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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 멸망한 세계의 끝에서

공미포 : 3,472

언젠가부터 사람이 어색했다. 사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가까이 다가오면 멀리 밀어내곤 했다. 그 행동에 큰 이유는 없었으나 자기 능력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오는 책을 꺼내 들었다. 뜬금없이 웬 책이냐고 묻는다면 폐허가 된 건물을 조사하던 도중 그나마 멀쩡하게 보존된 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가방 안에 넣어두고 잊고 있었는데 마침 여유가 생겨 가방에서 꺼내보았다.

사내는 한 페이지씩 천천히 넘기며 활자를 눈으로 읽어갔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지만, 전쟁하기 전, 이름 모를 무명의 작가가 쓴 소설이었다. 그러나 디오는 책을 덮고는 다시 가방에 책을 집어넣었다.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책에 적힌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서 수군대는 목소리가 너무 커서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소리를 따라서 뒤를 돌아보면 영가들의 목소리였다.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니 별 시답잖은 그들만의 대화와 농담을 섞으며 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영양가 없는 대화 내용임을 깨닫고는 다시 책을 보며 집중하는 듯했지만,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해 책을 접고 다시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그나저나 벌써 잠들었구나.’

디오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먼저 잠들어 있는 로제를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별다른 생각 없이 곤히 잠든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문득 자신이 왜 계속 쳐다보고 있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집중하지 못하는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까지 흘러온 관계에 대한 생각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첫 만남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우연한 기회로 같은 이능력자라는 이유로 만났고 목적이 같아 계속 길을 함께했다. 

물론 처음부터 만남 자체가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본인의 감정과 생각을 숨기는 자신과 다르게 로제는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처음부터 잘 맞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됐었는데, 완벽한 오답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누군가를 계속 생각하게 되고 잠시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하는 감정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그 감정을 정의하지 못해 밤낮으로 계속 고민에 잠기곤 했었다. 여태껏 살아오며 자신은 언제나 혼자였고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홀로서기를 연습했다. 단 한 순간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오만한 판단이었다.

디오는 자신의 감정에 계속 고민하고 사색에 잠기기를 반복했다. 그 행동이 너무 티가 났던 걸까, 최근에는 로제가 자신과 함께하는 게 불편하냐는 소리를 한번 듣기도 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행동하나가 그 앞에 가면 어색해지고 뻣뻣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든 이성을 통제하는 것도 쉽지 않아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끼는 것도 갈수록 심해져 갔다.

‘왜 이런 거로 계속 고민하는 거지.’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괴감에 빠져 죽는 기분이란 게 이런 걸까. 디오는 벽에 기대어 창문 너머로 비치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편하게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가도 조금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고 있었다. 가끔 옅은 미소로 웃던 그 모습도 같이 떠올라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디오 본인도 알고 있었다. 이미 자신은 친구의 감정을 넘어선 또 다른 감정이 있었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쉽게 말할 수가 없었다. 괜히 어색해지는 것보다는 현재의 관계 그대로 가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아려왔다.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복잡한 생각 때문에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어도 이상하리만큼 복잡해진 감정들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언제까지 깨어있을 생각은 없었다. 디오는 눈을 감았다. 선잠이라도 들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면 더 괜찮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꿈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마자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두 사람은 폐허가 된 도시를 헤쳐 나가며 길을 걸어갔다. 철근이 다 드러날 만큼 무너진 건물과 그 아래 콘크리트 잔해들만이 가득했다. 이곳에도 사람은 없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고 두 사람은 생존자가 있는 곳을 향해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비어버린 건물과 잔해들을 살폈다. 편의점이었던 건물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쓸만한 물건을 챙겨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 오랜 시간을 거쳐 이곳에 도착했지만 텅 비어 버린 도시라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발을 동동 굴리다가 결국엔 안전해 보이는 빈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디오는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그의 모습을 멍하니 옆에서 지켜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걸까. 수많은 의문과 궁금증이 스쳐 지나갔지만, 디오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디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죠?”

그의 시선을 느낀 로제가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디오는 망하니 로제를 바라보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멸망해 버린 세계에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언젠가 자신의 마음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공존하고 있어 머리가 복잡해져 왔다.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디오는 잠깐 침묵을 유지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로제에게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

“….”

디오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했지만, 로제의 단호함이 보이는 말들 앞에서는 차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자신의 표정을 숨기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둘러대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며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채 대답을 던졌다.

“그냥 고민이 있어서요.”

“그게 뭔데요?”

“지금 말하기는 좀 그렇고, 나중에 말할게요.”

로제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늘 그랬듯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레 상황을 넘긴 듯했다. 넘겼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디오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더 생겼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으니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괜히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지, 말을 잘못 꺼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여러 생각이 교차하였다. 디오는 하던 일에 계속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생존자를 찾으며 필요한 물자를 수급하는 데 힘을 썼다. 어느새 해가 기울어져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수색 과정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그게 좋겠네. 서두르죠.”

디오는 로제 옆에서 길을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존자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멸망해 버린 세상에서 빈 건물 한쪽에 짐을 풀고 저녁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다행히도 하루를 버틸 만큼의 식량은 충분했다. 늘 똑같이 모닥불을 피우며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닥불이 타들어 갈 때마다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내는 차라리 자각하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며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자신의 속마음 같아 괜히 한숨을 푹하고 내쉬었다. 로제는 아무 말 없이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아니면 언제 말할 수 있을까.’

아마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말할 기회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입술이 떨어질 것 같다가도 다시 입술이 굳게 닫히는 것 같다. 속이 저 모닥불처럼 타들어 가는 기분에 디오는 고개를 푹 숙여 조용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고민이 많아 보이는데….”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보며 멍하니 한숨을 내쉬는 디오를 바라보며 로제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로제의 말을 들은 디오는 고개를 돌려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어쩌면 시답잖은 고민일 수도 있죠.”

“말하기 힘든 겁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

디오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자신의 감정을 미리 말할 수 있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그 점이 굉장히 아쉬웠다. 그런데도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세상을 같이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지금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차분하게 언어를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진지하게 들어주세요.”

사내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기 위해 차분하게 숨을 들이쉬고는 다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해야 할까 많이 망설였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나중에도 말할 기회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은 전쟁으로 인해 멸망했지만, 디오는 먼 미래에 찾아올 새로운 세상,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날 희망을 눈앞에 있는 사람, 로제와 함께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물론 조금 더 괜찮은 세상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겠지만.

“로제 씨, 당신을 좋아했어요. 말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말하는 순간에도 밀려드는 감정에 눈가에 눈물이 아른거렸다. 형편없는 고백 때문일까, 아니면 그 말을 하는 순간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다는 복잡한 감정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벼운 정적 속에서 디오는 눈앞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로제의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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