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흑왕

앨리나나 AU 하얀 장미정원에서

나나계 by 휘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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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빛 한줄기 들지 않는 아침이 묘하게 밝았다. 하얀 왕의 방 안에는 번잡스럽지 않을 정도로의 커튼이 여러 개가 달려 있어 기분에 따라 일조량을 조절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암막커튼은 하얀 왕이 가장 애용하는 종류였다. 아침에 빛 한점 들지 않게 해주고 완전한 어둠 속에서 편안하게 수면을 취할 수 있게 해주니까. 추위는 싫었지만 아침 햇살은 그것보다 더 싫었다. 햇빛이 내리쬐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정오라는 걸 알 수 있어서. 그러니까 평소처럼 암막커튼 아래에서 푹 잠들어 오후가 될 때까지 깨지 않을 셈이었는데….

"…일어났어?"

커튼을 열어젖히고 제 이불을 빼앗은 이 불경한 놈은 또 누구란 말인가. …한 놈밖에 없지만. 찔러도 간단히 죽어버리지 않는 상대라는 게 떠올라 더 분노가 치솟았다. 아무리 같은 왕이라고 한다지만, 자신의 방에 멋대로 들어와서는 단잠을 깨우기까지 하다니. 침실에 검이 있었던가, 얼굴을 베개에 묻으며 머리맡을 더듬었지만 그런 날붙이를 머리맡에 두고 잘 정도로 왕의 삶은 흉흉하지 않았다. 

"…드디어 실성한 건가? 죽고 싶은가 보지…."

"벌써 열한 시라고? 슬슬 일어날 때야."

자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비몽사몽으로 저를 벨 검을 찾는 모습이 검은 왕의 눈에 꽤나 오싹하게 보였다. 잠들어 있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도 30분 정도, 죽을 때까지 보고 있어도 전혀 질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더 늦다가는 점심시간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배고프면 절대 움직여주지 않을 테고, 막 일어나서 뭐가 뭔지 모를 때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따라 나와주지도 않겠지. 나름대로 머리를 쓴 행동이었다. 하얀 왕이 제 부스스한 머리를 헤집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하품을 하며 짜증을 내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일어나 상대에게 폭력을 휘두를 것 같았다.

"무슨 용건이지."

"저번의 별 모양 과일, 맛있다고 해서 원하는 거 하나 들어주기로 했잖아? 그걸 받으러 왔는데."

당연히 용건이 없으면 보러 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다짜고짜 캐물었다. 용건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히 예전이었다면 이런 태도에 꽤나 상처받았겠지. 하얀 왕의 말투에 익숙해진 검은 왕은 별생각 없이 용건을 입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는 무뎌진 모양이었다. 벌써 몇 년인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분간조차 가지 않는 세월을 이 세계에서 보냈다. 

별 모양 과일이라고 하면 이전에 검은 왕이 하얀 왕에게 가져다주었던 말 그대로의 별 모양으로 생긴 과일을 말했다. 식감도 맛도 향도 훌륭해 상등품이라고 판단한 하얀 왕이, 검은 왕이 바라는 것을 하나쯤 내키는 대로 들어주겠다고 약속해버려서. 일전에는 장미 정원에 같이 간다고 했던 약속을 무참히 깨버렸지만. 

하얀 왕은 자신밖에 모르고 자존심이 높은 편이지만 그만큼 빚을 진 것이 있으면 흔쾌히 갚기도 했다. 그 빚의 청산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것과는 꽤 다른 경우도 많았지만. 어디 이 세계에 감히 왕에게 빚을 지우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이상한 세계의 왕은 두 명이었으니까. …왕인 주제에 아무 데나 쫄래쫄래 놀러 다니는 검은 왕이 체통이 없다고 생각해도 이런 특이한 물건을 가져오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그런 말을. …하기는 했었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주제에 이런 어중간하게 중요한 것은 가끔 기억해내고는 했었다. 표정을 보니 벌써 잊어버리지는 않은 모양이지. 검은 왕이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러니까, 같이 장미 정원에 갈 거야.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지? 사람들의 진상품이 마음에 들면 엄청난 상을 주면서, 왕인 나에게는 이것도 해주지 못하겠다고는 얘기하지 않을 테니까."

헛소리. …라고 일축하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들어줄 용의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얀 왕은 그 일을 떠올리면 감히 제 방에 멋대로 들어온 검은 왕조차 너그러이 용서할 아량이 있었다. 물론 이런 일이 두 번 있었다가는 목이 잘리겠지만, 그 과일은 꽤나 맛이 있지 않았던가. 초대 방식은 잡스럽지만 외양을 보면 자리를 가지기 위해 격식 있게 단장하고 온 모양이었고. 외견이 깔끔한 것은 싫지 않다.

"티파티가 고작 며칠 후인데 그걸 못 기다리고."

"나야 네가 늘 말하는 것처럼 품위 없고 엉덩이가 가볍잖아. 아, 시종은 부르지 않아도 괜찮아. 옷 갈아입는 건 내가 도와줄테니까."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불러도 검은 왕 자신이 무를 듯싶었다. 왕이 되어 시종이 할 일을 자처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자는 사람 돌보는 것이 능숙했다. 얼른 산책을 끝내고 돌아와서 다시 잠들고 싶었으니 옷을 제 취향껏 고르는 듯한 움직임도 적당히 넘어갔다. 어차피 맞지 않는 옷은 옷장에 넣어두지 않으니까. 

씻고, 옷 시중을 받고. 무릎을 꿇은 채로 제 구두를 신기는 남자는 태생부터 이 자리가 자신에게는 가장 어울린다는 듯 굴었다. 호위병과 시종도 다 미리 물려둔 것인지 따라오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하얀 왕이 귀를 기울이면 쥐죽은 듯 숨은 숨소리가 들렸지만 겉으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성에서 장미 정원으로 향하는 세상에 단둘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본래 하얀 왕은 혼자 있어도 쓸쓸함이라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렇게 조용한데도 기분 나쁜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그 감각이 불쾌할 정도로 기이했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빨간 장미를 하얀 장미로 바꾸라고 했던 하얀 왕의 무리한 명령도 시종들은 훌륭하게 완수해냈다. 가장 큰 문제라고 하면 정작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며칠이 지나고 한참이 또 지날 때까지 그 자신이 확인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검은 왕이야 매번 나돌아다니기 일쑤니 보기 싫다고 해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밤사이에 장미 가시를 손질하느라 손이 엉망이 되었을 시종들이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혼자서가 아니라 하얀 왕과 같이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정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지 않고 성 밖을 들락거렸다는 점에서 검은 왕의 집착도 알만했다. 

온통 하얀 장미로 뒤덮인 정원은 한눈에 보기에는 너무 넓었다. 처음 이 세계에 오게 되었을 때도 이곳에서 눈을 떴었지. 하얀 왕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부정적인 의미로 눈여겨보았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너무나도 익숙해져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었지만.

"이 큰 곳을 하룻밤 사이에 전부 뒤엎다니… 정말 대단하다니까."

"명령이니까 당연히 따라야지."

그런 당연한 소리를 왜 굳이 입에 담는 거지? 하얀 왕의 표정에 검은 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작 본인은 이곳의 장미가 바뀐 것도 오늘까지 모르고 있었을텐데. 명령만 내려두면 뭐든지 다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실제로 그랬고, 왕의 명령은 절대적인 세계였지만. 알 수 없는 힘이 자신들을 이 세계에 묶어두듯 왕의 자리 역시 그 힘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검은 왕과 달리 하얀 왕이 폭정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것이 한몫했다. 그런 이상한 논리 따위 얼른 사라져버리면 좋을 텐데. 이 얘기도 벌써 몇 년을 되뇌고 있는 건지.

"…혼자서 오면 안 됐던 거야? 나를 데려오지 않으면 장미가 다시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도 아니잖아."

이 산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자는 도중에 깨워졌으니 심기가 불편한 것이 당연했다. 검은 왕은 처음 정원을 갈아엎으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자신에게 집요하게 동반 산책을 권하고 있었으니까. 선물에 대한 보답이니 어울리고 싶을 때까지는 어울려 줄 생각이었지만 그 점은 몇 번을 생각해도 이상해서. 자신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건지, 하얀 왕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혼자 오면 더 빨리 구경할 수 있었고, 더 느긋하게 돌아볼 수 있다. 

"같이 보고 싶다고 했잖아? 정말 그것뿐이야."

같이 있고 싶고, 같이 보고 싶고. 둘이서 시간을 보내면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 것뿐. 그렇게 간단한 이유인데도 알아주지 않아서.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은 걸까 가끔 의심해버린다. 매번 유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지만. 

"빨간색도 좋지만, 이쪽이 더 예쁘잖아."

빨간 페인트로 칠한 장미도 아니고, 하얀 왕의 손에 목이 잘린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붉게 자라난 장미도 아니다. 예전에는 그 진한 향기가 좋았지만, 가끔은 피비린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말로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두 사람의 손에 죽어갔던 사람들은 이 장미 역시 붉게 물들이고 싶을지도. 그래도 내년이 오기 전까지는, 영원히 눈처럼 하얄 것이다.

"그런가, 빨간색도 마음에 드는데."

"난 하얀 색이 더 좋아. 눈 내린 것 같지 않아?"

겨울은 이제 다 지나갔지만. 겨울에도 꽃이 트게 하는 이 기묘한 세계는 붉은 장미 위를 눈으로 덮기도 했다. 검은 왕은 그 광경을 좋아한다. 눈이 내리면 원래 있던 세계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보이니까.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눈을 밟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눈이 내렸으면 절대 안 나왔어."

반면에 하얀 왕은 추위라고는 질색을 해서 눈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손끝이 시려질 정도였다. 왜 이렇게 거부감이 드는 단어인지. 그 말을 들으면 괜스레 속이 답답한 게, 추위를 너무 타서 체하기라도 한 듯싶었다. 그나마 날이 따뜻해져 봄이 와서 망정이지, 눈 덮인 정원 따위는 죽어도 걷고 싶지 않았다. 혼자 얼음판 위를 걷다 자빠지라지.

"…역시 그렇지?"

당연한 얘기를 듣기라도 했다는 듯 웃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검은 왕이 웃는 얼굴은 왜 이렇게 거슬리는지. 그래도 좋은 향기를 맡아 퍽 괜찮아진 기분을 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하얀 장미는 붉은 장미보다 은은한 향이 나서 가볍게 산책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검은 왕이 장미 넝쿨이 이리저리 얽힌 아치로 향했다. 하얀 왕은 마지못해 옆을 따랐다. 거리상으로는 뒤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나았지만, 적어도 검은 왕은 하얀 왕이 제 옆을 걸어주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비록 매번 엄청난 모욕을 당하고, 온몸이 조각나는 고통을 주는 상대였지만 어김없이 그를 사랑했다. 가끔씩 보여주는 부드러운 표정이 좋았다. 상냥하게 얽어오는 목소리가 좋았다. 기분이 내키면 저를 만지는 손길이 좋았다. 그건 이 세계에서, 불사와도 같은 자신의 목숨이 끝나는 날까지 변함이 없을 거라고 스스로 믿었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역시 잘 어울리네."

"매일 바깥을 쏘다니니까 그렇지."

하얀 피부가 부러워 꺼낸 얘기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제 행실을 타박하는 말에 검은 왕이 뺨을 긁적였다. 하얀 장미 속에서 가벼운 옷을 입은 하얀 왕의 모습이 예쁘다고 한 소리였는데. 하긴, 꽃이라면 정원의 장미부터 들풀까지 전부 어울리는 신기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 세계에서 왕의 자리에 앉아 기억을 잃은 뒤로부터는 들풀을 가져다준다면 손목을 잘라버릴 수 있는 인재가 되었지만.

아치의 틈과 덩굴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에 하얀 왕이 눈을 찌푸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냥 돌아본 건지 빙글 돌아 하얀 왕을 바라보는 검은 왕의 눈동자에 햇빛이 비쳤다. 투명한 눈동자가 정오의 햇살을 받아 여름처럼 빛났다. 

"…역시 빨간색도 나쁘지 않은데."

"이렇게 하얀색투성이인 곳에서 아직도 그런 말 하고…."

검은 왕이 하얀 왕의 눈에 햇빛이 드리워지는 것을 걱정했는지 손을 뻗어 눈 옆을 가렸다. 작은 손바닥 하나로 뜨거운 기운이 가려졌다. 자신을 위해 이리저리 노력하는 것은 싫지 않아서 그것을 가만히 놔두었다. 앞으로 나아가며 검은 왕이 손을 휘저었다. 아치 천장에서 하얀 장미가 하나 내려와 있었다. 손이 긁혀 피가 나는 것이 하얀 왕의 눈에도 보였다.

"돌아가서 관리인의 목을 쳐야겠군."

"됐어. 내가 꺾을게."

옆의 칸에 걸어두면 좋았겠지만 검은 왕의 키는 천장까지 닿지 않아서. 장미에게는 미안하지만 사람이 죽는 것보다야 낫다. 장미 하나가 튀어나왔다고 관리 소홀로 목이 잘리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줄기를 그대로 잡아당겨 꽃을 튿었다. 가시에 긁혀 손에는 상처가 더해졌지만 새삼스레 이런 잔 상처에 반응하지도 않는다. 길게 늘어진 줄기를 손에 감아 쥘 정도로는 고통에 무뎌졌다. 그걸 보고 있는 사람이나 겨우 신경 쓸까.

"상처를 버는 취미가 있나."

"너는 참 새삼스러워."

자신에게 비수나 검을 꽂아 넣는 것이 취미인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어도 하나도 걱정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걱정한 것도 아닐 테고. 미련하다거나, 더럽다거나 그런 소리를 하려는 거겠지. 땅에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아름다운 꽃이 핀다. 검은 왕이 덩굴을 손에 감고 향기를 맡았다. 그 표정이 퍽 행복해 보였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손이 가시에 찔리는데 그걸 꼭 쥐고 있는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미련하기 짝이 없다. 조금 더 약삭빨랐다면 제 앞에서도 그렇게 멍청하게 굴지는 않겠지만. 하얀 왕은 그런 생각을 했다.

해가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길고 커다란 아치를 지나면 예쁘게 꾸며진 벤치가 있다. 지붕이 있는 작은 휴식 장소는 누군가가 자주 들르지도 않는데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여 손질되어 있다. 방금 전에 하얀 왕이 목을 친다고 했던 관리인은 성실하게도 이곳을 다듬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사람이 관리하는 것도 아니지만.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걸 봐서는 관리하는 사람들도 여기를 좋아하는 거겠지. 몇 년이고 손님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곳을 매일같이 단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쉬었다 가."

"벌써 지쳤어? 아직 절반도 안 돌았잖아."

"네가 아침부터 깨웠잖아."

제대로 못 자서 그래. 하얀 왕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도 검은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왕이 먼저 벤치에 앉자 검은 왕이 조금의 거리를 두고 옆에 앉았으나, 그렇게 불편하다고 생각할 만큼 비좁지도 않아 굳이 옆으로 비키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아침에 그렇게 깨워졌는데도 기분이 좋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오늘은 검은 왕이 자신에게 적당한 무례를 저질러도 웬만하면 넘어가 줄 요량이 있었다. 아마 장미 정원이 예쁘게 피어있기 때문이겠지. 정원사들에게 포상을 내려야겠다. 아까 목을 쳐야겠다고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생각이었다. 

벤치 아래에는 유리 상자로 만들어진 연못이 있다. 아래에는 금붕어 크기의 하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다닌다. 이 세계에는 온갖 특이한 생물들이 많아서, 이 물고기는 물을 먹이로 삼는다. 뚜껑을 열어 물만 넣어주면 평생동안 작은 세계에서 녹지 않는 눈으로 살아가는 거다.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도 보았다. 검은 왕이 아래를 쳐다보고 있으면 하얀 왕은 문득 주위를 둘러본다. 언제였던지 이런 장면과 마주친 적이 있는 것 같다. 하얗게 만개한 장미꽃 사이에서 가만히 앉아 하얀 물고기를 내려다보던 상대. …검은 왕과 여기까지 동행한 적이 있었던가? 가끔 이상한 광경이 떠오르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이상했다. 시선이 느껴져 검은 왕이 고개를 들면 하얀 왕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움직여도 괜찮아? …저기 꽃밭까지만 보고 가자. 슬슬 배고플 것 같고."

"그래. …얼른 돌아갈래."

나는 미리 뭐 먹고 왔지만. 검은 왕의 말에 하얀 왕이 옆을 흘긴다. 어쩌라는 거지? 그 시선을 받으면 검은 왕은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낸다. 저 딴에는 배고프지 않으니 네가 괜찮다면 더 걸어도 된다는 뜻이었지만, 그런 말도 무언도 하얀 왕에게 통할 리가 없다. 

정원을 다 둘러보는 건 아니고 조금 작게 돌게 되었지만 하얀 왕이 걷는 것을 원체 싫어하니 어쩔 수가 없다. 중간에서 조금 끝에 위치한 꽃밭을 돌아 쭉 가로지르면 성에 도착한다. 산책 내내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했던 검은 왕도 이 즐거운 시간이 곧 끝난다고 생각하면 아쉬운 듯 섭섭해하지만, 하얀 왕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검은 왕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별로 내색하지 않았다.

하얀 장미라고 해도 종류는 여러 가지라, 어디를 지나도 보는 맛이 있었다. 약간 분홍빛을 띠고 있는 흰 장미가 널린 꽃밭은 보기만 해도 검은 왕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향기도 아주 조금씩은 달라서, 잔바람을 타고 콧잔등을 건드렸다. 가을바람처럼 선선한 자락이 장미 향과 함께 피부를 스쳐 가 기분이 좋았다. 하얀 왕이 추워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그 때 갑자기 돌풍이 불었다. 밭에 피어 있던 꽃에서 꽃잎들이 뜯겨 하늘에 날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옷자락도 머리카락도 다 날려 귓가에 바람 소리가 스쳤다. 검은 왕은 기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그런데도 너무 오래되어서, 잘 생각이 나지 않아서…. 

복사꽃의 색을 닮은 장미 꽃잎이 바람을 타고 날았다. 그 강한 바람은 유키와 제 주위를 감싸는 듯했으나 처음 이곳에 왔던 겨울날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모모는 꽃잎에 휘말린 것이 마냥 예쁘고 재미있는지 환하게 웃었다. 

"유키, 이거 봐…!"

어렴풋하게 풍기는 복숭아 향이 장미 향과 섞여 날아갔다. 유키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모모. 이름을 불렀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제 앞에서 웃고 있는 모모에게 손을 뻗었다. 하얀 장미 넝쿨이 들린 상처투성이 손이 잡혀 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그 손을 놓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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