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했던 그 애

모브녀시점 타임라인 잘 기억 안나는데 그러려니 해주세요

나나계 by 휘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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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좋아하던 남자애가 있었다.

처음에는 체육 시간에 남자들끼리 하던 축구에서 멋지게 골을 넣는 모습에 눈길이 갔다. 

…축구부라고? 체육에서 축구 시키는 거 완전 반칙이잖아. 그런 얘기를 하면서 친구들과 키득거렸다. 

지금까지 점심 시간에 매번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남자애들한테 관심 하나 없었는데도, 그 이후에는 가끔 시간이 나면 창밖을 보고는 했다. 누구 보고 있어? …그런 거 아니야! 놀려대는 친구들 때문에 가끔 민망해졌지만. 

가을이 되어 나는 축제 준비 위원을 맡게 됐다. 이런 거 싫어하지 않았고, 준비하는 건 귀찮아도 선생님이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준다고 했으니까. 기분 좋게 하려고 했는데… 뭐든 생각하는 것만큼 잘 풀리지는 않는 법이다. 준비해두었던 자재가 도둑맞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런 걸 훔쳐가다니 정말 할 일 없는 애들이라고 생각한다. 

축제를 담당하고 있었던 나와 반 친구들은 그야말로 눈 앞이 캄캄해졌다. 그 일로 방과후에 모여서 회의를 하는 와중에 그 남자애가 하교하다 다른 애에게 빌렸던 돈을 갚으러 돌아왔다. 과학 시간 끝나고 준다고 했는데 잊어버렸다나 뭐라나. 사교성 좋은 그 애는 중간에 끼어들어 우리 얘기를 듣더니 어떻게든 돕겠다고 했다.

마음은 든든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고민하던 나와 달리 그 애는 사람을 모아 전교를 돌았다. 고학년의 반까지 쭉 돌면서 남는 자재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 애는 친구가 많고 발도 넓은 건지 동급생이나 선배들의 예쁨을 받는 것 같았다. 연상의 여자 선배와 얘기하는 걸 보게 되었을 때는 조금 질투가 났지만, 본인은 누나가 있어 얘기하는 게 익숙하다고 주장했다. 친누나에게도 저렇게 애교를 부린단 말야…? 아닐 것 같은데.

그렇게 함께 돌아다닌 보람이 있어 원래 준비해 두었던 자제가 조금 넘게 모였다. 무사히 축제를 마칠 수 있었고, 결과는 대성황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그 애를 좋아하게 되었다.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아주 작은 계기로도 충분하니까.

다음 해에는 반이 갈라졌지만 나는 용기를 내서 그 애애게 고백했다. 차일 걸 예상했지만 역시나 차였다. 축구에 전념하고 싶다는 이유여서 나는 그럭저럭 납득했다. 동네를 넘어 지역에서 소문날 만큼의 유망주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관심이 많았으니까.

한 해가 또 지났다.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경기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축구를 그만둔다고 했다. 나는 아직 그 애를 좋아해서, 걱정이 돼서. 친구라고 얘기 붙일 만큼의 관계도 없는 나는 반 단위로 병문안을 가서도 괜찮냐는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했다. 괜찮을 리가 없는걸.

도움이 되고 싶었다. 여자친구가 되지 못해도 좋아.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의 그 웃음을 보고 싶었다. 그래도 나는 한 번 차였고, 그 애는 학교에 별로 나오지 않았다. 졸업식에는 얼굴을 비췄지만 그 전에는 학교를 자주 빠지기도 했다. 성실한 학생이었으니 몇몇 선생님들을 제외하고는 안타까워하는 분위기였다.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으니 수험을 준비해 고만고만한 학교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쓸쓸한 표정을 볼 때마다 아무것도 못 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지만 나는 그 애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났다. 남자친구가 생겼다. 나를 많이 좋아해주는 상냥한 사람이다. 학창 시절의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둔 채 나도 살아가고 있었다. 가끔 그 애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안면이 있던 친구들도 모두 연락이 닿지 않는 모양인지 SNS에서만 가끔 그 이름을 언급하곤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생각하는 게 끝이었다.

[사진] 이거 스노하라 아니냐?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아이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축구 선수를 그만둔 후에 아이돌이 될 생각을 하다니 엄청난 변화였다. …어울리긴 하는데 진짜 갑작스럽다.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무명 아이돌인 듯했고. 처음 본 방송은 심야 방송으로, 신인으로 나와 이상한 아저씨의 농담을 견디는 가혹한 형벌을 받고 있었다.

노래는 좋았다. …응, 좋다. 노래만 들으면 왜 못 뜨는지 모르겠는데. 노래, 이렇게 잘했던가? 축제 뒷풀이로 가라오케에 갔을 때의 그 애의 노래를 떠올려봤다. 평범했는데. 많이 노력한 걸까. 사람들을 웃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점은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상을 보다가 남자친구에게 동창이라고 말했더니 설마 좋아했냐고 물어봐서, 잘 얼버무리는 것에 실패했지만. 아마 얼굴을 보고 눈치 챈 거겠지? 꽤 귀엽게 생겼으니까. 경계했던 남자친구는 혼자서 방송을 몇 개 보고 오더니 그 애의 팬이 되었다. …남자친구와 내 취향이 비슷하긴 하지. 정작 이쪽은 지인의 근황을 전해듣는 느낌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 두 사람의 응원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Re:vale는 점차 인기가 많아졌다. 인터넷 게시판에 검색해도 글 하나 나오지 않던 과거를 생각해보면 BW 종합 우승은 정말… 그 순간만큼은 그 애의 고화질 사진데이터를 모으는 남자친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약간 기분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사무소가 작아서 스캔들에 많이 시달린다고 들었다. 시시콜콜한 정보의 출처는 전부 남자친구였다. 이렇게 인기가 많은데도 그렇다니 신기할 정도다. 연예계는 복잡하구나. 그 중에서도 제일 시끌시끌 했던 건 파트너의 과거 얘기였다. 부상당한 상대를 버리고 모모와 데뷔, 라는 내용. 초기 팬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돌고 있었지만 어차피 듣보였으니 묻혔다고 했다. 새삼 다시 터지는 부분에서 악의가 느껴지긴 했지만, 역시 두 사람 다 나쁜 사람은 아닐 것 같았으니까. 유키 쪽은 잘 생겼다는 거 외에는 별 생각 없긴 해도 그 애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좋은 사람일 것 같아서. 사실 이건 전부 핑계고, 그냥 그 애가 다시 웃을 수 있는 곳을 망치는 사람들이 싫었던 것 같기도 하다.

논란은 노래로 덮어졌다. 좋은, 사랑에 대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지금 행복하구나 싶어서. 

얼마 후에 동창회가 열렸다. 그 애가 온다는 소식에 참석한 사람들도 더러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주최의 섭외력이 대단한걸.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머리 끝이 하얗게 물든 거 말고는 예전하고 별로 달라진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인기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으니까 당연히 나 같은 건 기억 못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눈이 마주치자 이름을 불러주며 인사해줬다. 유명인에게 이름 불린 거 처음이야, 그렇게 말했더니 주변이 웃음으로 왁자지껄해졌다. 챙겨온 것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어필해야 할지 많이 고민하다가 냅다 꺼냈다. 

…스노하라 군. 남편이 팬인데, 사인 좀 해 줄 수 있을까!? 

조금 놀란 눈을 하더니 웃으면서 흔쾌히 받아주었다. 벌써 결혼이라니 빠르다느니, 이 정도는 빠른 것도 아니라느니, 스노하라 쪽은 실질 부부라느니 하는 농담이 번갈아 나왔지만 남편 이름이 적힌 종이가 그저 뿌듯했다. 이거 좋아하겠지.

그 애는 생각보다 술을 많이 마셨다. 분위기 타서 마시는 것도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데리러 올 상대가 있으니까 인사불성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적당히 마셨다. 다들 취해서 시끌벅쩍 할 무렵에 누군가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유키다…. 술 많이 취한 사람들은 눈치 채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데리러 온 건가? 정말 사이 좋은가봐. 그 애를 반쯤 업고 술자리를 빠져나가는 미남에게 슬쩍 인사했다. 그쪽도 제정신인 사람이 이쪽 뿐이라는 걸 눈치 챈 모양인지 웃어주었다. 잘생겼네. …어쩐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 애는 정신 빠져서 바닥에 눕기 일보 직전이지만.

그, 이번 신곡 좋았어요! 두 사람, 언제나 응원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옆에 사람을 업어서 고개 숙이기 불편한지 가볍게 끄덕거렸다. 좋은 사람이다. 유키의 옆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나중에 또 보자고 실실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내년에도 동창회 열리려나? 열린 것도 이번이 처음인데. 우리는 완벽한 타인이고 평소에 만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웃는 모모 군을 응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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