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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by 션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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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5 84P (특전, 후기 등등 포함 본편 약 5만자) 만원

표지 @omiljomil__님

히스클리프와 시노를 중심으로 이런 저런 거대한 재액을 물리쳤다는 IF 완결 이후 날조

현자님 클로에 카인 동법 레녹스

샘플로 1/3정도를 일부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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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재액 토벌이 끝나면 뭐 할 거야?

틈만 나면, 여유가 생기면 젊은 마법사 사이에서 도는 화제였다. 이번 년도 토벌이 끝나고 다시 소집될때까지 어디서 뭘 하고 지낼거냐는 일시적인 현상 이야기가 아니라. 거대한 재액이 두 번 다시 가까워지지 않는 미래를 가정한 화제였다. 태양이 없는 낮을 상상하기 어려운것처럼 달이 없는 밤을 상상하기도 어려울텐데. 젊은 마법사들은 태연하게 이런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매년 질리도록 거대한 재액과 만났지만 평범한 밤 하늘은 처음이니까. 별 사이를 힘껏 날아다닐래. 거대한 재액을 토벌하는데 성공하면 그 누구도 못한 걸 성공한 거잖아. 그 오즈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가 되는 거지? 오즈보다 더 강한 마법사라고 떵떵거리고 살래. 그러다가 보복 당하면 어떡해? 네가 뭔데 내 이름을 사칭 하냐고, 그 오즈가 나타나면 어떡하려고? 달도 부수지 못한 마법사의 말은 안 들린다고 하고 반응을 보자! 현자의 마법사는 그만두고 싶어도 관둘 수 없는 종신직이고 거대한 재액이 없어질 리가 없는데도. 세대를 가리지 않고 한 번쯤 나오는 주제였다.

이번 세대도 이 화제로 후끈 달아올랐다. 중앙 나라의 쌍둥이 마녀가 중심이 되어 다양한 미래 계획을 올렸으니까. 중앙 나라의 활기차고 거리낌 없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태도다 보니 마법관에 모인 마법사는 일곱밖에 되지 않았지만. 상냥하고 온후한 남쪽 마법사 넷과 호쾌한 중앙 마법사 셋이 모이면 충분했다.

오늘은 잠깐 일이 있다면서 유감을 표한 서쪽 마법사가 두고 간 홍차와 남쪽 할머니 마법사가 구운 쿠키까지 있으면, 완벽하고!

남쪽 나라에 환상의 꽃이라 불리는 진귀한 향신료가 자라는 굴이 있어. 마법사라도 들어가기 험난한 구조라서 거길 모험하고 싶어. 여기 오기 전에 옆집 청년이, 이 마을에 작은 학교를 만들거라고 했는데. 그걸 마저 돕고 싶구나. 거대한 재액을 물리친 영웅이 세운 학교라니, 학생이 넘쳐나겠어요! 할머니, 아니지, 선생님! 옛날 이야기 해주세요. 세상을 구한 시절 이야기를 해주세요! ……근사해라!

카인은 기사지? 그럼 막 그런데 가본 적 있어? 무도회 초대받은 적 있어? 있겠지. 기사단장이잖아. 기사단장 대단하네. 멋있네.

그럼 재액 토벌이 끝나면 우리, 데려다줘. 아름답고 고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춤추고 운명적이고 뜨거운 만남을 할 거야! 그런 만남이 없어도 하루종일 춤추고 싶어! 카인이 제 몫하는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건 다-아 저희의 지도 덕분입니다. 카인의 마법 선생이라고 할 수 있죠. 부채 들고 으스대고 호호호 웃을래.

동화 같은 깔끔한 마무리는 없어도 언젠가 매듭지을 날이 오긴 올 거라고.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반드시 올 거라고. 현자의 마법사가 된 젊은 마법사는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의 근거는 제각각 다르지만, 가장 유력한 근거를 하나 소개하자면……. 같은 현자의 마법사이자 고명한 학자기도 한 무르 하트의 격언 중 하나. "불변한 것이 없기에 이토록 이 세상이 아름답다."

밤이 물러나고 아침이 찾아오는 것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에 중앙 나라가 건국 되며 질서가 생겼듯이. 북쪽의 험난한 기후보다 더 위험한 환경이기에 인간이 살 수 없을 줄 알았던 남쪽 나라가 개척되어 민가가 생기고 마을이 형성된 것처럼.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 거대한 재액과의 관계도 한 없이 영원에 가까운 거지. 끝이 없을리가!

젊은 마법사에게 유구한 시간을 산다는 체감은 옅지만, 스스로에게 주어진 시간이 평범한 인간보다 길다는 건 알고 있기에 아주 먼 미래를 상상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긋지긋하다면 지긋지긋하고. 숭고하다면 숭고한 이 사명이 끝나면 뭘 할 거야?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나는 뭘 하게 될까?

네 이야기도 들려줘. 네 의견도 말해줘!

궁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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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거세게 불고 고양이가 소란스럽게 울던 어느 날 밤. 엘리베이터를 타자 공중 부양하는 모자와 빗자루로 하늘을 나는 마법사들과 조우했던 그 날 밤처럼. 아키라는 생소한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눈을 크게 부릅뜨고 그대로 자기 뺨을 내리쳤다. 

꿈이 아니라서 여전히 뺨이 얼얼하고 아픈데도. 여전히 하늘을 날며 마법을 쓰는 진짜 마법사들이 존재했던 것처럼. 여전히 뺨이 얼얼하고 아픈데 여전히 밝은 보름달이 보였다.

마법이 존재하지만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해서 그런가. 익숙한 부분도 있고 생소한 부분도 있지만 생활 양상이 굉장히 흡사했다. 그러다보니 이거 그거랑 비슷하네. 여기서 뭐 더 들어가면 그거랑 비슷하겠다. 분야를 막론하고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칠 때가 있었다.

처음 보는 요리를 먹었는데 어 이거? 어디서 먹어본 맛이 나거나. 낯설고 좋은 냄새 속에서 묘한 그리움을 느끼고. 여기는 이런 곳입니다 이런 일을 합니다. 소개를 듣고 있으니 자꾸 알고 있는 풍경으로 상상되고. 문자를 모르는데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관용어가 있기도 하고. 여기서는 이런 뜻이지만, 우리 세계에서는 그런 뜻으로 통하겠구나 짐작하기도 하고.

진실을 숨길 수 없다는 말을 할 때 비유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못 가린다는 표현을 하는데. 여기서는……. 그 표현을 갓 배웠을 때처럼 아키라는 손을 크게 피고 하늘 위로 올렸다. 다 가리지 못한 손가락 사이로 태양보다 거대한 달이 보였다. 여기서는 손바닥으로 거대한 재액을 못 가린다고 하겠구나. 우스갯소리를 만들기도 하고.

난연하게 빛나는 보름달을 보자 그냥 해 본 우스갯소리가 생각나서, 아키라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었다. 그러자 구름 한 점도 없는 맑은 하늘 아래에 떠있는 달이 손바닥으로 딱 가려졌다. 

일 년에 한 번 다가오는 거대한 재액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게 현자와 현자의 마법사의 일이지만. 얌전히 돌려보내기에는 모종의 이유로 턱없이 강해지고 말았다. 돌려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완전히 토벌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두 번 다시 누군가를 잃는 일이 없도록. 슬픈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마무리 지으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흉흉한 재액이라도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 중 하나인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괜찮은 걸까? 재액과의 싸움을 앞두고 했던 걱정이 다시금 떠올랐다. 

기운 천칭의 균형을 다시 맞추고. 틀린 답을 올바른 해답으로 고치고. 미아가 된 무언가를 있어야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게 문제 되지 않는 것처럼. 명백하게 이상한 거대한 재액을 물리친다고 해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 현자님.

모든 걸 삼켜버릴 듯이 흉흉하게 빛나던 거대한 재액이, 평범한 달이 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위로 받는 느낌이 들어서 아키라는 어정쩡하게 시선을 하늘에 뒀다.

세계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거대한 재액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다른 세계에서 온 현자가 필요하다. 그 상식이 진실이라는 증명을 했는데도 현실감이 없었다. 언제부터 현자와 현자의 마법사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이어진 관행이고. 따로 도서관을 만든다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많은 기록이 있는데 그게 내 세대에서 딱 끝난다니. 목표로 잡았어도 실감 날 리가 있나. 

어딘가 붕 떠서 멍한 아키라를 처음 발견한 건 미틸이었다. 현자님! 다, 다행이다. 아직 계셔서……. 재액과의 싸움에서도 겁먹지 않고 씩씩하게 한 자리를 지킨 미틸이 먼지투성이인 옷을 한 번 털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기에 다들 모여 있어요. 어서 가요. 처음 보는 풍경과 위업을 이뤘다는 흥분이 담겨 있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목소리가 높았다. 

미틸의 손을 잡고 이동하니 그제야 정신이 들기는 무슨…….

엄청난 위업을 이룬 성취감은 어디로 가고, 평범한 임무의 마무리처럼 느껴졌다. 오늘 마법관으로 온 임무는 살짝 특이하고 평소보다 특별해서. 원래는 시간이 되거나 일정이 비는 인원만 참가하는데. 어쩌다보니 전원이서 참가하게 된 그런 임무처럼 느껴졌다. 

다 같이 모여서 무사를 확인하면 각 나라의 선생님 역할이 간단한 예후를 설명해줄 테고. 이런 시시한 일에 부르지 말라고 북쪽 마법사는 짜증을 내거나. 일 했으니 그에 맞는 보상을 받아야겠다고 네로를 건들이거나 할 거고.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보상을 바라는 건 그릇된 생각이라고 리케가 참견해서……. 이런저런 일이 생기고. 얼렁뚱땅 마무리 짓고 마법관에 귀환 한 뒤 일상의 한 조각으로 녹겠지.

그리고 현자의 서에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마침표 찍고 새로 기록되고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한 기분이 들어. 신기한 기분이라고 중얼거리자 미틸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죠.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신기하고 이상한 기분이라 애매한 상태로 붕 뜬 아키라를 현실이 무섭게 내려오게 만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이쪽으로 와주세요 저기 가시면 안 됩니다. 마법사는 거짓말쟁이고 당신을 속이려고 하는 간악한 이들입니다. 저희 도움이 필요해요 부탁드립니다. 정신없는 돌발 상황의 연속이라 눈이 빙글빙글 돌았지. 그렇게 시작해서 그런가? 승리와 평화를 누리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알 수는 없지만 행복하게 잘 살겠죠! 희망차게 마침표와 함께 깔끔하게 막이 내릴 줄 알았는데. 문제와 혼란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궤도가 겹쳐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 일식과 월식도 옛날에는 초자연적인 무언가로 여겨졌는데. 태양보다 강렬하게 빛나던 거대한 재액이 평범한 항성이 된 건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올까? 무심코 돌아가고 싶어질 만큼 아득하고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마무리가 아키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을 구하고 찾아온 건 엄청난 수습과 응대라니. 상상과 좀 많이 다른데? 세계를 구하고 나면 화려한 퍼레이드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불평하고 싶어지는 현실이 나타났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 세계는 기적을 일으키는 마법이 실존하는 세계였고. 현자의 마법사 과반수가 이런 응대와 수습에 능했다. 게다가 중앙과 서쪽 두 나라가 앞서서 혼란을 수습하겠다고 일어났으니. 마사키 아키라 개인에게 쏟아지는 몫이 줄어서. 여전히 눈이 빙빙 돌고 막막하지만 어떻게 해볼 만한 범주에 들어섰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나요?”

아키라는 얌전히 붙잡힌 노바에게 질문할 틈도 만들 수 있었다. 서쪽 나라와 손을 잡은 이유나 본래의 목적. 노바 본인에 대한 정보나 이 세계와 관련된 진실. 그런 질문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는데. 재액 전이 끝나면 현자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거죠? 그렇게 들었는데 왜 저는 아직 여기 있나요? 아키라의 질문만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건 네 마음에 달려있지.”

아키라를 비롯한 모든 현자는 다음 현자가 올 때까지 유예 기간이 있고. 그 기간 중에 돌아가고 싶다고 바라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자 전 현자님의 귀환 증언이 색다르게 들렸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지만 돌아가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해야…….

세계 최강의 마법사를 데리고 유례없는 재액 전을 한, 질 리가 없던 승부에서 참패하고 없어진 현자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전 현자님을 떠올린 아키라는 저절로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 현자가 오기 전까지 돌아갈지 남을지 정해야한다고? 그럼 준비해야겠네! 그리운 내 집을 이길 건 없지만 그래도 사람은 고향에서 떠나 새 시도를 하곤 해. 왜 그러는 걸까? 편안함과 일상만큼이나 끌리는 요소가 다른 곳에 있으니까. 둘 사이에서 고민하고, 또 생각하고. 제일 좋은 쪽으로 마음을 울리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거지! 안 그래?

“그러니까. 현자님, 생각해봐.”

재액이 없는 세계의 현자인 내가 있을 필요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하지 말고. 잘 고민해봐!

거대한 재액이 평범한 달이 됐다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느닷없이 유례없는 강함을 가지게 된 작년처럼 언제 다시 거대한 재액으로 부상할지 모르니. 차후 행보를 지켜보기 위해서, 어떤 만약에도 대비하기 위하여. 다섯 나라는 새롭게 체계를 정비하고 새 조직을 세우기로 했다. 들으면 거창해보이지만 실상은 마법관 리모델링으로.

마법관은 현자의 이름 아래, 인간과 마법사가 합쳐서 재액에 대비하는 기관이 되었다. 천문대에서 볼 법한 장치가 들어오고. 역대 현자의 서는 자료로서 그대로 보관되고. 인간은 현자의 라티스라는 이름으로. 마법사는 현자의 마법사라는 이름으로 남은 달을 연구하게 된다.

다른 현자의 마법사는 긴 책무에서 벗어나 혼란만 어느 정도 진정된다면 제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무르 하트는 적극적으로 이 체계와 조직을 추진하면서 현자의 마법사로 남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상징성을 따져도 중립을 위해서도 현자님만 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이런 게 처음이라 걱정된다면 또 프로듀싱 해줄게. 어엿한 소장으로 만들어줄게! 걱정하지 말고 남아도 괜찮아.

이방인인 마사키 아키라를 향해 최고의 친절을 선보였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반이 달라지고. 진학으로 갈라지기도 하고. 이사를 가거나 뭐 그래서. 아키라도 나름대로 수많은 이별을 겪었지만 이렇게 규모가 큰 선택은 처음이라. 혼란스럽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랄 만큼 생각이 복잡했다. 차분히 고민해보려고 해도 걱정거리가 끝없이 달라붙어 골치 아플 무렵 내려온 그 친절은, 정말이지…….

무르를 시작으로 다른 마법사들도 아키라에게 아낌없이 친절과 배려를 쏟아 보냈다. 남아주면 좋겠지만 언제나 네 마음이 우선이니 잘 생각해보고 정하라고. 소장이 아니라도, 다른 일도 많으니까 걱정하지말라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괜찮겠죠. 여행자의 눈으로 보는 이 세계는 또 다를 테니까요. 저희 거리에 와주세요. 다시 모두에게 소개하고 싶어요. 이번에는 현자님을 제 친구로, 소개할래요. 앗 지금 친구 사이가 아니라는 건, 아니고요! 만약 그 자가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돌아갈 수단 정도는 마련해줄 수 있다. 든든한 지원에 아키라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결심을 했다. 

다들 정말 고마워요.

저는…….

2

네로가 비의 거리 어느 골목에서 작은 가게를 꾸렸다. 새 가게를 열었으니 찾아오라는 연락이 블랑쉐 가에…… 오진 않았고. 사냥꾼끼리 공유하는 소문사이에서 '아마도 네로일 것 같은' 주인장 이야기를 들은 시노가 가보자고 히스클리프에게 권유했다. 세상은 넓으니까 동쪽 나라 구석에서 가게를 연 솜씨 있는 요리사 마법사가 또 있을수도 있고. 현자의 마법사가 거대한 재액을 물리친 뒤로는 마법사는 선망 받는 존재가 됐으니 마법사를 사칭하는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별 특색 없는데 일품의 요리가 나오는 마법사의 가게라는 게, 왠지 네로 같으니까.

왠지 네로 같아. 그런 이유를 들고 시노는 히스클리프를 끌고 나왔다. 진심으로 네로라고 생각해서 데려가는 건 아니고. 재액을 물리치면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명예를 얻은 만큼 늘어난 압박과 부담 속에서 주군이 휘청거리니까. 적당한 이유 아무거나 대고 한 숨 돌리게 해주고 싶었다. 도대체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시노도 무심코 분위기를 살필 만큼 히스클리프를 향한 압박과 부담이 늘었다. 세상은 재액을 물리친 영웅에 열광하면서 뒤에서 무언가를 재고 있다.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해결했으니 무시하는 놈은 없고. 대부분 뒷수습이 원만하게 끝나 꼬투리 잡을 것도 없을 텐데.

그 재액 전 이후로 히스클리프에게 향하는 시선과 암묵적으로 도는 분위기를 보고 있으면, 시노는 카인을 떠올렸다. 이이상 아서님의 입장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아줘. 명망 있는 가문의 도련님이 영웅이 되는 걸 탐탁치 않아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블랑쉐 가문의 차기 군주가 될 히스는 멋있어. 거대한 재액을 물리친 마법사라는 업적을 가지고 있으니 더 멋있지. ……멋있고 또 좋지만. 마냥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게 짜증났다. 영웅이 되었는데도 히스는 여전히 상황을 보다 바닥을 보고 있는 것도 짜증나고. 그렇다고 시노가 막 행동하면 안 된다는 사실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기분 전환이 하고 싶었다.

사냥꾼 동료가 인정한 맛있는 밥을 먹고 먹이고. 네로 실력은 있으니까 어디 가서 굶어죽지는 않겠지만 영 소식이 없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적당히 투덜거리다가 내가 잡아올게. 찾아오라고 명령해. 과장을 보태서 장난치면 시노의 기분도 좀 풀리고. 히스클리프도 기운을 차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가벼운 행동이 대어를 낚았다. 아직 가게 준비가 덜……. 평범한 손님인 줄 알고 멋쩍게 굴던 네로는 손님을 파악하고 잠깐 굳었다가, 아- 곤란한데 반가운 이들을 보고 머리를 긁었다. 오늘 가게는 닫아야겠네. 특별 손님이 와 더 오늘은 장사하지 않습니다. 네로가 태연하게 간판을 준비할 동안 히스클리프 네, 네로? 너무 놀라서 정돈되지 못한 목소리를 냈고. 시노는 뭐야? 왜 있어? 짜증처럼 들리는 고함을 뱉었다. 둘 다 진정하고 일단 앉아봐.

아니 한 지 얼마 안 됐어. 가게 차린지도 얼마 안 됐다고. 뭐? 소문났어? 벌써 입소문을 탔어? 이거 귀찮게 됐네……. 현자의 마법사면 더 떵떵거리면서 살라고? 그런 건 질색이야. 이제 퍼레이드도 회의도 연설도 질렸어. 얌전히 조용하게 살고 싶어. 마법사가 하는 맛집이라고? 아니 마법사인 건 어떻게 알았대……. 너희가 처음이자 마지막 손님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유명해져봤자 좋은 일도 거의 없고……. 마법사 붐도 슬슬 꺼질 때니까. 다음에 가게 세우면 제일 먼저 알려줄 테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마. 아 미안하다니까. 아니 근데 첫 손님으로 어떻게 너희를 불러. 아직 준비된 것도 없고 너저분한데. 좀 장사가 되면 부르려고 그랬지. 아 미안하다니까. 진짜 다음엔 바로 부를게.

시노는 격하게 히스클리프는 얌전히 있다가 가끔 가다 엄청난 소리를 하며 네로를 쪼았고. 네로는 예예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능숙하게 그 둘을 대처하면서 갓 만든 아히요를 내밀었다. 너희가 오는 줄 알았으면, 군청 레몬도 살 걸 그랬네.

은하 보리는 있는데 다른 게 없어서, 디저트는 없어. 아 괜찮아. 신경써줘서 고마워. 손님에 대한 응대가 부족하네. 다음번엔 레몬파이를 내놔. 예예 그러겠습니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더 맛있다. 고마워. 마법관에 있을 때보다 더 먹네? 성장기라서 그런가? 네로, 나 다 컸어. 다 크긴 뭘 커. 이정도면 이런 구석진 가게가 아니라 더 큰 가게를 내. 아까 내 이야기 들었어?

대화를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알아서 툭툭 화제가 생겨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끊기고. 평온한 대화를 하다 네로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큰 소리를 냈다.

“너희 선생님, 만날 예정 있어?”

네로가 커다란 주전자를 상자에 담아 히스클리프에게 건넸다. 입소문 타기 시작했으니 여기도 슬슬 이별이군. 가게를 정리하고 새 가게를 준비할 때가 왔는데. 그러면 도저히, 무슨 수를 써도 올해 안에 못 줄 테니까. 나대신 선생님한테 전해줘. 겸사겸사 안부인사도 하고. 영, 못 만났지? 어디서 본 적 있는 주전자를 잡은 히스클리프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현자의 마법사 전원이 힘을 합쳐 거대한 재액이 없어져 생긴 혼란을 수습했지만. 동쪽 나라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파우스트였다. 나는 파우스트 라비니아, 중앙 나라 건국을 도운 마법사다. 과거를 밝히고 정면으로 나서서 안정과 평화에 힘썼으니까. 과거를 떨떠름하게 여기고 부정하기만 했던 파우스트지만. 아끼는 학생과 동료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믿어준 현자를 위해서라면 이런 건 당연히 할 수 있다는 듯이. 늠름한 태도로 중심을 잡아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질서를 되찾자 파우스트가 두 손을 들었다. 이제 지쳤어. 두 번 다시 이런 짓 하지 않아. 한동안 쉬고 싶어.

동쪽 나라 폭풍의 계곡에서 쉬면 참 좋을 텐데. 착한 마법사와 나쁜 마법사가 사는 곳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도 했고. 성 파우스트 라비니아임을 밝혔기에 생기는 제약도 많아서. 파우스트는 이런 영웅담을 굉장하다고 여기는 동시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이한 균형이 잡힌 곳을 새로 찾아야했다. 질서를 만들고 재액을 물리치다니 대단해! 공적은 높게 평가하면서 정작 눈앞에 당사자가 있는 걸 못 알아보는 곳. 동쪽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아예 없는 나라가 아니니까. 아 혹시? 설마? 그런 관찰하는 눈빛은 질색이야.

그렇게 남쪽 나라로 떠난 파우스트를 히스클리프는 물론이고 시노도 만나지 못했다. 현자의 마법사가 아니게 되자 카인과 아서와 만나지 못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어떤 뒷말이 돌지 모르니까.

선생님께 괜한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아. 뒷말하는 녀석들이 이상한거지. 어서 가자. 끌고 나가기에는 시노도 어렴풋이 느끼는 게 있어 가자고 먼저 권유 하지 않았다.

히스클리프도 시노도 먼저 제안하지 않으니 동쪽 마법사 두 사람은 현자의 마법사 동료와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루틸과 가끔 편지는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형식적인 안부인사에 가까웠고. 클로에에게 가끔 의뢰를 맡기지만 이것도 보는 눈이 많아서, 평범한 의뢰로 그쳤다.

히스클리프가 그러니 시노는 더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나지 않았다. 내 일로 히스가 욕먹는 게 싫어.

네로와도 오늘 우연히 재회한 거지만. 현자의 마법사로 지낸 세월이 모든 걸 말해주는지 다 안다는 듯이 굴었다. 파우스트가 남쪽으로 갔다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고. 슬슬 세상을 구한 영웅을 관찰하고 견제하는데도 질렸을 걸? 편하게 다녀와. 남쪽 나라는 경계가 그렇게 안 심해. 선생님도 너희 많이 보고 싶어 할걸? 우등생 히스클리프군을 안 좋아하겠어? 사고뭉치지만 귀여운 시노군도 걱정하고 있을 걸? 내 부탁을 계기 삼아 갔다 와.

“징그럽게 부르지 마.”

“예예. 선생님의 아기 고양이 시노 셔우드.”

시노와 네로 둘이 장난치며 투덕거릴 동안 히스클리프는 생각에 잠겼다. 선생님을 보고 싶다는 그리움과 정말 그래도 괜찮은지, 서로의 입장이 곤란하지 않는지 이리저리 생각하고. 또 생각한 뒤에 살며시 웃었다. 고마워 네로. 꼭 전해줄게.

“근데 이 주전자는 뭐야?”

“그거야 그거. 마법의 허니팟.”

물 넣고 하룻밤 지내면 마법으로 물이 꿀이 되는 허니팟. 진짜 꿀보다는 맛이 떨어지지만 간단하고 실용적인 요리 도구였다. 현자씨한테 줬는데, 두고 갔잖아? 그래서 원래 주인인 내가 잘 쓰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선생님이 가게에 오더니……. 전에 네가 만든 대로 갓 만든 빵에 꿀을 찍어먹었는데. 그 맛이 안 났어. 항아리에 건 마법은 완벽했는데 네가 한 거랑 달라. 그 맛이 아니야. 무슨 비법이 따로 있는 건가? 그러는 거야 그래서 그만……. 네로는 멋쩍게 웃었다.

3

고작 이런 걸로? 패션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시노도 간단한 작업이라는 걸 단번에 알았는데. 클로에 콜린스가 만든 옷이라는 이유로 엄두도 못 내고 있다가 시노 쪽으로 넘어온 일감이었다.

정치적으로 얽힐 게 걱정되기도 하고. 마법사 재봉사를 만나는 게 기대되면서 무서우니까.

서쪽 나라는 시끄럽고 분주하지만 싫지는 않고 석달 후에 참석하게 될 파티 옷이라고도 하고, 그런게 아니라도 오랜만에 블랑쉐 가 하인다운 일감이니까. 시노는 엘리베이터 대신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았다. 유명세에 비해서 클로에의 아틀리에는 작아, 아틀리에라기 보단 소소한 가게 같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공간이라고 들뜬 클로에가 잔뜩 떠들고, 왕창 자랑한 덕분에. 시노는, 아니 현자의 마법사 대부분은 약도나 지도 없이도 그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풍요의 거리, 새로 만들어진 분수대를 가로 지르면 바로 보이는 건물이니까.

닫았네. 분수대를 가로 지르자 시노를 반기는 건 여전히 활기차고 다른 방향으로 시끄러운 클로에가 아니라 불 꺼진 건물이었다. 클로에의 아틀리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웬만한 일 아니면 닫을 일 없을 거라고 클로에가 떠들기도 했고.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로도 그랬고. 히스도 그렇게 말했던 거 같은데. 아무나 붙잡고 무슨 일 있냐고 물을 수도 없고. 고민하던 시노는 히스클리프 옷에 장식으로 달린 루비를 잡고 주문을 외웠다.

무슨 급한 일이 생기면, 그러니까 아⋯⋯ 옷가지고 그런, 엄청 급한 일은 잘 없겠지만⋯⋯. 히스니까 더 그럴 거 같긴 한데. 그래도! 특별 주문 용 연락이야. 친구니까 특별히!

클로에가 만든 히스클리프 옷에는 항상 비밀 장치가 있었다. 일부 손님만이 알고 있는 간단한 연락 마법을 날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파란 새가 나타나 시노의 어깨 위에 앉았다. 풍요의 거리 3번가 카페에서 만나자. 내일 네 시에! 울음소리 대신 또랑또랑한 안내를 귓가에 하고 보석으로 돌아갔다.

연락 받은 대로 네 시에 다시 풍요의 거리를 찾자 3번가 카페에 붉은 루비로 만들어진 새 모양 브로치를 달고 있는 차분한 신사가 보였다. 정갈한 옷차림과 안경까지 쓰고 있으니 정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차분하고 멋진 신사 같지만. 시노가 근처에 나타나자마자 뜨거운 눈빛을 보여. 시노는 주변을 돌아볼 필요도 없이 곧장 시선이 느껴지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됐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시노가 올 줄이야. 블랑쉐 가 다른 하인은 자주 만났거든. 저번에 온 집사장이란 사람은 잘 지내? 앗 집사장이 한 둘이 아니려나? 그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사람인데.”

일정한 템포로 한결 같이 즐겁다는 듯이 떠드는 클로에는 마법관에 있을 무렵과 다른 게 없어보였다.

테이블 위에 수선할 옷을 올려두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줘. 마도구인 반짇고리를 들고 샅샅이 살피더니. 아 이정도면⋯⋯ 급하게 필요해? 얼마나 급해? 천천히 해. 세 달 정도. 세달 후? 파티야? 어떤 파티? 아니면 회의? 사냥? 거기까진 못 들었는데. 히스가 가는 거니까 어디라도 엄청난 곳이겠지. 역시 그렇겠지?!

손으로는 착실히 수선을 하면서도, 클로에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이 옷은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분위기니까. 머리 스타일을 화려하게 꾸미면 예쁘거든. 이게 이런 식으로, 앗 만들 때 스케치 한 게 있는데 보여줄게! 마법으로 스케치 북을 꺼내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겼다.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었고. 초기에는 살짝 멋쟁이, 화려한 느낌으로 가려고 했는데. 히스는 그런 것보다 얌전한 멋 쪽을 좋아하니까. 순수한 칭찬과 히스에 관한 이야기가 오랜만이라, 시노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렸다.

어느 히스도 멋있지만. 난 이게 제일 좋아. 멋지잖아.

아 머리 정리하면 깔끔해보여서 좋지! 아니 히스는 원래부터 깔끔하고 차분하지만. 좀 더 어른스럽다고 해야 하나. 완전 귀족 도련님! 이런 느낌이 아니라 완전 귀족 주인 나리 같으니까. 꺄아. 이 부분 레이스를 달고 싶은데, 그럼 팔이 무거워질 거 같아서 고민 많이 했어. 장식과 편함의 밸런스는 맞추기 참 힘들단 말이지. 아. 앗!

“이 장식, 다 떨어졌네⋯⋯.”

“나중에 줘도 돼. 언제 가게로 찾으러 가면 돼?”

“아니, 내가 마법으로 보낼게! 어디로 보내면 돼?”

“내가 찾으러 올게.”

오랜만에 편히, 좋은 이야기만 해서 기분 좋아진 시노가 그렇게 말하자. 아까까지만 해도 이야기의 주도권을 가지고 온갖 흥분과 흥미를 꺼낸 클로에가 주춤했다. 아, 그게, 그으⋯⋯. 뭐야? 내가, 그게. 어.

“가게를 닫아서⋯⋯.”

누가 무슨 가게를 닫아? 히스클리프 블랑쉐 국가전복설, 다음으로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전자는 그나마 뜬소리로 만들어진 헛소문이라도 되지. 당사자가 말한 진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충격의 무게는 이쪽이 더 무거울지도 모른다.

누가 가게를 닫아? 아까까지만 해도 춤을 추듯이 둥둥 떠있던 스케치북과 다양한 도구가 차분하게 책상 위로 올라갔다. 내, 가게. 더 큰 곳으로 이사가? 더 큰 곳! 으로, 이사는 언젠가 가지 않을까⋯⋯. 진짜 닫아? 닫, 는다고 했는데? 왜?

“왜?”

우물쭈물, 망설이면서도 또박또박 대답하던 클로에가 시선을 내리깔고. 침묵을 아주 오래 지켰다. 다른 이야기 할까? 미, 미안해. 뭐 그런 시도도 없이 손을 모아 가만히 있는 모습이 꼭.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한 준비과정 같아서, 시노는 더 묻지 않고 물끄러미 클로에를 응시했다.

히스클리프 블랑쉐와 클로에 콜린스. 동쪽 마법사와 서쪽 마법사. 신분은 당연히 다르고, 옷을 만드는 사람과 입는 사람. 화려하고 멋 내고 시선 오고 가는 게 좋아와 얌전히 최대한 조용히, 눈에 띄지 않고 있고 싶어. 성격과 태도도 완전 다른데. 보고 있으면 서로가 연상되는 순간이 있다. 뭘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일단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버릇 같은 게.

긴장해서 초조해하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늠름한 태도로 집중하는 히스처럼. 클로에도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나, 여행 갈 거야.”

한 번도 마시지 않던 홍차를 마시고 클로에는 부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고. 시노에게 귀를 빌려달란 손짓을 했다. 시노한테 처음은 아니고 한 네 번째로 말하는 건데. 아니다 다섯 번짼가……? 순서는 상관없으니까 얼른 말해. 응.

샤일록은 쭉 가게를 하는 것도 좋을 거라고 그랬어. 현자의 마법사가 된 이후로 신주의 환락가 베넷 바는 잠깐 닫았지만. 마법관에서 바를 영업했듯이. 여행을 가도 그런 식으로, 여행지에서 클로에 콜린스 아틀리에 출장판!을 영업해보라고. 귀한 경험이 될 거라고 그랬어. 무르는 아예 접고 20년 정도 은둔하는 것도 괜찮다고 그러더라. 아이디어나 발상, 번뜩이는 창의력 같은 건 뚜렷한 인도자가 있을 때 오히려 억제된다면서. 자기도 10년 정도 다른 연구대문에 연구실에서 안 나온 적이 있었는데. 다 끝내고 나오니까 참신한 발상으로 넘쳐나서 정말 즐거웠다고 했어.

라스티카는 클로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온화하게 오후에 홍차를 따르는 것처럼 정중하고 기분 좋은 태도로 클로에의 등을 밀어줬겠지. 같이 함께 가자. 어디가 좋을까? 날씨가 좋고, 클로에가 가보자고 마음을 먹었으니까. 어디라도 멋진 여행이 될 거야. 내 신부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 걸.

샤일록, 무르 다음으로 당연히 라스티카 이야기가 따라 나올 줄 알았는데. 클로에는 빈 잔을 잡고 뜸을 들였다, 나, 여행 가. 들었어. 아까보다 살짝 시큰둥한 반응이 튀어나오자 클로에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 혼자 가는 거야. 라스티카는 안 가.”

4

어린 시절 히스클리프는 사교의 장이 힘들었다. 홀로 있는 걸 좋아하는 성향 탓도 있고. 마법사를 배척하는 분위기도 있고. 다양한 이유로 거북하고 긴장 되는데. 행동 하나하나가 흉이 되어 달라붙으니, 좋아하려고 해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무심코 마법을 써서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르니까……. 자기 체력을 잘 모르고 뛰어다니다가 사고가 일어나는 어린아이처럼, 히스클리프도 자기 마력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다보니 종종 사고가 일어났다.

속이 울렁거려서 입을 틀어막았다가 근처에 있던 컵이 깨지거나. 부모님은 괜찮다고 웃으셨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겨 울적한 밤이면. 방 안에 비구름 비슷한 걸 만들어서 침구를 축축하게 만들거나. 그런 듣기엔 귀엽지만 당사자에겐 무거운 사건이 발생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꺼려지게 됐다.

어엿한 성인이 되어 훌륭하게 가주를 물려받은 지금도 과거의 경험이 있다 보니 움츠려드는 부분이 있지만. 큰 발전이 생겼다. 아버지 대신 참가한 게 아니라 블랑쉐 가주로 직접 참가한다는 입장의 변화. 현자의 마법사로 얻은 경험과 배움이 히스클리프의 등을 밀어주니까.

적당히 인사하고 때를 봐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벗어나는 요령 같은 게 생겼다. 마법사라고 들리는 뒷말이야 뭐,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고 아무렇지 않게 되지도 않겠지만. 눈치 보지 않고 시노가 잡아준 걸 떠올리면서. 이런 문화는 잘 몰라서, 긴장 되네요. 멋쩍게 웃었던 아키라를 떠올리면서 어떻게든 숨을 쉬었다.

조금 여유 있게 쉬다 돌아가도 되겠네. 파티에 초대받았지만 주역인 것도 아니고. 예의와 격식을 챙기기 위해 비워둔 한 자리라는 인상이 강한 초대장이었는데. 와보니 실제로도 그런 자리였다.

옛날에는 아버지 대신 온 거니까 잘해야 해. 내가 실수 없이 착실하게 잘 해야 해. 긴장으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녔지만. 지금은 후우 한결 편한 태도로 주변은 자연스럽게 둘러보고. 가벼운 목례와 함께 자리를 뜨는 기술을 익혔다.

따로 테라스가 있으면 좋을 텐데. 쉴 공간이 따로 마련되지 않은 파티장에서 벗어나 복도를 걸었다. 창문이 전부 닫혀 있어서 어딘가 삭막한 분위기가 나는 복도였다. 마법으로 몰래, 창문을 열면 실례겠지. 직접 열어도 실례일 테고. 하나쯤 창문 열린 곳 없을까. 정처 없이 헤매던 히스클리프는 저택 구석에 열린 창문을 발견하고 그 앞에 섰다.

아까 간략하게 인사했으니까. 그걸 작별 인사 삼아서 빗자루 타고 날아가고 싶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어도 못 된 생각이 자꾸 떠올라 히스클리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노가 왔으면 성큼성큼 와서 왜 이런데 있어? 이런 데 있을 거면 나가자. 그게 나아. 데려가줬을 텐데.

시노랑 만난 지도 오래 됐네. 히스클리프는 가슴팍에 달린 동쪽 나라를 상징하는 푸른 보석이 박힌 브로치를 매만졌다. 클로에가 아틀리에를 닫기 전에 만든 마지막 역작이야. 히스한테 잘 어울릴 거야. 수선한 옷과 함께 그런 말을 야윈 집사에게 말하고 다시 마물 의뢰를 받으러 나갔으니까. ……진짜, 언제 마지막으로 만났지?

가주가 아닌 동쪽 대 귀족 아들로 있었을 때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군중에게 인기 있는 무가라는 건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것이라. 우리는 안전하고 무해하다는 걸 항상 왕가에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증명을 하느라 시노를 도울 수 없을지도 몰라. 그래서 점점 거리를 두긴 뒀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됐네.

시종과 주인 사이인데도 재액이 뜨는 밤이 되면 같이 자고. 히스클리프 방으로 시노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기도 했고. 현자의 마법사로 지낸 나날도 있다 보니 이 거리감이 어색했다. 앞으로도 올바른 관계를 이어가려면 이정도가 좋은 걸까? 그건, 조금. 아니 많이…….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잠겨있으니 피곤해져서, 고개를 아래로 떨구자 마법의 기색이 났다.

어린 시절 히스클리프라면, 그때도 마력의 기색은 잘 느끼는 아이였으니까. 이 세상에 마법사가 얼마나 많은지 몰랐으니까. 화들짝 놀라면서 주변을 살피고, 자기가 뭔지는 모르지만 또 마법을 썼구나. 울적해 땅바닥만 보고 한참을 울었을 테지만. 지금 히스클리프는 아니었다.

이 마법 어디서…….

히스클리프가 고개를 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창문에 달려있는 커튼이 길어지더니 동그랗게 말리기 시작했다. 애들이 자주 만드는 비밀 기지 같기도 했고. 야행 할 때 가끔 신세 친 천막과 비슷한 형태로 변한 커튼을 관찰하고 있자니. 문을 노크하듯 누가 딱딱해진 커튼을 밖에서 두드렸다. 누구세요? 사뭇 경직된 상태로 그가 질문하자. 후, 후하하. 장난스럽고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히스. 나야 나.

그러니까, 누구세요? 이번에는 히스클리프의 질문에서 웃음기가 묻어났다.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고, 만난 지 오래 됐으니까 알아차리는 게 늦었는데. 이거…….

노크 소리를 듣자하니 웬만한 벽처럼 딱딱할 텐데. 부드럽게 공간이 열리고 커튼 색 보다 짙은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오랜만입니다. 블랑쉐 공.”

“카인!”

바닥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의자 모양으로 굳어졌다. 언제 이런 마법을 배웠어? 이런 건, 서툴지 않았나? 히스클리프가 신기해하고 있으니, 그 모습을 알아차린 카인이 가려진 눈으로 귀엽게 윙크했다. 나도 좀 마법에 익숙해졌거든. 오즈한테 지적받은 부분도 이제 고쳤어.

지적받은 부분? 시노처럼 너는 마력이 강하고 화력도 좋은데. 미세한 컨트롤이 잘 되지 않은 게 문제야. 그런 지적을 한 걸까. 카인은 마법을 쓴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럴 수 있지.

카인은 살짝 부끄럽다는 듯이, 목에 손을 댔다.

“기분에 따라 마력이 너무 휘둘려. 의욕이 나면 잘 되는데. 의욕이 떨어지면 화력이 뚝 떨어지고 그러거든.”

너무 카인다운 단점에 히스클리프가 무심코 큰 소리를 내며 편하게 웃어버리자, 너무 그렇게 웃지 마. 지금은 고쳤거든? 아 정말 난감하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덩달아 웃었다.

“피곤해보여서 따라왔는데. 멀쩡해보여서 안심했어.”

“따라왔어? 언제부터?”

발소리도 기척도 마법도 느끼지 못했는데? 블랑쉐 공. 중앙의 기사를 얕보면 곤란해. 예의를 차리다가 친근함으로 돌아오는 태도가 반가워서 히스도 적당히 장단을 맞췄다. 그거 실례했군요. 미안해 카인.

“여기 테라스가 없고 창문도 다 닫혀있으니까 갑갑하지? 뭐 경호하는 입장으로는 이러는 게 더 편하긴 하지만.”

“그래서 마법으로 임시 테라스를 만든 거야? 고마워.”

“별말씀을.”

잘 지냈어. 잘 지냈지. 너는? 그런 말없이도 사소한 주제로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대화와 편한 분위기가 그들의 안부를 전했다.

“편하게 있어도 괜찮아. 밖에선 안 들리거든. 뭐 누가 오면 내가 설명 할 테니 걱정할 거 없어.”

외진 곳이긴 하나 파티 중에 마법사가 마법을 부렸다는 사실은 큰 소란이 될 법도 한데. 카인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히스클리프의 호기심이 움직였다.

“정말 괜찮겠어? 한 번 혼나지 뭐. 이런 건 안 돼.”

“제대로 된 이유를 생각했으니까 괜찮아.”

“제대로 된 이유?”

“몸이 안 좋은 귀부인이 계셔서, 지금 쉬고 계십니다. 이러면 아무도 못 들어올걸. 예의가 아니니까.”

“왜 내가 귀부인이야?”

“아 미혼이지. 레이디가 계셔서.”

“그러니까, 왜 레이디가 되는 건데?”

“몸이 안 좋은 여성이 이 안에서 쉬고 있다는데. 마법을 썼다고 뭐라 하는 녀석은 이 파티장에 없을 테니까?”

“다른 이유를 대.”

“다른 이유 예를 들어서?”

히스클리프가 답지 않게, 장난기를 담아 말했다.

“성격 나쁜 마법사를 상대 중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건 더 못 말하지!”

시노가 날 죽이려고 들 걸? 허물없는 태도로 카인은 히스클리프의 등을 세게 두드렸다.

“그냥 귀인이라고 하지.”

“귀인이라고 하면 누구지, 하고 슬쩍 보는 사람이 있더라고. 레이디가 가장 아무 일도 없었어.”

“염문 나지 않아?”

“기사는, 호위하는 게 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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