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샤오윈 希 笑韵

Vision of Gideon

아, 아버지. 당신이 말씀하셨던 그대로.

심해 by L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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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Music

Sufjan Stevens - Visions of Gideon


새파란 하늘. 높은 곳을 유영하던 비행기. 아버지는 내게 언제나 그 비행기의 이륙음이 그립다고 했었다. 그들이 머리 위를 날아갈 때면 자신도 함께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들었다고. 하면 아버지, 진정 성채가 무너졌을 때의 기분은 어떠셨습니까.

그래서 당신은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해 그리도 곤두박질쳤느냐고.


보잘 것 없는 가정사였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자마자 해외로 도망쳤고 아버지 홀로 구룡 구석에 자리한 식당에서 일하며 핏덩이에 불과했던 나를 키워내셨다. 옛 청춘 때는 직접 배를 몰아 먼 바다를 헤치고 다녔다던데. 고작해야 농구공만한 갓난쟁이를 데리고 바다를 나가기엔 어려웠겠지. 내게 기억이란 게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의 아버지는 이미 뭍으로 나와 갓 잡아올린 생선 살 바르는 일을 하고 계셨다. 퉁, 퉁 울리던 칼과 도마 소리. 생선 장수의 외침, 시끄러운 시장 바닥. 언제나 젖어있던 회색 콘크리트 바닥에선 언제나 비린내가 풍겼다. 그렇게 질긴 바다내음과 부딪혀 부서졌던 파도의 울음소리는 언제나 기억 속 깊이, 심장 소리처럼 남았고.

“샤오윈. 내 잘생기고 예쁜 아들.”

아버지는 궃은 손으로 어렸던 내 뺨을 쓰다듬어줄 때면 나는 무엇이 그리 힘든지 모르고 세상이 제 것인 양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 아버지도 크게 웃으며 하늘 높이 들어 비행기란 걸 태워주곤 하셨다. 구룡성채가 무너지기 전까지 우리 머리 위로, 그렇게 큰 날개를 가진 새가 날아갔었다고. 옛 이야기를 조곤거리던 아버지는 언제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굳은살 가득한 손을 맞잡고서 그를 올려 봤을 적에 아버지, 당신은 아주 곧고 거대해 보였더란다.

하지만 인생이란 것이 굴곡으로 이루어진 만큼, 곧 닥쳐올 불행은 고작해야 홀아비란 점 하나로 퉁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성채가 무너지고서 구룡시 동쪽, 허름한 아파트 구석으로 내몰린 아버지는 생선 낚는 법과 바르는 법 외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어떤 일자리도 구할 수 없었고 매일같이 내쫓기는 처지. 그는 마치 물고기가 물 바깥에서 살 수 없듯이 바다에서 멀어질수록 질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떠돌다가 드디어 취직한 곳은 공장이었다. 어린 아들을 두고 몇 시간 내리 일해야 했던 게 아쉬웠을 테지만 그만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살 방도를 얻었으니 아버지는 질기게 이어진 삶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세 끼 반찬을 준비해 두고, 다녀오면 제 앞가림 못하는 아이를 씻겨주기도 하면서. 힘들지만 조금씩 남들과 비슷한 생활을 갖춰나가던 무렵. 우리의 불행은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왜 나한테..., 내게만 이런 일이...!”

아버지는 울었다. 울고 또 울었다. 청춘 다 바쳐 사랑했던 아내가 도망갔을 때도, 평생 살아온 바다에서 멀어져야만 했던 때도 울지 않았던 그가 끝내 울고 말았다. 끊어진 손가락과 치료비로 나가버린 목돈. 그는 겨우 지켜냈던 소시민의 삶에서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더, 더 멀어질 곳이 남은 걸까. 다섯 살배기에 불과했던 어린아이는 더 이상 비켜날 수도 없는 작은 쪽방에서 그의 아버지를 지켜봤다. 아버지는 하염없이 울다가 시체처럼 일어나 바깥으로 나섰다. 그렇게 복도에서나 날 법한 역한 냄새가 담배라는 것도 처음 알았고, 술이란 게 유리병에 담겨있단 것도 처음 알았지. 유일한 어른의 등이 작아 보일수록 아이는 무엇이 미운 지 모르고 하염없이 모든 걸 미워했다.

당신을 그리 만든 모든 것에 미움을 얹었다. 작디 작은 손으로 제 아비를 위로해줄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오기는 할까.

“…….”

어느새 아버지는 아들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그리 사랑했던 아들인데, 정말 사랑했는지 모를 만큼. 먼저 터덜터덜 걸어가는 아비의 뒤를 쫓겠다고 몇 폭 안 되는 다리로 쫄래쫄래 따라오다 넘어져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가을이 되면 무채색 세상에 한 떨기 색 비춘 은행잎이 그리도 예뻐 보였던가. 우수수 떨어진 이파리 중 가장 예쁘고 고운 것을 품에 안아 선물할 적에도 아비는 술병만 들이킬 뿐이었다. 그렇게 세상의 어떤 색도 그를 되돌릴 수 없음을 차츰 깨닫던 시기. 아이도, 어른도 지쳐가는 시기였다. 어린 샤오윈, 어렸던 날의 나. 무엇이 나쁜지 몰라 제 눈에 예쁜 것만 좋은 줄 알았던 아이. 미련하고 미련해서, 수없이 외면 당했는데도 알량한 관심 한 점 받고 싶어했던….

열 살이 되던 해, 오색의 무지개조차 더는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다녀… 올게요.”

아버지의 외면이 의도란 것을 알았던, 그때였나보다. 더는 그의 옆에 머물지 않기로 했던 것은. 일찍 일어나 할 일도 없었던 아이는 아버지와 한 공간에 머문다는 사실조차 견디기 어려워했다. 그래서 첫 여행을 시작했더란다. 처음으로 먼저 바깥을 내딛어보고, 홀로 새파란 하늘을 마주했었지. 광활한 세상은 지금껏 아파트라는 어항 속에 가둬졌던 아이를 바닷소리로 이끌어냈다.

하여 작은 아이는 그리도 궁금해 했던, 아버지가 몹시도 그리워했던 바닷가로 향했다. 저멀리 뱃고동이 울리고 간간이 풍겨오는 비린 내음을 깃발 삼아 첫 여행을 떠난다. 지금까진 직접 다가갈 용기가 없었지만, 이제는 그런 용기가 필요치 않은 시점이었다. 다만 제 아비가 얼마나 자유롭던 아가미를 가졌었는지, 어떤 세상을 누비며 색바랜 기억을 추억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새벽 바람은 특유의 시큰한 내음을 지녔고 서서히 지나치는 사람들의 비린내가 짙어져간다. 그렇게 좁은 길목에 이른 새벽 볕이 들 무렵.

처음 본 바다는 드넓고 새까맣게, 그리고 고요하게 몰아쳐서. 마치 세상의 끝을 목도한 느낌이었다. 자연의 신비로움보단 두려움에 가까워 보였지. 정녕 아버지는 저런 바다를 사랑했던 걸까. 날 대신하여 사랑했던 건 저런 차가움이었을까. 바닷바람에 닻처럼 걸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 ‘너도 그 광경을 봤다면 평생 잊지 못할 거다.’ 그래, 잊지 못할 테다. 젖은 부둣가에 서서 처음으로 바라본 바다를, 결코 그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겠노라고 직감했던 그날을. 나는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으니. 괴물의 밑머리 처럼 출렁이는 파도와 하나 되지 못해 부서지는 포말의 울음은 얼마나 서럽던가. 그들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 멍하니 바라보다가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했을 때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홀로 돌아가던 길, 발목을 잡아끌었던 파도 소리.

그리하여 나는 공포와 경이, 질투로써 첫 번째 바다를 기억한다.

아, 아버지. 당신이 말씀하셨던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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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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