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현 씨 집안의 주인
개항기가 시작된 이후 몰락할 때까지. 세현에서 현 씨 집안의 입지는 정말 절대적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고 가세가 기울었지만 당시 지역민들의 지지가 압도적이었던 덕분에 일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지역학 오리엔테이션 이후 첫 수업시간을 장식했습니다.
독립운동에 준하는 행위가 무엇이었길래 그토록 굳건하던 집안을 무너뜨렸을까요? 교수님이 말 안 해주셨던 것 같은데. 태블릿에 뜬 필기 페이지를 쭉 올렸습니다. 서낭당 재건... 이건 이 주차 수업 내용입니다. 어디갔냐. 일주차 필기. 찾았다. 첫 페이지 구석 끄트머리에 적혀있습니다. 기록 모호함... 아. 생각났어요. 그때 어떤 학생이 물어봤습니다. 박재윤 교수님이 정말 난감해 하셨지요.
'이런 일이 벌어질 정도의 죄목은 독립운동밖에 없지 않나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실제로 동생은 봄에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순국했습니다. 문제는... 동생 체포 이후 당시 집안 주인의 행적이 모호해요.'
읽어보길 잘했습니다. 덜 억울해졌어요. 교수님이 여기 떨어졌어도 현 씨집안이 무너지는 상황에 대한 대책은 없었겠네요. 교수님이 보셨다는 집안 사람의 일기장에는 자금 관련한 기록만 있었을까요? 그래도 현 선우나 현 선영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으니 나보다는 수월했으려나? 나중에 도서관 사이트에서 교수님 논문이라도 찾아봐야겠습니다. 뭐라도 남아 있겠지요.
태블릿을 가방에 밀어넣고 방문을 열었습니다.
"어머."
막 문을 두드리려 했던 사람과 마주쳐 심장이 쿵 떨어졌습니다.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습니다.
"절묘하군요."
"그러게요. 깜짝 놀랐어요."
어제 기차역에서 만난 여인입니다. 봐도봐도 넋을 놓게 되는군요. 선우도 보자마자 드라마 남주인공이다 싶었는데 이분은 더 하네요. 드라마 주인공이 뭐냐. 얼굴로 세계 정복도 가능하겠다.
"현 선영입니다."
"이 휘라고 합니다."
시기를 고려하면 아마도 이 사람이 집안의 마지막 주인이겠지요.
"선우에게 들었습니다. 해명이 귀찮으셔서 외국인인 척 하고 계신다고..."
"네에... 그렇습니다."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여인을 따라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지내시는 동안 불편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집에서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아서 매번 놀라고 있습니다."
옷도 빌려줘, 요리 안 해도 돼, 설거지 안 해도 돼... 이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빨래도 잘 개어서 내놓으면 정리해주니 정말 감사하지요.
응접실에는 차와 다과가 나와있었습니다. 이거...
"다식인가요?"
"예. 화과자와 다식입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각자 제일 잘 만드는 간식류로 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둘 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차 냄새가 향긋합니다. 국화일까요? 차 향이 티백차보다 더 강합니다. 현대에도 이런 것이 있으려나. 찾아봐야겠네요.
"이런 곳까지는 어찌 오셨습니까?"
"과거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찾아왔습니다. 동생분 말씀으로는 제가 아는 것과 이곳에 내려오는 이야기가 다른 것 같더군요."
"예. 과거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의 이름이 세현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간 세에 나타날 현일까요? 인간 세자는 '세상'이라는 단어에도 들어가니까.
"이곳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옛 이야기로만 치부되는 이야기입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주워들었습니다."
교수랑 선배들이 이야기 해줘서 안다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얼버무렸습니다.
"비상금을 제외한 여비를 잃어버려 난감하던 차였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후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인사는 선우에게 하십시오. 그 아이가 당신을 데려왔으니."
과자 하나를 집어 먹었습니다. 맙소사. 입에서 녹는데? 마구 집어먹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지요. 애써 참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디서 수학하셨나요?"
"경성의전에서 공부했습니다. 선우와 달리 양인들의 언어에는 재능이 약했던지라, 조선에서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이겠지요. 의사인 이상 영어 공부는 필수입니다. 이 시절은 현대만큼 정보가 쏟아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정보는 서양에서 들어왔을테니 언어는 필요했을겁니다.
"아쉽네요. 미리견에 오셨다면 선배님으로 만나 뵈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차를 살짝 마시고 말을 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의학도입니다."
선영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내려앉았습니다.
"미리견에서 수학하셨습니까?"
"예. 일 년차 과정만 마친 상황입니다."
"다 끝나기 전에 조선으로 돌아오셨군요. 설마 공부를 포기해야 할 상황은..."
"아닙니다. 급한 일은 마무리 했습니다."
고개를 저었습니다.
"잘 쉬고 돌아갈겁니다. 의대 들어가겠다고 뼈 빠지게 고생했는데 누구 좋으라고 포기합니까?"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선영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대학이라면 아직 예과 과정이겠군요. 할만합니까?"
"그럼요.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은 노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의전 출신이라 대학 과정은 잘 모릅니다만... 예과에서는 기초를 다지고 본과가 진짜라고 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배우면... 외울 것이 많죠?"
"예. 많습니다."
"살려주세요..."
농담조로 대답했습니다. 선영이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생각보다는 할만합니다."
선영이 다식 하나를 집어들고 말했습니다.
"혹시 할 일이 없다면 제 병원에도 놀러오시겠습니까?"
"저야 좋지요."
"대신 사람이 많을 때는 저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할 줄 아는거라고는 간단한 응급처치밖에 없습니다. 괜찮을까요?"
"그것도 큽니다. 접수 도와줄 사람만 있어도 감사할 때가 많아서 말입니다."
"그정도는 할 수 있어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습니다.
"그동안 못 뵈었던 이유가 일 때문이었습니까?"
"예. 급한환자가 있어 밤을 샜습니다."
선영이 멋쩍게 웃었습니다.
"그래서 어제 많이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역에서 뵙는 바람에... 조금 난감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밤 새서 공부한 저보다 배는 더 멀쩡해보이셨습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지라... 선우가 아가씨를 역으로 데려온 걸 알았을때는 정말이지."
푸흐 웃으며 답했습니다.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세요. 저도 짐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못 찾으셨다고 하셨지요? 중요한 물건이 그 안에 있었습니까?"
"옷과 신분증, 여비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비상금은 있어 당분간 괜찮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예. 두 분을 만나서 더 다행이지요. 아니었으면 앞날이 캄캄해질 뻔 했습니다."
당신들은 모를겁니다. 내가 근대사 한복판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눈앞이 얼마나 캄캄했는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사람이 지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얼마나 아찔했는지.
"별말씀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돕고 손님은 후하게 대접하는 것이 법도입니다."
그러니 오래 머무르지 않겠습니다. 폐는 최소한만 끼치고 갈게요.
"보답이라기에는 미약하지만.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은 언제든 가겠습니다."
"잘 기억해두겠습니다."
선영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 * *
"만나보셨습니까?"
"그래. 거짓말이 꽤 익숙해 보이더군.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있는 가는 별개의 문제 같지만."
선영이 선우의 방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현 선우. 왜 저런 수상한 자를 집안까지 들였지?"
"작년 겨울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선우가 선선히 입을 열었다.
"일이 전부 꼬여 죽을 일만 남았던 상황 말입니다."
"그래. 그때는 꼼짝없이 너를 잃는 줄만 알았다. 살아 돌아온 뒤로 아무 말도 안 하지 않았더냐."
"꿈을 꾸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때 저 아가씨와 닮은 사람 덕택에 목숨을 건진 것이 생각나 모셔왔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닮은 사람이라…. 그 뿐이라면 슬슬 내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엇을?"
선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저를 구해준 사람과 동일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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