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음사헌, 다시 만난 세계 1
수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서 희미한 빛을 □ 쫓아가
솔음은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에 소원권을 썼다. 다른 필요에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긴 고민 없이 그렇게 했다. 그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그게 그의 역할인 것이 아님을 이곳에서 배워서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 그는 부재했으리라 여겼던 세계가 건재하였기에 평범한 생활을 만끽했다. 정해진 시간과 있어야 할 장소에 돌아왔다는 실감은 여운도 길지 않았다. 본디 뿌리내렸던 세계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로서 평화로웠다. 아침에 출근해 밤에 퇴근했으며 월세와 공과금을 내고 주말엔 밀린 집안일을 해치운달지 친구나 가족과 만나고 연락했다. 여전히 근무시간이나 출퇴근길에 어렵잖게 괴담을 읽었고 직접 경험해본 바로 살에 와 닿는 글자들에 조금 더 무서웠지만 그 이상으로 즐거웠다. 그리고, 가끔이긴 하지만 여전히, 괴담을 썼다.
그런대로 그의 복귀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므로 성공적이었다. 그는 더이상 막대한 포인트와 인센티브를 성취할 수 없었지만 매사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고, 눈에 띄는 업적으로 선망과 시기를 한몸에 받을 수 없었지만 그 누구의 인정 없이도 제 뜻대로 나아갈 수 있다. 솔음은 무언가 잃었다는 상실감도 얻었다는 만족감도 없었다. 그저 만에 하나, 다시 백일몽 주식회사에 입사하는 그날로 돌아가겠느냔 선택지를 준다면 쉬이 선택하겠지만 그는 또 소원권을 원래 세계로 돌아오는 데 쓸 거란 막연한 예감이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딱히 백일몽 주식회사에서 현장탐사 팀으로 근무하고 괴이한 생명체와 조우하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어울렸던 기억을 반추하는 일이 여즉 없었다. 그것은 정말로 한낱 백일몽으로 취급했을지 모르겠으나 그리워한다는 표현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가 없어도 그들은 잘 지낼 것이라고, 그들도 저를 그렇게 생각하리라. 생각해보면 사회초년생인 그의 첫 퇴사인 셈이었고 잔류하는 동료보다 제 의사로 퇴사하는 이가 더 당당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이제 안다.
그리하여 다시 또 직장과 업무만 달라진 솔음은 같은 출근 시간에 맞춰 지하철에 올랐다. 복작복작한 서울 지하철은 시간에 맞춰 똑같이 정차하고 출발함에도 불구하고 늘상 만석 또 만석이라 서서 가는 일이 부지기수지만, 급이 다른 만석도 경험해봤기에 이만으로 언감생심이다. 그러니 이 와중에도 한가롭게 어제 보던 어둠탐사기록을 마저 볼까 할 수 있었던 것인데 오늘은 좀 그럴 수가 없었다.
저거, 그 코스프레라는 거지?
평일에도 그런 이벤트가 있나 봐.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던 건 솔음의 의식도 그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절반 이상 찬 지하철에서 잘도 좌석을 차지한 저편에 출근길과 등굣길의 지루한 이들의 시선을 뺏겼다. 그도 그럴게 이젠 대단한 메이저 콘텐츠가 되어서 일반인들도 심심찮게 지하철역이나 온라인 광고에서 볼 수 있을 '종말예언:어둠탐사기록'이었고 거기에 나오는 캐릭터와 흡사한 사람이 눈앞에 있었으니 말이다. 순수하지만 잔혹한 일반인들의 흥미롭다는 관심 한가운데 혼란스러운 듯 어찌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그를 솔음은 일단 못 본 척했다. 그가 지금 생각하는 게 맞다면, 아직 잠이 덜 깼거나 구경하는 남 일처럼 어떤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거다. 아니면 솔음이 아는 그가 여기 있을 리 없다. 정확히는 있어선 안 되었다. 백사헌이 왜 여기 있겠나. 어떻게 여기 있을 수 있지. 말이 되냐고. 고작 어순 틀린 거로 이해 안 될 리 없는 한국어처럼 그는 거기 있었다.
솔음의 소원권 수령이 확정되는 날부터 실질적인 수령일까지 의외일 만큼 백사헌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소원권은 이 회사의 가장 큰 수혜이자 사원들 모두가 목숨을 거는 사유였으므로 지정된 수령자를 위협하거나 해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수령 직전까지 발표하지 않았지만, 암암리 퍼지는 소문을 막을 수 없는 노릇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우리는 사택의 공간을 분리한 채 공유했고 간혹 회사 업무 관련 얘기를 하거나 이인 분부터 주문 가능한 배달음식을 나눴다. 혹시 정말로 소식을 못 들은 건가 싶을 만큼 낌새가 없어서 같이 산 세월이 있기도 하니 언질이라도 해줄까 했지만 배달 음식을 나누며 (이제 당신이 없으니) 이것도 어렵겠네,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기실 그가 없는 단톡방이 이미 만들어져 그의 소원이 무엇일지 아는 사람은 다 알았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 백사헌이 들었다면 당장 항공편이든 기차표든 끊어주겠다며 대신 소원권을 내놓으라 생떼를 부릴 줄 알았는데 무슨 오기를 부리는지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예상과 다르다고 솔음이 지적할 거리도 아닌 그의 반응에 오히려 입씨름할 게 없어지니 편했다. 아니 편했나? 조금 심심하지 않았나. 솔음은 그때 그 기분을 구태여 단정 짓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더이상 그가 돌아올 곳이 아니었다.
김솔음이 있어야 할 곳. 경쾌한 지하철 안내음이 그것을 가리키자 솔음은 망설임 없이 일어났다. 이럴 때는 다행이게도 지하철에 사람이 많아 백사헌은 그를 인지 못한 듯싶다. 정차한 역에 내림과 동시에 출구를 향해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만약 그가 저를 알아봤다면 어땠을까 상상했지만 뭐하나 변변찮게 어울리는 것 없이 그쳤다. 오늘도 루팡은커녕 근무 시간 내리 빠듯하게 일하지 않으면 야근 확정인 제 앞가림이 먼저인 게 당연하다.
솔음이 몸담고 있는 부서의 수장이 밀어붙이는 프로젝트 하나에 동료들은 위아래 할 거 없이 제 몸 갈아 바삐 하루를 보내는 게 예사였다. 이것만 끝내면 남은 연차를 몰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겨우 인상을 폈지만 기실 올해 안에 소진하지 않으면 소멸할 것을 두고 회사가 노동부에 눈치를 보며 쥐어짜 낸 퍼포먼스에 불과하단 걸 모르진 않았다. 그렇지만 노비가 별수 있겠어, 라고 자학적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월급을 받는 신세들끼리는 싫든 좋든 오랜 시간 같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즉슨 같은 팀 사람들에게서 솔음은 오늘 무슨 일이 있느냔 질문만 사람 수대로 들었다는 의미다. 솔음 님, 어디 아파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솔음 님, 거기 오타 났어요. 앗 솔음 님, 그거 그쪽 아니고 여기에요. 솔음 님, 솔음 님, 솔음 님. 지금 회사에 입사한 이래 이렇게 이목을 끌어본 것도 처음인데다 두 팔 두 다리 멀쩡하고 어제까지만 해도 평소 같았던 사람이었으니 필경 가까운 지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주변의 걱정은 덤이었다. 내일 주말이니까 푹 쉬어요. 그리 따스한 현 직장 동료들을 보며 일이 힘든 건 참아도 사람이 힘든 건 못 참는다는 직장인 구전을 떠올리며 솔음은 그 힘들다는 사람 때문에 결국 못 본 척하려던 첫 단추를 다시 맞추기로 했다.
출발지와 종착지가 없을 순환 열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솔음은 마음 한편으로 백사헌이 그곳에 없길 바라고 있었다. 그를 본 건 착각이었고 어쩌면 사람들 말처럼 대기업에서 진행하는 행사 마케팅의 일환이었다고도. 그가 여기 있을 리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단 건 자신이 산 증인이다. 그렇게 들어오는 열차를 보내면서 다시 기다릴 때 자신이 무슨 연고로 잠깐 숨을 참았는지 마뜩잖은 심정이 들어 작게 심호흡한다. 비로소 그가 타야 할 열차가 들어왔다. 적당한 안내 음성에 맞춰 탑승한 솔음은 빈자리가 없음에도 약속된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퇴근 시간에 맞춰 다시금 밀도 높아진 사람들은 의외로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은 남겨두었기도 했지만 일직선으로 향하는 솔음을 보고서 비켜준 배려였을 수도 있어서 이번엔 정말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솔음은 어느새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이며 고개 숙인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이곳에 있었을까. 괴담에서 길을 잃은 회사원의 좌절감을 수없이 봐왔지만 백사헌이 그러는 건 생소했다. 왜냐하면, 그가 그렇게 되기 전에 이미 자신이 해결책을 제시했으니까. 과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백사헌이 아직 이곳에 있었다. 어찌 보면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엔 모르는 척 안 하네?
당신 구두만 봐도 알 수 있다며 열 시간도 전의 일을 가지고 사헌이 비꼬자 솔음은 피식 웃음이 났다. 궁지에 몰린 얼굴로 잘도 도발적인 말을 내뱉으니 기가 찰 수밖에. 그에게 이번 역에서 내리자니까 순순히 일어났다. 꽤 오랜 시간 앉아있었는지 비척이며 일어나는 모양이다. 앞장섰지만 그래도 저를 따라오고 있다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제멋대로 굴지 않고 저를 기다린 후 따라 내렸다는 사실이 솔음은 여간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대충 이름만 아는 역에서 내려 역사까지 나오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괴담의 시작이 지하철 안이었다는 형편 좋은 변명에 솔음은 여태 눌러본 적이 손에 꼽았던 개찰구 옆 비상문의 호출 벨을 눌렀다. 이 친구가 나오는 길에 교통카드를 잃어버렸다는 식의 거짓말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쓰인 버튼이 눌려 나오는 목소리치곤 퍽 귀찮은 기색이더라. 그리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시 침묵하는 공사 직원이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어쨌든 나가서 교통비를 지불한다니까 순순히 문이 열렸다. 그리곤 다음에는 그러지 말라는 충고에 번듯한 정장 차림의 두 남정네는 어쩔 수 없이 목례하기까지, 솔음은 초과된 일상에 작게 한숨을 쉬자 눈치 빠른 사헌이 움찔 떨었다. 그래 너 때문이다, 짜샤. 그렇게 찔러주지 않아도 알아서 찔려 해서 솔음은 됐다며 다시 앞서 나갔다. 일에 우선이라는 게 있었다. 특히 한국인에겐 그랬다.
사헌이 어디로 가느냐 물을 수도 없을 짧은 시간 내에 솔음은 그를 근처 해장국집으로 이끌었다. 못해도 서로 식성 정도는 알만해서 알아서 주문하니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사헌을 기다리는 게 되었다. 다른 세계라지만 아무튼 한국어를 쓰는 국가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점은 동일했고 더하여 아까 나온 역사도 사헌이 아예 생소하지만 않을 역이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을 역 근처의, 어디서나 흔한 해장국집에 들어오기까지 예민한 그가 짜증이나 성을 내지 않은 것은 그런 까닭이었겠다. 사헌이 자리를 비운 일이 분 남짓한 사이였고 이대로 백사헌이 돌아오지 않아도 솔음은 상관없었으나 금세 돌아왔다. 딱 맞춰 날라진 해장국을 먹는 내내 아무 말이 없는 그는 북적이는 가게 안을 살폈다가 장식용처럼 틀어놓은 텔레비전을 일별하곤 했다. 교통카드는 무슨 지갑도 없을 백사헌을 대신해 해장국값과 해장국집에서 몇 걸음 떨어진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선뜻 대령한 솔음은 작금의 상황에 대해 흔한 괴담처럼 설명했다. 솔음의 원래 세계와 그의 원래 세계는 괴담과 어둠 하나만 놓고서 그 외 큰 차이가 없었다. 평행세계. 평소 다녔을 회사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똑같은 음료를 마시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솔음은 큰 기대를 하지 않고서 진실만 말하기로 했다.
그럼 여긴 다른 세계라는 거예요?
과연 뜨끈하고 적당히 먹을 게 들어가니 한껏 유순해진 백사헌에게 카페인까지 부어주자 솔음의 말을 곧이곧대로 경청했다.
당신은 다른 세계 사람이고요?
당신?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꼬집으니까 잘못됨을 느꼈는지 화들짝 몸을 떤다. 하여간에 사이코패스지만 사회화시키는 보람이 있는 놈이라니까. 솔음은 웃음이 날 뻔한 걸 커피에 꽂힌 빨대를 무는 것으로 모면한다.
아니, 그렇지만 퇴사하셨잖아요…?
낮고 조심스레 골라선지 솔음은 그의 말이 그다지 모순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회사에서건 퇴사한 사람에게 직함을 붙이는 이유가 없다. 아마 소원권 수령일에 함께 자리했던 사헌은 솔음이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소원을 빈 것이 퇴사를 겸한 거라 여겼던 것 같고 이는 모두가 그렇게 납득했을 터다.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 확신한 솔음도 마찬가지였다만, 아무것도 정리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퇴사 의사를 밝힌 적은 없는데.
백일몽 주식회사에서 무단결근은 징계사유가 될 수 있어도 특정한 상황에서 출퇴근 체크를 하지 않는다고 해고하는 조항은 없었다. 그러면 몇 날 며칠 괴담에 있어야 할 현장탐사팀들은 여럿 잘려나갔겠지. 회사 규정을 파악하고 있는 솔음이 영영 못 만날 사람 같이 굴었던 것에 사헌은 더 토달지만 않았지 불만 있는 표정으로 빨대를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뻗대봤자 그의 손해라는 결론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얘는 왜 혼자 여기 있는 거지? 본인 취급은 아랑곳하지 않고 솔음이 되물었다.
그나저나 백사헌 씨는 왜 혼자 여기 있어요?
설마. 솔음은 설마 하는 가정에 소리를 입혔다.
설마 소원권을 써서 날 찾아왔다거나.
다행히 백사헌은 질색팔색 했다. 자신은 연구팀에 부탁했을 뿐이란다. 미확인 어둠이 있는데 꿈결 수집에 꽤 기대가 크다고. 말 그대로 그에게 이곳은 괴담이요, 탐사 중이라는 뜻으로 솔음이 말한 평행세계와 아예 동떨어진 건 아니었다. 이어서 삼인 일조일 텐데 왜 혼자서 거기 있었느냐 물으니 눈을 피한다. 그래, 혼자 고과를 독차지하려고 수를 썼다가 망했다는 전개였다.
다시 말하지만, 어떻게 들어왔건 여긴 어둠이나 괴담이 아니야.
현장탐사에 있어 목숨의 위협이 되는 것이 없단 걸 분명히 해두어야 했다. 사투를 벌일 괴담 주민도 없으며 오염을 걱정할 일도 없단 것 또한. 솔음은 백사헌의 구두를 신경 썼다. 홀로 탐사에 나섰다면 그의 전용무기도 경계해야 했다. 카페 옆자리에서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커플과 공부를 하는 학생, 잡담하는 친구와 동료 사이를 둘러싼 이 평범한 세계에서 괴이는 오히려 백사헌이지 않은가. 주변 걱정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놈에게 안전을 강조하는 건 비단 그를 위한 일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요, 주임님.
솔음의 노력이 무색하게 사헌은 본격적으로 목소릴 낮췄다. 주변을 살피는 경계가 전혀 늦춰지지 않는 것에 솔음이 뭐라 하든 설득은 불가능한 건가 성가시지만 백사헌 한정 사이코패스 대비안인 플랜비로 넘어가려던 찰나다.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더라구요.
하나같이 처음보는 사람들이 대놓고 뭐라 하진 않았던들 똑똑히 그를 가리켜 '백사헌'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무척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과연, 그에게 좀더 심도 깊고 전문적인 설명이 필요한 때였다. 솔음은 이곳에서 쓰이는 괴담에 대해 막힘없이 설명했다. 종말예언, 괴담 탐사 기록, 백일몽 주식회사 외 두 조직, 네임드. 대기업과 수차례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며 백사헌이란 캐릭터는 나름 유명인사라는 것까지.
그러니까, 우리가 탐사하는 괴담이 여기선 소설인데 제가 소설 주인공이라서 사람들이 알아보는 거라구요?
그래요.
솔음은 결단코 네가 주인공까진 아니라고 했지만, 사헌이 캐릭터 설정의 차이를 이해하기엔 무척 난해한 듯하여 관뒀다. 너무 방대한 지식을 집어넣었을까, 하긴 종말예언:괴담 탐사 기록은 무궁무진한 세계관과 설정에 처음 듣는다면 혼란스러울 만하다. 아마 백사헌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인도 그의 오타쿠력이 느껴지는 설명을 들었다면 혼란스러웠을 테지만 그럴 일은 없으므로 솔음은 사헌의 멘탈이 약한 것만 탓한다. 흔들리는 외눈에 카페인을 괜히 먹였나 짧게 후회한 솔음은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느덧 오후 아홉 시가 넘은 시간이다.
그렇게 믿기 힘들겠으면 내일 같이 가보든가.
어딜요?
콜라보 행사요.
사실 솔음은 그만 집에 가고 싶어서 그런 권유를 했다. 제 딴에 어둠이라고 들어왔다는 백사헌이지만 솔음이 보기엔 이 무해한 세계에 딱히 클리어라고 할 것도 없었고 괴담의 조건이 적합하지 않다는 빌미로 강제 귀환 처리될 가능성이 높았다. 수많은 괴담을 보면서 그런 게시물도 있었나 싶지만 아마 폐기되고도 남았을 망작이었으므로 그의 기억에 없을 뿐이라 낙관적으로 넘긴다.
괴담에 관해서 솔음의 예측은 대체로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 그를 근처 비즈니스호텔에 하루 숙박 비용까지 대주는 게 마지막 의리라 여겼으며 내일 체크아웃 시간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허투루 했다. 그가 걱정한다면 내일 홀연히 사라졌을 투숙객에 호텔 측에서 실종이나 사고로 공연히 일을 크게 만들진 않을까 하는 정도였고, 오히려 사헌과 헤어진 후 도착한 시간이 자정에 가깝거나 치우지 않은 자기 집이 더 심란했다.
주말임에도 평소 출근 시간과 다름없이 일어난 솔음은 간단히 아침을 차려 먹은 후 어제 못한 집안일을 했다. 택배 온 생필품을 정리했고 나가는 길에 버릴 요량으로 재활용품을 모았다. 마치 투디 콜라보레이션을 위해 백화점에 가는 것이 아닌 백화점에 갔다가 우연찮게 알만한 대기업이 주최한 콜라보레이션 행사에 가는 느낌을 살려 외출 준비를 마친 그는 어제 백사헌을 밀어 넣은 호텔에 들를까 말까 고민했다. 지금 갔다가 없어진 사람을 두고 붙잡히면 어떡하지. 오늘 할 일은 꽤 예전부터 예정한 행사장 방문밖에 없었지만 그건 뭘 하든 시간이 부족했다. 그때 모르는 서울 번호로 온 전화를 받아선 안 되었는데. 업무 관련 전화는 주말에도 종종 있어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주임님 너무 늦으시는 거 아니에요?
쨍한 목소리가 핀잔보다 더하게 자신이 얼마나 곤란한 처지인지 부디 헤아려 달라는 협잡질 같아 보이스 피싱이 의심되었으나, 어찌 부정한들 호텔 로비에 있는 전화로 연락한 백사헌이었더랬다.
어제와 똑같은 구겨진 정장의 백사헌은 조식까지 살뜰히 챙겼다고 해서 곧장 두 사람은 지하철로 이동했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거에 자연스러웠던 사헌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옆에서 나란히 이동하는 솔음은 적잖이 긴장한 상태였다. 얘가 왜 아직도 여기에 있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사헌을 비껴 나 그에게 정통으로 맞닥뜨렸다. 혹시 몰라 어젯밤 솔음은 그에게 꿈결 수집기를 물었다. 당연지사 텅텅 비어있었고 눈으로 확인하여 확신을 가진 근거였다. 이 세계는 백사헌이 온 세계와 달리 어둠이 기생하기엔 비좁다. 그러므로 어둠이라는 잘못된 경로로 불시착한 그는 발단부터 오류로서 수정될 거라 여겼다. 망해서 재미없는 괴담들이 흔히 그랬듯이. 그러나 그는 수정되지도 않았고 착실하게 전개를 밟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솔음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헌은 어제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 보였다. 마치 VR 게임이라도 하는 듯 현실세계에 신기해했다. 네임드다운 적응력이라 생각되었지만 한편으로 이 자식은 진짜 남의 기분 따윈 안중에도 없구나 싶다. 그래도 거는 말에는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는 그에게 사헌은 나지막이 덧붙였다.
갚을게요.
뭐?
어제 저녁이랑 교통비랑 호텔비랑 아무튼 주임님이 쓰신 돈 다 갚을 테니까요.
어떻게 갚을 건지 트집 잡을 만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래 봤자 솔음은 학생 때라면 모를까 어엿하게 직장도 있는 상태에서 집도 없이 외간 곳에 뚝 떨어진 안면 있을 이방인에게 그리 야박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역시 감사 인사 같은 건 모르는 태도에 솔음은 사양하지 않고 그러라 대꾸했다. 자신은 처음 저쪽 세계로 갔을 때 사택이며 인센티브며 시작부터 그가 괴담에만 집중하라는 듯이 완벽했다. 문득 지금 백사헌에게는 자기 자신이 그 완벽한 준비 그 자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 건 그때였다. 솔음은 그를 세우고 다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나 이미 팝업 스토어가 진행 중인 백화점 지척의 지하철역에 도착해버렸다.
지하철에 내려 팝업스토어로 가면 갈수록 사람들의 시선이 백사헌에게로 향했다. 백사헌 코스프레인가봐, 라는 내용으로 대동단결하는 온갖 관심이 그에게 꽂히자 과연 사이코패스도 긴장하더라. 이 분위기에선 뭘 얘기해도 진지해질 수 없어서 솔음은 말 거는 건 고사하고 일단 그와 조금 떨어져 걸, 으려 했으나 사헌이 자꾸만 저를 버리지 말라며 볼 수 없을 간절함으로 붙어서 어쩔 수 없이 함께했다. 솔직히 한 번 뿌리치려고 했는데, 주임님이 데려왔잖아요! 라는 책망은 가소로웠으나 쪽팔려서 울려고까지 하길래 참아주었다. 그래도 이건 약과였고, 최종은 팝업 스토어에 도착해서 그곳 행사장 도우미로 있는 직원에게, 어머 정말 저희 행사를 기대하셨나 봐요! 하고 기념사진까지 찍은 게 정점이다.
그렇게 겨우 입장한 팝업 스토어에서 사헌은 말 그대로 구경했다. 솔음이 처음 이런 행사장에 왔을 때에 비해 흥분이 덜 했던 건 아무래도 실제로 경험해봤기 때문인데, 사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감흥으로 보였다. 전용무기를 굿즈로 해서 판다거나, 짐승 탈을 키링으로 파는 부분에선 장난감이 되어버린 것이라든지 제 별명이 독사라는 거에 웃기도 했다. 몇 수십 권으로 분철 된 어둠탐사기록 판매대에서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일이 여기선 한낱 상상 속 이야기라는 것에 분개하거나 배신감을 느낄 줄 알았는데 그저 훑어보는 게 다였다. 만약 좀더 개인적인 내용이 있었다면 불쾌했을지 모르지만 이곳에서의 백사헌은 그저 피도 눈물도 없는 캐릭터란 설명 이상이 없었다. 좀처럼 본인과 연관 지을 수 없다며, 말했잖은가, 또한 그는 남의 일이라면 관심이란 게 없었다.
소문이긴 한데 다른 부서에서 우리가 탐사한 걸 소재로 써서 팔기도 한대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데 솔음이 이걸 치트키로 써서 괴담을 클리어했다는 결론은 이르지 못한 듯싶다. 하긴 이렇게 많은데 이걸 어떻게 다 외워서 일일이 활용한다고 상상하겠는가. 여기엔 메모리얼 그립톡의 역할이 유별했지만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그런 건 그가 그의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데 하등 도움되지 않는다. 사헌은 초점을 명확히 두었다.
그러니까 여기선 온라인 커뮤니티 같은 곳에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괴담을 쓰는데 그 세계관이 제가 사는 세계와 동일하다는 거잖아요?
점점 많아지는 팝업 스토어 이용자들에 밀려 백화점 옥상 정원으로 밀려난 두 사람은 이 세계가 괴담이 있으나 괴담이지 않으며, 저쪽과는 관련이 있으나 아예 무관하다는 링크를 재확인했다. 여기서 쓴 이야기가 저기서는 괴담이 되어 꿈결을 수집하고 그리하여 소원권이 된다는 것. 알 수 없는 수요와 공급의 관계를 정의하는 데 사헌은 솔음이 사준 백설산 사과 주스를 마시며 잠시 골몰했다.
그리고 주임님은 소원권을 써서 이곳에 왔고.
솔음이 조금씩 풀어낸 단서로 그가 무슨 퍼즐을 맞추고 있는지는 결국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서야 알 수 있었다. 두 세계를 가정하고 그에게 있어 가교 역할은 김솔음이었다. 부정할 수 없다. 저 클리어 방법을 알아낸 거 같아요. 느닷없지만 백사헌은 지가 불리하거나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불쌍한 척을 했다. 지금처럼. 아까도 그러더니만, 그건 상대에 따라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그 자신도 솔음도 알았거늘 무슨 습관에선지 포기를 몰랐다. 하나밖에 없는 처연한 눈길을 보내며 그가 작게 몸을 움츠러들었다. 솔음이 막을 새도 없을 공격 태세다.
주임님이 이 괴담의 끝을 써주세요.
문제는 솔음도 이 해답이 맞다고 생각해버렸다는 것이다. 이곳의 이야기는 저곳에서 현실이 된다. 이 세계에서 괴담을 쓰는 김솔음은 백사헌에게 소원권이란 의미와 진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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