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모모] Timeline
커미션입니다~ 주제는 정신연령만 퇴화하는 10 15 20 26살의 유키로 유키모모
‘큰일이에요, 모모 군. 유키 군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걸려온 전화에 휴대전화를 하수구에 떨어트릴 뻔했다. 전화기 정도야 얼마든지 고장 나도 상관없지만, 유키가 입원한 병실을 찾아가야 하니까. 도중에 유키가 깨어났는데 내가 전화를 받지 못하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손에 힘을 꽉 쥐고 택시를 잡았다. 대학병원 708호실. 708호…. 택시에서 내리면 바로 뛰어들어갈 수 있게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금액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가달라고 하는 손님에게 말을 걸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택시 기사조차 조용해서, 마치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유키한테 별 일 없어야 하는데. 의식 불명이라는 소리가 무언가의 선고처럼 들렸다. 도착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택시 기사에게 지폐 다발을 잔뜩 안겨주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허둥대다 못해 휘청거려서 다리를 접지를 뻔했지만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급하게 뛰어들어가 막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안에 타고 있는 환자들이 닫히다 만 문에 퍽 아쉽다는 표정을 했지만 기분 나빠 할 정신도 없었다. 환자와 보호자가 이용하는 승강기이기 때문인지 문이 닫히는 속도가 느릿느릿해 그 일분 일초에 속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7층에 도착하자 마자 거의 달리다시피 병원을 헤집었다. 708호. 특별실이라 그런가, 가장 안쪽에 있는 모양인지 길이 멀었다. 뛰어 들어온 것과 달리 병실 앞에서는 숨을 고르고서 얌전해졌다. 문이 조금 열려 있어 안에서 의사가 무어라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웅웅거려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괜찮겠지…?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별 이상은 없으니 금방 깨어날 겁니다. 자세한 건 더 검사를 해야겠지만….”
다행히 들어오자 마자 들리는 소리가 퍽 희망적이었다.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챘는지 오카링이 뒤를 돌아봤다. 그래도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유키를 보고 손발이 차게 식어서. 방금 괜찮을 거라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몸이 떨렸다. 유키, 괜찮은 거지?
“모모 군! 잘 왔어요, 곧 깨어날 거라고 하셔서… 모모 군이 옆에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유키, 많이 다쳤어…?”
“외상은 없다고 하네요. 차에 치였는데도, 정말 천만 다행이에요…. …아, 피의자는 지금 청취 중이에요. 신호등이 고장 난 쪽에서 생긴 일이라 좀 복잡하게 흘러가서.”
시에서는 대체 뭘 하는 거야. 고장난 신호등 하나 안 고치고 놔둬서 사람 다치게 하고. 마음만 같아서는 상대방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고 싶었지만 지금은 유키의 옆에 있는 게 우선이다. 낯선 병실에서 깨어났는데 옆에 아무도 없으면 역시… 좀 외롭지 않은가. 가뜩이나 유키는 병원도 싫어한다. 반 씨가 입원했을 때 내도록 병원에 출석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플 때 오기 싫어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병원 침대 위에 누워있는 건 누구든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반 씨의 상황을 떠올리면 또 가슴이 철렁거린다.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유키에게 누구도 감히 손댈 수 없도록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왔는 걸. 너무 놀라서 그런지 생각이 널을 뛰고 있다. 과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멈추기는 힘들다.
“모모 군도 많이 놀랐을 텐데, 앉아서 쉬세요. 두 명이나 몸져누우면 곤란하기도 하고.”
“…응.”
쉬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서 앉아 있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다. 보호자 의자에 앉아 있으면 오카링이 생수 한 병을 건네준다. 자리에서 올려다 보면 그 표정도 과연 피로에 차 있어서 머리가 조금 식는다.
“…미안, 오카링도 많이 놀랐을 텐데.”
“전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께 간단한 검사 결과도 자세히 들었고요. 신기하리 만치 뼈가 금 간 곳 하나 없다는데, 우유를 많이 마신 덕분일까요?”
“나도 통뼈긴 하지만, 앞으로 우유 더 마실래….”
“가급적 사고가 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긴장을 풀어주려는 셈인지 웃으며 뼈가 있는 농담을 한다. 의사 선생님은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병실 밖으로 나갔다. 대학 병원이니 많이 바쁘겠지. 그래도 괜찮다는 얘기를 거듭해서 들으니 조금 걱정이 덜어진다. …그래서 유키는 언제 일어나는 거지. 막 도착한 주제에 애가 닳아 이런 소리를 하는 것도 퍽 웃겼지만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유키는 보기가 어려웠다. 아마 산소 호흡기라도 끼고 있었다면 의사 멱살이라도 잡지 않았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한다.
유키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있으면 이런저런 것들이 눈에 띄고는 했다. 예를 들자면 흉통이 오르내리는 모습이라던가, 살짝 벌려져 있는 입이라던가…. …이거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잘 때도 이런 귀여운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자는 유키니까 의심스러워서. 설마 이런 상황에서 태평스럽게 혼자 잠을 자고 있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설마 싶어 불러보지만.
“유키…? …자?”
“설마….”
유키가 “…으응….” 소리를 내며 몸을 뒤집었다. 거 봐, 역시 자는 거잖아! 사람을 이렇게 걱정시키고서는 잠이 와? 정말 무사해 보여서 조금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고. 오카링도 역시 이 상황에는 어이가 없었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혹시 모르니까 일찍 퇴원하게 되어도 유키 군은 며칠 더 쉬게 하는 게 좋겠어요. 모모 군 혼자서 괜찮으신가요? 힘들면 같이 조정해 볼게요. 이런 상황이니 다들 이해해 줄 테고.”
“아니, 유키가 쉬고 있는데 나까지 쉴 수는 없잖아. 이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돌아다녀야지. 유키가 빠진 스케줄도 죄송하다고 얘기해야 하니까….”
“모모 군의 그런 면이 믿음직스럽기는 하지만, 너무 무리는 하지 말아주세요.”
“두 명이나 몸져누우면 곤란하니까 말이지?”
농담을 주고받으며 하하 웃으면서 떠들었다. 만담을 주고받느라 모르고 있었는데, 유키가 상체를 일으켜 피로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시끄러워.”
“유키…! …아, 미안! 근데 정말 자고 있던 거였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정말,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이쪽을 바라보는 유키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미심쩍은, 그리고 수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스스로 잘못한 것이 있을 때가 아니면 이런 표정을 마주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없는 잘못을 뉘우치고 싶어졌다. 졸릴 때 깨우면 저혈압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피곤했나…. 차에 치인 김에 길바닥에서 잠들어 버릴 정도로…? 유키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한번 미안, 이라고 말하려던 그 참이었다. 유키가 벽 쪽으로 붙으면서 말했다.
“…당신들 누구야? …여긴 어디고?”
장난은… 아닌 것 같지. 나는 조용히 담당의 호출 벨을 누르면서 오카링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카링. 역시 나도 스케줄 빼줘.”
“……고려할게요.”
“…그러니까, 내가 스물 여섯에 아이돌을 하고 있는데 맹하니 길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너는 2인조 그룹의 내 파트너고?”
“그렇다니까아…….”
…의사 선생님, 유키 어떡해요? 문제없다고 하셨잖아요…!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나이 든 의사 선생님을 쳐다봤지만 눈이 좋지 않으신지 이쪽의 시선도 느끼지 못한 채로 진료 차트만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오카링도 위장이 쑤시는 건 마찬가지인지 피로한 사회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친 게 없는 건 다행이지만, 이건 다행이랄까… 큰일이다.
“충격에 의한 해리성 기억상실 증세로 보입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는 간혹 있는 일인데, 몇 년 사이의 기억까지 잊어버리는 경우는 좀 드물긴 하지요. 보통은 시간이 지나면 차차 회복됩니다. 개인 차가 있기는 하지만….”
“유키, 혹시 올해 몇 년인지 기억해?”
“헤이세이 16년인데.”
“…하나, 둘…. …대략 10살인가….”
이 얼굴로 열 살이라니. 기억만 초등학생으로 돌아가버린 가련한 미남이 충격 발언을 했다. 헤이세이 16년이라니 대체 그게 몇 년 전이야? 올해는 레이와 2년이에요. 오카링이 옆에서 덧붙이자 유키가 “…레이와?”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반응이겠지요, 보통은….
“개인 차라고 하면, 보통은 어느 정도인가요?”
“며칠 사이에 해결이 되는 케이스도 있고 기간을 더 길게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장 최악은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경우지만… 뇌 손상이 있는지 정밀 검사를 진행해야 할 것 같군요.”
“…나 집에 가면 안 돼?”
열 살 유키의 시선에는 웬 이상한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수상한 의식을 벌이는 것 같겠지만 거울도 보여줬고, 목소리도 몸도 크게 자랐으니 사실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나 싶다. 유키의 성정상 조금 더 말썽을 부리지 않을까 했는데 뇌 손상이라는 말에 유키 역시 겁이 나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쪽은 그것보다 5배 정도는 더 걱정이 됐다. 며칠 사이에 기억이 돌아오면 좋겠지만…. 스케줄은 고사하고 앞으로의 장래까지 고민해봐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유키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내가 책임질 테지만.
차마 무관계자가 있는 곳에서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어서 유키에게도 아무 얘기 안 하고 있었지만 일단은 유키의 연인이다. 사실 열 살의 유키에게 미래의 유키에게는 남자 애인이 있어요, 하고 얘기하는 것부터가 충격이겠지. 밝힐 일은 없을 테니까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는 가만히 있을 거지만,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희망적인 생각을 해보고 싶지만, 역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가정해 두는 편이 좋겠지. 오카링의 머릿속에도 나름대로 비슷한 생각이 지나가고 있을 거다.
“본가에는 아마 지금 가도 아무도 없지 않을까? 두 분 다 바쁘시고….”
“내 부모 알아?”
“이래봬도 우리 꽤 오래 같이 있었으니까.”
“…아들이 사고 났다는데 연락 하나 안 하는 건가.”
그 말을 듣고서야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 유키는 열 살이지. 유키네 부모님이 방임주의라는 건 익히 듣고 겪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연락을 듣고도 급하게 찾아오지 않으시는 건 나를 어느정도 믿어 주고 계신 탓이라고 생각하는데. 유키는 이런 말 해도 아직 이해 못하려나. 성인 유키는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썼으니까, 이쪽 유키에게 말하는 것도 조심성 없이 굴었다. 나도 아직 유키가 열 살이 되었다는 거 실감이 잘 안 나는 탓도 있지만.
“내가 연락을 늦게 드렸어. 무사하다는 얘기 들으셔서 크게 걱정 안 하셨던 걸거야. 스물 여섯의 유키는 어엿한 성인이니까.”
“됐어, 그런 어설픈 변명.”
그렇게 들리나? 사실만 얘기하고 있는데. 무어라 더 덧붙이기도 어려워 머쓱하게 웃으며 뺨을 긁었다. 마음이 상했는지 이불을 뒤집어쓰는 유키 때문에 다른 얘기를 꺼내기도 뭐했다. 의사는 검사를 준비하겠다며 나가고, 오카링은 스케줄 조정 때문에 먼저 사무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병실에는 나와 기억을 잃은 열 살의 유키만 남았는데, 어쩐지 서먹한 공기만 흘렀다. 이불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와 제대로 말해주지도 않아서, 나는 사고가 날 때부터 유키의 곁에 계속 있지 못했던 게 내심 미안해졌다.
내가 거는 잡담도 거의 받아주지 않은 채로 시간이 지나간다고 생각했는데, 이불을 슬쩍 들춰보니 잠이 들어 있었다. 이 잠만보! …이렇게 잘생긴 잠만보 없지만. 이번에는 유키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으니까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늘은 이제 할 일도 없으니까 의자에 앉은 채로 자리에 앉아 밤을 보내기로 했다.
유키가 퇴원할 때까지 시간은 빠르게도 지나갔다. 정말로 며칠 되지 않았으니까 당연한가. 바로 검사를 했지만 별 이상이 발견되지 않아 모두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전전긍긍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혼란스러운 건 유키였을텐데도,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건지 어리광을 부리지 않아서. 결국 스케줄을 어느정도 조정하고 내가 유키를 돌보기로 했다. 이렇게 긴 휴가는 평소에도 잘 받지 못하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사정이 사정이라 어느정도 넘어가주는 면이 있는 듯했다. 열심히 활동해온 덕을 보는 모양이겠지. 몸은 스물 여섯이라고는 하지만, 정신연령이 열 살인 유키를 집에 혼자 놔둘 수는 없으니까. 본인은 별로 상관없고 오히려 따라붙는 게 귀찮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거 반대다. 아무렴 열 살의 유키보다야 내가 생활력이 있지 않겠어? 사실 자신은 없다.
“나 요리는 잘 못하니까, 갈 때 뭐 사가지고 가자. 먹고 싶은 거 있어?”
“…요리도 못하면서 돌보겠다고 한 거야?”
병원을 나서면서 유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열 살이라고는 해도, 저 모습으로 저런 표정을 지으면 좀 마음이 아픈데. 그치만 요리는 유키가 다 해줬는걸. 그 점에 대해서는 자신 역시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유키의 요리 맛있으니까. 유키도 요리 하는 거 꽤 좋아했고… 아무래도 식재료를 낭비하며 탄 음식을 만들어내는 자신보다야 유키가 만드는 게 훨씬 더 나았다. 그래도 열 살이니까, 요리는 잘 못하겠지?
애들은 피자 같은 거 좋아하나. 아니, 유키니까 어릴 적에도 야채 좋아했을 것 같다. 가볍게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밥 종류를 포장이라도 해가는 게 좋으려나. 유키를 데리러 오려고 중간에 가져왔던 차 문을 열자, 자연스럽게 뒷좌석의 문을 연다. 상관은 없지만?
“…왜 내 집으로 가는 거야? 같이 살아?”
“그건 아닌데….”
우리 집은 너무 더러워서. 유키에게 보여주기 민망하다. 아무래도 유키도 익숙한 곳에 있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싶고. 기억도 새록새록 돌아오지 않을까.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길이인 휴가지만, 이 안에 유키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막막하다. 이래저래 걱정이네.
“역시 익숙한 곳이 좋지 않겠어?”
“…그런 말 해도 모르는데.”
“유키 집 침대가 엄청 푹신해.”
“그건 좋네.”
솔직한 반응에 웃음이 나왔다. 가구도 아무렇게나 고른 편은 아니었지만 침대는 유독 더 신경 써서 골랐다고 해야 할까. 나도 덕을 보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도 어린애 앞에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다. 외양은 크게 차이가 없으니 안쪽이 열 살이라고 의식하고 있기 힘들어서 계속 신경을 쓰고 있다. 유키가 뒷좌석에서 안전벨트를 매는 것까지 확인하면 그제서야 출발한다. 유키 역시 귀갓길에 벌어진 사고였으니 병원과 집은 그렇게 거리가 멀지 않다. 가는 길에 유키랑 몇 번 같이 간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다. 평소에 먹는 메뉴를 골라서 포장하면 되겠지. 어차피 유키니까 햄버그 스테이크 같은 건 고르지 않을 거다. 내가 먹어야지.
“…갑자기 커진 거 불편하지 않아? 어릴 때 유키 사진 보니까 엄청 작고 귀여웠는데.”
“뭘 멋대로…. …불편해. 시야는 갑자기 높아졌지, 손발도 길어졌지. 이건 편하지만. 목소리도 이상하고 머리 치렁치렁한 게 짜증나. 자르면 안돼?”
“…절대 안 돼! …그 부분은 어떻게 좀 참아주세요….”
옷 같은 건 치워둬도 괜찮겠지만, 머리카락은 자르면 기르는 데 오래 걸린다고! 유키의 머리칼을 좋아하는 자신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그리고 유키 목소리 멋있지 않나…? 역시 그런 인식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는 건가. 열 살에서 갑자기 스물 다섯으로 워프한 적이 없었으니까 모르겠지만. 아마 자신이 이것저것 마개조 당했다고 생각하면 확실히 당황스럽기는 하겠다. 열 살이면 변성기도 오기 전일 테니까, 자신이 말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듯 가끔 말을 꺼내고 멈칫하기도 한다. 부모님도 얼굴 보러 안 오시고, 주변에 자신이 모르는 사람 투성이라 불편해 보이고. 그냥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게 불편한 것 같기도 한데…. 행동은 솔직한 편이지만 대하기가 어렵다. 납치범 취급 받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 백미러에 다 비쳤던 건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린다.
“지금 가는 곳 크림 리조또가 먹을 만하다고 했거든. 밖에서 팬들 마주치면 곤란할 테니까, 포장해서 들어가자. 괜찮지?”
먹을 만하다고 했던 거 유키였지만. 별 대답이 없는 거 보니까 괜찮은 거겠지. 창 밖을 보면서 주변 풍경을 살피는 게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는 듯하다. 나라도 갑자기 40살의 세계에 떨어진다면 꽤 놀랄 거야…. 지금으로부터의 10년 전 풍경과 10년 후 풍경은 꽤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혹시 나 불편해? 혼자 있는 게 낫다고 했는데, 미안… 내가 유키를 혼자 둘 수가 없어서….”
한숨을 푹 쉬면서 핸들을 부드럽게 꺾는다. 오카링을 상대로도 말이 많았던 건 아니지만 역시 모르는 어른은 상대하기 꺼려지겠지. 파트너라고 하면서, 갑자기 친한 척 하고 있으니 기분 나쁘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 차라리 몸까지 어려졌다면 대하기 편했을 텐데, 유키의 얼굴로 거리감 있게 대하니까 나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물론 몸까지 어려지는 게 훨씬 대사건이긴 하지만.
“당신이야말로 뒤치다꺼리 하는 거 귀찮지 않아? 바빠 보이던데.”
“유키인걸. 귀찮다고 생각 할 리 없잖아.”
그렇게 얘기하니까 차 안이 다시 조용해진다. …기분 나쁜가? 모르는 사람이 이런 말 해도 별 관심 없겠지. 유키의 목소리에 날 선 말이라 반사적으로 움츠러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유키가 걱정되니까. 기억이 돌아오면, 이번에는 바로 옆에 있어주고 싶고. 전화로 유키의 사고 소식을 듣는 건 충격적이었으니까 말이지. 실제로 옆에서 봤다면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싶은 건 있지만.
패밀리 레스토랑 앞에 주차를 해두고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스마트폰이 신기한 건지 이것저것 만져보고 있었지만 금세 흥미가 떨어진 것 같기도 했다. …거기 노래도 많이 들어있는데. 그렇게 얘기하면 흥미를 보일 것 같았지만.
“내가 포장해서 가져올까? 여기 있을래? 같이 나가도 되고.”
“밖에 추워서 싫어.”
“알겠어. 그럼 라디오라도 틀어 두고 갈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해?”
유키의 입맛이 얼마나 변했을 지는 모르지만 근본은 유키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다른 게 먹고 싶다고 하면 그걸 사주면 되지.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내리기 전에 차 안의 라디오를 켜고 주파수를 조정했다. 마침 후배인 MEZZO”의 음악 라디오가 할 시간이라, 채널을 그쪽으로 맞춰 뒀다. 역시 오늘도 즐거워 보이네. 일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뿌듯해진다.
“유키가 좋아하는 후배들의 라디오야. 이거 듣고 있으면 금방 다녀올 게! 추우면 온도 더 높여도 돼. 여기 버튼 누르면 되니까, 알았지?”
“응.”
다행히 대꾸도 없지는 않았다. 자신이 불편한 것도 있지만 역시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탓이 클 거다. 유키는 추운 거 싫어하니까 멋대로 나가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고, 가게에 들러 두 사람이 먹을 것을 주문했다. 열 살 애라고 생각하기에는 몸이 스물 여섯이니까, 평소 먹는 양만큼 주문하면 되겠지. 유키가 그 몸으로 어린이 런치 세트 먹는 것도 귀여울 것 같지만…!?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걸 기다리면서 오카링에게 래빗챗을 보냈다. ‘유키 퇴원 완료. 지금 집으로 데려가는 중’. 역시 간단함이 모토인 패밀리 레스토랑이니까 음식이 나오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손 가득 음식을 싸 들고 다시 운전석에 올랐다. 마침 상체를 뻗어 볼륨을 조정하고 있어서 눈이 마주쳤다.
“음식 가져왔어! 내가 해줄까? 된 건가?”
“…됐어. 가자.”
그렇다면야. 조수석에 포장된 음식을 놔두고 다시 벨트를 맸다. 재미있게 듣고 있었던 것 같아서 뿌듯했다. 채널 바꾸려던 건 아닌 것 같으니까. 평소에도 유키랑 같이 스케줄 다니면서 듣기도 했고, 취향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면 좋아할 것 같아서. 유키와 유키의 공통점을 발견했다는 느낌에 괜히 신이 났다.
“그럼 이제 집으로 출발합니다! 손님, 안전 벨트 착용은 필수예요.”
과장스레 얘기하는 나를 보고 유키가 ‘이건 뭐지’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유키 옆에서 떨어질 생각 없으니까, 이런 나한테도 점점 익숙해졌으면 좋겠는데! 교통 사고로 입원하고 기억까지 잃은 유키였으니 뒷좌석이라도 안전벨트 꼭 지키라고 당부하는 멘트가 늘었다. 나도 평소에는 좀 허술했는데 조심해야지. 아무리 신호등 문제였다고 해도 말이지.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서도 유키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듯 자신의 집 주변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본가와는 사뭇 차이가 있으니 그렇겠지. 사실 익숙한 곳에서 지내게 하고 싶지만, 그러면 내가 다니기 힘드니까. 역시 보호자가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유키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안 볼 생각도 없고…. 주차장에 들어설 때가 되어서야 내릴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안전벨트를 풀었다.
“도착했으니까 내리자! 배고프니까 얼른 밥도 먹고 쉬고. 추우니까 들어가자 마자 난방 틀어야지.”
그렇게 춥지는 않았지만 다들 춥다고 하고, 유키는 더 추워할 테니까. 퇴원용으로 사복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불편해 할까 두꺼운 옷을 겹겹이 입히지는 못했고. 유키가 내리자 나도 뒤따라 내렸다. 대충 손가락으로 아파트 위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 보여? 저기가 유키 집인데.”
“…비싸 보여.”
“그거야 잘 나가는 아이돌이니까!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지금 일본 제일의 톱 아이돌이라고? 작곡도 다 유키가 하고 있으니까.”
아파트 외형을 보고 비싸 보인다니, 감상도 웃겼다. “톱 아이돌….” 그 얘기가 익숙하지 않다는 듯 곱씹는 탓에 손을 잡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역시 유키가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서 옆을 따라 걸었다. 중앙 현관을 넘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면 유키가 두리번거리는 게 낯설었다. 정말 기억 안 나는구나. 처음에는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몇 번 버튼을 눌러야 할 지 몰라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에 호수를 옆에서 읊어줬다. 집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야 하니까. …이 상태로는 운전도 못 하겠지. 차가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기억하고 있는 집은 이미 자신이 사는 집이 아니라고 하는데, 집 주소도 모르는 기분이 어떨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유키 성격은 어렸을 때부터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익숙해 질 때까지, 아니…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불편하지 않게 옆에서 돌봐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기도 했지만, 아무리 내가 글러먹은 어른이라도 열 살 어린애한테 손을 댈 만큼 최악은 아니니까.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와중에 유키가 한 마디를 꺼냈다. 나는 어린 유키가 먼저 말 걸어주는 게 내심 좋아서, ‘아까’로 시작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까 라디오 메인 MC, 노래 취향 나쁘지 않았어.”
“…다행이다! 마음에 들었어? 친한 후배인데, 작곡을 하거든. 유키한테도 이것저것 배우고 있다고 들었어. 이렇게 말해도 기억 안 나겠지만. 아, 메인 MC라고 했는데 사실 둘이서 같이 메인이야. 아무래도 소고 쪽이 조예가 더 깊으니까 그렇게 보이지? 나도 가끔 사연 보내고 그러는데.”
“뽑힌 적 있어?”
“아직! 익명으로 보내고 있으니까. 유키도 안 뽑혀서 새로 보낼 때마다 심혈을 기울이던데.”
유키의 앞에서 유키 얘기를 해도 되는 건지 고민을 했지만, 역시 기억도 찾아야 하는데다 생긴 것도 목소리도 유키라서. 조금 까칠하고 더 말수가 적은 정도? 기분 나빠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문 앞으로 향했다. 스페어 키를 꺼내 문을 열자 신기하게 쳐다봤다.
“…같이 사는 거 아냐?”
“이건 여벌 열쇠. 유키한테도 우리집 열쇠 있어.”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그렇게 이상한가? 사귀기 전에도 스페어 키는 가지고 있었는데. 유키는 우리 집 와서 청소하고, 나는 유키네 와서 아침에 깨워주고. 그거 말고도 많이 했지만.
며칠 사람이 없었던 집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들어가자 마자 불이랑 난방부터 켜 놓는 게 제일 우선순위였다. 저기는 침실, 저기는 주방. 저기는 화장실이고 저쪽은 스튜디오. 하나하나 가리키며 소개해주는 참에, 처음에는 침실에 눈이 돌아가더니 마지막은 스튜디오 쪽에 관심을 보이는 게 유키답다 싶었다.
“집 안에 스튜디오도 있어?”
“유키는 작곡하니까. 안에 모으고 있는 앨범이랑 이것저것 있을 거야. 트는 방법 아니까 들려줄게.”
“CD랑 레코드 정도는 나도 켤 수 있어.”
“그건 그렇네.”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긴, 열 살이면 어리긴 해도 좋아하는 거에는 흥미 가득할 나이다. 유키는 어릴 적부터 아버님 때문에 그런 거에 관심 많기도 했고. 자신이라면 고전 레코드 같은 걸 모을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 봐서도,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래도 뭐 망가트리면 나중에 유키가 심란해 할 테니까 제대로 보고 있어야지.
“일단 밥부터 먹자. 배고프지? 병원에서는 환자식밖에 못 먹잖아. 나는 병원 밥 못 먹겠던데.”
유키의 음식에 너무 길들여져서 말이지. 인스턴트나 편의점 음식도 더러 잘 먹는 편이니 음식 투정은 잘 하진 않지만, 역시 병원 밥은 좀. 간이 싱거운 탓인지 입에 잘 맞지 않다. 건강 체질이니 병원에 갈 일도 별로 없어서 먹어본 적이 그렇게 많진 않지만. 주방 옆 식탁에 사온 것들을 벌려 두었다. 유키의 옷도 받아서 옷장에 걸어 두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직 유키는 집에 익숙해지는 중이니까. 데려와서 식탁 앞에 앉히고서야 좀 맘을 놓을 수 있었다.
“빨리 와서 식지는 않았을 거야. 얼른 먹자!”
유키가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음식과 주방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유키는 주방을 자주 쓰니까 사용감이 있는데, 이런 일회용기에 담긴 음식을 먹는 건 언밸런스 했지만. 내가 요리를 잘 못해서…. 그 시선에 무어라 말하지도 못하고 냐하하, 곤란하게 웃었다. 한 숟갈을 뜨는 모습에 감상을 기대했다.
“…그렇게 나쁘진 않네.”
“그렇지? 가끔 같이 가서 먹으니까.”
사실 이 햄버그 스테이크도 정말 맛있답니다. 유키는 고기를 안 먹으니까 혼자 먹어야 하지만, 안을 자르면 치즈가 줄줄 흐르는 게 군침이 도니까. 나를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유키와 밥을 먹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식사할 때도 그렇게 말이 많지는 않아서, 이쪽이 몇 번 말을 거는 게 끝이었다. 만족스러운 식사였지만 분위기는 영 아닌 걸. 난 유키랑 있어도 별로 상관없지만 말야.
식사가 끝난 후에는 역시 스튜디오 쪽에 관심이 가는 모양인지, 그쪽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갈래?” 한 마디 했을 뿐인데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먼저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 유키도 드물다. 역시 관심 있는 것엔 에너지를 아끼지 않는 유키다웠다. 조금 천천히 들어갈까 했다가도, 안에서 뭘 건드릴지 몰라 먹은 것을 대충 수습하고 바로 뒤를 따랐다.
유키의 스튜디오에는 나도 일이 없으면 잘 들어가지 않아서, 사실 뭘 만져도 되냐고 물어본다면 으음…. 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무도 안 보고 있는 것보다는 나으려나? 음향기기야 새로 사면 되지만, 절판된 CD나 레코드들은 망가지면 큰일이니까. 안을 빼꼼 들여다보니 유키가 손에 제 얼굴보다 큰 레코드 판을 들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좋아하는 가수인가. 이 안에 있는 것들, 대부분 유키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들로 채워져 있으니까. 그 한쪽에 위치해 있는 Re:vale의 CD를 나는 제일 좋아했지만. 유키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챘는지 문득 이쪽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당황해서 손을 휘적거렸다.
“그냥, 뭐 좋아하는지 궁금해서…! …옆에서 봐도 돼?”
“마음대로 해. 내 집이니까 나도 마음대로 써도 상관없지?”
“그렇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줘.”
능숙하게 레코드를 세팅한다. 눈높이도 손도 달라졌을 텐데 음악을 하는 손은 언제나 똑같다. 유키는 의자에 앉아 노래를 듣기 시작한다. 이 노래, 들은 적 있다. 좋아하는 가수라고 소개받아서, 몇 분이고 계속해서 얘기를 들었다. 제 몸의 변화에 어딘가 서툴러져도 좋아하는 건 변하지 않는다. 먹을 것도, 듣는 노래도. 유키의 그런 한결같음이 좋다. 어쩌면 유키는 기억을 잃어버리고 처음으로 익숙한 것을 만났는지도 모른다. 음악을 듣는 표정이 편안해 보여서 아주 조금 마음을 놓았다.
작은 스튜디오 안이 제가 사는 세계라도 되는 것처럼 유키는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곳이 편하다면 상관없었지만, 그것보다는 바깥으로 나가는 게 싫은 것 같아서. 바닥에 앉아서 래빗챗도 하고 시간도 죽여보았지만 유키는 이쪽에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뭔가 유키랑 멀어진 것 같아서 싫어.
“…유키, 내가 좋아하는 노래도 들어줄래?”
“누구 노래인데?”
“Re:vale.”
그 얘기에 고개를 돌린다. 한번쯤은 들은 적 있는 이름인지 이쪽을 쳐다보는 시선에 빙긋 웃었다. 오카링이랑 내가 말한 걸 기억하고 있는 걸까. 싫다는 얘기도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앨범을 뒤적거렸다. 분명히, 이쯤에 있을 법한데. 데뷔곡도 아니고, 가장 최근 앨범도 아닌 것을 하나 꺼냈다. 제일 좋아하는 두 사람의 노래는 고르기 어려웠지만, 지금 듣고 싶은 노래라면 있었다. 앨범을 열어 CD를 꺼내 플레이어에 넣었다. 데이터를 읽는 소리가 나다가 멈춰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의자에 앉아서 노래를 듣는 유키를 바닥에서 올려다보았다.
“…노래, 내가 만든 거라고.”
“응. 좋지?”
“같이 부른 거야?”
“나랑 유키랑. 나도 지금은 작사는 하는데, 이때는 아직 유키가 다 맡아서 할 때라서.”
“…모모라고 했지.”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을 끌고 싶어서 얘기를 꺼낸 거긴 하지만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유키가 깨어나서 내 이름 불러준 적 없었구나. 처음에 스노하라 모모세라고 풀네임도 알려줬는데, 복숭아만 기억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겉치레 없는 성격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진짜 솔직한걸.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거리는 것 같더니 다시 꾹 닫아버린다. 그래도 두 사람의 노래가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럴 리는 없지만 유키 성격상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든다고 말해버리는걸.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다 알려 줄게. 가능하면 빨리 기억이 돌아왔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도 생활은 해야 하니까.”
“요리는 빼고?”
“요리는 빼고.”
자취 경력이 점점 늘어나고는 있지만 늘어나는 건 토스트기에 어떻게 토스트를 맛깔나게 굽는지에 대한 지식 뿐이다. 유키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가정은 하고 싶지 않지만, 열 살의 유키니까 스물 여섯으로 키우려면 16년. 16년동안 같이 있으면서 등산에 따라가주는 유키로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정말 최악의 가정이지만. 유키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도 천운 같은 걸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다음에는 고백해주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아이돌로서는 몰라도 유키의 연애 상대로는 매력이 한참 부족하니까, 나는.
“모모랑 나, 친해?”
처음부터 그런 델리케이트한 부분 물어보는 거야? 아니, 확실히 미래의 자신 옆에 파트너를 자칭하는 이상한 남자가 있으면 신경 쓰이겠지. 피어스 같은 거 하고 있고. 유키 앞에서는 빼 둘 걸 그랬나… 처음부터 이미지 관리에 실패했다. 기억이 돌아오면 쓸데 없어질 노력이지만. 뭐라고 대답하지.
“친해! 가난할 때 같이 산 적이 있었어. …그리고 내가 유키를 많이 좋아해.”
“혼자 좋아해?”
“아니, 그런…. …아니지만…? …아마도….”
뉘앙스 때문인지 그렇게 받아들이는 건 이해하지만, 예민한 부분이니까 조심스럽게 건드려줬으면 하는데. 사귀는 사이니까 짝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힘이 빠져서 쪼그려 앉고 있었던 엎어지듯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유키도 나 좋아하지? 그 얼굴이랑 목소리로 혼자 좋아하는 거냐고 묻는 거 너무하지 않아?
“푹신한 침대 보러 갈래.”
그렇게 말하고서는 혼자 방을 나가버린다. 마침 노래도 다 끝난 참이라, 노래가 끝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는 잘 몰라도. 오들오들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뜩이나 유키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걱정거리를 하나 더 늘려 주다니. 유키의 사랑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유키 입으로 그런 말 들으면 역시 신경 쓰이잖아? 태평하게 침실로 향하는 유키의 뒤를 따랐다.
침실로 들어가자 마자 긴 머리칼이 넓게 퍼진 채로 누워 있는 유키의 모습이 보였다. 하암, 하품을 하면서 뒹굴거리면서도 입가에 슬금슬금 미소가 지어진 게 좋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긴, 비싼 침대라 좋긴 하지. 한껏 풀린 표정을 보면 이쪽도 괜히 행복해졌다. 나를 보고서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푹신해.”
“엄청 크고 좋지 않아? 유키 침대 잠도 잘 오고. 스케줄 끝나고 여기에서 누워서 자면 피로가 다 풀린다니까~”
“…모모, 여기서 잠도 자?”
“으, 응. 그, 아무래도 넓으니까! 유키는 상냥하니까, 소파에서 재우는 거 별로 안 좋아하고 말이지!”
큰일났다. 약간 말 실수한 것 같다. 신경…쓰나? 기분 나빠 하지는 않겠지. 뒷목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으니 유키가 흐응, 하는 투로 대충 넘긴다. 별로 흥미 없는 모양이다. 다행이야…. 저 모습으로 그런 거 기분 나쁘다고 하면 견딜 자신이 없는 걸. 열 살 애에 대한 교육적 의미도 있고. 그런 건 적어도 15세 이상이잖아?
“벌써 졸려? 오늘 아침에도 늦게 일어났으면서.”
“안 잘건데. 그냥 누워있는 거야.”
어쩜 이리 유키랑 똑같은 소리를. 하나도 안 믿긴다. 들어오면서 난방을 틀어 두었더니 집 안 공기도 따뜻하고, 밥까지 먹었으니 유키가 졸려 하지 않으면 그게 더 신기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어렸을 때랑 지금이랑 하나도 안 변했을 수가 있지? 침대 위에 앉아 유키를 내려다봤다. 오카링이 힘을 써준 터라 내일 당장 스케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유키랑 있는 시간에 낮에 자는 거 아깝단 말야. 그래도 유키가 잠들면 어쩔 수 없긴 한데…. 일단 어린애고 환자니까 봐줘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유키가 이불을 잡아당겨 머리 끝까지 덮었다. 아래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 졸려….”
“자는 거 아니라며?”
“졸려졌어.”
그렇겠지. 아까부터 졸렸을 테니까. 태클 걸 생각도 없어 옆에 같이 누웠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으니까 누워 있어도 되겠지. 식사도 끝냈고, 사실 운동을 하고 싶은데 유키를 두고 나갈 수도 없고. 오늘은 게으른 모모쨩 하기로 했다. 유키와 반대로 누워 있으니 이불 안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모.”
“응?
“…혼자 좋아하는 거, 아닌 것 같아….”
유키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십 수 초 동안이나 넋을 놓고 머리를 굴렸다. 깨달았을 즈음에 슬쩍 이불을 들춰보면 입원했던 날과 똑 같은 상황이다. …이 잘생긴 꼬맹이, 또 자고 있어! 뺨이 붉게 달아올라 이불을 놓아두고 한숨을 폭 쉬었다. 그런 말 듣고, 낮잠 같은 거 잘 수 있을 리 없잖아. 결국 뜬눈으로 저녁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당황한 티는 내지 말아야지. 아까 그 얘기, 무슨 뜻이었는지만 물어볼 거야. 집을 얼추 정리해두고 유키의 머리맡에서 잠이 깨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낮잠이고,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났으니 밤이 되기 전에는 일어나겠지. 그리고 밤에 다시 잘 거다. 유키의 생활 패턴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니까 자는 거지. 일을 쉬는 것 때문에 여러모로 걱정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리고서는 잠꼬대를 하는 유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태평하게 있어도 되는 건가? 유키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 지 모르는데. 열 살 유키가 귀엽다고 생각해버리고, 너무 마음 놓고 있는 거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유키에게 압박을 줄 수도 없고, 혼자 골머리를 썩힌다고 해도 별달리 좋은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열 살의 유키 어린이, 어느 정도 마음을 열어준 것 같고 오늘은 수월하게 보낼 수 있겠지.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허락해 준다면 손만 잡고 잘 거니까.
슬슬 일어날 때가 됐는지 유키가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소음을 낸 것도 아니었으니까, 처음에는 깨운 건가 놀랐지만 금방 눈을 비비고 잠을 깼다.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은 건지, 잠에서 깨고 난 후에도 영 눈을 뜨지 않아서. 입이 꼭 다물린 게 안 자고 있는 게 티가 났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가자, 유키가 눈을 번쩍 떴다. 수면의 요정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서, 이쪽을 바라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납치…?”
이 말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한참 유키가 한 말을 곱씹어보았다. 경계의 기색을 띤 눈빛. 한두걸음 정도 뒤로 물러선 몸. 납치라는 단어. …이거 완전히 오해 받고 있는 거 아냐!? 아까만 해도 꽤 좋은 분위기였는데. 어린 유키가, 혼자 좋아하는 거 아닌 것 같다고 해줬는데…? 설마 다시 기억이 리셋된 건가? 기억 상실에 이어 다시 단기 기억 상실이라니 정말 무슨 일이야. 다시 검사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의사가 크게 문제 없으니까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했는데….
“유키, 나 기억 안 나…?”
“…모르는데. 스토커?”
그런 오해를 받고 있는 건가. 확실히 유키가 어렸을 적에도 그런 극성 팬들에게 꽤 시달렸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스토커라는 말을 들으면 역시 억울하다. 나는 유키의 파트너고, 연인인데…. …그건 그렇고, 열 살 애한테까지 스토커 같은 게 붙었던 거야? 미남의 삶 너무 다이나믹한데. 성인에게 해도 되는 일은 아니지만, 어린 유키도 참 고생이 많았겠다 싶다. 일단 무죄를 호소하기 위해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양 손을 들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퍽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키는 그럴수록 더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뒤로 물러났지만. 아, 잠깐… 위험한…데….
“…조심해야지. 뒤로 떨어지면 아프잖아.”
이쪽을 피해 물러나다가 바닥으로 홀랑 떨어져버릴 뻔한 유키를 간신히 잡아냈다.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도 고맙다는 얘기는 한 마디도 안 해서, 이상한 사람 따라갈 일은 없겠구나 싶어 안심했다. 일단 옆에 있어야 하니까, 믿지 않아도 설명을 해야 하는데. 병원도 아니고 의사도 없어서 믿어줄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유키가 잊어버릴 때마다 계속 해명을 해야 하는 건가? 유키 기억은 언제 돌아오는 거지…. 눈 앞이 막막했지만 일단 눈 앞의 미남의 경계심을 푸는 게 먼저였다.
들어주든 말든 해명은 해야 했으니, 무릎을 꿇은 채로 구구절절 이야기를 했다. 유키가 사고가 나서 기억을 잃어버린 것, 지금은 아이돌을 하고 있는 것. 내가 유키의 파트너고 일단 거울을 한 번만 봐 달라는 것도. 침대 옆에 시계와 함께 탁상거울이 놓여 있어서 유키의 얼굴 앞에 들이밀어주었다. 유키는 그 무엇보다 가장 먼저 길게 늘어난 머리를 보고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어서, 긴 머리 정말 멋있는데…. 하고 다시금 혼자서 아쉬움을 달랬다. 왜 유키는 몰라주는 거지.
내 말을 믿지 않고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바깥의 풍경이나 두 사람의 앨범, 휴대폰의 달력 등을 몇 개고 보여주고 나서야 우리의 거리 재기는 끝이 났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유키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이거였다.
“그럼 내일 학교 안 가도 되는 거네.”
“그렇…지.”
열 살 유키와는 반응이 약간 다른 것 같은데. 생각 수준이 더 어려진 거 아닌가? 설마 기억이 더 지워지고 있는 건가? 미래로 워프했다는데 이 태연함은 뭘까? 유키 어린이, 학교가 그렇게 싫었나…. 고등학교 졸업까지는 한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학교 잘 안 나가는 파?”
누가 듣는다고, 목소리를 줄이고 속닥거렸다. 유키는 자신이 성실한 학생이었다고 얘기하지만, 반 씨도 코웃음친데다 나도 그걸 믿지는 않았다. “걔가 그래?” 거기까지만 듣고 휴대전화를 빼앗긴 적도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늦잠 자다가 지각하거나 아예 빼먹은 날도 부지기수일 거라고 생각한다. 유키네 부모님, 그렇게 잘 챙겨 주시지는 않는 것 같았으니까. 물론 바쁘셔서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역시 개인주의적 성향 강하신 분들이고. 이 유키라면 내 앞에서 말을 가릴 것도 없고,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을까 싶은데. 내 미심쩍은 태도에 유키가 불쾌한 티를 냈다.
“불량 아니거든? …사사키가 체력 테스트 통과 못하면 학기말까지 남긴다고 했다고.”
“…그 사사키라 함은?”
“체육.”
아아. 대충 납득이 됐다. 유키, 운동은 안 하는데도 몸은 좋지만 체력은 운동 안 하는 사람의 그것이니까. 결국 학기말까지 남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기는 하지만 그건 본래의 유키가 아니고서는 모르는 일일 거다. 그런데 초등학생 상대로 그렇게 심한 체력 단련을 시키나…? 가뜩이나 움직이는 거 싫어하는데 고생 많았겠다.
“유키, 초등학교 때부터 체육 싫어했구나.”
“…초등학생 아니거든. 초등학생으로 보여?”
아니, 스물 여섯으로 보이는데. 그나저나 너무 잘 넘어와서 당연히 열 살보다는 더 어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초등학생이 아닌 건가? 이 맹랑함을 봐서는 유치원 수준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고.
“중학생?”
“고1.”
고1의 유키가 체력 테스트 받기 싫어서 학교를 빼먹었을 거라는…. 유키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어쨌든 충격인데. 다섯 살이나 더 먹었는데 그렇게 쉽게 넘어왔단 말야? 열 살의 유키도 엄청 경계했는데. 내가 인상이 좋아 보이나. 아니면 학교 가기 싫은 것과 귀찮음이 불안과 경계심을 이긴 걸까? 생각 해보니 열 살의 유키처럼 자기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듯 목을 가다듬지는 않았었다. 변성기가 지난 후인가. 고 1이면 충분히 그렇겠지.
“그… 유키 부모님 연락처 가지고 있으니까, 혹시 불안하면 전화 해봐도 괜찮아! 저녁이니까 바쁘지 않으시면 받아 주실 테고.”
“왜?”
“…아니….”
이렇게 경계심이 없을 일인가? 왜 굳이 전화 따위를 해봐야 하는 거냐고 묻는 짧은 한 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생겼으면서 용케 일이 안 생겼다 싶다. 으음, 그러니까 공연장에서도 자주 시비 붙고 그랬을 테지만. 오는 여자 가는 여자 안 막았던 걸로 알고 있고… 이 정도 쿨함은 있어야 하는 건가. 정말 무사해서 다행이다….
“나, 아이돌이라고 했지.”
“…응! 유명하고, 팬들도 많아. 지금은 유키가 기억 못 하고 있으니까 쉬어야 하지만….”
“돈 많아?”
“어? 어. 뭐 필요한 거 있어? 사다 줄까?”
“아니, 내가 보러 갈래.”
이 상태로 어딜 나가겠다는 건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주면 나갔다 올텐데. 열다섯의 천방지축 유키는 열 살 유키보다 더 어디로 튈지 모르겠으니까 혼자 놔두기 뭐하긴 한데…. …열 살 애가 더 어른스러운 거 아닌가? 지금 나가면 안 되는데…. 유키 사고나서 요양 중이라는 게 팬들 사이에 쫙 퍼졌는데 돌아다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진짜 대사건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았다고 느끼는 걸 정말 싫어하는 걸.
“뭐가 필요한 건데? 내가 구해다 줄게. 말했지만, 지금 나가면 엄청 곤란하거든… 아이돌이니까? 아무데나 들키면 안 된단 말야. 응? 유키?”
“돈 많이 생겼으니까 새 기타 사러 갈 거야. 눈 여겨 뒀던 거 있으니까 만져보러 갈래.”
그래도 옆에 있는 자신이 명목상 보호자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한 듯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열 다섯 유키는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어떤 것들을 충족시켜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건 업계인이나 고려해야 하는 거니까, 모를 수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데. 안절부절 못해서는 유키의 앞길을 막으니 유키가 거슬린다는 듯 짜증을 냈다.
“뭐야? 스물 여섯이나 됐다면서 혼자 움직이지도 못해?”
“유키는 지금 열 다섯이고… 팬들한테 들키면 큰 일이 날거야. 지금은 요양중인 걸로 되어 있으니까…. 기타? 이름 말해주면 내가 사다 주면 안 될까? 아니면 인터넷 배송이라던가. 말만 해. 일시불로 긁어줄 수 있으니까? 요즘은 배송도 빨라서 금방 오거든. 아니면 내가 받으러 갔다 오면 되고.”
“어떻게 악기를 소리도 안 내보고 사?”
말 잘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유키라고 해도 한창 혈기 왕성할 때고, 음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걸. 와중에 긴 머리가 익숙하지 않은지 자꾸 만지작 거리는 게, 뒤에 나올 말이 예상이 돼서 불안해졌다.
“이거 잘라도 돼?”
“절대 안돼! 그거 엄청 공 많이 들어간단 말야…!”
“안 내보내 주면 머리 자를래.”
이 무슨 억지람. 골머리가 썩는다. 유키가 가끔 말이 안 통할 때가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유구하게 그랬구나 싶어서. 밖에 나가서 소란이 이는 것도 안 될 말이고, 머리를 자르는 건 더더욱 안 될 말이다. 그렇다고 유키에게 무력을 쓸 수도 없고, 환자인 지금 상태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하니까. 어디 잘못 부딪히기라도 했다가 이번에는 다섯 살 되면 어떡해? 지금이야 플러스 다섯 살이지만, 마이너스가 될지 모르는 일이라고.
“…그럼, 유키. 나가기 전에 변장 시켜 줄 테니까 그거 하고 가면 안 될까? …지금은 정말 얼굴 들키면 곤란해서 그래. 유키는 모르지만, 우리 둘 꽤 유명해서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거든. 다들 유키의 노래를 좋아하니까, 그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이해해?”
“…이해해.”
유키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얘기까지 나오니 나름대로 얌전해진다. 열 살도 어리지만 열 다섯도 어리다. 어린 유키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고 싶지 않다. 그런 건 폭력인데다, 잘 말하면 이해해 줄 거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유키는 자기 노래를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약한 걸. 내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팬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악기는 내가 사줄게. 차도 태워줄 테니까, 가발하고 안경 정도만. 이 얼굴이 고작 그런 거에 가려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도 조심할 테니까.”
“…가발까지 써야 해?”
“내가 해 줄게. 이런 건 유키가 더 잘 하긴 하지만, 나도 분장은 몇 번 해본 적 있으니까.”
저녁인데 급하게 나가게 생겼다. 평소에 유키랑 있을 때도 이런 일은 드문데. 그 외에 투정을 입에 담지 않는 유키의 의사를 승낙으로 받아들이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침대에서 뻗대고 있던 게 오늘 일과의 전부였는데도 슬슬 배가 고팠다. 사람 몸은 정말 비효율적이라니까. 들어올 때 또 먹을 거 사 와야지. 열 다섯의 유키는 요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나를 위해 요리를 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거 해주지 않아도 사고만 치지 않으면 다행인 걸! 기억이 점점 돌아오고 있다는 부분에 기뻐할 여유도 없었다.
평소에 외출 할 때는 가볍게 찍혀도 될 만한 차림으로 코디하니까 가발 같은 거 쓸 일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나나 유키나 모두 장난을 좋아하는 편이니까 분장 용품이 집에 준비되어 있기는 했다. 단발로 변신하고 안경만 쓰면 얼추 티나지는 않겠지. 작은 악기상이라면 저녁이니까, 돌아다니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을 거다.
“모모…? 는 왜 가발 안 써? 나만 답답하게.”
“나는 유키랑 달리 그렇게 심도 있는 분장 하지 않아도 눈에 안 띄는 얼굴이니까! 모자만 쓸 거야.”
유키가 억울한 건지 어이없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유키는 인파 사이에 섞여 있어도 확 티가 나는 실루엣이지만, 나는 평범하게 섞일 수 있으니까. 그리고 유키보다는 사람 상대하는 것도 익숙하니 들켜도 대충 얼버무릴 수 있다. 나도 스케줄을 쉬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돌아다니는 건 큰 문제는 아니란 말이지.
어쨌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집에서 나서기로 했다. 유키가 일어났을 즈음에는 이미 해가 지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벌써 깜깜해졌다. 일찍 보고 와도 한 시간은 걸릴 테니까 돌아오면 유키가 또 피곤하다고 자겠지.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하지만, 유키는 좀 과하게 많이 자는 것 같아. 이번에는 조수석에 앉아주는 유키에게 안전벨트를 다시금 강조하고 시동을 걸었다.
그나저나 유키가 눈여겨보던 악기라면 최소 11년 전 악기인데, 지금 취급하는 곳이 있으려나. 유키가 평소 자주 오던 동네 악기상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가게 안에는 손님 하나 없고 주인 아저씨만 카운터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자주 오는 건 아니지만, 올 때마다 용케 장사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가게다.
“…낡았어.”
“좋은 악기들이 많이 있다고 했어. 오래 지났으니 유키가 찾는 게 지금 있을지는 모르겠네. 물어보는 게 제일 빠를 것 같기는 한데….”
뭘 찾는지도 모르니까 대신 물어봐 줄 수도 없다. 사실 이미 가지고 있는 기타라던가, 그럴 수도 있고. 집 안을 한 번 둘러보고 오는 편이 나았으려나. 악기를 쌓아 두는 편은 아니지만, 소리가 마음에 드는 건 하나씩 사고는 했으니까. 자신이 흥미 있는 분야에서는 행동이 빠른 유키가 가게 주인에게 가 남아있는지 물어보는 것 같았다. TV를 보던 가게 주인이 소리를 좀 줄이고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 시리즈가 아마, 인기 없어서 단종됐을 텐데….”
“아… 재고 남은 게 없나요?”
“우리 가게에 마지막으로 있었던 게 2년 반 좀 됐나. 다른 사람이 사갔어. 단골이거든. 근데 아마 다른 가게에도 없을 걸? 그 단골도 돌고 돌아서 우리 가게까지 왔다던데.”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감사합니다, 인사하고는 가게를 빠져나왔다. 인기 없어서 단종이라니,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옆에서도 유키가 사람들 눈이 옹이구멍이냐고 꿍얼댔다. 나도 유키와 반 씨의 Re:vale가 아직 메이저 데뷔 하지 않았다는 걸 처음 인식하게 되었을 때 그런 말을 했었지. 그렇게 생각하면 그 기타도, 빛을 보지 못했을 뿐 정말 좋은 악기였을 것 같다.
“어떤 기타야? 오늘 당장은 무리여도, 더 찾아볼 수 있으니까.”
“…됐어. 단종됐다며. 구해도 중고겠지. 남의 손 탄 것보다 내가 길들이는 게 좋아.”
유키는 자기 물건에 꽤 애착이 있으니까. 가지고 있는 악기들도 손보고 있고, 가능하면 시간이 날 때 관리해 주고는 했다. 그 기타도 유키 손에 들어왔으면 행복한 악기생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있는 주인 아래에서도 망가지지 않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원래는 살 수 있었는데, 산 지 얼마 안 된 기타가 있어서 못 샀어. 그 때 바로 샀어야 했는데…. 11년이나 지날 건 뭐야.”
그래서 돈 많다고 하니까 바로 사러 간다고 한 거였구나. 유키의 마음 속에 아쉽게 남은 기억이었던 걸까? 하필 일어나자 마자 생각난 기억이 기타인 걸 보니. 그렇게 갖고 싶었던 거였으면 유키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는데, 그건 좀 아쉽다. 보조석에 앉은 유키의 표정이 영 풀 죽은 듯싶어 더 신경 쓰이기도 했고.
“아, 지금 생각 난 건데. 나도 기타 하나 있다. …이거 좀 말하기 미안한데.”
“뭔데?”
“잠깐만. 트렁크에 있거든.”
차 뒤의 트렁크를 열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정말, 이걸 잊고 있었다니. 커다란 기타를 안고 다시 운전석에 올라탔다. 유키가 영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걸 여기에 갖고 오냐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이것도 유키가 준 거니까.
“나도 기타 배워보고 싶다고 하니까 유키가 준 거야. 자기가 아끼는 거라고 해서 안 받고 새 걸로 사려고 했는데, 초심자가 쓰기에도 음이 예쁘게 잘 나주니까 소중하게 다뤄 달라고 해서. …집에 하루 못 가져갔더니, 다음날에 바로 유키가 사고가 나서…. 진짜 까맣게 잊고 있었어. 유키가 좋아하던 기타니까, 유키 마음에도 들지 않을까?”
유키한테 말하기 미안하지만, 어느 정도는 유키 때문에 잊어버린 거니까. 첫 날은 피곤해서 잊어버린 거였는데, 둘째 날부터는 나쁜 일이 생겼으니까. 마음 상한 것 같지만, 그래도 당장 안겨줄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고. 흥미가 동한 모양인지 뭔지, 겉을 감싸고 있는 커버를 보고는 유키가 지퍼를 열었다. …눈이 동그래지는 게, 마음에 든 건가?
“…이거다.”
“응?”
“내가 찾고 있었던 거….”
이쪽도 마찬가지로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그게 이거라고? 이게 여기서 나온 단 말야? 그제서야 가게 주인의 말이 떠올랐다. 2년 반 전의 단골…. …유키인가? 유키도 나름대로 가게의 단골인 걸로 알고 있으니까. 결국 새 걸로 구하기는 구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푸스스 웃음이 나고,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걸 받아 놓고 트렁크 안에 방치해 둬서 미안하기도 하고. 한가해지면 정말 유키한테 제대로 배울 거라고?
“잘 됐다! 조율 같은 것도 안 건드렸으니까, 유키가 해준 그대로일 거야. …어때, 괜찮아?”
“응. 모모, 나 이거 쳐봐도 돼?”
저 좋을 때만 이름 부르고는. 그래도 기분이 풀린 것 같으니 상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닫힌 차 안에 잘 조율된 기타 소리가 울렸다. 소리 좋다. 좁은 차 안에서 기타를 만지는 유키의 표정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유키도 이 기타를 다시 발견했을 때 이런 표정을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소중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타 못 친다고 했지.”
“아직. 아, C코드는 잡을 줄 알아!”
“하나도 못 하는 거잖아. …기분 좋으니까 뭐 하나 쳐 줄게. 듣고 싶은 거 있어?”
하나도 못 하는 거라니. 유키도 시작이 반이랬단 말이야. 정작 본 레슨에 들어가면 스파르타로 가르친다는 거 알고 있지만. 유키의 상냥함이 유키 때문에 와장창. 내가 못 하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까다로워도 좋은 선생님이 있으니까 나중에는 유키가 만족할 만한 노래를 연주할 수 있을 거야.
“유키 노래면 뭐든 좋아.”
그렇게 말하고서는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작은 연주회라도 마련해 줄 모양이지. 유키가 나한테 부탁한 거니까, 기억이 돌아오면 다시 받아갈 거지만. 지금은 유키의 손에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옆을 보니 불그스름한 뺨의 유키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지금 부끄럼 탈 만한 부분 없지 않았어? 갸웃거리기도 전에 연주가 시작됐다. 그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유키의 노래라서, 연주가 끝날 때 손이 아플 정도의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 후로 몇 곡을 더 졸랐더니 결국 시간이 늦어 그냥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배가 고파서 죽는 소리를 내자 유키가 간단하게 식사를 준비해 줬다. 냉장고 안에 반찬도 있었으니 적당히 밥을 해서 먹는 게 끝이었지만. 시간이 늦어버려서 유키는 바로 잠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돌아올지, 아니면 더 오래 기다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유키의 기억이 점차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러니까, 열 살과 열 다섯 살 후에 몇 살이 돌아올지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소리다.
문제는 망측하게도 잠들기 전에 옷을 훌렁훌렁 벗고 가운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들어간 유키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자신이 입은 옷이라고 해도 기억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입은 것 같은 파자마를 입고 자기 싫다는 유키가 얇은 샤워 가운을 입고 자고, 나는 그냥 집에 있던 파자마를 입고 잠들었다. 커플 파자마라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했는데, 졸린 게 우선이었는지 침대 위에 올라가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아 그냥 같이 잤다. 나도 소파보다는 침대가 좋아. 유키 집 침대 좋으니까.
아무튼 설마 그렇게 잠을 많이 잤다고 해도, 유키가 나보다 먼저 깰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모모 군…?”
평소처럼 잠버릇이 심했던 탓에 파자마 배는 드러나 있고, 빳빳했던 옷은 엉망이고. 거의 침 흘리다시피 인사불성으로 잠들어 있었는데 눈 앞에 미남의 얼굴이 있어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호칭 때문에 눈을 깜빡였다.
“…유키, 좋은 아침….”
눈을 비비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키, 기억이 돌아온 건가? 그렇다기에는 묘하게 반응이 이상한 것 같은데… 그나저나 모모 군이라는 호칭, 어디선가….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유키한테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내 태연한 아침 인사에 유키가 경악하는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다시 두리번거렸다. …뭐 이상한 거라도 있나.
“…우리, 지난 밤에…. ……에?”
“…어제? 악기상 들른 후에 집에 왔잖아.”
“그러니까, 뒤풀이 끝나고…. …모모 군 머리랑 귀 왜 그래?”
뒤풀이? 내 머리랑 귀가 왜? 잠이 덜 깨서 유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됐다. 내 머리는 데뷔했을 때부터 계속…. …꿀꺽.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이 사람… 아니. 이 유키…?
“…유키 씨, 아무것도 기억 안 나세요…?”
내 말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유키의 표정이 새하얘졌다가 새빨개지길 반복했다. …이거 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이었나? 유키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서. 그 때는 사귀지도 않았으니까, 같은 침대에 누워 있다고 보통 남자랑 사고 쳤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하잖아. 어쨌든 대답하지 않는 걸 봐서는 유키 씨가 맞는 것 같다. 날 모모 군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기억이 돌아오는 게 빨라지는 것 같아 내심 마음이 놓인다.
“나, 지난밤에 같이 술 마셨던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나랑 반 씨랑 유키랑 술 마셨던 건가? 몇 번 있었으니까 언제 일인지 모르겠는데. 퍽 혼란스러워 보이는 유키에게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유키 씨 상대라… 말을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 술 마셨다고 했으니 숙취 약이라도 사와야 할까 했는데, 몸은 숙취 상태가 아닐 테니까. 나까지 정신이 없네. 머리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간밤의 일을 떠올려보려고 하는 유키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보인다. 숙취가 있을 리가 없으니 두통이 날 리도 없는데 머리 잡고 있는 걸 보면 감기라도 걸렸나 싶고. 요즘 일교차가 심하니까…. 가까이 다가가서 유키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았다.
“잠깐만요. …열이 있나….”
“…모, 모모 군…?”
열은 없는데. 그러면 그냥 기분의 문제인가? 교통사고 후유증 문제까지 가면 복잡해지는데. 얼른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귀까지 빨개진 유키의 얼굴 탓에 그렇게 상태가 심각한가 싶기도 했다.
“저, 많이 아프세요? 병원 갈까요?”
“아니… 안 아픈데…. …모모 군은?”
“저야 당연히 괜찮죠! 다친 곳도 없으니까.”
유키가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픈 게 아니면 단순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건가? 나를 기억하고 있는 유키 씨였으니 이전처럼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뒤풀이라고 얘기하는 걸 보면 역시 반 씨가 있을 때의 유키인가 싶지만. 이런 호칭으로 부를 때는, 뒤풀이 같은 걸 갈 만큼 성공적으로 일이 끝났던 게 별로 없었지.
“…지난 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지금 무슨 생각 하세요?”
유키의 차림을 보면 오해할 만도 하지만. 잠버릇이 나쁘지 않아도 샤워 가운은 일어나보면 잔뜩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이쪽 차림도 멀쩡한 건 아니지만, 유키는 거의 벗다시피 하고 있으니까. 설마 내가 유키를 벗겨뒀다거나, 그런 의심을 하는 건 아니겠지. 나 유키한테 그렇게 신용 없었나? 그것도 유키 씨에게 이런 의심을 받을 정도로?
예전의 나였다면 저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을 눈치챘다면 따라서 얼굴을 붉혔겠지만, 지금은 산전수전 다 겪은데다 유키랑 몸도 셀 수 없을 만큼 섞은 모모쨩이다. 불쾌해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유키의 얼굴에서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지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지금까지의 경험대로 생각해본다면 하루이틀쯤 적당히 속여서 재우면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기도 한데. 유키, 그런 부분에서 적당한 구석 있으니까 얼버무릴 수 있겠지만. 상대가 유키라서 그것도 내키지 않았다. 유키한테 거짓말 하고 싶지 않고. 의심스러운 투로 묻는 내 말에 유키가 헛기침을 했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됐어. …여기 어디야? 나 머리 왜 이래? 모모 군은? …반항기야?”
반항기라니. 나름 멋 낸 건데! 팬들도 좋아하고 유키도 귀엽다고 해주는데. 그리고 유키의 긴 머리는 정말 누구에게나 태클 걸리는 소재인 건가 싶다. 확실히 하룻밤 자고 일어났는데 내 머리가 유키만큼 길어진다면 놀라지 않을 자신이 없긴 하지만….
“그걸 설명하려면 길어지는데요….”
세 번이나 같은 내용을 얘기하려니 이것저것 빼먹게 된다. 과연 이 부분에서는 일부러 빼먹은 부분이 훨씬 더 많았지만. 같이 아이돌을 하고 있는 부분이나, 그런 거…. 아무래도 반 씨와 같이 활동하고 있는 유키 씨라면 놀랄 것 같으니까. 대충 지금이 5년 후고, 유키가 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잃어버린 것만 전달했다. 집 안만 둘러봐도 Re:vale의 이름과 함께 두 사람의 사진이 걸려 있는 이런 저런 굿즈가 많이 있을 텐데, 그건 어떻게 설명하지….
이런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도 그렇고, 바뀐 외형도 그렇고. 납득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러기 힘들겠지만. 십 년에 가까이 건축 중이던 돔이 완공된 사진이나 뉴스에 나오는 최신 날짜들이 내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줬다. 아무래도 열 다섯의 유키가 평범하지 않은 반응을 보여줬으니 추정 나이 스물의 유키의 반응도 기대가 되는데, 그것보다는 앞으로 있을 후폭풍이 더 걱정되기는 했다.
“…그, 혹시 우리 둘이 같이 살아?”
상황을 납득한 후의 첫 마디는 이랬다. 그것도 조금 낯부끄러운 듯이. 같은 침대에 누워 있었으니 그렇게 오해할 만도 하다. 생뚱맞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중요하지. 원래는 반 씨랑 같이 살고 있었으니까,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경계할 법도 하다.
“저는 따로 집 있어요! 가끔 와서 묵기는 하지만. 사고가 났으니까, 아무래도 돌봐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제가 옆에 있기로 했어요. 다친 곳은 없어도, 혹시 모르니까….”
“아, 그래….”
이 묘하게 실망스런 반응은 뭐지? 이 시절의 유키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나? 전혀 모르겠는데. 사귀고 나서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물어봐도 유키는 부끄러우니까 말 안 해준다고 하면서 말을 피했으니까. 그냥 돌봐주는 사람이 반 씨가 아니라 실망한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라 마음이 무거워진다.
“맞아, 반은? 집 따로 있어”
“아….”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타이밍 좋게 그쪽을 물어본다. 보통은 궁금하겠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우물쭈물 하면 유키가 침대 옆 협탁으로 고개를 돌린다. 액정이 나갔는데 용케도 작동되고 있는 유키의 휴대전화다. 일단 충전시켜 두기는 했는데…. 어떻게 제 휴대전화인 줄 알기는 했는지 망가지기 일보 직전인 전화기를 켜서 연락처를 뒤져본다. 아니, 내 휴대폰이 아니라서 이걸 어떻게 막을 수도 없고…! 전화해 봐야지. 그렇게 얘기하고서는 ‘반’ 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것에 통화 버튼을 누른다. 동시에 나도 몸을 돌려 래빗챗을 켠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속도로 타자를 쳤다.
반씨유키지금사고나서기억상실20살됐어요죄송합니다적당히얼버무려주세요
말하고 싶은 게 잘 전달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휴대전화를 붙잡고 있으려니 유키가 이쪽을 쳐다봐서. 어색하게 웃으면서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전화 안 받네….”
뭐야? 내 전화 무시하는 거야? 툴툴거리는 유키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알기로는 보통 반 씨는 유키의 전화를 두 번까지는 안 받고 세 번째에 겨우 받아준다. 그 전에 내가 보낸 래빗챗을 확인해 주시면 좋을텐데…. 역시 집념의 유키는 전화가 두 번이나 끊겨도 굴하지 않고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한테도 저렇게 전화해주면 오죽 좋아? 내 부재중 전화가 불이 날 때는 술 약속이 잡힌 날 밖에 없다. 그것도 매번 말하고 가는데 전화하고.
“아, 받았다.”
헉, 숨을 들이마신다. 유키가 반 씨에게 무슨 말을 들을 지 모르겠다. 대체 왜 일어나자 마자 반 씨에게 전화하는 거지? 사실 대화를 좀 했으니까 일어나자 마자, 는 아니지만. 질투의 화신이 속에서 슬쩍 고개를 들이미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진정해야지. 스무 살의 유키잖아. 유키는 그 때 나랑 사귀기는 커녕, 그냥 팬 A라고만 생각했을 테니까. 무섭긴 해도 역시 통화 내용이 궁금해서 옆에서 얼쩡댔지만 큰 수확이 없다.
“반. …응? 내가? 아니…. 어? 그런 적 없는데…. …그랬다고? 이상하네…. 알았어. …다음에 연락 해도 돼? 응, 미안. 응.”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길래 유키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지? 확실히 우리 둘 모두 다 반 씨에게는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처지였으니 별로 다를 건 없긴 하겠지만….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주셨으려나. 가만히 앉아 유키의 표정을 살폈다. 영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나 반이랑 싸웠어?”
“어…. …잘 모르겠는데요….”
싸웠던가? 며칠 전에 같이 술 약속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유키 일이니까 반 씨를 화나게 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유키를 좋아하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란 말이지. 싸웠어도 이상하진 않다. 반 씨가 화날 정도라면 유키가 엄청 잘못한 거겠지만….
“…반 씨, 뭐라고 하셨는데요?”
“나랑 반이 음악적 견해의 차이로 크게 다투고 갈라선지가 언제인데 스스럼없이 전화 거냐고. 지금 같이 하고 있는 모모 군한테나 잘 하라고 하는데? 미안하다고 하니까 반성했으면 연락은 해도 된댔어.”
내가 먼저 얘기 꺼냈다는데. 모모 군, 이거 진짜야…? 전화기를 들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 유키를 보고 있으니 골이 띵했다. 그 긴 얘기를 다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대충 얼버무려 달라고 하기는 했는데, 이런 식으로 얘기해 주실 줄은 몰랐으니까. …괜찮은 건가? 유키가 돌아와서 화내지 않으려나?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고.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진짜구나….” 하고 한숨을 폭 쉰다. 그게… 이 상태에서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어서.
“모모 군, 체육계 아니었어? 용케 하고 있네.”
“그… 네…. 많이 도와주신 덕분에….”
“잘은 모르지만 반이 뭐라고 했겠지. …1년 후에 새로 짜게 된다는 건 좀 충격이었어. 벌써 5년? 앨범 같은 거 있어?”
아까 전화에서는 미안하다고 했으면서 전화 끊자마자 반 씨의 탓으로 돌리다니. 하지만 웃어 넘길 수밖에 없는 화제였다. 여기서 내가 사실대로 말하면 반 씨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니까. 그나저나 내가 보낸 래빗챗이지만 용케 잘 알아들어 주셨다.
“있어요! 저희, 꽤 성공해서. 처음에는 이런저런 일도 많았지만… 지금은 유키 씨랑 같이 노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요.”
초반에는 고생 뿐이었으니까. 가난할 때에는 유키한테도 못할 일 많이 시켰지. 다른 집에 세차를 다닌다든가,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하게 하고. 진심이 담긴 말을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얘기하다가, 제멋에 마음대로 떠든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이 유키, 아직 스물이고. 이렇게 얘기해도 곤란할텐데.
“…아, 죄송해요. 혼란스러우실 텐데 이런 말 들으셔도 불편하실 텐데. 멋대로….”
“아냐, 괜찮아. …그럼 나, 5년 동안 모모 군하고 같이 있었던 거야?”
“네…. 불편하시겠지만… 그래도 기억이 돌아오실 때 까지는 제가 옆에 있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유키가 뭐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반 씨가 유키의 탓으로 돌려 버리긴 했지만, 역시 탐탁치 않겠지. 이런 기분도 오랜만에 느껴본다. 가슴이 쿡쿡 쑤시는 죄책감 탓에 표정 관리가 어렵다. 예전이었다면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을지도 모른다.
“…아까 유키, 라고 불렀지.”
“헤.”
“반말했지?”
“자, 잘못 들으신 거 아닐까요?”
“‘유키, 좋은 아침’ 이라고 했잖아?”
그걸 기억한단 말야? 이 타이밍에서 그 얘기를 꺼내다니. 혼내려는 건가? 그런 투가 아닌데. “예에… 그랬죠….” 개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치만, 열살의 유키도 열다섯의 유키도 유키라고 불러도 별 생각 없었단 말야.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침대에 무릎 꿇고 있는 것도 퍽 불편하다. 유키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방긋방긋 웃고 있지만.
“다시 해봐, 그거.”
“네?”
“반말. 평소에 그렇게 부르는 거지?”
“제가 어떻게 유키 씨를…!”
“그렇게 부르잖아?”
이제 같이 활동해야 하니까 편하게 유키라고 부르라고 했던 얘기, 처음 들은 것도 벌써 5년 전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유키 씨를 마주하고 이름을 부르라니. 유키랑 유키 씨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스무 살의 유키 씨라니 역시 좀 멀게 느껴지고. …내 안의 최고의 아이돌인걸. 얼른, 하고 재촉해봐도….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지만. 대체 이건 왜 불러 달라고 하는 거지. 갑작스런 관계 진전을 꾀하는 것 마냥. 우린 이미 A부터 Z까지 진도 다 뺀 사이인데….
“…유키…….”
그렇게 얘기하고 슬쩍 고개를 들면 아까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유키가 보인다. 그렇게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유키와의 사이에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진짜 나 좋아하나? 스무 살이면 제대로 얘기도 못했을 때인데.
“…유키 씨도 저 모모라고 불렀는데.”
우물거리면서 얘기하면 유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다. 어쩐지 어린 애를 가지고 노는 것 같은 죄악감이 든다. 생긴 건 스물 여섯이랑 똑같은데 다들 왜 이렇게 다른 건지. 유키가 좀 천의 매력을 가진 미남이긴 하지만… 좀 반칙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까지 괴롭힐 생각은 없으니까 적당히 봐주지만.
“됐어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단번에 그렇게 호칭 바꾸는 거 쉽지 않잖아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이거 귀여운데. 지금은 보기 힘든 유키의 모습이라 어쩐지 좀 짜릿하다. 나쁜 버릇 드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런 걸로 유키가 바람이라고 하지는 않겠지? 유키 씨도 유키인 걸. 생긴 것도 똑같잖아.
“…모모 군은 머리 긴 남자 좋아해?”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수줍은 표정을 하는 유키는 정말 마음을 숨길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5년이나 같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막 나가자는 건가? 그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도 부끄럼 탈 때라서 몰랐던 건가? 확실히 침대에서 눈 떠서 마주치면 기분이 색다르기야 하겠지만….
“유키 씨라면 뭐든 좋아요! 어느 쪽이든 엄청 미남이라는 느낌이라. 짧은 머리는 인상이 날서 있으면서도 부드러워서 좋고, 긴 머리는 또 여러 매력이 있어서. …그래도, 저 유키 씨 머리칼 만지는 거 좋아하는 편이라. 자르면 아까울 것 같지만요.”
열 살 유키도 열 다섯 유키도 머리카락 자르려고만 하니까. 일단 스물 유키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못 박아 둬야겠다. 자신을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는 어린 유키를 농락하려는 건 아니고, 반응이 귀여운데다… 말도 잘 들어주잖아. 지금도 머리카락 좋아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긴 머리랑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는 걸 봐서는…. …하아…. 정신을 잠깐 놓으면 양 뺨을 감싸 쥐고 황홀경에 빠질 것 같다. 유키, 미남….
“여기 내 집인 거지? 둘러봐도 돼?”
“그럼요! 편하게 계세요. 제가 손님 같은 거니까요.”
유키니까 스튜디오 같은 곳으로 가려나? 아니, 보통 집에 스튜디오가 있다고 생각을 안 하려나. 세레브가 되어 유키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노력한 덕택도 있지만, 역시 운도 따랐을 테니. 노력해도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유키의 노래가 있으니까 언젠가 성공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굶어 죽기 전이라 다행이야. 침실 밖을 빠져나오면 Re:vale의 포스터나 굿즈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에 있어 역시 유키 씨의 눈치를 보게 된다. 아무래도 좀 그렇지. 눈을 떼구륵 굴리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유도하려고 해도, 역시 집안 이곳저곳에 두 사람의 자취가 남아 있어서. 지금까지는 의식하지 않았는데 새삼 기쁘기는 하지만….
“…모모 군의 노래 듣고 싶네.”
“노, 노래요.”
주변을 구경하던 유키가 빙글 돌아 얘기한다. 그거야 아이돌도 벌써 5년차고, 노래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 유키의 파트너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고. 그래도, 그것과 걱정이 되는 건 별개다. ‘이 정도의 실력으로 내 옆에 있는 거야?’ 같은 말 들어버리면 한동안 의기소침할 것 같으니까. 유키가 괜찮다고 말해주니까 믿고 있지만.
“헤드셋 가지고 올까요? 이, 이어폰으로도 괜찮나. 아니면 그냥 틀까요…?”
걱정이 돼서 자꾸 말을 더듬게 되네. 유키 앞에서도 그럭저럭 당황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이런 화제가 나오면 긴장하기 마련인걸. 유키는 내 생각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하고서는 태연하게 얘기한다. 노래에 관한 일이니 진지하지 않을 리 없지만 비교적 가볍게 물어본 것 같다.
“이어폰으로도 괜찮아. 음원 있는 거야? 들어볼래. 궁금해.”
“금방 가져올게요…! 아마 이쪽에…. 그, 편하게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자신의 집인데도 처음 보는 곳이라 신기한 게 많은 건지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주위를 살핀다. 인테리어도 유키의 취향이니 마음에 든 걸까? 널려 있는 커플 굿즈들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주는 것은 고마울 따름이다. 여기 어디쯤 이어폰이 있을 텐데. 제 외투를 뒤져 검은 줄의 이어폰을 꺼냈다. 어쩐지 심사위원에게 평가받는 기분인 걸. 주섬주섬 연결해 유키에게 양 손으로 기기를 건넸다. 마음만 같아서는 소파 아래에 무릎 꿇고 앉고 싶었지만,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 소파 옆자리에 앉았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유키가 이어폰을 귀에 꽂은 후로 기다림의 시간이 흘렀다.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에는 말을 잘 하지 않으니까. 놀이동산에 온 것처럼 들뜬 표정이었던 유키도 노래가 시작하자 퍽 진지한 표정이 된다. 열 살의 유키에게 들려줬을 때는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그래도, 유키의 노래니까. 유키도 분명 좋아할 거라고 믿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을 살피게 되는 건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아직 부족한 탓이겠지. 한 곡이 끝난 뒤에도 유키가 조용하자 더없이 불안해진다. 혹시 마음에 안 드나…? 조마조마하는 사이에 유키가 이어폰을 뺐다.
“…신기하네. 만든 적 없는 노래인데, 내 노래 같이 느껴져. …이런 노래도 쓸 수 있구나.
유키의 노래는 자신의 색을 가지고 있으니까. 유키가 자신의 노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서, 순수한 질투와 감탄이 담긴 그 말이 무엇보다도 기쁘다. 작게 미소 지으면서 다음 말을 기다린다. 조금의 혹평이 있어도 받아들여 바꿔 나갈 수 있을 정도의 프로가 되었으니까.
“모모 군도 노래 잘하게 됐네. 노래방에서는 부끄럽다고 잘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 그랬던가. 몇 번 함께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탬버린을 쳤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아이돌 앞에서 태연하게 노래 부를 수 있는 팬이 있을 리 없지 않나? 지금이야 셋이서 노래방에 가도 아무 노래나 부르면서 신나게 웃고는 하지만.
“…지금은 부를 수 있어요! 아이돌이니까.”
“그래? 그럼 이따가 노래방이라도 갈까.”
“바, 밖에 나가는 건 좀…. 여러 사정이 있어서요.”
물론 어제도 외출을 하기는 했지만 열 다섯 유키의 억지가 아니었으면 절대 나가지 않았을 거다. 오카링에게의 정기 보고도 잊지 않고 있지만, 역시 밖을 돌아다녔다는 얘기를 하면 화낼 것 같아 아직 비밀로 해두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니까 괜찮을 것 같지만. …단골이라고 했으면서 유키의 목소리를 못 알아보는 악기상 주인의 무던함에 감사할 따름이다.
“5년인가….”
문득 유키가 고개를 든다. 유키를 살피고 있던 나는 아무래도 시선이 움직여서, 바깥을 바라보는 옆모습에 눈을 빼앗긴다. 수없이 봐서 익숙해진 이 도시의 모습도 예전과는 꽤 달라졌을 거다. 물론 유키도 나도, 그때와 비교하면 많이 바뀌었지만.
“…모모 군, 열심히 했네.”
유키와 유키의 노래를 좋아하는 이 마음은 앞으로도 계속 변함이 없을 거다. 겉치레 없는 이 말 한마디에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무어라 말하려고 입술이 달싹거리지만 목이 매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라서. 아마 유키가 들었어도 기뻐하지 않았을까.
Re:vale의 팬이었던 과거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열심히 했다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모모 군, 울어?”
유키가 내 얼굴을 살피고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했는데. 역시 감동적이라서. 훌쩍훌쩍 코 흘리는 소리를 내며 옷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아니에요오….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스스로도 구차하게 들린다. 이쪽은 진지한데, 유키는 소리 내서 웃는다. 아, 곧 있으면 일 복귀해야 하는데. 눈 부으면 안되는데. …사람 우는 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거야? 웃는 이유는 알겠지만! 킁킁대며 손을 내리자 유키가 미소를 띠곤 가까이 다가온다. …뭐, 뭐야. 너무 가깝지 않나요?
뒤로 조금 물러나려는 순간, 유키가 양 뺨을 잡고 입술을 부딪혀왔다. 부딪혀 왔다는 건 아무래도 이미지 적인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부드러웠고. 위로라도 하려는 듯한 상냥한 혀에 비해 접촉 거리는 농밀하기 그지없다. 사귀는 사이이긴 하지만, 스물의 유키하고는 손톱만큼의 연애전선도 없었는데요…!? 위로의 키스라니 너무 대범하지 않나. 평소에 유키와 쌓아 뒀던 경험이 무색하게 당하고만 있었다. 스물 주제에 왜 이렇게 잘하는 건데? 입술이 떨어질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어벙한 표정만 지었다. 키스보다 유키가 배시시 웃으며 꺼낸 다음 대사가 더 가관이었지만.
“꿈이니까 키스해도 괜찮아.”
…어련히 그러시겠죠.
어쩐지 반 씨랑 싸우고 Re:vale를 해체했다는 헛소리에도 쉽게 넘어가고, 갑자기 세레브가 된 데다가 6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별로 놀라지를 않더라니.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거다. 내 감동 돌려내! …라고 말하고 싶은 부분이지만, 꿈이라고 생각해도 허튼 소리는 안 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꿈 꾸는 중이라고 생각해 대범하게 혀를 섞은 연하의 유키가 귀엽게 보일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웃는 얼굴에 잠깐 넋을 놓은 자신이 어이가 없지만.
“…저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목이 마르다고 물을 마시고 있던 유키가 콜록콜록, 사레가 들려 등을 팡팡 두드려주었다. 키스까지 했으면서 되게 새삼스럽다. 설마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꿈 속의 사람도 아니기는 하지만, 꿈 속의 사람이라도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모르, 겠…는데….”
유키들은 죄다 기억상실이라도 걸린 거야? 물론 지금은 기억 상실이지만. 아까 당한 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좀 놀려주고 싶은데. 연상의 매력으로 어떻게 좀 안될까? 이왕에 스무 살 유키의 테크닉과 반응도 볼 겸. 스스로도 흘릴 거라고 생각했는지 테이블 위에 물이 담긴 컵을 놓아둔다. 좋은 생각인걸.
“…유키. 키스만 해도 괜찮아?”
이 호칭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고. 꿈이니까 괜찮다며? 어차피 열 살이나 열 다섯에 있었던 일들도 유키, 기억 못하는 것 같던데. 허벅지 위에 손을 얹으니 머리 위에서 펑, 하고 열이 나는 것처럼 급속도로 얼굴이 빨개진다. 나도 아까 기습공격 당했거든. 널찍한 소파 위에 유키를 밀어 눕힌다. 어차피 힘이 차이 나서 저항하기도 어렵겠지만, 몸이 굳어 움직이기 힘든 모양이다. 다리 위에 올라타서 가슴을 쓰다듬는다. 당황하는 기색이 퍽 귀엽다. 소파라서 묶어 둘 게 없는 건 아쉽다. 더 재미있는 반응 볼 수 있었을 텐데.
“아까 착각했던 거, 해보고 싶지 않아…?”
“…모모 군, 그게….”
시선을 피하면서 벗어나려 해보지만 쉽게 놓아줄 리가 없다. 아무것도 없었던 어젯밤의 일을 기정사실로 만들면 유키도 좋고 나도 좋지 않겠어? 이렇게 부끄럼타는 유키 보기 어려울 테고. …유키 경험 많지 않았나? 동정 같은 반응이 신선하다. 유키 위에 엎드려 뺨이나 목에 입을 맞춘다. 피부가 닿을 때마다 파드득 떨리던 몸이 곧이어 축 늘어진다. …어라? ……기절했어?
“유키? 잠깐만, 유키…!?”
머리에 피가 몰려서 실신이라니 이거 동정도 안 할 일이잖아!? 좀 일어나봐! 한참을 흔들어 깨우다가 열이 문제인가 싶어 이마에 물수건도 얹어보고, 옷도 풀어헤쳐본다. 그런데도 일어나질 않아서, 새근대는 숨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역시 걱정돼서. 어줍잖은 인공호흡이라도 시도해보기 위해 입을 겹친다. 가슴을 압박하는 것도 아니고 숨만 불어넣어서 사실 별로 의미 없는 행동이긴 했지만. 신이 노력에 감복이라도 한 건지 유키가 색색거리더니 눈을 뜬다.
“…유키…? 괜찮은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희미하게 초점 안 맞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유키 때문에 더 걱정이 되는 걸.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냐? 구급차 불러야 하나? 안절부절해서는 유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프다거나, 병원 가자거나.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모모, 뭐 해?”
평소와 똑같은 유키 목소리에 으앙, 하고 우는 소리를 내며 가슴에 매달린다. 다행이다. 앞으로는 절대 동정 같은 유키 놀려먹지 말아야지.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어야 하지만. …기억이 돌아온 건가? 확실히 돌아오는 텀이 더 짧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또 기뻐져서.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다시 병원에 검사를 하러 가야겠지만.
유키가 상체를 일으킨다. 나는 슬그머니 다리 아래쪽으로 몸을 옮긴다. 다행이다, 하고 안도하고 있으니 갑자기 시야가 뒤집힌다. …어라? 방금 전과 정반대의 자세에 침을 꼴깍 삼킨다. 그러니까, 이 상황이. 방금 막 일어난 유키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는….
“…하고 싶었으면 깨우지. 왜 감질나게 위에서 혼자 바르작거리고 있어.”
“유키? 그게 아니라. 나 인공호흡을….”
말 좀 들어줄래? …유키? 하기야 유키의 늑골을 부러뜨릴 수는 없어 가슴에는 손도 못 댔으니까 신빙성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유키를 놀리려고 했던 업보가 그대로 돌아왔다고 하기에는 내가 잘못한 게 너무 적지 않나? 희미한 저항마저 유키의 입에 막혀버린다. 그러니까, 대체 왜…. 키스를 이렇게 잘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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