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청레-차가] 다다르다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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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되게 귀엽다 

너에게 그 말을 한 뒤의 있던 일들의 순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너는 봄날의 신록처럼 웃었고 맑은 눈에 흐르는 동경이 간지러웠던 나는 차마 견디질 못하고 발길을 돌렸었는데. 차라리 그때 너를 따라갈걸. 아니. 애초에 어줍잖은 반항심으로 담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게 아니었다. 그 담을 바람처럼 넘어온 너에게 그런 나를 들키는게 아니었다. 새파란 열기에 가득찬 너에게 온기를 바라고 말을 거는게 아니었어. 너에게 쓸데없는 친절을 베푸느라 내 목을 조르던 넥타이를 푸는게 아니었어. 너를 만나는게 아니었어. 그래서는 안되는거였어. 

너에게 진 빚을 나로 갚을 수 있다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나를 조소했다. 나의 목숨 같은거 따위로 뭘 할 수 있다는거야. 비겁하게 죽고 싶은 데에도 너를 핑계로 가져다 쓰는 내가 진절머리 치게 싫었다. 그래서 그 날 나는 담벼락에 기대는 대신 충동적으로 너의 병실을 찾아가 널 책임지겠다며 울었다. 병신. 책임지긴 뭘 책임져 자기 인생도 책임지지 못하는 주제에. 그러면서도 흔들리는 너의 눈빛에서 증오심을 찾을 수 없다는 것에 안도한 나를 너는 알까. 내가 이렇게 한심하고 비겁한 인간인걸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그 이후로 너에게 나의 껍데기를 실어 보냈다. 

매일같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병실에서 너를 마주하고 앉아 혼란스러워 하는 너에게 교과서를 들이민 것은 그러니까 나의 껍데기였다. 다정하게 너를 보고 웃어보이고, 생전 처음한다는 공부에 울상인 널 다독일 수 있었던건 그게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짜인 나는 다정히 웃음 지으며 너를 대하는 나의 껍데기를 혐오스럽게 쳐다보며, 왜 나를 원망하지 않냐고 소리치고 있었다. 왜 너는 나를 밀어내지 않지? 나 때문에 너의 인생이 무너졌다고, 너의 꿈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왜 말하지 않는거야? 너도, 너의 부모님도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아 나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내 탓이 아니었다고 말해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너를 나는 사실 조금 원망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나를 니가 알까. 죽을 때까지 그것만은 네가 알지 못하길 바랬다. 


네가 퇴원하고서 부터는 아주 조금 더 수월해졌다. 어처구니없게도 네가 건내주는 다정함과 솔직함을 빌려온 나는 나의 껍데기와 일시적인 휴전에 들어가 다시 몸을 합쳤다. 너는 좋은 학생이었다. 처음하는 공부에 다소 버거워하는 너에게 친절을 가장해 죄책감을 덜어내는 나를 알 턱이 없는 너는, 고작 숙제 한 번 안해온 것으로도 그 크고 맑은 눈에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고 잘못했다며 빌거나, 실수로 틀린 문제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나의 눈치를 보며 고갤 숙이곤 했다. 고작 그런 사소한 일로 나에게 미움이라도 받을까 걱정하는 것 마냥. 나는 너의 인생을 망쳤는데. 

그래서 나는 감히 이게 치유되는 과정인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다시 병원에 가기 전까지는. 너의 재활치료와 수업일정이 겹쳐, 병원 근처에서 밥을 먹고 기다리는 동안 수업을 하자는 너의 말을 따라 병원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가 다시는 여기로 올 수 없다는걸 알았다. 나와 몸을 합친 껍데기가 이번엔 반대로 나를 밀어냈다. 니가 어디 감히 여길 오냐고. 그때도 도망쳤던 주제에 이제와서 어딜 감히 여길 들어와. 이미 몸을 합친 껍데기가 내 속에서 벼락같이 소리치며 날 밀어내는 바람에, 급하게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먹은걸 다 게워내고서도 한참을 울었다. 치유를 기대한 내가 한심해서. 

아 현아. 이제 알았다. 나는 너에게 닿을 수 없어. 

우리는 영원히 만날 수 없어. 

바보같은 난 그걸 이제야 알았어 현아. 

그때부터 나는 널 밀어내기 시작했다. 몸이 안 좋아서. 교평이 코 앞이라. 조금 피곤해서. 내내 붙어 다니던걸, 있는 힘껏 밀어내면서도 꼬박꼬박 수업을 하는 나에게 너는 처음엔 서운해하다가 금방 서러워했다. 약속했던 수업시간에 도착해, 다정한 말 한마디 꺼내지 않고 바로 책을 펴는 나를 시무룩하게 따라오고 있던 너의 책상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걸 깨달았을 땐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 선배 왜 저 피해요. 저 뭐 잘못했어요? 이제 제가 싫으세요? 제가 너무 멍청해서 그러시죠... 죄송해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입을 열면 울음이 튀어나올 것 같아 침을 삼키며 펜을 꾹 눌러잡고 울고있는 너를 바라보았다. 파르르 떨려오는 눈을 감으면 눈물이 흐를게 뻔해서 눈을 크게 뜨고 가만히 이 죽을 것 같은 시간을 지나보냈다. 현아. 나는 너를. 나는 널. 현아....

-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약속할게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제발.. 선배..

울먹이는 너의 말에 나는 그 자리에서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죽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현아. 너는 죽었다 깨어나도 날 실망시킬 수 없어. 현아.. 내가 너에게 닿을 수가 없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자릴 박차고 일어나는 데에 너의 울음소리가 걸음마다 나를 따라왔다. 죽을 것 같았다. 죽고 싶다. 정말 죽어버리고 싶다. 

정신은 육체를 지배한다던가. 그날부터 죽도록 앓았다. 시간마다 찾아오는 과외교사들의 말이 허공을 떠돌고, 나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따위로 도망쳐 나온걸 사과해야 하는데. 도저히 너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수업하기로 한 시간 도서관이 아닌, 불꺼진 강당에 앉아 삶이 끝나기를 손을 모으고 기대했다. 능동적인 죽음을 선택할 수는 없다. 현이 너에게 차마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라면. 


선배......?! 선배!!!! 

희미한 의식에 너의 얼굴이 동그랗게 떠올라 웃었다. 너구나 현아. 꿈이더라도 현실이더라도 너의 얼굴이 좋아 웃었다. 나는 너에게 닿을 수가 없는데. 너는 나를 찾아 왔구나. 멍하니 벤치에 기대어 앉은 나를 온통 더듬던 네가 울먹이며 나를 불렀다. 선배...선배 몸이 불덩이에요. 어떡해. 어떡해야 되지. 선배 병원가요.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다급한 목소리에 너의 손을 뿌리치려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 안돼. 병원 안가 

처음으로 울며불며 화를 내는 너에게 매달리듯 안겨 안간다고 했던거 같은데 낯선 천장을 보고 누워있었다. 이렇게 포근한게 지옥일리는 없고 우리집은 아닌데.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마가 축축해 손으로 더듬어보니 미지근해진 물수건이 얹어져 있었다. 대충 바닥에 내려두려 시선을 옮겼을 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팔을 베고 잠든 널 발견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너의 얼굴에 왈칵 눈물이 나 축축한 수건에 얼굴을 묻고 소리죽여 조금 울었다. 나는 네게 닿을 수가 없는데 너는 왜 자꾸 나를 보고 우니. 죽고 싶은데 죽을 수도 없게. 

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숨죽여 울고 있었는데, 선배. 하고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 숨을 크게 들이마셔 호흡을 정돈하고 고갤 묻은채로 응. 짧게 대꾸했다. 

- 선배 저번에 병원에서 토했던거 체한거 아니죠 

후우 길게 숨을 뱉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선배 그 날부터 저 밀어냈잖아요. 너의 목소리엔 울음기가 가득했다. 울지마. 울지마 현아. 제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에게로. 현이 네가 다가왔다. 침대 코 앞에서 거칠게 요동치는 숨소리를 뱉는 너를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가만히 시선을 내려 이를 악 물었다. 

- 저 때문이에요...? 병원 못 가는 것도, 선배 아픈 것도, 그거 다 저 때문이에요? 

- 아니야. 너 때문 아니야 현아. 

거짓말. 선배 거짓말쟁이. 서럽게 울며 고작 한다는 소리가 거짓말쟁이라니. 목놓아 우는 너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우니 현아. 왜 우는거야 도대체. 울고 싶은건 난데, 왜 자꾸 니가 울어. 너한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나는 너를 위로도 못하는데 울면 어떡해. 

- 책임진다고 했잖아요. 선배가 저 책임진대 놓고. 이러는게 어딨어. 선배 나빠요. 왜 책임진다 그래놓고 저 밀어내요? 저 대학 안가도 돼요. 금메달 그까짓거 안 따도 그만이에요. 그런게 필요한거 아니란 말이에요.. 

이러는게 어딨어요..진짜 나빠. 선배 나빠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하는 말에 멍하니 서러워 죽겠단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아? 

- 선배가 저 죄책감 때문에 책임진다 그런거 알아요. 근데....그래두..그래두 선배가 먼저....

흐어엉. 자리에 주저앉아 우는 너의 입에서 먼저, 책임, 그래도, 미안, 못 놔줘요, 처음부터, 좋아서,.. 하는 분절된 단어 하나하나를 겨우 그러모아 하나의 문장을 구성하느라고 나는 숨도 못 쉬고 집중을 했다. 네가 뱉는 단어 하나하나마다 너는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와 나의 껍데기가 죽죽 그어놓은 빌어먹게도 기나긴 길을 성큼성큼 지워내고. 크게 한 발짝 두 발짝. 그리고 바로 내 앞까지. 바닥에 주저앉은 너를 와락 껴안은 것은 그러니까 그 길을 지워낸 너의 몫인게 틀림없다. 

응 내가 먼저. 현이 널 좋아해서. 놔주지 마. 진짜로 책임질게. 약속해 현아. 

너를 부둥켜 안고 약속한다고 몇번이나 다짐하는 동안에, 나는 처음으로 자유로움을 느꼈다. 너에게 안겨 있는 동안에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걸 알았다. 닿을 수 없던 너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되었다. 

내가 손을 뻗는 모든 곳이 너에게로 다달았다. 


청레는 간지러워서 안하는데 ㅎ_ㅎ 

차가에 가경의 트라우마 극복을 돕는 차현을 보고 싶어하는 분이 계셔서 

청레로 가보았습니다 

나름 또 풋풋한 맛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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