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성우] Serenade

CHERRY by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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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부드럽게 이어지던 음이 엇나가며 끊겼다.

“미안.”

“미안할 거 없어. 다시 해보자.”

응? 재촉하는 목소리에 피아노 건반 위에서 머뭇거리던 손가락이 도로 내려갔다. 오늘은 그만할래. 성규는 말없이 우물거리는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왜 그래.”

“그래, 그만하자.”

이어지는 대답에 우현은 몸을 일으켰다. 성규의 시선이 우현을 따라 올라왔다. 선 채로 우물쭈물하던 우현이 입술을 뗐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묻지도 않은 말을 하며 우현은 빠르게 피아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왜 그래…….”

성규에게 붙잡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붙잡힌 손목을 보며 우현이 난처하게 웃었다. 이제 쉬고 싶은데. 힘들어.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내보아도 성규는 요지부동이었다.

 

한참의 기다림 끝에 성규가 입을 열었다.

“가지 마.”

“어?”

“같이 있어. 못 치겠으면 내가 들려줄게.”

“어어…….”

어영부영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남자 둘 앉기에는 좁은 피아노 의자에. 성규를 바라보자 성규도 우현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성규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피아노에 얹어진 손가락으로 돌렸다. 언제 봐도 예쁘고 가는 손가락이었다. 나와는 다르게 피아노 치기에 딱 좋은, 피아노에 어울리는 손가락.

“어떤 곡 듣고 싶어?”

“글쎄, 아무거나…….”

어차피 아는 곡도 별로 없는데. 푸흡, 그건 그래.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시작으로 건반이 부드럽게 눌렸다. 방금까지 우현이 연습하던 곡이었다. 분명 같은 악보를 보고 치는 것임에도 음은 확실히 달랐다. 제가 한 연주는 엉성하고 끊김이 잦았다면 성규가 연주하는 음은 부드럽게 저를 감싸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건반에서 떼는 순간까지도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연주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넋 놓고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우현아.”

“응?”

“어땠어?”

“좋았어. 잘하네.”

“어떻게 들렸어?”

“어? 그건……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부드럽게 절 감싸는 것 같았다고? 마치 제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고?

“이 곡 제목이 뭔지 알아?”

고개를 저었다. 성규에게서 피아노를 배운지 일주일 가까이 된 것 같은데 제목조차 아직 모르고 있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힐끗 악보를 쳐다봤지만, 제목은 적혀있지 않았다. 악보에 제목이 없는 게 말이 돼? 속으로 악보를 향해 화를 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처음에 성규가 알려주었던가? 이번에는 일주일 전 기억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여전히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모르는 게 당연해. 악보에도 안 적혀있고, 알려준 적도 없으니까.”

“아…….”

어쩐지 놀림을 당한 것 같은데. 불퉁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부풀려진 제 볼을 아름답다고 눈을 떼지 못했던 성규의 손이 감쌌다. 어? 우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성규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안 물어보길래 알고 있는 줄 알았어.”

그야 처음에는 성규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는다는 사실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으니까.

 

 

“피아노 알려줄까? 오랜만에 한 번 쳐볼래?”

그날도 늦은 시간까지 피아노 연습을 하는 그의 뒤에서 홀로 기다리던 우현에게 성규는 처음으로 제안했다. 갑자기 끊긴 피아노 소리에 성규를 쳐다봤던 우현은 성규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당황했었다. 이어지는 제안에 더욱 당황스러워졌지만, 성규의 눈빛에 우현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에게 피아노는 어릴 적 성규를 따라 한두 달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의 기억이 전부였는데 그 기억마저도 흐릿한 상태였다.

 

다시 마주하게 된 피아노는 역시나 낯설었다. 섣불리 고개를 끄덕인 게 아닌가 싶었지만 제 손을 감싸는 손길에 그 생각은 쉽게 날아갔다. 제 손을 잡고 조곤조곤 알려주는 목소리에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기도 했다. 혹여나 그 소리가 성규에게 들리지 않을까 긴장도 했었다. 지나친 긴장으로 실수를 할 때마다 성규는 괜찮다고 다독여주었다.

 

“오늘 어땠어?”

“…생각보다 좋았어. 재밌었어.”

“그래. 그럼 다음에 또 알려줄까?”

 

끝나갈 때쯤에 긴장이 완전히 풀린 우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일주일 동안 단둘만의 피아노 레슨은 계속됐다. 서먹해진 성규와의 사이도 전처럼 다시 좋아진 것만 같은 느낌에 그 일주일 동안 우현은 행복했다. “성규야, 좋아해.” 고백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성규와 우현은 부모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친했다. 게다가 집도 가까운 탓에 둘은 항상 붙어 다녔었다. 우현이 축구를 할 때면 성규도 어설프게 끼어들어 같이 했고, 성규가 피아노를 칠 때면 우현은 옆에 앉아 구경을 하거나 쉬운 곡을 따라서 치곤 했었다. 시험 기간에는 서로 마주 앉아 공부를 하기도 했었고, 가까운 거리여도 등하교를 같이 하기 위해 서로를 기다려주기도 했었다. 그렇게 친하던 둘 사이에 서먹함이 끼어들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진로선택을 앞뒀을 때였다. 어느 고등학교에 가고 싶은지 넌지시 물었을 때 성규가 잠시 고민하다 답한 고등학교는 여기서 조금 떨어진 예술 고등학교였다.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좋아했고, 그만큼 나름대로 열심히 쳐왔던 것을 아는 우현이었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같이 지내왔는데 이제는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었고,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어린 마음에 조금 서운했었다. 대답을 들은 우현의 표정은 저도 모르게 어두워졌었다. 그날 이후에도 같이 등하교도 하고 점심도 같이 먹고 평소와 같았지만, 분위기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우현아, 나 너랑 같은 고등학교 갈까?”

“아니, 성규야, 미안해…….”

 

우현은 놀라서 크게 고개를 저었고 그걸 본 성규의 표정은 모호했다. 이 대화를 끝으로 둘의 사이는 더욱 애매해졌고, 끝내 성규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고등학교는 우현과 같은 고등학교였다. 제 어린 이기심 때문에 성규가 저와 같은 고등학교를 가게 된 것 같아서 우현은 자책했었다. 성규는 그런 우현을 달래주었지만 둘 사이에 이미 생겨난 거리감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의 거리는 멀어졌어도 그동안의 습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서로가 곁에 없는 건 어색했다. 때문에, 정규 수업이 끝나고 늦게까지 남아 피아노 연습을 하는 성규를 기다리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등하교를 할 때, 별다른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거리도 가까우면서 우현은 항상 성규를 기다렸다.

 

 

정말 괜찮았다. 우현에게 말했던 고등학교는 꼭 가고 싶은 곳이 아닌, 가면 좋고, 안 가면 어쩔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피아노를 치니 예고에 가도 나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정말 딱 그 정도였다. 오히려 우현과 같은 고등학교에 가는 거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우현이 느끼기에는 달랐는지 그 부분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 썼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끙끙대는 모습은 귀엽기도 했지만 안쓰러움도 컸다. 게다가 우현과 이렇게 어색한 채로 있고 싶지도 않았다. 괜찮아. 그냥 말해본 거야. 거기 안 가도 돼.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했고, 고민 끝에 내뱉은 말은 “우현아, 나 너랑 같은 고등학교 갈까?”였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우현을 보고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어라 더 말해야 네가 이해를 할까. 답지 않게 당황해 아무 말도 못 했고, 대화는 흐지부지하기 끝나버렸다.

오늘은 대화해야지, 해야지, 하던 걸 계속해서 미루다가 같은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고 말할 때, 다시 한번 제 생각을 말했지만, 우현의 반응은 미적지근했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말하자 생각해왔던 건 이제 힘들게 되었다. 하루에 우현이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등하교 시간과 점심시간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 피아노를 치는 시간. 말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붙어있었지만, 우현이 저와의 대화를 어려워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우현과 멀어지는 건 싫었다. 그래서 기회를 보고, 또 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계속 불편하게 지내느니 차라리 먼저 놓아버릴까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귀찮은 건 질색이지만, 이 손을 놔버렸을 때 보게 될 우현의 표정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현재진행형인 제 마음도 거슬렸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어렸을 때부터 수년째 이어온 짝사랑을, 우현을 먼저 놓을 자신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를 좋아하게 되는 여느 소설들처럼 귀엽고 다정한 우현이 자연스레 제게 스며들었었다. 강아지처럼 신나게 공을 쫓는 모습, 공부한다고 앉아놓고 조는 모습, 싸울 때 울먹이는 모습, 화해할 때 못 이기는 척 제 손을 잡는 모습, 절 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쭈뼛거리면서도 제 옆에 있는 모습, 절 기다리기 위해 음악실에 올 때마다 신기하다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 등 우현의 모습들 하나하나가 전부 제 마음속 깊이 박혀있다. 특히 피아노를 칠 때마다 뒤에서 절 보며 눈을 반짝이는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저 좋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정도였다. 학원과 집에서 할 수 있음에도 학교에 남아서 피아노를 치는 것도 전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던 도중 우현에게 ‘피아노 알려줄까? 한 번 쳐볼래?’ 같은 말을 건넨 건 다소 충동적이었다.

 

 

 

“우현아, 오늘 무슨 일 있어?”

“응? 아니, 없는데.”

“그럼 아직도 자책해?”

“갑자기 그게 왜 나와…… 이제 안 해.”

 

네가 하지 마라며…….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여전히 귀엽게 느껴졌다.

 

“그럼 왜 그런 거야?”

“별일 없어. 오늘은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야. 그것보다 곡 제목은 뭔데 말을 안 해줘?”

 

거짓말도 말 돌리기도 서투르네, 그것마저도 귀엽게.

 

“오늘 내가 고백받는 모습 본 거지?”

“어? 그걸 어떻게…….”

“그래서 이렇게 힘이 없는 거야?”

 

우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표정에서 충분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서 성규는 조금 더 우현의 마음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난 그랬으면 좋겠다. 이 곡이 뭔지 물었지? 세레나데야.”

“세레……나데?”

 

우현은 제가 알고 있는 그 세레나데가 맞나 고개를 갸웃했다. 뒤늦게 무슨 곡인지 알고 나니 빈번히 일상생활에서 들어본 듯한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곡도 몰라봤구나 싶어 새삼 무지함에 민망한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너한테 들려주고 싶어서 또 네가 나한테 들려줬으면 했던 곡이었거든.”

 

제 무지함에 혼자 민망해하고 있다가 우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걸 왜 나한테?

 

“우현아, 좋아해. 너는 어때?”

 

 

 

 

“우현아?”

 

아무 반응도 없더니 갑자기 잡고 있던 성규의 손을 쳐냈다. 그러곤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푹 숙이는 우현의 행동에 성규는 당황했다. 우는 거야? 내가 너무 놀래켰나? 근데 이게 이 정도 반응이 나올 정도의 말이었나? 우현아, 고개 좀 들어봐.

 

“……하게.”

“뭐?”

“조용히 해봐, 나 생각 좀 하게!”

 

어쩔 줄 몰라 하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저도 모르게 나온 큰 목소리에 똑같이 당황했지만, 그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지금 다른 큰 문제가 있었다. ‘좋아해.’라니. 가뜩이나 머릿속이 어지러운데 더욱 심화시키게 만드는 성규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는 게 안 보고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대로 정신을 놓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을 해야 하지. 이대로 일어서서 뛰어나갈까. 그러면 성규는 과연 날 잡을까. 근데 이게 이 정도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나. 처음에 든 생각은 혼란 그 자체였다.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인지가 안 됐었다. 10여 년 넘게 알고 지내온 소꿉친구에게 고백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드라마나 소설 같은 곳에서나 나오는 단골 소재였지, 그 주인공이 내가 될 줄이야. 더군다나 우리 둘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색한 사이였는데.

 

“혹시 기분 나쁜 거면…….”

 

우현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성규를 바라보았다. 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긴장으로 얼룩진 표정. 성규가 긴장을 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헤아려봤다. 고등학교 입학시험 때도 긴장 안 했었고, 더 옛날 일을 생각해보자면 어릴 적 피아노 콩쿠르에 나갈 때도 그는 별로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규를 응원차 보러 갔던 우현이 더 긴장했었지.

 

“너 정말 나 좋아해?”

“응. 좋아해.”

 

한 치의 거짓도 없어 보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우현이었다.

 

“싫은 건 아니야. 그냥 놀랐던 거니까. 난 정말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러겠지. 일순간 얼굴에 쓸쓸한 표정이 번지는 걸 본 우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저어가며 부정했다.

 

“널 안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고백을 받을 줄 몰랐다는 거야!” “그래.” 애써 부정하는 우현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고, 성규는 그걸 숨기지 않았다. 웃음을 본 우현은 금세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말하니까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런다고 널 그동안 좋아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웃지 마!

 

“그럼 나 차인 거야?”

“…….”

 

우현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고민할 것도 없이 거절할 사항인데, 거절할만한 고백인데 왜 망설여지는 걸까. 우현 역시 그 답을 알 것 같지만 믿기 힘들었다. 난 정말 맹세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단 말이야. 근데 왜 이런 복잡한 기분일까.

 

“난 잘 모르겠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모호했다. 왜냐면 정말 모르겠으니까. 거절하기는 어렵지만 그런다고 받아주기엔 아직 제 마음을 몰랐다. 좋지만 지금까지 친구로서 좋다고 생각했던 거였다. 하지만 이대로 우리는 친구라고 선을 긋고 거절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러니 나한테 잘해봐.”

“어?”

이번엔 처음 보는 멍청한 표정. 김성규도 그런 표정 지을 줄 아는구나. 우현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성규를 바라보았다. 못 들었어? 나한테 잘하라고. 일단 너 하는 거 봐서 답해줄게. 그 고백 받을지 말지.

긍정적인 거지? 놀랐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현을 바라보다가 살풋 웃었다. 이 강아지가 끝까지 마음 졸이게 하네.

 

같이 하던 연습을 이어가기는 힘들 것 같아 둘은 나란히 학교에서 나왔다. 성규도 우현도 말이 없었다. 항상 같이 걷던 길이었는데. 전이라고 말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김성규.”

“응.”

“성규야.”

 

성규는 대답 대신 우현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도 우현은 꿋꿋이 앞만 보고 걸었다.

 

“나 진짜 자책 안 했어. 고등학교 올라와서는.”

“그래.”

“그냥 어색해서 그랬어. 그 후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었거든. 부끄럽기도 했고.”

 

생각해보면 이것도 웃기네. 다른 애들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치댈 수도 있는 거였는데. 그 상대가 김성규라면 더더욱 쉬웠을 텐데.

 

“근데 이렇게 다시 전처럼 대하는 거 보니 내가 뭘 망설였던 걸까 싶어.”

“아, 더 일찍 고백할 걸 그랬네.”

 

잠시 아무 말 없던 우현이 성규의 등을 한 대 쳤다. 역시 진지함이라곤 없는 김성규. 아프지도 않으면서 성규는 엄살을 부리며 우현에게 가까이 붙었다. 저리 떨어져. 싫어.

이미 옆에 바싹 붙은 성규는 떨어질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오히려 더 달라붙자 우현은 몇 번 더 시도한 끝에 떨쳐내기를 포기했다. 이제 아무 반응 안 하는 우현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 정말 너 좋아해.”

“알아.”

“가벼운 것도 아니야.”

“그것도 알아.”

“잘할게.”

“당연히 그래야지…….”

 

 

 

자야 하는데…….

우현은 침대에 누워 멀뚱히 천장만 바라보았다. 아까 그런 말을 들어놓고 잠이 오기를 기대하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인가.

‘우현아, 좋아해.’

히익. 우현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응, 좋아해.’

뜨거워지는 볼을 느끼며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폭 가렸다.

‘나 정말 너 좋아해.’

이제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과할 정도로 뛰는 심장에 잠은 저만치 날아간 지 오래였다. 우현은 억울해졌다. 내가 왜 김성규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이래야 하지? 김성규는 지금쯤 내 상태도 모르고 잘도 자고 있겠지? 욱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집어 들어 김성규를 번호를 꾹꾹 눌렀다. 화면에 떠 있는 11자리 숫자를 보며 통화를 누르려는 찰나 머릿속에 한가지가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내가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알면 김성규가 좋아하겠지? 난 누구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좋아할 거라는 생각에 번호를 한 자리, 한 자리 꼼꼼히 지우고 핸드폰을 다시 내려두었다.

침대에 풀썩 누워 눈을 감은 우현은 억지로라도 아까 본 김성규 얼굴과 아까 들은 김성규 목소리를 지우려 애썼다. 나도 의식 안 하고 싶은데. 김성규가 뭐라고…….

 

‘좋아해.’

눈이 다시 번쩍 뜨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잠들기 그른 듯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김성규에 대해 생각이나 해보려고 했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 거지? 해야 될 것 같긴 한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먼저 거절하기 힘들었던 이유부터? 아니면 그 전으로 돌아가 김성규에 대한 것부터? 으으…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데.

머리를 감싸고 한참을 끙끙 앓다가 우현은 힘겹게 모든 생각을 떨쳐내고 김성규를 떠올렸다. 내게 있어서 김성규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 하지만 고등학생 때는 조금 어색해진 친구. 언제든 그는 나한테 있어서 항상 친구일 뿐이었다. 어색해진 이후로는 그를 항상 의식하긴 했어도 김성규처럼 좋아한다는…그런 의미로는 아니었다. 여전히 그가 친구로서 좋지만, 전처럼 지내지 못하자 미련이 흘러넘쳐 그런 거였다. 그러던 중 성규가 먼저 제안을 해줘서 기뻤고 그 짧은 기간에 잠시나마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기뻤다. 그리고 고백을 받던 모습은 어째서인지 부풀어 있던 마음을 푹 가라앉게 했다. 아. 이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고 보니 성규는 그 고백을 받아줬을까? 절 좋아한다고 했으니 당연히 거절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신경이 쓰였다. 몇 번의 고민 끝에 우현은 핸드폰을 들었다. 톡에 들어가 보니 마지막 대화도 정말 오래되었다. 일이 있으니 먼저 가라는 대화만 있었던 대화창에 먼저 톡을 보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너 받았던 고백은 거절한 거지?’ 이건 너무 노골적인가? 화면 위에서 방황하던 손가락을 움직여 여러 단어들을 조합해보았지만, 마땅히 괜찮은 말이 없었다.

 

‘자냐?’

 

머뭇거리던 손가락이 전송을 꾹 눌렀다.

어떡해! 우현은 핸드폰을 던져놓고 베개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이 새벽에 이게 무슨 짓인지. 그냥 보내지 말고 잘걸. 보냈던 걸 지우기에도 보냈다는 흔적은 남겨져 있으니 더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어쩌지도 못하고 자책하는 찰나 던져둔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니 역시나 김성규였다.

 

“여보세요.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건 무슨 예의야.”

 

괜히 툴툴거려봐도 들려오는 건 웃음소리뿐이었다.

 

“이 시간에 톡 한 건 누구더라.”

……웃지 마. 내 말은 웃느라 듣지도 못한 건지 더 큰 웃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나 전화 끊는다.”

“알았어. 미안. 안 웃으면 되지?”

얄미운 자식. 전에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너 성격 변한 거 알아?

“그보다 왜?”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거였어. 왜 톡 한 거야? 내가 보고 싶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툭 끊었다. 역시 변했어.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게나. 우현은 핸드폰을 도로 던져두고 베개 속에 다시 파묻혔다. 이번에는 시끄러운 벨소리 대신에 톡 알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왜 전화 끊었어, 톡도 안 보고. 너 안 자고 있었잖아.

아닌데, 나 자고 있었어.

만나자마자 한다는 말이 저거다. 우현은 모른 척, 아니, 정확히는 성규를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지각해. 빨리 와.

“남우현, 진짜 끝까지 말 안 해주지.”

“어.”

 

멈춰 서 있는 성규를 뒤로 한 채 우현은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갔다. 뒤늦게 투덜거리는 소리와 뒤따라 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됐는데도 불구하고 어제와 오늘 알게 된 모습들이 많았다. 이건 친구로서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아마……. 우현의 얼굴에 옅게 미소가 서렸다. 응? 웃는 거야? 어느새 옆에 선 성규가 우현을 보고 갸웃했다. 아니야, 바보야. 금세 표정을 지워낸 우현이 불퉁해진 표정을 지었다. 너 요즘 그 표정 자주 짓는다. 너 때문이잖아.

 

우현은 어제 성규와 전화를 멋대로 끊어놓고 혼자 다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솔직히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다시 가까워진 관계에 당황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그런 관계라고 해도 그동안의 공백이 있었으니까.

몇 번을 생각해도 역시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모르는 걸까 스스로가 의심되었다. 둘 사이에 어색함이 있으면서 끝까지 그 관계를 놓지 못했던 점이나 고백 장면을 보고 싱숭생숭했던 점이나. 무엇보다도 성규의 고백을 바로 거절하지 못했던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동안 친구라고 포장했었던 마음이, 심지어 제게 고백하는 성규에게도 우리는 친구라고 했던 그 마음이 사실은 진심이 아니지 않았을까. 사실 우정이라는 것보다 더 깊지 않았을까. 그러니,

어쩌면 나도 그동안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런다고 해서 우현은 아직 성규처럼 제 마음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알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게 제 마음이라 섣불리 그에게 전해주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소중했으니까, 김성규가 소중한 친구니까 더욱 그랬다. 그래서 당분간은 조금 더 숨기기로 했다. 그리고.

 

“왜 그러는데.”

 

쩔쩔매는 성규의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 재밌었다.

 

“내가 뭘. 얼른 가자.”

 

그래도 저한테 쩔쩔매는 김성규한테 이 정도는 해줘도 괜찮겠지. 우현은 성규의 손을 잡았다. 귓가에 닿는 웃음소리가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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