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중

동행

한 사람분의 생애를 몇 번이나 같이 보내왔는데!

살아온 햇수보다 턱없이 얄팍한 삶의 굴곡을 지나왔다. 걸어온 족적을 돌이켜보면 세상이 저를 외따로 두고서 자기네들끼리만 성큼 자랐다. 육의 생장만 소실된 건 아니었다. 사유를 관장하는 정신마저도 미숙한 채로 여물지를 못하더랬다. 어제보다 더 나은 나날을 보낼 수 없어서 언제부턴가 정지하고야 만 성장. 실로 어리석은 면면을 수두룩이 내비쳤으니 부정 못 할 명제이다.

그러니 기원대로 타인을 양분 삼아 알기로 하였다. 인간과 현신을 가리지 않고서 모두를 범주에 몰아넣었다. 앎으로써 성숙해지리라 여겼다.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생에 타인을 낱낱이 새겼으므로 어느 누구라도 불가분하였다. 그리 각인된 까닭으로 어떠한 마음이 일어났다.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가 발원하였다.

역설되기를, 자와 타가 나누어졌다. 나와 네가 구분되었다.

잘 벼린 촌철의 언사로 네가 나를 찔렀던 때를 기억한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신도를 하릴없이 기다리는 초라함, 생을 연명하기 위하여 아등바등 애쓰는 비루한 작태. 인간의 음성으로 나열하는 진실은 현신을 도구라 부를 만하였다. 쓰이지 않는다면 홀로 사그라지고야 마는 천부적인 숙명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아끼는 사람들이 제 눈을 가리고 애정만을 주며 키워온 탓으로, 모른 척해온 생존 조건을 이제는 몸소 받아들여야 했다. 보잘것없는 저라는 생을.

상처였다. 네가 싫고 미웠다.

아팠고 곪았으며 앓았다. 여실한 고통으로 알았다.

살아있음을, 살고 싶음을.

등 떠밀렸다. 네가 모진 말 뱉은 대로 멀어졌다. 잠시였다. 누군가를 두고두고 싫어하는 일은 그만큼 뇌중에 담아두어야 한다는 걸, 너는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라는 의문은 내게도 피어올랐다. 도구라 부르면서 너라는 돌조각으로 우리를 겨냥하는 이유가 궁금하여 다가갔다. 탐구심을 숨기고 선심을 가장했다. 돌아보건대, 잘 먹히는 수였다.

온 진실을 깨닫고 나면 사유는 감정을 수반한다. 이별을 두려워하여서 멀어지고자 저를 찌르고 할퀴는 팔매질은 자학으로 읽혔다. 그 어느날처럼 한 수 접을 수는 없었다. 네 뜻대로 너를 모르는 체하기에는 드디어 투명하니 보여서. 의문으로 지펴진 사유라는 불씨는, 이제 네게 감정으로써 연민을 품었다. 이해의 결실이었다. 심장은 없을지언정 영혼은 있다는 방증이었다.

사당을 돌아다니며 공물을 바친 너를 알았다. 하물며 외진 구석에 처박힌 내 마을에도 걸음하였음을. 뒤늦게 다가온 네 다정이 곤혹스러웠다. 이대로 스치듯 사라질 돌조각이라며 잊기에는 후회가 자명했다. 너라면 알고 있지 않겠는가. 한 번이라도 제대로 물어볼걸 따위로 수렴하는, 과거로 돌아가고픈 미련을. 우연으로 맺어진 현재의 인연을,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될 과거로 두고 싶지 않았다. 작별 인사 없는 생별, 그 공유된 상실을 제쳐두고서라도 너를 위무하고 싶었다. 배운 다정을 틀 삼아 손을 내밀었다.

너를 보고 있는 지금도,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다. 나의 이름 뜻대로.

낯을 숨기고 고개를 떨군 너에게서, 한 방울의 무언가 빛을 내며 떨어졌다. 네 이름 뜻을 떠올렸다. 미지라는 안개가 걷히고 이슬이 맺혔다. 감정에 뒤섞여 단 한 번 결로한, 어떤 순간의 아침이기를 바랐다. 종지부 찍혔으나 새로이 시작되는 그러한 아침. 어제라는 과거를 견디고서 오늘로 이어지는, 하루의 시초라는 서광이기를 바랐다. 오랜 시선으로 너를 담아둔 탓인지, 사위에 담긴 머리칼과 같은 색의 숲에 와 있다는 착란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발화한다. 회유가 길었던 만큼 확언은 짧아야 뇌리에 박히므로.

“뒤에서 지켜만 보아댔으니, 네 보폭이 얼마나 좁고 느린지 가늠이 안 되지만 말이야.”

여전히 네 손끝을 타고 불안과 무서움이 느껴진다. 이별을 내 몫으로만 두지 않겠다고 하는 네 단언은, 스스로 겁쟁이라 부를지라도 고통에서 성장하는 인간 같아서. 같이 걸을 길 위로 얹을 수 있는 답은 살아온 생으로 증명하는 일뿐이다.

“한 사람분의 생애를 몇 번이나 같이 보내왔는데.”

“너와 동행하는 일쯤이야 못 맞춰주겠어?”

 

혀에 밸 정도로 익숙한 타박을 싣는다. 나를 무어로 보는 거야. 제 마을 사람들이 나고 자라는 걸 곁에서 몇 차례나 보았는데? 걸음 맞추는 건 숨 쉬듯 가뿐하다. 네가 내밀 답과 내가 행할 일은 명쾌하다. 유쾌하기까지야 하다. 네가 내게 바라기만 한다면, 나는 너를 믿기만 하면 되었다. 이 신뢰를 배반하지 말아. 아이 같은 웃음이 비죽 새었다.

 

"고개 돌릴 일도 없이 네 삶에 함께할게."

 

기원과 신성으로 생이 다른 생을 붙잡으니,

아끼는 이 죽었음에도 안녕한 세계에서 영영 홀로일 수는 없다. 우리는 그럴 테다.

아끼는 이 사라졌어도 안녕한 세계에서 영영 홀로일 수는 없다. 우리는 그럴 테다.

카테고리
#기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