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 중

一四〇三年 / 一五二四年

과거 / 애향

一四〇三年

과거

그토록 나를 위해 주던 고마운 이에게 빚 하나 또 지기로 하였다. 물론 이 잘난 나로서는! 응당 지어져야 할 사당이지만 말이야? 장정 열댓이 나무를 고르고, 벽과 바닥에 흙과 회를 바르고, 기와를 굽고 기둥을 세우더니만, 주련 짓기까지가 몇 달이나 걸렸더라. 날 모시는 신도 아무개들 집 아무 데나 불쑥불쑥 들어가 툇마루에 앉아 밥이나 한 공기씩 얻어먹던 것이 몇 계절이나 되었더라. 세월아 네월아. 시간은 죽죽 흘렀다.

불야성을 이루던 장평에서 벗어나, 해가 지면 어둠만이 반기는 이 외진 촌락에서는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밤이 되면 모두가 암흑에 지질러졌다. 시커먼 장막은 어떠한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한탄을 불러일으켰다. 반역을 도모했다는 참소로 권력에서 밀려난 패배자의 둥지에서, 제 신도들은 안치형에 처한 죄수처럼 허하기 그지없었다. 실로 공허였다. 그에 울울히 채워지는 건, 낮을 피해 깊이 파묻어 둔 신도들의 비애였다.

여려니는 감각했다. 인석들의 곡소리로 내 귀 들쑤셔지기 전에 찾아나 가야지. 감정 있어 슬퍼하는 신도들 달래는 일은, 전부 내 몫이네? 현신을 이런 식으로 부려 먹다니! 심통이 났다. 초롱불 들어 첫 신도의 초가집 쪽문을 발로 찼다. 창호지 뚫린 건 내일 알아서 처리하라지?

고사리 한 움큼에 쓴소리 한 번, 미나리 한 젓가락질에 잔소리 두 번.

학당의 서탁도 아니고 식사하자는 소반 앞에서 저를 또 가르치더라. 그래, 그래라. 과거에 젖어 우는 소리를 듣느니, 미래를 살라며 저를 훈육하는 소리가 나았다. 그러다 지쳐서 숨을 돌리노라면.

“외딴 두메에 당신조차 묶어두어 송구스럽습니다.” 이딴 말이나 해댔지.

“무슨 억하심정으로 사과를 하는 거냐? 잘 먹고 잘 자고 하다못해 토실토실 궁둥짝까지 찌우고 있는 나한테,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질이야? 눈칫밥까지 멕이고 싶어?”

박주산채에 불과한 상차림을 불평 안 하고서 꿀꺽 삼키고 있는데, 밥맛 떨어지게? 친히 신성까지 내주어 함께였건만 어디서 현신에게 용서를 비는 오만을 저지르냐는 말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어제도 그제도 매일 이랬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현신인 저를 제하고서는 고여버린 일상. 예의를 몰라 무례하고 건방지지만, 알려주면 배우고 나아가 생동할 존재가 마을에 필요했다.

그것이 저였다. 누누이 말했잖아, 마을의 귀염둥이라고? 여려니는 두 발 딛고 서서 의재의 땅을 아이처럼 누리기로 했다.


一五二四年

애향

사유라는 지면 위로 감정을 먹인 붓 들어 일필로 써 내려간다 받는 이 행불되어 아니 쓰인 편지다 종지부 찍지 아니한다 마음이 분절되는 잘못을 저지를 수는 없다 형태 없어 퇴고하지도 못하는 탓에 비루하고 거칠지만 동시에 정신 빠져 가장 솔직한 연서가 될 테다 참회한다 회고에 겨워 불야성으로 몸소 걸음한 까닭으로 너희를 유실하였다 숫제 침통한다 서른 남짓한 늬 얼굴들 전부를 떠올린다 사람으로 본 떠져 뇌리에 각인되는 나의 상형문자여 나를 원망하여서라도 숨을 쉬기를 내 복장 찧어가며 하소연하고자 해서라도 어디선가 생을 연명하기를 미덥지 않은 현신이니 내키는 대로 상처 주기를 살아있어 온몸으로 감각하는 이 몸뚱어리가 곧 너희의 생존을 증명하는구나 끝끝내 우리는 붉은 실로 엮인 연이라 감히 여겨본다 해가 떠오르는 동쪽 지평 맨발 아래로 부수어지는 흙 알갱이 들어 올린 손끝으로 마중하는 바람 불어오니 심중에서 사무치는 고향 내가 너를 생각하면 네 역시 나를 생각하는 사당 구순 감쳐물어 짙어지는 빛깔 고운 열병 흉중에 아로새긴 세 음절은 그리움이요 고작 두 음절의 낙인은 사랑이니 그저 한 음절의 진실은 정으로 자각한다 터럭 뭉텅 잘라내어 조야한 신격으로 자박한다 흉중의 병증이 곪는다 오랜 툇마루에 앉아 사람 없는 쓸쓸함에 반나마 취한다 폐허다 메마른 찬웃음이 샌다 허울로 읽힐까 두려워 이만 말을 줄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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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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