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다
좀 노란장판감성임... 시기상 말 안놓았을거같은데? 말 안놓으니까 더 불쌍해보여서... 고침
나흘 전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가 서점으로 찾아왔다. 자기 말로는 여자친구를 나한테 뺏겼다고 하는데 대체 걔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이름을 들어도 기억나는 게 없어서 더 억울했다. 최근에는 나름대로 조용하게 살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랬다. 이딴 곳에서 시급이나 받아먹고 일하는 거지새끼가 남의 여자를 넘봤다고 주먹다짐이 일어날 뻔 했다. 그 말에 기분 나빴을 법도 한 사장님이 남자를 말려서 적당히 으름장으로 끝났던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사실 여기는 시급 못 받는다. 얼굴이 다칠지도 모르니 맞기는 싫었고 싸우기도 싫었으니 말려준 것은 고마웠지만 마지막이라고 건네준 봉투 안에는 사고 때문에 망가진 책값을 제외한 지폐 두 장과 동전 몇 개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다시는 이 서점 오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틀 전에 새로 일할 곳을 구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천운이라고 생각할 만 했다. 불의의 사고로 지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이쪽은 급여도 높았고 일하는 시간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모모도 기뻐했다. '분명히 잘생겼을테니 보러 가고 싶지만 시간이 맞지 않을 것 같아서 아쉽네요'. 그렇게 말했었는데. 지금 꼴을 보면 그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유니폼으로 입게 된 웨이터복 위가 알콜 냄새로 흥건했다. 반쯤 숙인 머리에서는 투명한 색의 술이 똑똑 떨어졌다.
"나가, 이 새끼야! 얼른 꺼져!"
이런 곳에서는 금방 여자도 붙고 시비가 붙으니까 조심하려고 했는데. 쌀쌀맞다고 클레임이 들어와 이런 꼴이다. 옆에서는 동료 직원들이 어쩔 줄 몰라 했고, 들은 대로 옷을 갈아입고 나가는 와중에 지배인이 내 손에 색이 다 바랜 봉투를 쥐어주었다. 사장이 오늘 도박하다가 돈을 날려서 기분이 나쁜 것 같았다고.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소문 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느낌이었지만 사실 나는 주위에 소문 낼 사람도 없었다. 봉투를 주머니에 대충 우겨넣고 술 냄새 풀풀 나는 머리를 수습하기 위해 공원 수도에서 대충 머리를 감았다. 한밤중이었고, 곧 겨울이었다. 모모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칼바람이 불어서 몸이 얼음장 같았다. 손도 시려웠고 보지 않아도 뺨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귀신처럼 날아와서 젖은 뺨 위에 착 붙어버리는 낙엽이 제일 서러웠다.
집 앞 골목에 서서 꾸깃꾸깃한 지폐가 든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다행히도 이틀 분의 급여보다 더 많이 들어있었다. 장사가 잘 되는 곳인 건 알았는데 그래서일까. 끼얹어진 술값을 제하겠다고 하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는 황량한 집이라지만, 그것도 모모와 같이 살고 있는 집이라고 이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 같다. 지폐만 손에 쥐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직 머리가 축축하고, 손발과 피부가 다 시려웠다. 서랍 안에 돈을 넣어두고 대충 닫아두었다. 시계를 보니 곧 모모가 올 시간이라 빠르게 수건으로 물기만 닦기로 했다. 들키면 분명히 속상해할 테니까 그냥 잘렸다고만 말하자. 코가 냄새에 익숙해져서 이제 술냄새가 얼마나 나는지 분간도 가지 않았다. 추워서 이불을 덮고 있으니까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왠지 모르게 자는 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으…, 술 냄새. 유키, 술 마셨어…?"
아마 일어나 있었으면 저 질문에 응, 하고 대답해야 했을 거다. 아르바이트에서 잘릴 때마다 별 일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오늘은 하기 싫었다.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으니 현관에서 걸어 들어와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곳으로 향하는 듯했다. 인기척이 들려오자 나는 도롱이벌레처럼 벽 쪽에 붙어 몸을 웅크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기색이 나서 티가 나지 않게 눈을 꼭 감았다. 가까이에 와서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게 과연 광견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후각도 그만큼 좋은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어도 이 정도면 엄청난 취객으로 보이겠지만.
제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는가 싶더니 서랍이 드륵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의 일당을 안에 넣어두려고 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이틀간 벌었던 일당이 들어 있겠지. 어차피 모모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안 할 거니까 그냥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아마 저 정도면 내일은 고기반찬을 내놓을 수 있을 거다. 열어두고 잊어버리기라도 한 건지 한참을 가만히 있는 탓에 다 식은땀이 났다. 자는 척 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 묘한 정적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 침묵이 조금만 더 이어진다면 눈을 뜨고 미안하다고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눈을 뜨지 않으려고 미간에 힘을 너무 많이 줘서 주름이 지기 직전에 모모가 다시 다가왔다. 화요일 자정 너머에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온 모모에게서는 고기 구운 냄새가 진하게 풍겼는데, 고기라고는 입에 대지도 않는 나도 오늘은 술 냄새보다 그쪽이 더 좋았다. 항상 현관 앞에서 냄새를 뺀다고 옷을 펄럭이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다가왔으면 아마 몸에 코를 묻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앞에 쪼그려앉아 어둑어둑한 방 안으로 새어들어오는 빛에도 그림자가 졌다. 모모가 손을 뻗어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유키 씨, 감기 걸리면 안되는데."
그러고서는 나를 몇 번 토닥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먼지가 되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모모는 내가 먼지가 되어도 열심히 공양해줄 것 같으니까 되면 안될 것 같지만. 분명히 머리카락은 다 말랐는데 왜 이렇게 축축한 건지 모르겠다. 씻고 돌아온 모모가 옆에 누워서 고기 냄새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비누 냄새를 풍길 때까지의 시간은 너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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