 저런 모험 끝에 용을 도와서 해인은 자신의 몸을 여성으로 성별을 고정한다. 즉, 이 소설의 주제는 '정체성 찾기'다. 

마족의 계약의 주제가 '직업 혹은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면 정령왕의 딸의 주제는 '정체성 찾기'다. 분명 두 소설 모두 완벽하지 않지만 여성주의 소설과 맥을 같이 하며 여성주의를 포함하고 있어도 장르소설이 얼마든지 재밌다는 반증이다. '정령왕의 딸'도 마찬가지로 먼치킨이고 기본적으로 역하렘 구도지만 연애를 안 한다. 끝에 가서 누구랑 연애할 것처럼 굴긴 하지만 서사에 있어 연애 과정이 안 나온다. 이쪽도 개정판이 나왔다.

3세대 얘기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분량상 어림도 없었다. 체력과 기력이 모두 소진해 오늘은 이만 접겠다. 4편에서는 3세대의 얘기를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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