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와 여성주인공의 계보 (2)

판타지와 로맨스는 반목하지 않는다

준비된 체력이 소진되어 급하게 접었던 이전 글에 이어 계보의 설명을 계속하겠다. 세대 분류에 대해서도 적당히 더 얘기할 생각이다. 그리고 피곤해서 일단 끊어버리게 된 바람에 약간 부정확해진 부분에 대해서 추가로 언급할 생각이다.

왜 자꾸 말이 바뀌냐고 뭐라고 할 사람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예를 들자면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 같은 거다. 아무리 개정된 교과서로 배웠어도 대학에서 전공으로 선택해 깊게 들어가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경우가 많은데 어느 정도 선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화시키다보니 생기는 일이다. 진짜로 궁금하면 관련 논문을 찾아보자. 대학교 도서관 홈페이지를 이용한다면 무료로 볼 수 있다. 공짜로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두자. 나중에 피눈물 흘리지 말고.

다시 1세대와 2세대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여성주인공의 계보를 따라가보면 귀여니의 붐 이전에도 여성주인공의 히트작이 존재한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중요한데 순전히 시기만 따진다면 1세대에도 여성주인공은 있다. 바로 '엘야시온 스토리'와 '아린 이야기'인데 이 작품들도 PC통신 연재를 하긴 했다. 단지 이 작품들에 몇가지 문제가 있어서 언급하기 힘든 점이 있다. '엘야시온 스토리'는 1부는 10권으로 어떻게든 완결이 났지만 2부는 작가의 건강 문제로 연중되었고 '아린 이야기'는... 설정 표절작이다.

'아린 이야기'는 임경배 작가의 '카르세아린'의 2차 창작으로 연재를 시작했다가 인기가 붙으니 1차로 바뀌기는 했는데... 아린이라는 이름 자체도 카르세아린에서 따왔고 주인공만이 아니라 조연 캐릭터들 이름도 고대로 따오고 가장 핵심인 주인공이 인간이 아닌 용인 점도 따왔는데(...) 전개의 퀄리티에 있어서 원작에 한참 밀리는 점과 진행된 내용이 워낙 다르다보니 지금보다는 인식이 더 무뎠던 옛날엔 어떻게 저떻게 넘어갔달까... 장르소설 내 설정표절이 만연하게 된 데엔 '드래곤 라자'도 한몫했지만 '아린 이야기'가 계기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그와는 별개로 '아린 이야기'도 나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이 자살했다가 다른 세계에서 환생한다는 설정이 아린 이야기에서 나온 게 최초였는데 이 설정이 다른 환생물로 퍼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환생물 쪽도 주인공의 사인이 예전엔 생각보다 다채로운데 지금은 주로 교통사고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쇼킹했던 건 최정연 작가님의 이르나크의 장(2002.01.31 발행)이었는데 주인공을 아사 시켜버렸다. 한국인이 가상의 캐릭터라지만 사람에게 어떻게 이리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더 짜릿했다. 최정연 작가는 여성작가고 취향이 소나무에다 필명도 은근슬쩍 바꾸시지만 잘 쓰신다. 일단 봐서 손해보지 않는다. '이르나크의 장'은 클리셰를 좋아한다면 절대 후회 안 한다.

어쨌든 여성 주인공이 1세대에서 성공적이지는 못하더라도 나오긴 했으니 2세대에선 여성주인공의 이야기가 편하고 재밌다고 느끼는 여성독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따라서 비교적 흔해졌다. 첨언하면 계보에 기술한 작품들이 여성주인공만의 계보이다 보니 혹시라도 그럼 1세대 여성작가들만이 남성주인공의 모험물을 썼냐는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을 텐데 절대 아니다. 남성주인공 판타지를 쓰는 여성작가는 그때도 지금도 있다. 이분들을 언급하는 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닐 때가 많아서 그렇지. 

대표적인 게 바로 위에서 언급한 최정연 작가님의 '이르나크의 장'이다. 웹소설로도 개정된 거 보면 얼마나 팔렸는지 감이 올 텐데 여성작가님들의 모험물을 계보에 포함시키지 않은 건 아주 단순한 이유다. 그럼 계보 작성이 정말 엄두도 안 나는 일이 되어버린다... 취미를 핑계로 애정을 원동력 삼아 비평하고 있는 사람에게 연구거리를 투척하지 말아달라...... 혼자서는 절대 못 한다. 자료까지 생각하면 비용도 장난 아닐 테고. 괜히 도움 도움 타령하는 거 아니다.

이쯤에서, 귀여니를 언급했으니 그럼 귀여니의 유행과 함께 촉발된 '어린 로맨스 독자층'이 바로 판타지로 유입됐는지를 궁금해할 사람도 있을 텐데... 그건 절대 아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중요하다. 이 두 장르는 기본적으로 각 장르 독자층이 소설에 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잘 섞이지 않는다. 

로맨스 독자층이 판타지를 읽는 건 아주 한정된 조건에서야 가능하다. 읽을 소설이 바닥나버렸는데 그래도 로맨스 소설이 읽고 싶을 때, 로맨스 경향이 진한 판타지 소설은 있을 때 뿐이다. 로맨스 독자층을 세세하게 나누면 그 안에는 분명히 세계관에 대해서 이해하기 귀찮아하는 층이 있다. 종족이 어떻고 마법과 용이 어떻고 할 때마다 그래서 이걸 기억해야하는지 귀찮아한단 소리다. 

이 때문에 로맨스 독자층이 유난히 더 보수적이란 소리가 나오는 거고, 기본적으로 로맨스 독자층은 소설 속에서 그려내는 배경이 어떤지 상상하기 귀찮아하는만큼 시대적 배경이 과거여도 별 상관 않으며 대신 캐릭터의 심리와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중시하기에 모험물에서 오는 다른 서사를 번잡하게 느끼곤 한다. 그래서 현대 배경을 채택한 모험물 성격이 있는 작품이 로맨스로 들어가면 잘 안 팔리는 거다. 게다가 로맨스 독자층 안에는 로맨스 장르를 포르노 기능으로만 사용하는 독자층도 꽤 많다.

대한민국에서의 판타지와 로맨스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이전 글에서 로맨스 장르가 기사도 문학에서부터 시작했다고 짧게 언급을 했는데 전부 기사도 문학에서 유래한 건 또 아니다. 사랑 이야기 자체는 잘 따져보면 인류가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으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나오기 마련이니 말이다.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동물이 인간인만큼 사랑 이야기 자체는 지겨울 정도로 옛날옛적부터 써먹어왔다. 소설의 형태로 정립되기 시작한 게 기사도 문학과 함께 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는 얘기다. 

한국의 경우엔 기사도 문학의 영향력이 있을 리도 없고... 17세기 말 쯤 나온 '춘향전'이 첫 로맨스 소설이라고 보는데 알다시피 이런 저런 탄압이 많아서 발달하기 힘들었다가('상록수'도 야들야들한 로맨스 소설인 척 하지 않았던가) 민주화와 함께 조금 자유로워지고 난 뒤에야 순전히 '즐거움을 위한 장르 소설'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장르 소설로써의 로맨스 장르의 특징은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여성을 위한 포르노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뭐 여성을 위한 포르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기회가 생기면 나중에 한번 얘기해보겠다. 

로맨스 소설이 지금은 주로 포르노로 활용되고 있지만 어쨌든 그 본질을 파고 들면 사랑 이야기인데, 그럼 판타지의 본질은 무엇이냐? 바로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동화가 그 시초다. 어?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진짜다. 또 다시 영미권 소설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해야하는데 어쩔 수 없다. 영미권의 영향을 씨게 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

먼저 톨킨부터 얘기해보자. 전쟁 후 그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해 집필을 시작했지만 그런 톨킨이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은 소설은 '베오울프'다. 톨킨의 소설을 연구하려면 필독서인 지경이다. 그럼 '베오울프'는 언제 쓰여졌느냐? 8~11세기 쯤으로 추정한다. 현존하는 필사본이 10세기 물건이 있긴 한데, 그 줄거리는 켈트족 영웅이 무슨 괴물과 싸우고 용도 잡고 하는 전형적인 영웅 서사시다. 이러한 영웅 서사시는 보통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로 구전되다가 기록으로 남게 되기 때문에 어쨌든 판타지 소설은 그 본질이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란 얘기다.

너무 나간 주장 같은가? 글쎄다. 펄프 픽션이 지금의 판타지 소설의 원류라고 보는 측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펄프 픽션을 싣던 펄프 매거진은 1896년에 나왔잖은가. 장르 소설 자체는 그 이전부터 발달해나갔다.

그림 형제가 1812년에 '그림 동화'를 발표하며 이야기집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공포와 추리 소설의 시조인 에드거 앨런 포(아... 어느 작품이 제일 중요한지 따지면 화약고에 불 붙인 담배 던지는 꼴이니 대충 1840년대라고 생각해달라)가 활동, 루이스 캐럴(필명이다. 본명은 찰스 러윗지 도지슨)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1865년,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주홍색 연구'가 1887년, 라이언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 1900년, 제임스 매슈 베리의 '피터팬'이 1904년에 발표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1914~1918) 전쟁 때문에 프로파간다가 프로파간다 하다가 파멜라 린던 트래버스의 '메리 포핀스'가 1934년에 나오고 존 로날드 로얼 톨킨의 '호빗'이 1937년에 나왔고 좀 나아지나 싶으니 2차 세계대전이 또 터지고(1939~1945) 펄프매거진이 1950년에 사라지며 그 해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가 출간된다. 이 '나니아 연대기'가 또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에 영향을 주지 않았던가. 물론 시기로 따진다면 '나니아 연대기' 다음은 1964년의 어슐라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가 와야한다. 

이렇듯 판타지 소설은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이야기들이 독자층으로 성인을 품으며 발전해나갔다. 특히 현대의 장르 소설에 영향을 많이 준 작품들은 전쟁으로 꿈이나 희망이 거창한 소리가 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도피처였던 측면이 있다. 그래서 현실 도피 자체는 솔직히 그러려니 하게 되는데... 여기서 잠깐 생각해보자. 메리 포핀스와 호빗 쯤부터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가 안 나오고도 히트 친 판타지 소설이 있긴 한가? 주인공이 내내 어린이인 소설을 빼고 말이다.

판타지 자체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모험물에서 분화했고, 모험물에서 로맨스 요소는 흥행을 위해서라면 필수 요소에 가깝다. 물론 없어도 되긴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대중은 러브 스토리를 좋아한다. 더 정확히는 이 캐릭터는 남자고 저 캐릭터는 여자니 둘이 눈 맞아서 사랑한다는 설정상의 사랑 놀음이 아니라 서사로 단단히 엮이고 캐릭터간 상호작용을 하는 사랑을 좋아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 하고 싶어하는 것과 사랑 받고 싶어하는 것 모두 자연스러운 본능인만큼 당연한 얘기다. 

요즘 들어 판타지나 로판의 주인공이 여성이니 러브 스토리로만 가득한 꽃밭 이야기일 거란 편견이 짜증날 지경이고 판타지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사랑에 대해 조금만 묘사하면 BL코인이니 여성팬들을 위한 팬 서비스니 헛소리 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환멸 밖에 안 생기는데 이런 반응 자체가 인셀들의 디비짐이라고 밖엔 못 봐주겠다. 그런데도 요즘은 왜 요모양 요꼬라지가 되었는지는 다음에 얘기하자.

한국의 장르 소설로 돌아와서 판타지에서 1세대와 2세대를 가르는 키워드는 '대리만족'이다.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일전에도 얘기한 적 있는데 사람은 자신의 현실이 불만족스럽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다른 세계로 도피를 꿈꾼다. 이건 전세계 공통이다. 

1세대는 이제 막 장르가 생길 시점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영향이 흐릿한데 2세대는 외환위기로 인한 사회상의 격변을 그대로 맞았고, 뒤로 갈수록 이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평범한 주인공이 이세계에 뿅 떨어졌는데 현대 기준으로는 별 거 아닌 지식이나 기술로 문명의 수준이 낮다보니 떠받들여진다는 시놉시스가 유행하게 되는데... 다들 알다시피 한국의 IMF 외환 위기의 영향이다. 오죽하면 '이고깽'이라는 신조어가 있을 정도였는데 이게 무엇의 준말이냐, '이계로 간 고교생이 깽판친다 or 치는 이야기'다. 이때는 이세계물이라는 말이 없었다. 이런 이계물은 일본이 후발주자지만 오타쿠 문화랑 떨어지기 힘들다 보니, 그리고 ~물로 대충 정리하기 편하다 보니() 반대로 유입된 말이다.

처음 이계물이 나왔을 때는 암만 이세계에서 잘 먹고 잘 살았어도 가족이 그립다거나 하는 이유로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는 주인공이 주류였다. 하지만 이 부분이 서서히 변해 어지간히 성공했다 싶으면 주인공이 고향인 한국이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 결말이 점점 더 늘어난다. 요즘엔 또 그렇게 깔끔하게 가족과 고향을 포기할 수 있냐고 생각하는 독자층이 늘어나다 보니 돌아오는 결말이나 한국과 이세계를 왕래하는 전개도 찾기 힘들진 않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경향을 확인하고 싶다면 사월생 작가의 '악녀를 죽여줘'가 설득력 있는 전개와 결말을 보여서 추천한다. 좀 더 이고깽스러운 게 궁금하다면 마찬가지로 최근작인 고옴돌 작가의 '여고생, 귀환 신고합니다!'도 괜찮다. 아직 완결이 안 나긴 했지만 이고깽의 맥락을 이은 건 확실하다.

또 2세대의 계보 안에서 확인할 수 있듯 남성 작가들도 때로는 여성 주인공을 사용한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 만큼 미소지니가 덜하다고는 죽어도 못 하겠다... 하지만 이게 가능했던 건 당시 일본 문화의 영향이 강했고 그 즈음에 일본에서 '슬레이어즈'란 소설이 히트했기 때문에 비교적 여성 주인공에 대한 거부감이 옅었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다. 

그리고 TS물이라고 해야 하나... 주인공의 원래 몸과는 다른 몸으로 변하거나 빙의하거나 환생하거나 해서 자신의 성정체성이랑 다른 성별의 몸을 얻는 계열도 많다. 요즘엔 이런 주인공 참 보기 힘든데 이런 주인공을 채택한 소설이 더 늘면 좋겠다. 소수성을 가진 주인공은 중요하다. 교실 속의 아이들이 자살하지 않게 해주니까 말이다. PC 어쩌고 하면서 헛소리 하는 인셀들도 있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양한 종류의 캐릭터를 만들어 자연스럽게 소설에 녹여내는 건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물론 당사자성을 가지지 못한 작가가 캐릭터에 대한 연구가 모자라 편견을 확대 재생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가의 실력을 제일 잘 보여주기도 한다.

1세대와 2세대 배경의 이야기는 이쯤하고, 다음 글에서는 2세대의 대표작과 로맨스 판타지가 2세대의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지, 지면이 남는다면 3세대에 대해서 설명해보겠다. 모쪼록 체력과 기력과 제보가 따르길 바란다.

사족 1. 뭔가 빼먹었는데 싶어보니 어스시 시리즈가 빠져서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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