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雪
“아, 추워…….”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입김을 호호 불어보았다. 괜찮아지는 건 잠시뿐 다시 추위는 몰려들었다. 어떡하면 좋지.
“거기서 뭐해요?”
“네?”
절 부르는 목소리인가 싶어서 옮긴 시선에는 저와 또래로 보이는 교복 입은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그 아이는 제 얼굴을 보고 놀란 듯 흠칫 몸을 떨면서도 천천히 다가왔다. 내 얼굴이 그렇게 보기 흉한가. 하긴 지금까지 몇 시간을 울었던 건지 모를 정도로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고, 볼에는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은 지 꽤 됐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그냥…….”
뭐라고 답해야 할까,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남자아이의 표정에는 의문이 가득 담겼다.
“게다가 교복도 처음 보는데.”
“아, 그냥, 여, 여행 왔어요.”
그 꼴로? 절 보는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여행이요? 그럼 뭐 숙소가 어딘데요, 봐봐요. 데려다줄게요.”
표정과는 다르게 다정한 말이었다. 말투는 여전히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듯했지만.
“없, 는데요…….”
“…….”
우현은 남자아이의 뒤를 쫄쫄 따라갔다. 한숨을 폭 내쉰 남자아이는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멀뚱히 바라만 보자 그 남자아이는 직접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차가운 손에 놀라 금세 떼버리곤 자기가 가지고 있던 핫팩을 우현에게 주었다. 얼마 안 걸리니 주는 거라며 덧붙였다. 어디 가는 거예요? 당연히 집이죠. 왜요? 어차피 갈 곳 없잖아요. 그건 그런데……. 정곡을 찌르는 말에 우현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슬쩍 남자아이의 뒤통수를 보았다. 저와 비슷하게 보였는데 살짝 더 큰 듯했다.
“다녀왔습니다.”
“어머, 누구니?”
“아, 안녕하세요.”
“친구.”
남자아이는 우현의 손목을 잡고 바로 화장실로 들여보냈다. 먼저 씻고 나와. 우현은 얼떨떨하게 들어왔다가 거울을 보고 기겁을 했다. 내가 지금까지 이 꼴로 돌아다녔다는 거야? 놀랄 만도 하네. 울어서 부은 얼굴은 심하게 흉했다. 우현은 얼른 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씻고 나오니 이번엔 방으로 데리고 갔다. 방은 심플하게 필요한 것만 있고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 우현은 방을 둘러보고 남자아이를 바라보았다. 남자아이는 옷을 꺼내서 우현에게 건넸다. 그러고 보니 몇 살? 저, 15살이에요. 난 17살인데 말 놓을게. 나보다 어릴 것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진짜 어렸네.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옷을 갈아입으려는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그걸 보고 있던 우현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문 쪽으로 돌렸다. 그런 제 모습을 본 게 분명한지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기, 그, 이름이 뭐예요?”
“김성규.”
“아, 전 남우현이에요. 근데 성… 규형. 전 어디서 갈아 입, 어?”
어느새 불쑥 저를 덮는 그림자에 우현은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었는지 성규가 서 있었다. 나와. 여기서 갈아입어. 우현은 잽싸게 옆으로 비켜섰다. 성규가 문을 열고 나가고도 잠깐 우현은 나간 문만 바라보았다. 놀래라…….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우현은 성규가 나간 틈을 타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성규가 건네준 옷은 생각보다 컸다. 제 옷이 아니라 어색한 느낌에 휙휙 몸을 돌려가며 옷을 바라보았다.
“뭐 하냐.”
또 부끄러운 꼴을 보였다. 우현은 볼이 벌게지는 것을 느끼며 멈추었다.
“옷이 생각보다 크네. 겉옷 때문에 나랑 비슷하게 보였나 보다. 너 생각보다 작구나.”
그런 말을 대놓고 하다니. 우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였다. 아직 성장기거든요.
“그래. 너 뭐 안 먹었지? 이거 먹어.”
우현은 그제서야 성규가 들고 온 것을 바라보았다. 음료수와 과자, 과일류였다. 우현은 울음이 터지려고 하는 것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 합니다…….
“여기로 왜 여행 온 거야?”
입은 열리지 않고 과자를 우물거리기만 했다.
“그것도 15살짜리가 혼자.”
“……그냥요. 근데 형 부모님은 뭐라고 안 하셨어요?”
“응. 너희 부모님은 아셔?”
“글쎄요…….”
말이 힘없이 축 처졌다. 성규는 그런 우현을 바라보았다.
“내일 갈 거야?”
“그래야죠.”
“그래.”
성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깊은 밤, 우현은 잠이 오지 않았다. 밑에서 자겠다던 우현을 보일러 안 켠다며 침대에 올라오게 했다. 침대가 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둘이서 자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우현은 벽을 보고 자는 성규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은데. 조금 추운 것쯤이야 별거 아닌데. 그래도 솔직히 조금 많이 성규가 고마웠다. 집에 데리고 와준 것도 모자라 먹을 것도 주고 입을 옷도 주었다. 아까 정말로 울뻔했었다. 사실 지금도 울 것 같은데 제 우는 목소리에 성규가 잠에서 깰까 봐 참고 있었다. 성규의 등을 계속 보다가는 못 참고 울 것 같아서 우현도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베고 있던 베개를 세게 꽉 쥐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너 돈 없잖아.”
“있어요!”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주말이 아니었다. 즉 성규도 우현도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다. 우현이야 그럴 생각으로 온 것이니 상관없지만 성규는 그게 아니지 않던가. 우현은 괜찮다며 그를 밀어냈지만, 성규는 듣는 채도 안 하고 우현과 함께 역으로 가고 있었다.
“너 거짓말 정말 못한다.”
“…….”
푹 숙인 고개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비웃는 게 분명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간지러워졌다.
표를 구매하고 이제 돌아가도 괜찮다는 만류에도 성규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기차를 타기까지 아직 30분여 정도 남았다. 우현은 성규를 힐끗거리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저 성규 형.”
“응.”
“고마워요.”
“너 지금 그 말 몇 번째인 줄 아냐?”
“그만큼 고마워서죠…….”
웅얼거리며 우현은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다음에 갚아.”
“다음에요?”
“응.”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현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좁은 한국에서 살아가다 보면 한 번쯤은 더 만날 수도 있었고, 사실 우현은 그러길 바라기도 했다.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우현은 어느새 지금만큼은 시간이 천천히 흐르길 바라고 있었다.
“남우현.”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가던 우현이 고개를 돌려 성규를 바라보았다. 성규는 우현에게 가까이 오더니 핫팩을 건넸다. 어제와 같은 핫팩. 핫팩은 이미 따뜻했다. 우현은 참고 있던 울음을 기어이 터트리고 말았다. 잘 참았는데. 마지막에 우는 모습 안 보이고 싶었는데. 성규는 그런 우현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울지 말고. 늦겠다. 얼른 들어가. 볼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준 성규가 이번엔 우현을 재촉했다. 얼른 가. 우현은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다시 한번 성규를 눈에 담았다. 다시 앞을 보고 걷던 우현이 돌연 뒤를 돌아 성규에게 뛰어갔다. 그에게 폭 안겼다. 형 정말 고마워요. 다음에 꼭…….
성규는 본인 스스로를 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것도 대화까지 해본 사람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도 그대로 두고 갈 성격까지는 못 될 뿐이었다. 아마 그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온몸이 얼어붙은 채로 교복을 입고서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을 누가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그래서 성규는 다소 충동적으로 그를 데려왔다. 이 정도까지 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부모님께는 두리뭉실하게 설명하고 아마 아무것도 안 먹었을 남자애를 위해 먹을 것을 직접 챙겨서 들어갔다. 제가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 본 적 없는데.
그 애는 놀리는 말에 투덜거리다가도 제가 챙겨온 것을 보고 울먹였다. 울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응. 너희 부모님은 아셔?”
“글쎄요…….”
괜히 물었네. 성규는 우현의 표정을 살폈다. 서글퍼 보였다. 우현은 표정에서 티가 잘 나는 사람이었다. 어려서 그런가. 성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이 올 리가 없지. 은근 예민한 구석이 있는 성규는 옆에 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잠이 들기 어려웠다. 여즉 잠을 못 자고 있었다는 걸 알면 우현이 마음에 걸려 할 것 같아서 성규는 최대한 가만히 자는 척을 했다. 우현 역시 잠이 안 오는지 뒤척이다가 절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금방 뒤로 돈 우현은 눈물을 참고 있는 것인지 제게까지 떨림이 느껴졌다. 뒤돌아서 달래줘야 하나 생각도 들었지만, 성규는 가만히 눈을 감는 것을 택했다.
우현이 떠난 지금도 성규는 역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우현이 아직도 제게 안겨있는 것 같았다. 한숨을 폭 내쉰 성규가 고개를 들어 우현이 들어갔던 곳을 바라보았다.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생애 처음으로 아무 이유 없이 베푼 친절이었다. 뒤늦게 핸드폰 번호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아쉬웠다. 그걸 알면 나중에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텐데. 만약 우현이 다시 온다고 해도 내가 또 맞이해줄 수 있을 텐데. 성규가 알고 있는 건 우현의 이름과 나이, 사는 지역뿐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갚으라고 했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눈을 감았다. 다시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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