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재심이 끝나고, 법정 복도를 걸어 나오던 영원은 쭈그려 앉은 채 말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은 창백하게 하얗고, 문은 무겁고 어둡게 닫혀 있었다. 마치 오래된 기억 속에 갇힌 방처럼. 판결은 끝났다. 가해자들은 이제 오랫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무기징역은 아니나 평생 나오지 못하거나 다 늙은 노인이 되어서야 나올 것이다. 여전히 영원은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영원아, 괜찮아?”
정 씨가 낮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무릎을 굽혀 영원과 눈을 맞추려 했으나, 영원의 시선은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약간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네.”
영원의 대답은 희미했다. 판결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것이 정의라는 이름에 가까웠을 것이다. 첫 재판에서의 터무니 없이 낮던 처벌과 달리 초범이라도, 반성문을 썼어도 전혀 감형되지 않았다.
“그 사람들… 정말 안 나오는 거죠?”
영원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의 눈은 긴장과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정 씨는 입술을 굳게 다물다가,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응, 이제 끝났어. 너 다시는 그 사람들 볼 필요 없어. 절대.”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안에 묻어나는 슬픔을 감출 순 없었다. 영원이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길게 내뱉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숨은 깊고 무거웠다.
안전을 몰랐다. 보호소에 있는 동안에도, 정 씨의 집에서도 사회 어딘가에 포주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에 쉬이 잠들지 못하던, 그리고 그것이 너무 당연해서 이유도 모르던 나날이었다.
“안전해….”
그 말은 작았지만, 그 안에는 어딘가에서 막 깨어나기 시작한 자각이 담겨 있었다. 눈가가 뜨거워지고 목 안에서 소리가 터져나올 듯 터였다. 몸이— 자그마한 무의식이 이제서야 울어도 된다고, 안전하다고 안 것일까. 영원은 한동안 웅크리고 품에 안겨 있어야 했다. 몸은 떨렸다. 생후 몇 개월도 안 되서 잊었던 기술이건만 목 안에서 소리가 아이와도 같았다.
법정을 떠나는 길에, 창밖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정 씨는 영원의 손을 잡고 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영원은 문득, 저 햇빛이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붉어진 눈가를 비볐다.
낯설어도 걷는 거겠지, 그의 손을 잡은 정 씨의 손이 따뜻했다. 그것만은 변하지 않았다.
***
얼마 후, 서류가 하나 날아왔다. 법원 판결에 포함 되어있던 배상금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영원은 물론 정 씨도 평생 이렇게 훅 들어올거라 상상조차 안 해본 큰 금액이라 정씨의 경우에는,
“헉.”
하는 소리를 실제 내고 말았다.
정 씨는 어려서부터 갑자기 큰 돈이 생긴다면 하고 싶은 것이야 많았다. 한 때는 인형을 갖고 싶었고 공장일을 그만두고 싶었으며 더 나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고 또 지금은 그저 더 행복해지는 것에 쓰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이 아닌 영원의 몫이었다. 그리고 또 영원도 이 돈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배상을 받았다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줄 알았는데 머리가 멍하였다. 20여년간의 학대와 착취를 견딘 비용은 꽤나 커서 저 숫자들을 세는 것에 시간이 꽤 걸리었다.
그렇게 둘은 그 돈이 들어오고서도 한동안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은 일상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영원이 안전해졌고 하고싶은 것을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고통의 시간들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을 것이나 그래도 그 고통을 인정 받았다. 착취 당하였던 제 몫을, 빼앗기었던 시간을 돌려받았다고 생각을 하면 된다.
생일도 나이도 모르고 사는 것은 퍽 서러운 이야기이나 법적으로 이정도의 돈을 배상받았다 하면은 권선징악— 좋은 결말일 것이다.
둘은 여전히 각자 위치서 일을 한다.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날들과 조금 행복하거나 불운한 날들을 살아갈테다.
영원이는 영원히 나아지는 길을 걸어야 하겠지만 손 잡아주는 이가 있으니 그 길이 고통만은 아닐 것이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