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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로제] 계약관계 - 上

로판AU / 공미포 5,067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레스티아 국가의 북부지역인 에데니스의 하늘은 평소와 다르게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먹구름이 가득 내려앉은 하늘과 나뭇잎이 다 떨어진 척박한 풍경이 겨울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왠지 눈이 내릴 것 같은데….’

사내는 무의식적으로 입김을 허공에다 뿜었고 겨울바람에 흩어지는 입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을 파고드는 추위를 느끼고는 고개를 올려 겨울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금 있으면 곧 눈이 내릴 것 같은 겨울 하늘은 회색빛이 가득했다.

사내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깊은 사색에 잠기기 시작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만큼 깊은 눈빛으로 하늘을 계속 응시하더니 짧은 한숨과 함께 코트를 여미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인님, 이제 들어가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 그게 좋겠네.”

“더 추워지기 전에 얼른 들어가시죠.”

건물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한 것은 다름 아닌 이 저택의 집사이자 정령이었다. 집사는 자기 주인에게 건물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장했고 주인이라고 불리던 그 사내는 앞장서며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사의 역할을 하던 그 정령 역시 사내를 따라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는 집은 깔끔한 이 층 건물의 저택이었다. 용도에 의해 만들어진 방 몇 개와 마법 관련 서적으로 빼곡한 서재, 주방 등 필요한 것들만 있는 실용적인 구조가 가까웠다. 사내가 부리는 정령들은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차원으로 이동하는 습성이 있어 정령들을 위한 휴식 공간은 별도로 만들지 않았다.

“그럼,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사내의 곁을 지키던 정령은 정중하게 자기 주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온몸에 마력을 감싸안은 채 차원 이동을 통해 사라졌다. 사내는 자신을 보필하던 정령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멍하니 응시하고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다들 휴식을 취하러 간 모양이군.’

소리가 사그라든 저택을 창문으로 내려보다가 시큰하게 아려오는 통증이 올라오는 곳에 손을 얹었다. 가장 최근, 그러니까 사흘 전의 일이었다. 결계 마법을 보수하기 위해 잠시 결계를 풀어놓은 사이 저택에 침입한 자객에게 칼을 맞아 죽을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도 계약한 정령들의 도움으로 자객을 제압한 뒤 의원을 부를 수 있었고 급소를 피한 덕에 치료는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또 상처가 벌어졌나.’

상태를 보기 위해 거울이 있는 옷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옷방에는 다양한 옷들이 걸려있었고 격식을 차릴 때 입을 옷들과 평상시에 입을 옷들, 편안한 옷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 거울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빛의 달빛이 부서진다는 표현에 가까운 백색의 은발에 바다를 그대로 옮겨 담은 듯한 파란 눈동자, 그리고 긴 속눈썹 아래로 미묘하게 드려진 그림자가 진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상처가 아물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셔츠를 잠시 벗었다. 상처를 꿰맨 곳이 완벽하게 아물진 않았지만 그래도 상태는 아주 좋아졌음을 확인하고는 약을 바르고 다시 붕대를 덧대었다.

옷방을 나온 사내는 온기가 꺼진 집안을 한참 동안 멍하니 둘러보았다. 짙은 밤이 내려앉았고 슬슬 잠이 들어야 하는 것이 맞았으나 사내는 곧장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이 분명한데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끙끙거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사내는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숙하게 저택 주변의 방어 결계를 강화한 후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그곳에 간 건 내 실수였나.’

불이 꺼진 방안의 천장을 바라보며 디오는 과거에 잠겼다. 본래 그는 레스티아 대륙, 그중에서도 남부지역인 엘더론 출신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평민 출신이었던 사내는 엘더론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로웬하트라는 집안에 남작이라는 신분이 붙은 것도 엘더론 아카데미 출신과 더불어 수많은 공들이 쌓여 생긴 결과물이었다.

평소에도 책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고 한번 봤던 것은 쉽게 잊지 않을 만큼 머리가 영특했다. 마법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한다는 엘더론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이미 고대언어는 물론 정령들의 언어조차 독학으로 터득했을 만큼 머리가 비상한 편이었다. 엘더론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평상시에도 아카데미 스카우트가 사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고 기회가 닿아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학구열을 불태우며 마법사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들의 대부분은 귀족 집안의 자제거나 왕실의 직계 후손이었던 탓에 시기와 미움, 질투는 물론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멸시까지 한 몸에 받으며 힘든 아카데미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런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밟고 올라설 만큼 디오의 실력과 재능은 탁월했고 10년, 혹은 그 이상을 해야 할 아카데미 생활을 단 7년 만에 최초로 졸업한 사례기도 했다.

처음부터 북부지방으로 거슬러 온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마법 지식을 이용해 대륙의 전쟁을 막아섰고 그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얻었기 때문에 본래라면 공작이라는 지위를 얻는 것이 마땅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남작이라는 직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디오는 귀족들의 직위에 영 관심이 없는 편이 맞았지만.

‘그래. 지난번에 찾아온 그 백작도 그쪽 아카데미 출신이었지….’

사내는 한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한 달 전에 찾아온 백작은 디오와 같은 시기에 입학한 동기였고 이 백작 역시 디오에게 시기와 질투를 더한 것은 물론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얕잡아보던 그런 귀족 자제 중 하나였다. 디오는 눈앞의 백작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몰라봤지만 돈 없는 평민 주제에 감히 아카데미를 들어왔다며 자신을 멸시하던 그 사람 중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남부지역에서 지내던 당시 자신의 저택으로 백작이 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 용품을 팔고 싶은데 기존의 마법 용품들은 너무 흔하다는 이유로 디오에게 거래와 관련하여 제안을 걸려고 온 것이었다. 제시한 내용 외에도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었다. 연구가 진전이 없다는 말부터 늘어놓더니 자신의 마법 연구가 영 별로라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본론으로 바로 넘어가 계약서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계약서를 읽던 사내는 싸늘하게 경멸하는 눈빛을 보내며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갈기갈기 찢었다. 디오에게 지나치다고 느낄 만큼 불리한 조건들뿐이었기 때문에 디오는 싸늘한 시선으로 가차 없이 백작을 저택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지금부터 약 일주일 전, 자신을, 목숨을 위협하던 조직의 움직임을 눈치챈 디오는 자신의 거처에 감히 발을 들일 수 없게 결계를 쳐두었으나 전투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누가 봐도 백작이 보낸 조직이었다. 싸움은 디오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큰 부상과 함께 자신의 거처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보았던 용병들을 구할 때가 왔군.’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괜히 시큰거리고 따갑게 느껴졌다. 자칫하면 칼날이 허리를 관통할 뻔했으나 운이 좋아 베인 정도로 그쳤으니 망정이었다. 약이 제대로 들지 않았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약을 하나 더 먹기로 했다. 그제야 밀려오는 졸음을 안고 사내는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날에는 그 목록 중에서 괜찮은 용병을 반드시 뽑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이곳이 맞는데….’

디오는 매의 형상을 한 어둠의 정령을 통해 그 용병이 살고 있다는 마을에 도착했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허름한 복장을 하고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망토를 착용하고 가면을 썼다. 북부 중에서도 가장 끝자락 접전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말이 좋아서 마을이었지, 사실상 무법지대에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제대로 산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마을이었다. 아주 오래전엔 마을에 이름도 존재했었으나 이제는 이름조차 사라진 마을로 현대에 들어와서는 이 마을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꽤 드물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버려진 건물들뿐이었고 어쩌면 저 안에 노숙자라든지 이곳을 장악하는 조직들의 거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간단한 마법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를 감추는 것에 성공했다. 준비는 완벽하다. 본격적으로 자신이 눈여겨본 그 용병을 찾아가기로 했다.

마을 입구에서 느꼈던 황폐함과 적막감이 마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 강하게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어디서 습격을 받아도 이상해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걸으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던 그때였다. 한 골목에서 누군가의 찢어질 듯한 비명과 눈물이 섞인 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저쪽인듯하군.’

사내는 서둘러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사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정리된 이후였다. 흩뿌려진 피들 위로 수많은 사람이 쓰러졌고 누가 봐도 수많은 사람을 제압했을 것 같은 사람이 디오 눈에에 들어왔다.

헝클어진 분홍빛의 긴 머리카락과 길게 내려온 앞머리를 넘기면 그 안에 흉터가 가득한 얼굴은 누가 봐도 날카롭게 보였다. 기본적인 체격도 날렵하고 강함이 느껴지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영역임을 확실하게 하는 표범을 연상시키는 듯했다.

그 사람은 자기 얼굴에 묻은 피를 닦고는 싸늘하게 누워있는 시체들을 뒤적거렸다. 뭔가를 찾은 듯 시체의 품에서 두둑하게 생긴 돈주머니를 들고 어디론가 가더니 잔뜩 겁에 질린 채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넘겨주었다.

“조심해. 그리고 여길 벗어나.”

어린아이들은 눈물을 훔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골목 밖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위험에 처한 아이들을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직접 싸움에 나선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디오는 자신에게 걸어둔 마법을 해제하고 상대방에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신이 로제인가요?”

아무것도 없는 허공과 같은 공간에서 나오면 분명 놀랄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덤덤하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디오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을 누군가가 지켜본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디오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디오는 침착하게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실력이 출중한 용병이 있다고 해서 당신을 찾기 위해서 왔습니다.”

“저 말고도 실력 좋은 사람들이 많을 텐데요?”

“에데니스 용병단에 이름을 올리셨더군요. 그중에서….”

“당신 같은 귀족이 굳이 이쪽을 찾아올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요.”

로제는 사내의 말을 끊고 경계심을 드러냈다. 남부지역인 엘더론에도 사설 용병단이 있듯 북부의 에데니스 역시 사설 용병단이 존재했다. 대부분의 용병단들은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전투를 치르거나 혹은 괴수를 잡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며 구성원의 대부분은 돈이 필요한 평민이거나 혹은 빈민가 출신들이었다.

엘더론의 사설 용병단과 달리 북부의 에데니스 사설 용병단은 같은 사설 용병단 중에서도 특히 빈민가 출신이 많기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는 헐값으로 사람을 부리거나 매몰차게 대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에데니스의 용병들은 특히 귀족들을 싫어했으며 귀족들의 요청보다는 평민 측의 요청으로 주로 움직이곤 했다.

“저는 귀족이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그쪽만큼 귀족의 태가 나는 사람도 없을 텐데요.”

아무리 허름한 옷을 입고 있다고 한들 분위기마저 숨기기는 쉽지 않은 듯했다. 자신의 지위가 있기 때문에 최대한 숨기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던 탓에 디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과 눈앞의 로제라는 사람 외에는 특별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디오는 손을 뻗어 로제와 자신을 포함 숨겨줄 결계를 만들었다.

“이게 뭐죠?”

“저희의 존재를 숨겨주는 결계입니다. 외부에서는 저희의 목소리도, 존재도 의식하지 못할 거고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로제는 디오를 향해 직설적으로 답했고 디오는 그에 답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코트 품 안에 넣어둔 서류를 꺼내 로제에게 건넸다. 로제는 받아 든 양피지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총 세 장 정도 되는 양피지에는 사설 용병 고용과 관련된 글이 적혀있었고 주업무는 경호였다.

로제는 눈앞의 새하얀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의 표정은 변화 없이 한결같은 분위기였다. 굳이 먼 길을 돌아서 자신을 고용하는 이유는 딱히 없었다. 오히려 인상만 보았을 때는 남부지역인 엘더론을 통해 사설 용병을 고용하는 게 더 나았을 거다. 그럼에도 디오의 표정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듯 확고한 답을 보여주었다.

“제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아뇨.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요.”

로제는 자신이 궁금함으로 삼았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으나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물어볼 예정이었다. 제 눈앞에 나타난 백발의 남자는 한눈에 봐도 위태로워 보이는 분위기에 귀족처럼 곱상하게 생겼으면서 그동안 많은 일들을 겪은 사람처럼 보였다. 로제는 양피지를 주머니에 접어 넣고는 디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이다음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제가 머무르고 있는 저택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디오는 손을 뻗어 공간이동 마법진을 펼쳤다. 로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디오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용병이 있음에도 자신을 고른 이유라던지, 여러 가지 궁금증이 많았지만, 로제는 그 생각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푸른색이 빛나는 마법진에서 마력이 두 사람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디오는 로제에게 저택으로 가면 자세하게 말하겠다는 말을 끝내고는 마력에 몸을 맡겼다. 그 이후의 생활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로제는 그 이후에 모든 것을 생각하자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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