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omnia
그 성에는 괴담이 돌았다.
“그거 들었어요? 글쎄-”
“쉿. 그 이야기는 금기인 거 모릅니까?”
성주는 괴담을 입에 올린 자들에게 싸늘한 눈길을 보내기 일쑤였으니 자연스레 그 이야기는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금지된 이야기란 무릇 호기심을 돋우기 일쑤였기에, 오래 지나지 않아 성에 상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는 귀가 없는 곳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소문의 시작은 어린 하인이었다. 그 애는 오래전부터 성에서 홀로 살아가던 고아로, 올해 봄 버려진 성을 마침내 돌보기로 한 그들의 주인이 성내를 재단장하며 거두어들였다. 폐허나 다름없던 곳의 사용인들은 소년 빼고는 모두 외지인이었기에, 종종 성의 토박이가 말해주는 각종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경청하곤 했다. 개중 단연코 화제가 된 것은 으슬으슬한 성의 분위기에 썩 잘 어울리는 이야기.
“13년 전부터, 매년 겨울이 되면 계절 내내 유령이 나타났어요. 온통 하얀 것이 틀림없는 귀신이라니까요!”
여인의 모습을 띤 그 유령은 말없이 성 곳곳에서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한다고, 그 애는 장담하듯 말했다. 못 믿겠으면 겨울에 확인해 보시든가요. 말투가 제법 당당한 것이 확신에 차 있었고, 매년 봤다는 광경에 더는 겁먹지도 않은 듯했다. 아무 짓도 않고 바라만 본다는 말에 겁먹는 이도 거의 없었으나, 유독 성주만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얼굴을 굳히곤 했다.
성주와 유령의 비밀은 겨울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았다.
스칼렛은 멀찍이서 들리는 말소리에 오늘만 해도 다섯 번째로 하던 일을 멈췄다. 근래 들어 성안에 들리는 소문은 기세를 죽일 줄도 모르고 열심히도 퍼졌다. 이곳에서 크는 내내 유령을 봤다는 그 소년은 스칼렛을 마주칠 때마다 움찔거렸으나, 그는 별다른 조치를 내릴 마음은 없었다. 소문을 믿는 것이 죄가 되지는 못할 터이고…….
무엇보다, 그 애가 본 것이 누구일지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첫눈이 떨어진 밤, 스칼렛은 공연히 적막한 복도를 걸었다. 신발굽이 돌바닥에 부딪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등불을 열 몇 개쯤 지나쳤을 무렵 그는 서류를 들고 바삐 걸음을 옮기던 그의 보좌와 마주쳤다. 겨울이 왔으니…. 혹시 어느 유령을 보았는지 물을까-하는 생각도 잠시, 차마 그 이야기를 꺼내지는 못하고 스칼렛은 그저 실없이 말을 늘어뜨렸다.
“그냥, 잠이 안 와서…….”
그래도 일찍 주무시라는 말과 함께 또 어디론가 서둘러 떠나는 이를 뒤로 하고 스칼렛은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낮에 작게 내리던 첫눈은 이제 자취를 감췄다. 쌓일 틈도 없이 녹아버린 눈 탓에 아직은 가을 같았다.
스칼렛은 소문의 주인공을 안다.
그 겨울,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소문이 퍼진다. 자신들의 성주가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는 다소 강경한 어투의 중얼거림이나, 혹은 조금 더 온건한 투의, 성주가 그 유령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기에 매일 밤을 지새운다는 속삭임. 스칼렛은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았다. 괴담에 붙잡혀 매일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자신은 조금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성으로 오지 말았어야 한다. 당신과의 추억이 한 숨결에 수천 번은 생각나는 곳으로 오지 말았어야 한다. 멀리로 도피해도 도무지 잊을 수가 없던 이름은 마지막 의지를 쥐어짜내어 돌아온 이곳에서 이름 없는 형체로 다가온다. 그러나 끝내, 당신은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 사람은 무척이나 다정하여서, 부러 제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라는 생각도 한참이나 했다. 그렇대도 그는 바뀌지 못한 채로 밤마다 이리저리 떠돈다.
일주일이 지나고 이 주가 또 지났다. 겨울은 깊어가고 그의 불안 또한 그러했다. 들리는 말 속의 하얀 영은 영락없는 셀레스테프레즌, 더는 그 기억이 변질되어 닳아버릴까 함부로 발음하기에도 아까운 존재인데, 그는 그 여러 밤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함박눈이 하늘을 잠식해 버릴 기세로 쏟아지는 밤에도 스칼렛은 걸음을 옮겼다. 눈 오는 날이면 심장이 함께 서늘해진다. 그는 몰아치는 망념을 쫓으려 어지러운 걸음을 이끌고 떠돈다. 그렇게 그는 어느 문을 마주보고 멈춘다.
이날 스칼렛의 발걸음이 그를 이리로 이끈 것은 온몸이 기억하는 누군가 때문이며,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 마음을 먹은 것은 그간 내내 찾아다니던 누군가가 그리워서다. 열세 해 전의 그는 마냥 행복하게 이 문을 두드리곤 했다. 그러면 안에서는 맑은 목소리가 대답해주었고, 이내 기다리던 하얀 머리칼의 소녀가 방문을 열고…….
스칼렛이 연 방문 뒤에는 언제 사라졌었냐는 듯 익숙한 형체가 반투명하게 서 있다. 하얀 유령은 매일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형상보다 작았다. 그것이 열세 해 전의 셀레스테였고, 이제는 과거에 존재하는 스칼렛이었다. 도망치듯 이곳을 버려두고 떠난 때가 십 년도 넘었건만, 셀레스테프레즌 앞의 스칼렛은 순식간에 다시 스물둘의 청년이 되었다. 먼지 쌓인 바닥 위로 눈물 방울이 점점이 자국을 남겼다. 13년 만의 재회였다.
오래지 않아 성에는 또 다른 소문이 퍼진다. 겨울밤 어느 방의 문앞에서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고. 그러나 막상 방에 출입하는 발자국은 한 개여서, 괴이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분명하다고. 성주가 방에 누구도 접근하지 말 것을 명령한 것을 보면 무언가 수상한 일이 있다고들 말한다. 스칼렛은 여전히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사용인들은 성주가 전보다 밝아졌다는 사실에 다행이라고 여기며 또 하루를 살아간다. 스칼렛은 가끔 미소도 짓고, 별 목적 없는 싱거운 대화도 나눈다. 여전한 것은 매일 밤 홀연히 떠나는 산책이다.
자의적 불면증은 겨울 내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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