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언덕 위 꽃이 필 때
봄이 왔다고 내게 말해주겠어?
로O히 타속성 AU: [불] 셀레스테 X [어둠] 스칼렛
바야흐로 혁명의 불꽃을 올린다.
너절하게 닳아버린 신발의 천으로 이슬이 스며든다. 해가 채 뜨지 않은 어스름 가득한 하늘은 무척이나 맑다. 셀레스테 프레즌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고, 더는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정면을 향한다. 새벽은 첫걸음을 내딛기 좋다. 아침 해가 뜨면 더는 나태한 자의 아래에 남은 것이 없을 것이다. 모두는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 …… 너조차도.
나라는 국민을 위하고 위정자는 나라를 위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 자들의 손아귀에 놀아난 지 오래, 우리는 불꽃으로 모두를 휩쓸 것이다. 타오르는 잿더미 위로 세워진 나라는 거무튀튀할지언정 무지하지는 않을 것이니.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는 자리를 원한 자들이 저곳에 있다. 우리가 겨누는 칼끝이 향하는 곳에, 피 흘려 남긴 발자국이 다다르는 곳에. 허울 좋은 자유의 명목 아래 지도자는 무엇을 하는가? 버려진 도로와 마을에는 자신들조차 채 감당하지 못하는 애끓는 울음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국경을 맞대는 지역은 무능하나 탐욕스런 군주를 둔 죄로 타국의 칼날 아래 스러져가고, 정작 이들을 지켜야 할 우리들의 왕은 매일 같이 먹고 마시며 게으름을 피운다. 알지 못하며 돕지 않는 이들은 수천의 요구에 두어 번 응답하며, 그조차도 제 듣기 좋은 소리를 내어줄 기자들을 부르고, 민중 앞에서 민중을 꾸짖는다. 우리들의 탓이라고, 모두 그러하다고.
그들 틈에 네가 있다.
정확한 말은 아니다. 너는 그들 틈에서 우리를 꾸짖기에는 덜 적극적이며, 사방에 얼굴을 내보이며 욕받이가 되기에는 네 스승이라는 자가 널 아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어렵지 않게 자라 의학을 공부한 너는 간혹 그들과 담소를 나눈다. 한때 나에게 이해받지 못했던 이야기는 다시금 그들 틈에서 젊은 인재의 비전과 아이디어로 둔갑한다. 너와 나는 결코 공감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아마도, 영영 해피엔딩은 아니었을 것이다.
품에 안은 단도를 본다. 누구의 손을 거쳤는지 알 수 없는 무수한 자국들. 오래 가지는 법이 없이 보이는 대로 주워 쓰는 장식 없는 회색 무기는 버리기를 반복한 탓에 손에 익은 적이 없다. 흙만 남은 어느 무덤가에 깊게 꽂은 여린 칼날을 떠올린다. 작은 흙더미에 묻은 것은 꺼낼 일 없는 시간의 잔재들이다.
옳고 그릇된 것들의 분별.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던 순진한 과거. 오늘 내 손으로 내치는 것들에는 이 또한 담겨 있을 테지. 힘차게 고동치는 심장 탓인지 오랜 기억이 수면으로 부상하곤 한다.
진달래, 개나리, 산수유, 라일락……. 한기가 가시고 따스한 기운이 감돌 때면 어김없이 언덕 끝자락부터 다채로운 물결이 번져 나갔다. 봄은 그곳에서부터 시작했다. 언덕이라 부르기에도 굴곡이 크지 않은 곳, 민들레가 지면 토끼풀이 피던 곳. 어김없이 계절은 찾아오고, 들판과 언덕 위에서 평화가 사랑을 틔울 때가 있었다. 너와 내가 어려서 공존할 수 있던 시간. 바람은 웃음을 싣고 나풀거리곤 했다. 좋아한다는 말이 쉬웠다. 한 치의 의심도 없었기에.
네 스승은 비틀린 자다. 한눈에 알 수 있었고, 그러지 못하는 네가 답답했다. 매일 온 국토를 떠도는 내 이야기를, 성 안의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 그릇된 이상이 어디까지 참혹해질 수 있는지. 결별은 사랑만큼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봤을 때는 결심이 선 후였다. 네 발치에 추억을 던진다. 필연적 안녕일 뿐이다.
나는 본래부터 무기로 단도를 쓴다. 네가 날 좋아할 적에, 무척이나 질 좋은 무기를 내 손에 쥐여준 적이 있다. 당신과 내 이름이 아름다운 서체로 각인되어 있는, 장식으로도 무기로도 썩 훌륭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가장 밑바닥을 대변하여 당신네들의 목 끝까지 휘몰아칠 우리가 좋은 칼을 들어 무엇할까? 그날 무덤을 만들었다. 단칼에 꽂아 넣은 이 칼이 묘비요, 흙 속의 관에는 과거의 마음이다. 더는 아름답고 찬란한 것을 쓰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달려들 때면 거리에 버려진 상한 날의 칼을 집어 들었다.
어리고 무르던 시절의 상흔이 오래 간다지. 너는 아직도 어리고 무르니 상처를 입을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문득 떠올라 인상을 찌푸릴 만큼이나 깊이. 네 그 어리석은 생각이 눈에 들었을 적 진즉 돌아섰어야 했다. 내 상흔이 너의 모습으로 남아 버렸으니, 네 상흔 또한 내 모습으로 남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리하여 붉은 여명을 등지고 걸어 나간다. 흘려야 할 피가 낡은 칼날 위로 덧칠된다. 마지막으로 네 앞까지 닿으면, 너는 체념한 건지 예상한 건지 모를 낯으로 가만히 기다린다. 그러나 여전히,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는 모르는 채로.
역사는 필연이라던가? 나라를 민중의 것으로 돌려주는 것은 분명 그러할 것이다. 네 모습은 이제 창살 건너편에서만 마주할 수 있다. 죽기에는 가볍되 살아 나가기에는 무거워서. 너는 봄꽃도, 가을바람도 마주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네게 상흔을 남긴다.
네 얼굴을 본다. 여리고 맑던 흔적이 온데간데없이, 단단한 표정은 사납게 나를 바라본다. 창살을 가운데 두고 마주한 당신은 여전히 불가해하다. 우리가 가진 차이 따위 불타는 마음으로 메울 수 있을 줄 알았던 때를 떠올린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의 눈에 내가 틀리듯, 내 눈에 당신이 그러하여. 우리의 모든 박자가 어긋나고, 우리의 모든 음정이 불협화음을 낸다.
사랑이 그러하구나. 내게 남은 것이 이러하구나. 당신과 나를 가리키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비 오는 날 흠뻑 젖은 채 맡았던 마지막 먼지의 향을 닮겠구나.
눈을 감으면 아주 잠깐은, 그 봄날의 흙내음이 밀려온다. 미련처럼, 마음처럼. 창문 없는 이곳에서 꿈으로 도피한다. 낮은 언덕 위 꽃이 필 때, 봄이 왔다고 내게 알려주겠어?
CM 십이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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