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신고
Survived.
"이봐, 그래서 내가 직접 얼굴보고 부탁하잖아."
"또 같은 소리하게 만드네. 릭, 이렇게 나랑 얼굴보고 대화 할 수 있는 사람도 몇 없거든?"
"그러니까 얼굴 본 김에 거래도 하면 좋잖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이 돈으로 제트기를 달라고? 개소리도 정성껏 해야지."
릭은 항상 이런식이었다. 알바생 한 명이 모든 업무를 해결하는 조그마한 카페로 불러 작은 디저트랑 커피를 사주며 터무니없는 부탁을 해온다. 그럼 나는 같은 레파토리로 흘러가는 부탁들을 들어주곤 했다. 그렇게 계속 들어줬더니 점점 부탁이 정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밀러. 아니, 그러니까, 아샤."
듣고싶지 않은 단어에 조각 케이크 위의 딸기를 위협적으로 푹 찔렀다. 지금 이 케이크만 아니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아샤, 내 말 좀 들어봐. 이번 고객은, 블라블라블라.' 항상 이러잖아. 그래서, 이번 고객은 누군데?"
잔뜩 비꼬는 내 말투에 릭이 어이없다는듯 코웃음을 쳤다.
"지금 내 프로 정신을 비웃는거지? 그래도 내가 거래하는 사람들은 다 괜찮은 사람들이었잖아."
그 말조차 무시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상하게도 네가 만나자는 곳은 커피가 맛있더라. 그냥 카페 추천하는 일이나 해봐."
릭이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아는 표정이었다.
"어벤져스가 분열됐다는건 너도 알잖아."
"그래서?"
"블랙위도우가 부탁한거야. 그녀가 네 목숨도 구했다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뉴욕 하늘에 뚫린 구멍으로 몰려온 외계인들과 싸우며 구한 사람 중 한 명이 나였으니까.
"나를 구한건 그 사람이지. 지금 내 앞에 있는건 블랙위도우가 아닌걸."
이렇게 말하면서도 몇 년전 봤던 붉은 머리칼을 떠올렸다. 어릴 때는 그런 색이 아니었는데. 물론 내 앞에 있는 남자처럼 검은 머리도 아니었다.
"그럼 헬기? 그 정도는 가능하잖아."
"진짜 급한가보네. 다른 연락책은? 저번에 뚫었다는 사람 있지않았나."
릭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무 이유없이 나를 불렀을 리가 없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닌건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냥 말해."
재촉하듯 포크로 접시를 틱틱 두드리자 몸을 앞으로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로스 장관이 내 뒤도 같이 캐고있어. 조만간 요주의 인물로 찍히는건 거의 확정인것 같고."
그럼 연락책들이 거래를 안하려는건 당연한 거였다. 그런데 이걸 숨기고 나랑 거래하려 했다니.
"... 미안. 근데 거래를 안 할 수는 없잖아."
내 표정에서 다 드러났는지 릭이 사과했다. 내용만 사과였지 말투는 꽤나 뻔뻔해 그다지 돕고싶지 않았지만. 릭은 이렇게 말해도 결국엔 내가 들어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요구사항은 없었어?"
"연료랑 세 명분의 식량은 내가 준비할 수 있어. 그 정도 돈은 미리 빼놨지."
그 얼굴에 퍼지는 승리의 미소를 한 대 치고싶었다.
"철두철미하네. 세 명이서 뭘 한다는데? 세 명이면 나머지는 캡틴 아메리카랑 호크아이인가? 이 정도 해주는데 나머지 정보도 줄 수 있잖아."
"고객 정보를 유출시키면 안되는거 너도 알잖아."
웃기지도 않았다. 정말 아무 말도 안하려 하네.
"나한테 아무 말없이 그 돈으로 제트기 얻어가려던건 괜찮나봐?"
릭은 허, 웃으며 항복한다는듯 두 손을 들어보였다.
"그래, 그럼 이걸로 거래하는거지?"
"내용 들어보고."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한다고 했어. 누가 같이 가는지는 나중에 헬기 갖다주면서 보고 올게. 이정도면 되나?"
사실 나한테 크게 필요하지 않은 정보였다. 그런데도 터무니없는 값에 들어주고 싶은건 기분 때문이었다. 이래서 카페로 부른건가.
"그래, 이렇게 해줬는데 나중에 너도 나를 돕겠지."
"제트기가 필요하다니까."
"그래놓고 시간을 안줬잖아. ...돈도. 내가 제트기를 그냥 만들어내는 줄 아나보네. 지금 이것도 겨우 구한거거든?"
확실히 나타샤가 말했던 제트기는 아니었다. 하얀 바탕에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무늬가 그려진 이 허름한 헬리콥터는 러시아까지 겨우 날아갈것 같았다.
"네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나타샤가 진짜 프로라고 했다고."
진심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헬리콥터는 시원치 않아보였다.
"양심없게 구네. 아파트 무료 제공이랑 디저트 평생 제공으로 부족했나봐?"
하. 그래도 헬리콥터 내부는 있을건 다 있었다. 러시아의 추위까지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쟤 얘기 듣지 마."
"아니, 내 프로 정신을 비웃는건 더 이상 용납 못해."
더 이상이라니, 누가 또 비웃었나보네. 그럴만 했다. 지금까지 가져다준 것들 중에 가장 좋은게 딸기 키셀이었으니.
"네가 가져다준 발전기는 6시간만에 고장났어."
"너네 마저 그래, 허?"
또 다. 여기 오기 전에 누군가가 먼저 성질을 들쑤셔 놓았나보다.
"까칠하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누구 얘기하는 거야?"
"있어, 거래 한 번 하기 엄청 까다로운 다리."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는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일이 쉽지 않았나보다.
"다리?"
"이번건 혼자 한 게 아닌가 보네."
"혼자 할 수가 없었지. 너 때문에 나까지 요주의 인물될 것 같으니까. 그럼 요금 올라가는거 알지?"
나타샤는 그제서야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가장 편하게 썼던 사람의 값이 올라간다는건 반갑지 않는 말이었다.
"무슨 말이야?"
"로스 장관이 내 뒷조사를 해대서 연락책들이 전화도 안받아."
"그래도 어떻게 잘 구했네."
고개를 두어 번 저으며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덕분에 보라 머리 여자애한테 평생 빚갚게 생겼고."
보라 머리? 보라 머리는 흔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 인생에서는 딱 한 번 있었다.
"아무튼, 내가 다 갚을게."
"항상 그렇게 말하지."
"옐레나, 가자. 지금 출발해도 빠듯하겠어."
빈정거리는 말을 뒤로하고 헬리콥터에 올랐다. 그러면서도 남자의 말이 신경쓰이는건 어쩔 수 없었다.
"누구였다고?"
"나도 잘은 모른다니까. 금발의 여자였어. 엘리나? 옐리나? 그런 이름으로 불렀는데."
전화 너머로 한껏 귀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면 빚 갚은걸로 쳐 줄 거야?"
릭은 양심도 체면도 없는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해, 할 일이 생겼어."
통화 종료음이 들린 핸드폰을 탁자에 올려두고 생각에 빠졌다. 살아 있었구나. 당연히, 살아 있었겠지. 러시아 간첩이었다고 했으니까. 어떻게든 살았겠지. 안도감인지 허탈감인지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무슨 일 있어, 아샤? 그건 그다지 좋은 행동이 아닌것 같은데."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제야 내가 또 다시 주먹으로 허벅지를 찧고 있었다는걸 알았다. 뒤를 돌아 마주본 샤론은 걱정과 궁금증이 애매하게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 걸음에 다가가 그 품에 안겼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예상 못했던 소식을 들어서요."
어깨에 얼굴을 묻고 체향과 섞인 시원한 향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말하면 더 걱정되는거 알잖아."
머리에 입을 맞추고 등을 토닥이는게 느껴졌다. 전에 느꼈던 안정감보다 언젠가 이 관계가 깨질것 같다는 불안감이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금발 머리까지 그 아이를 떠오르게 했다. 머리칼을 피해 눈을 감아도 그 아이가 떠올랐다. 얼굴도 목소리도 모두 잊었지만 머릿속에 있는게 그 아이라는걸 나는 알고있었다. 문득, 샤론은 무언가를 알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론, 블랙위도우에 대해 얼마나 알아요? 가족이나, ... 부다페스트?"
뜬금없는 질문에 샤론은 잠시 고민하는것 같았다.
"지금 내 앞에서 다른 여자 정보 묻는거야?"
내 이마에 입맞추며 하는 말은 조금 날이 선 것 같았다.나도 모르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그런 생각은 안해봤는데.
"... 네가 그렇게 묻는걸 보면 급한 일이겠지. 나도 아는게 많지 않아. 러시아 스파이었다고 했었는데. ...레드룸을 없애는게 쉴드에 들어오는 마지막 조건이었어. 그리고 거기가 부다페스트였다지 아마."
"레드룸?"
생소한 단어를 소리내어 발음해 봤다. 추측가는게 하나도 없었다.
"응, 근데 지금은 그거 말고 네 앞에 있는 사람한테 집중해줄래?"
답을 하기도 전에 샤론은 나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지금은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제트기가 아니라 헬리콥터를 탄 덕에, 러시아까지의 비행시간은 더 길어졌다. 덕분에 오랜만에 추억에 빠질 시간이 생겼다.
"나타샤, 우리 옛날에 오하이오에서 살때 기억해?"
조종간을 잡고있던 나타샤가 내 쪽을 흘끗 쳐다보는데 느껴졌다.
"아까 릭이 한 말때문에 그래? 보라 머리?"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당연하게 묻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샤샤는 아직도 나를 기억할까?"
몇 년만에 생각만 해오던 이름과 생각만 해오던 불안을 입에 담았다.
"그 여자가 밀러라는 보장도 없잖아."
"차라리 그 사람이 샤샤가 맞았으면 좋겠어. 그럼 적어도, 적어도 살아있는지 아는 거잖아. 내가 거기서 꺼내준다고 약속했는데. 난 그때 한 말들을 하나도 못지켰단말이야."
그렇다면 어쩌면 그 남자를 통해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려던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 옐레나, ... 내가 뭐 하나 알려줄까?"
답지않게 머뭇거리며 꺼낸 나타샤의 말에 고개를 돌려 얼굴을 바라봤다. 나타샤는 뭔가 알고있었다.
"살아있구나."
붉은 머리가 덤덤하게 끄덕였다.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딱 한 번 봤어. 2012년. 뉴욕 침공때."
다행이었다. 정말로. 내가 그곳에서 꺼내주지 못했지만 결국 스스로 도망쳤구나.
"어땠어?"
"그대로 컸어. 그 얼굴도, 네가 부러워하던 머리카락도 전부 그대로였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안도의 끄덕임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헬리콥터의 조종간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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