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음사헌, 하얀 밤을 날아서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들이 마치 □□□의 놀이 같아


   솔음은 심호흡하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소리 없이 뱉었다. 이번엔 있는 힘껏 팔 안쪽을 꼬집어 봤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으며 손목의 문신도 없었고 그의 긴장에 공명이라도 하는 양 대본을 읽는 착한 친구 또한 없음이다. 꿈이었다. 솔음은 동시에 이것이 자각몽이라 스스로 분명히 했다. 괴담이 실제가 되는 세계로 넘어온 지 반 년도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루하루 목숨에 위협 없이 그저 사는 게 전부였을 원래 현실에서 이십여 년 적응된 그의 몸으로 돌변한 거나 마찬가지인 환경에 내동댕이 처지며 스트레스를 받아 이런 꿈까지 꾸게 하였다고,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꿈속의 그는 무너진 건물에 갇혀 있다. 전기도 끊겨 화재로 번지는 위험은 넘겼지만 사위가 너무 어두웠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수의 사람 목소리에만 기대고 있는데 그들 역시나 온전치 못하고 너무 크거나, 작거나, 떨거나, 울었다. 초조함을 진정하는 게 우선이었을 솔음은 부러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귀를 기울였고 어서 어둠에 눈이 익길 바랄 따름이다. 휴대폰도 없이 이 상황과 조건을 부합하여 기억해내고자 단서 하나가 이다지 간절했다. 그리 많은 괴담을 읽었음에도 이런 꿈은, 현재에 이르러 아무런 아이템도 없이 괴담과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누가, 아무나 좋으니까 휴대폰 좀 켜봐요.

   그게… 주머니에 넣어놨는데 잃어버렸어요.

   전 아까 넘어지면서 고장 났나 봐요…….

   사람들 목소리에 이어 솔음도 잃어버렸다는 말을 편승했다. 기실 그가 자신에 대해 아는 건 어둠에 투입된 것처럼 출근할 때 입는 정장 차림이라는 정도다. 이윽고 한국 사람이 여덟 명이나 있는데 휴대폰이 더 없는 게 말이 되느냐 힐난하듯 높아지는 목소리가 다시금 분위기를 불온하게 만들자 마지못한 듯이 누군가 휴대폰을 켰다. 솔음의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다.

   배터리 얼마 없습니다.

   익숙한 목소리는 가장 늦게 입을 열었지만 금세 불빛을 거둘 것에는 타협이 없었다. 백사헌. 하마터면 이름을 부를 뻔했던 걸 솔음은 마른침을 삼키는 것으로 모면한다. 그가 지긋이 탐색하는 시선은 아는 것과 달랐다. 무례할 만큼 고압적이면서, 그 이상으로 미물을 보는 양 감정이 없다. 그건 솔음의 기억보다 상상했던 모습에 가까웠다. 눈 하나쯤 아무것도 아닌 양 버릴 수 있었고 남의 것은 그보다 더 쉽다고, 제 발밑에서 살려달라 비는 사람 따위 발로 차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제 갈 길을 가는 피도 눈물도 없을 캐릭터. 사헌의 시선은 비로소 솔음에게 향했다. 아무것도 들키지 않았을 순진한 눈매가 되레 이 절망적인 작금에 무엇도 서슴지 않을 듯 보였다.

   솔음은 주변을 살폈다.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그를 포함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 지적되었던 것처럼 과연 여덟 명이었다. 이곳으로 이동하기 전 사람들은 만났던 것일까.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아니면 후에? 자문이 깊어지기 전에 솔음은 겪지도 않았던 경험이 마치 스스로 납득하라는 듯이 떠올랐다. 그는 이곳에서 백사헌 과장의 팀이 먼저 진행한 어둠을 지원하는 격으로 보충된 역할을 맡았다.





   그를 포함한 이 기묘한 무리는 지방 산속의 한 때 요양 시설이었던 폐건물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요양 시설이기 전에는 어느 사이비 종교의 수련관으로 쓰였다고 하더라. 무명찬란교의 심볼이 그려진 건물 외벽을 알아보고서 솔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보이는 팔십 대 노인이 이따금 노숙자나 비행 청소년들의 아지트로 쓰이는지 확인하는 수준으로 관리되는 게 전부일 이런 건물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사람들은 언뜻 변명처럼 돌아가며 제 사연을 읊었다. 대피 중에 팔이 부러진 이십 대 남성은 트래킹이 취미라고 했고 갑작스러운 기상 악재에 이곳에 왔다고 한다. 보기엔 모르겠지만 메고 있는 숄더백에 임산부 배지를 단 젊은 여성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를 키워준 조부모가 이 시설에서 돌아가셨는데 임신한 지금 조금이라도 걷기 성할 때 와보고 싶었단다. 가족 단위도 있었다. 중학생쯤 되는 남자아이를 양옆에서 지키듯 중년의 부모가 주고받듯 입을 맞추어 그들은 이 폐쇄된 시설에 볼일이 있었다고만 할 뿐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백사헌은 그의 팀원들과 솔음을 가리켜 MT를 왔다가 앞서 청년과 마찬가지로 거푸 쌓이는 눈을 피하려고 들어왔다는 설정이다.



   건물에 들어선 사람들은 젖은 몸과 찬 바람에 추스르고 싶어서 라든가 전기도 전파도 없는 스산한 공간에서 집단 내 안정감을 느끼고 싶은 건 당연했기에 초면이라도 자연스레 같이 움직였다. 과거 사람이 있었던 흔적과 관리인의 설명에 따라 불을 피울 도구와 장소, 운이 좋으면 깨끗한 물과 수건 등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여겼다. 괴담에 도입부라는 것을 아는 백사헌과 자신에게는 기꺼운 동행이었으므로, 이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날 선 느낌은 아니었다.



   발단은 폭설로 건물이 무너지면서부터다. 꽤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애초에 요양 시설이랍시고 이런 산속에 누가 왜 지었는지 가늠할 수 없을 것이었기에 모래성과 다름없었다. 밀도 높은 눈송이를 더는 견디지 못한 구조물은 금이 가기 무섭게 폭포처럼 천장이 무너졌다. 윗층에서 떨어지는 자재들로 압사하는 게 두려워 빛 한 점 없어진 거에 경악할 틈도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출입구를 떠올렸고 사람들이 달리는 소리에만 의지해 앞으로 나아갔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한두 명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한 명이 콘크리트 더미에 깔렸다는 걸 솔음이 직감한 건 옆에서 뛰던 사헌이 혀를 찼기 때문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머릿수는 아홉 명이 되었다.

   누가 비명횡사했는지도 모르고서 정신없이 뛰던 사람들이 멈춘 건 출입구에 다다라서가 아니었다. 그곳마저 무너진 벽에 부딪혀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퇴로 역시 막힌 상태. 여기서 휴대폰 쓰기가 가장 수족과 같을 중학생이 휴대폰 손전등으로 사람들을 비췄고 양복을 입은 사람 하나가 없어졌다는 거에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통화권이 이탈한 걸 알았지만 다들 기도하는 심정으로 자기 휴대폰을 확인했다. 넘어지는 통에 팔도 다치고 휴대폰도 고장 난 청년이나 정신없이 달리며 휴대폰을 잃어버렸다는 중년 부부가 소리를 지르며 구조요청 했지만 예상대로 모든 행위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동시에 조금만 건드려도 폭삭 주저앉을 듯한 5평 남짓의 이곳도 안전치 못하다는 경고처럼 잊히지 않게 단단한 재질들이 부딪히고 쓸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우리 여기 갇힌 거예요?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질문은 이미 대답을 안다며 울먹였다. 이로써 시작되는 괴담이었다. 가물지 않는 강설로 무너지는 오래된 건물과 그곳에 갇힌 사람들. 수많은 괴담이 떠오를 소재로서 브라운이 있었다면 쾌재를 불렀겠다만- 이상할 만큼 솔음은 짚이는 게 없었다. 꿈이라서 그런가. 악몽과 다름없을 전개에 어떻게서든 꿈에서 깨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는데, 단순 휴대폰이 방전되었던 것이라 아쉬움을 삭히자니 한편으론 이것도 괴담이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언제 전화가 될 수 있을지 모르니 손전등 기능으로 휴대폰을 낭비하지 말자고 말한 건 백사헌의 팀원이었다. 체력을 유지하자며 일찌감치 자리에 앉은 그의 제안에 그러면 너무 어두워 무섭지 않겠느냐 머뭇거리는 일반인들에게 다 같이 앉아 양 옆 사람의 손을 잡자고 거듭 제안한 것도 그였다. 미쳐버릴 것 같은 상황에 사람들은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으므로 협조적이었다. 심지어 백사헌조차 조용했다. 아마 상황을 살피는 것이겠지. 그리고 이대로 전원 사망 엔딩의 조짐도 없잖았지만 무엇이라도 하는 게 옳다는 판단에 솔음도 동의했다. 어둠 속에서 손에 손을 잡았다. 어떤 의식의 모양새처럼. 다들 지쳤고 힘들었기에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아 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아득한 침묵이 어둠 속에서 잠식하려던 찰나 결코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묵직한 둔기가 부드러운 살을 찧어 뼈를 부서뜨리는 파열음이. 먼지로 가득 차 매캐한 공간에 비릿한 냄새가 삽시간에 코를 찔렀다.

이게 무슨 소리냐는 질문이 앞다퉈 나오는 중에 다시금 휴대폰 손전등이 켜졌다. 임산부의 것이었고 제 옆에서 일어난 일을 발견하자마자 솔음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벗어 옆으로 던졌다. 노약자가 있어서 반사적으로 할 수 있었던 행동이지 모골이 송연해진 건 마찬가지였다. 그의 옆에는 백사헌의 팀원이 앉아있었다. 그가 죽었다.

   씨발새끼가.

   이 중에 살인자가 있다. 그런 압도적인 공포에 난 욕지거리가 아니었다. 반대편에서 아이와 부인의 손을 잡고 있었던 중년 남자는 시체가 살아생전 가리고 있었던 것을 가리켰다. 그것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틈이었다.

   지 혼자만 살려고 수작을 부렸어.

   노인이 중년 남자의 편을 든 건 틈의 상태를 보고서였다. 한 사람이 포복해 겨우 나갈 수 있는 작고 야트막한 틈은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었으므로 누가 봐도 정말 딱 한 사람만 나갈 수 있을 기회로 보였다. 사람들이 긴장을 풀었을 때 어둠을 틈타 혼자 도망가려 했을 거란 추측이 그의 타살에 한 점 동정마저 남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단숨에 사헌을 주목했던 적도 있었으나 그가 몰랐다며 고개를 가로젓는 정도로 의심을 물렸다. 직장 상사라 해도 좌우간 나갈 기회는 한 명에게 주어지는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믿었다.

   그리고 지금. 열 명의 사람 중 한 명은 운이 없어서, 그리고 한 명은 비겁하다는 각자의 이유였지만 놀랍게도 백일몽 주식회사 직원 둘이 사망했다. 솔음은 이것이 평소 회사에 갖고 있었던 제 원한이 꿈에 반영된 건가 싶었다. 그리고 다시 암전. 누구도 항의할 수 없이 임산부는 자기 휴대폰의 배터리를 아끼고 싶다고 말했다. 살인자가 있고 배신자도 있었고 혼자서만 탈출할 수 있는 탈출구가 언제 무너져 없어질지 모른 채 존재하는 가운데 지옥이 다가오듯 무너지는 저편에서 건물이 침몰하는 울림과 침묵하는 폭설이 교차하며 귀를 메웠다.







   ―그리하여 꿈을 자각한 처음의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온다.

   누가, 아무나 좋으니까 휴대폰 좀 켜봐요.

똑같이 힐난하는 목소리로 사람이 여덟 명이나 있는데 양보나 배려하는 이가 한 명도 없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에 마지못해 사헌이 휴대폰을 켰다.

   배터리 얼마 없습니다.

   익숙한 목소리는 가장 늦게 입을 열었지만 금세 불빛을 거둘 것에는 타협이 없었다. 백사헌. 하마터면 이름을 부를 뻔했던 걸 솔음은 마른침을 삼키는 것으로 모면한다. 그가 지긋이 탐색하는 시선은 아는 것과 달랐다. 무례할 만큼 고압적이면서, 그 이상으로 미물을 보는 양 감정이 없다. 그건 솔음의 기억보다 상상했던 모습에 가까웠다. 눈 하나쯤 아무것도 아닌 양 버릴 수 있었고 남의 것은 그보다 더 쉽다고, 제 발밑에서 살려달라 비는 사람 따위 발로 차 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제 갈 길을 가는 피도 눈물도 없을 캐릭터. 사헌의 시선은 비로소 솔음에게 향했다. 아무것도 들키지 않았을 순진한 눈매가 되레 이 절망적인 작금에 무엇도 서슴지 않을 듯 보였다.

   주임님이 보시기엔 어떠신가요.

   형편 좋은 꿈이 어느 정도 통성명을 마친 여건을 조성했다. 혼잣말과 다름없을 속삭임은 여전히 눈송이에 삼켜져 솔음에게만 들리는 듯한데, 직급이 낮더라도 깍듯이 높임말을 쓰는 모습이 이전에 지하철에서의 순박한 인상과 겹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솔음과 같은 비정상적인 진급이 아니라면 신입사원에서 과장직까지 최소 5~6년은 필요로 할 것이다. 대충 가늠이 되는 연령에 비해 동안인 건 여전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침착하게 유약한 표정을 짓는 게 그다웠고. 키는 비슷하지만 살이 좀더 빠진 것 같다. 이런 일을 하면서 몸 관리는 필수건만, 역으로 어느 때건 상관없이 악에 받쳤을 그가 떠올랐다. 지금처럼 몇 명의 동기와 후임과 상사와 부하가 명을 달리하는 걸 보았을지 헤아릴 수 없다. 상처 하나 없을 가녀린 얼굴을 하고서. 잠시 그를 응시한 솔음은 황망히 고개를 돌렸다. 생생한 꿈에도 눈치는 있었다. 사헌이 그에게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상위 직급자의 기대에 부응할 미련 정도는 떨어줄 수 있었다.

   적어도 이 중에서 한 명은 나가야 살 수 있겠네요.

   나가서 구조요청을 하면 그나마 남은 모두 살 수 있다. 하얀 눈으로 아득할 야산이긴 하지만 산세가 그리 험하진 않았다. 뛰어 내려간다면 바로 인근 마을에 닿을 수 있을 테고 그 전에 전화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지당한 판단에 금이 가듯 사헌은 솔음에게 친근한 척 다가왔던 몸을 뒤로 뺐다. 실망했다는 기색이 역력하단 선 긋기에 솔음은 웃음이 날 뻔한 걸 겨우 속으로 참는다. 점점 그가 아는 백사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원만하게 의견이 모아질 수 있을까요.

   솔음은 사헌이 재차 묻는 뉘앙스가 결코 양보의 형태가 아님을 직감했다. 여기에 노인과 임산부와 미성년자, 부상자까지 있었지만 전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해석하자면, 어떡하면 저들을 제치고 자신이 나갈 수 있을까, 라고 물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점마저 그러하니 억지로라도 다른 우선순위를 언급하고 싶은데 그가 어떻게 반론할지 알만해서 관뒀다.

   여기서 가장 빨리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나 주임님뿐이지요.

   낮고 빠른 중얼거림이 귀에 꽂혔다. 오. 이건 좀 놀랐다. 솔음은 그가 만에 하나일지언정 자신을 포함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지하철에서처럼 다른 가능성을 불구로 만들 우려가 들지 않았던 건, 이젠 백사헌과 같은 소속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만 남았으며, 남은 여섯 명이 무력으로 강탈한 기회를 남 일인 양 불 보듯 할 리 없었다. 어느 목숨이 효율을 이유로 저울질 가능한가. 모두가 살기 위해 폭력이 난무한다면 한다면 그 난리에 지금 이 공간은 무사할 수 있을까. 엎친 데 덮치는 악재를 두고서 사헌이 그런 예상을 못 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처음에서처럼, 백일몽 소속이 과반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솔음은 애도할 새도 없이 불운하고 배신했기에 죽은 이들이 떠올랐다. 천장이 무너져 내려왔기에 발밑은 온전한 순간에 고꾸라진 불운과 등 뒤에 유일한 탈출구를 가진 것을 시체가 되어 밝혀진 배신을. 두 명의 백일몽 주식회사 사원들을.

   백사헌 과장님.

   솔음이 그의 팔을 잡아끌자 사헌은 생각보다 쉬이 제 옆에 붙었다. 이제 남은 백일몽 주식회사 소속이라고는 그와 자신뿐이다. 그래, 이제 와 새삼스럽게 우리가 같은 소속임을 깨달았다. 자신과 백사헌을 묶는 유일한 요소이기도 했으며 놀랍게도 죽은 이들이 같은 회사 사람들이란 것도. 어떤 의제를 가지고 다수결로 편을 가른다면 불리해진 셈이다. 솔음은 다시금 이곳에 모인 이들의 의도를 되짚는다. 노인은 이것이 업이었고 청년은 우연이었으며 산모는 추억을 따라서다. 답하지 않은 일가족에게는 아무도 캐묻지 않았더랬다. 어둠 속에서 모두가 손에 손을 잡았던 것처럼 우리는 마치 서로가 서로를 통제했다는 착각해버린 게 실수였다. 사람에게서 들려선 안 될 굉음이 터지고 다시 불을 비췄을 때 누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는지 솔음은 기억이 생생했다.

   혹시.

   솔음은 자기가 속엣말을 소리 내는지도 몰랐다. 그의 시선은 사헌을 제외한 사람들을 향한 채다.

   여러분은 무명찬란교와 관련이 있으신가요.

   이번엔 모두가 대답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런 찰나에 모든 소음이 죽은 듯이 침묵이 가로질렀다. 이런 공백의 순간을 두고 귀신이 지나간다고 한다던데, 을씨년스럽게도 사헌의 휴대폰 손전등 불빛이 배터리가 부족해 약해졌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섯 쌍의 눈이 아무런 감흥 없을 온도로 솔음을 직시했다. 부정하거나 모르쇠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조차도 하고 싶지 않을 만치 독실하단 의미였다.

   당신들이 무명찬란교인이 아니란 걸 압니다.

   그 또한 이유를 묻지 않음은 필요가 없어서다. 여전히 손에 손을 잡고 동그랗게 앉았던 모양이었지만 그들은 솔음과 사헌을 한쪽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사이비 종교의 이치는 그들이 아니라면 모두가 이단이라 하여, 그들 외에 살아남는 기적 따윈 가당찮을 존재로 전락하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죽는 게 호상이었을지 모르겠다. 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 비수와 같을 적의에 왜 좀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나 아쉽다.

   모든 괴담을 꿰차고 있었을 솔음이 왜 이 괴담은 기억해내지 못했을까. 무대가 무명찬란교의 흔적이 남은 방치된 건물이었으며, 살인자가 있고 배신자도 있었고, 혼자서만 탈출할 수 있는 탈출구가 언제 무너져 없어질지 모른 채 존재하는 완벽한 조건에서. 단순히 꿈이라서 치부하기엔 기이할 만큼 마음에 걸렸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꿈속에서야 가능할 자신만만함까지 갖춘 정답이 있어서다. 솔음은 이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괴담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던 이야기였다. 그와 백사헌이 대화한 것처럼 의견을 모아 누군가 이곳을 탈출해 구조를 요청한다면 모두가 살 수 있었다. 사람의 도덕성을 무시하는 이야기입니다. 솔음은 핍진성을 지적했다. 오로지 사람의 무도함만으로 괴담이 될 수 있습니까. 익명으로 떠들어대는 공간이었지만 사람의 신의가 과반수를 넘으므로 그토록 공허하게 무너졌다. 범람하는 콘텐츠에 가치가 밀려 사장된 이야기. 그러니 그가 기억해내지 못할 수밖에.

   절망으로 치닫는 최악의 상황에서 양심을 저버린 인간의 말로에 무엇이 있으랴. 상대를 저와 똑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려 정상성을 취하려 하는 것은 또 어떻고. 문득 이곳에 있는 연령도 성별도 입장도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여덟 명의 사람 중 솔음은 스스로 가장 결백하다 주장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무명찬란교인든 아니든 다들 똑같은 생각이지 않겠습니까.

   솔음이 운을 띄우는 것에 눈치 빠른 사헌이 탄식했다. 그래 봤자 말을 멈추지 않을 것까지 포함한 탄식이었다.

   거수로 나갈 사람을 정합시다.

   그는 항상 명쾌한 해결책을 내놓는 듯했지만 남이 보기엔 늘상 도박에 가깝고 패인이 짙었다. 면밀하게 말하자면 제 이득이 없이 상대에게 칼자루를 쥐여주는 선심처럼 보인다. 목숨이 온전치 못한 마당에서 펼쳐진 곡예에 예상했던 불만은 머리도 들지 못했다. 이 자리의 모두가 목숨이 쫓기는 중이었기에 그럴 시간도 이외 뾰족한 혜안도 없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솔음이 말문을 틔우자 각자의 사정이 적나라에 드러난다. 비논리적인 주장에서부터 생명의 무게까지, 하나의 무명찬란교라 한들 원하는 것은 제각기였고 호소는 영탄으로 이어졌다. 말했잖은가, 도덕이 없는 이야기는 괴담은커녕 사장되고 마는 거라고. 제 손으로 망가뜨린 이야기를 되뇌며 솔음은 사헌을 보았다. 부하를 둘이나 잃었음을 강조할 줄 알았던 그는 뜻밖에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이야기가 종막에 이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꿈에 지나지 않거늘, 차라리 그답게 죽일 듯이 솔음을 원망했으면 좋으련만.

기실 백사헌은 이 비도덕적 이야기에 가장 잘 어울릴 캐릭터이긴 했으나, 아까웠다. 여기서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솔음은 그제서야 처음 이 이야기를 부정했을 때 다소 감정이 실렸던 것을 시인하는 바이다.

   김 주임님이 나가시죠.

   뱀의 혀를 연상케 하는 사헌의 입꼬리에 솔음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아수라장 사이로 늘씬하게 미끄러진 말새가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유를 묻는 눈초리보다 일동이 몸을 떨었던 건 사헌이 순한 인두겁 아래 숨겨두었던 총구가 이내 통보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의 의견에 찬성할 거라 여긴 하필 그 순간, 솔음은 그를 설득하고 싶었다. 내가 아니라 네가 나가라고, 피도 눈물도 없이 저를 버리고 네 살길을 택하라고. 왜 안 하려던 짓을 하려고 그래. 숱한 말이 차마 소리가 되지 못한 것마저 자존심이었다. 자각몽을 인지한 여유로움도 아니었고 사헌에게 어떤 빚을 지는 부담감도 아닌, 이와중에, 마치 스스로 백사헌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기어이 솔음의 미적거림을 채근하듯 사헌의 휴대폰에서 불빛이 꺼졌다. 다시 암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 …요.

​   이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할 솔음은 그말을 귓등으로 하고 건물의 유일한 출구에 몸을 던졌다. 현실과 와닿지 않았던 모든 게 생생히 착각되었다. 만약 이것이 꿈이 아니라면 그를 살려야 하지 않겠나. 완전히 폐쇄된 저기서 그를 꺼내야 했다. 따져 묻고 질책하고 하다하다  오랜만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며 놀려먹는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무릎만치 쌓인 눈과 계속해 내리는 눈을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는 그의 발은 여즉 추위를 몰랐다. 휴대폰이 없는 그는 저 멀리서 보이는 불빛을 따라 뛰었다. 그리고 인기척을 느꼈다는 희망이 든 순간.



   "도대체 무슨 꿈을 꾸길래."

   꿈에선 나지 않은 가픈 숨을 몰아쉬자 솔음을 현실로 건져낸 사헌이 난감을 표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사택. 일요일날 저녁에 가까운 시간. 사헌이 보기에 그는 낮잠을 자면서 오만상을 쓴 게 다다. 기껏 마주한 얼굴에 기가 막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너 말이야……."

   길게 숨을 내뱉으며 말을 고르는 동안에도 대꾸는커녕 숨죽여 긴장하는 그에게 솔음은 이제 그냥 어이가 없어 웃겼다. 이곳 또한 저에게 현실이 아닌데 안도할 겨를도 있고 남 챙길 생각도 들고 만다. 그가 아는 것이 전부인 세계.

   "사이비 조심해라."

   그러니 했던 말이나 또 할 수밖에 별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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