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경종독살설

생각 정리하는 페이지

1724-1756 by 에타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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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책 같은거 인용 안하고 막쓰는 페이지임 어디서 봣다 같은 언급 없으면 개인적 의견임)

1. 독살설의 시작

영조 1년 이천해가 능행 (이었는지 종묘였는지 기억이안나네…)을 다녀오던 영조의 가마앞에서 소리친 것으로 시작. 3년 뒤 무신란이 터지고 심유현 등이 이천해를 시킨거다 라는 연결고리가 생겼지만 영조 1년 (1725) 당시에는 웬 미친놈이 뛰어들어서 헛소리 한 것으로 판결. 이천해는 이 일로 스무번 넘게 압슬형을 당했는데 이 사건에 존나 분노했던 영조조차도 그 모습을 보고 너무 잔인하다며 압슬형을 영구 폐지할 정도. (압슬형 폐지를 누가 언급했는지는 모르겠음… 내기억으론 영조 본인이 독단으로 내린 결정이었는데, 승정원일기에 나와있을테니 찾아보는게 나을 듯)

압슬형 (아프다). 자료출처는 아래

당시 을사환국이 완료된 상황이고 (유봉휘가 귀양간 시점인지 그 전인진 모르겟음 문외송출 (서울 바깥으로 쫓겨나는 것)은 당했던듯 | 이광좌도 영의정 자리 그만 두고 도성 밖에 나가있던 상태) 사대신 복권 논의가 이뤄지던 시기라 또 큰 옥사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것같은데 이천해가 딱히 누가 시켰다고 안함 + 영조도 이 사건을 확대시키고 싶어하지 않아서 작게 처리된 사건으로 기억함. 이천해가 뭘 말했는지는 일기나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 뒤 나온 정유의 상소에서 “이광좌가 선왕의 병을 숨기고 조태억이 ‘한밤중 갑자기 가셨다’같은 문장을 써서 이런 유언비어가 떠돈다” 라는 말을 한 걸 봤을 때 + 무신란 주동자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걸 봤을 때 + 을해옥사에서 신치운의 게장발언이 무신란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걸 봤을 때 어느정도 디테일했는 지는 몰라도 경종독살설이라는 걸 유추할수 있다.

이천해가 진짜로 심유현의 사주를 받았는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심유현이 부정했거나 시인했어도 여러차례 고문 이후였을거라서…) 이천해 이후 영조는 각종 익명서와 괘서에 시달려야했음. 이천해 이전에는 딱히 이런 기록이 없는데 아마 환국이후라 + 이천해의 일로 아무리 숨겨도 소문 내용이 퍼져나가서 무신란을 준비하던 사람들의 발판이 되어준게 아닌가 싶음. 단순 급소+남인 세력만 쉬쉬하며 알고있던게 아니라 이때부터 시작해서 여러 계급의 사람들에게 퍼져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면 무신란과 을해옥사는 재쳐두고서라도 그 사이에 있던 수많은 익명서, “역모” 사건에 꽤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나와서…

2. 유언비어의 내용

영조에 관한 유언비어는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데

1) 경종에게 가는 음식(게장)에 독을 타서 죽였다

2) 영조는 김춘택의 아들로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

1 이건 2 건 영조가 왕위를 물려받은 것은 정당하지 않았고 자격조차 없었다는 내용이 요지임. 다만 2번 소문은 언제부터 돌았는지 알기가 힘든게 독살설은 이광좌와 조태억을 역적으로 묶으려는 노론의 주장으로 볼 때 이러한 소문이 돌았다는 것을 추측할수 있지만 친자가 아니라는 말은 언제 무슨 계기로 확산되었는지 확실치 않음… 김춘택이 누군가 얘기하려면 너무 길어지니까 이건 다른 포스팅에서…

1번에 관해서 서로 상반되는 음식인 게장과 땡감을 올려 죽게 했다라는 주장은 천의소감에도 없는걸로 봐서 그 후에 나온 주장이거나… 내생각에는 경종실록에 ‘저녁으로 게와 감을 드셨는데 의서에선 이걸 꺼리는 조합이라 하여 걱정했다’라고 나온 기사를 보고 현대인들이 ‘이렇게 죽인게 아닐까??’ 라고 추리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함. 영조 즉위년부터 을해옥사까지 대중적인 루머는 독을 타서 죽였다! 임.

게장 (맛있다)

그 다음문제는 게장의 소재인데 천의소감을 보면 당시 퍼진 루머로는 대왕대비전 (인원왕후| 숙종의 계비)에서 보낸 게장을 먹고 죽었다 라는 내용이라 영조가 ‘감히 미치지 못할 곳에 무함이 미쳤다’라며 펄펄 뛰는 일이 많이 나옴. 저 감히~ 부분은 이천해가 잡힐 당시에도 나왔던 내용인걸로 보면 아마 꽤 초기부터 있던 주장으로 추측가능함. 다만 게장 얘기는 없었는데 게장은 무신란이후에 추가해진 디테일임. 실제로 게장을 먹은 후에 설사증세가 심해지고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다음날인가 그 다음날 죽은걸로 봤을 때 약원에서 근무하던 신하나 그 사정을 가까이서 알수있는 왕족( ex 심유현| 경종의 첫 빈이었던 단경왕후의 동생)을 바탕으로 신빙성높은 루머로 퍼졌다고 생각됨.

인원왕후가 왕인 경종을 두고 영조를 전격 서포트했다는 루머 <<정말 중요한 내용이지만 독살설페이지에 구구절절 쓰자니 길어질거같아서… 나중에 신임옥사 정리하고 싶어지면 거기서 언급하겠음. 영조 8~10년 즈음에 ‘갑진년의 일을 인종과 명종에 비교한 역적’이 나와 영조가 극대노하면서 인종과 명종에게까지 무함이 미쳤으니 내가 죄인이다 하고 개난리친 사건도 있었으니 경종-인원왕후-영조 관계를 인종-문정왕후-명종의 관계로 해석하기도 했다는 걸로 이해하면 쉬울듯.

영조는 천의소감에서 가을철별미라 올라간 것 뿐이라고 어떤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함 (당연하겠지만…). 실제로 영조 7~8년 즈음에 입맛이 없어 식사를 못하는 영조에게 곧 가을이니 게장을 먹는건 어떻겠냐고 약방의 신하가 물어보는 대화가 나옴. 영조는 그에 ‘게장먹기엔 좀 이르지 않나? 근데 어차피 난 비린건 잘 못먹는다.’ 하면서 넘김. (게장이 무신란 이후에 영조에게 금기처럼 여겨진 것도 아니란 것…) 가을철 별미라 그냥 소소히 올라오는 음식인건 맞았는듯. 감 역시 가을에 먹는 과일이라 올라갔을 가능성이 큼.

https://www.k-health.com/news/articleView.html?idxno=56871

이 기사에 의하면 경종은 게가 상해서 죽었을 가능성이 더 클꺼고 게와 감이 상반된다는 말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본초강목 한줄 뿐이고 이미 위장병이 난 상태에서 그렇게 찬걸 먹었으니 악화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 내려줫으니 먹어보고싶은사람은 먹어봐도 됨 하 게장먹고싶다

영조가 진짜 경종을 죽일 의도로 게장과 감을 올리는 과학실험을 실행했을까? 당연히 우스개소리로 하는 거겠지만 이걸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경종이 게장을 먹었을 때엔 경종이 거의 한달 내내 밥을 제대로 못먹던 상태였음. 먹는걸로 죽이려면 그래도 그 사람이 그걸 먹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거기에 독을 쓰지 않겠느냐? <- 라는 요지로 경종 독살설을 타파하는 논문이 있음. 나도 거기 동의해서… 사실 경종을 독살하려고 했으면 약에다가 독을 타는게 훨씬 빨랐을 것 같기도 함… 의원이 이러한 약이 대내에 있냐고 물어보니 당시 왕세제로 시좌하고 있던 영조가 벅뚜벅뚜 방으로 들어가서 약을 찾아왔을 정도로 영조가 약에 접근할 수 있는 것도 쉬웠음. (이걸… ‘영조는 게장이아니라 약으로 경종을 독살했구나!!’ 라고 받아들여주지 않길 바람… 그만큼 게장독살설이 진짜일 가능성은 낮은데도 궁은 굉장히 비밀스러운 곳이라 정보가 대중적으로 퍼지지 않다보니 + 조선시대라 퍼지는 정보도 한계가 있다보니 강력한 루머로 자리잡은 거라고 봐주셈… 요약하자면 삼백년전 소론+남인 세력이 퍼트린 루머를 지금까지도 왱알왱알 하고있는 거임…) 차라리 인삼과 부자를 잘못써서 경종을 실수로 죽게 만들었다가 더 신빙성있음. (이렇다 하더라도 고의는 아니지만…머 어의들은 고의로 왕을 죽게 만들어서 벌받았나…) 영조는 장자인 효장세자와 끔찍이 아끼던 장손인 의소세손이 아플 때에도 인삼 쓰자고 할 정도로 인삼최고~ 였어서 경종을 해하려는 목적으로 인삼부자를 쓰려고 했다는 건 근거가 없다고 봄.

인삼 (귀하다)

어의 중 하나였던 이공윤이 삼다를 쓰면 안 된다고 반대하는 것에 영조가 고집을 부려 인삼을 처방했다가 죽게되었다 라는 말도 있는데 이공윤이 쓴 계지마황탕도 설사로 인해 탈수증세를 겪는 경종에겐 적절한 처방은 아니었을 뿐더라 당시 상황에서 고집을 부린 건 사실 영조가 아니라 이공윤 쪽이었음. 일단 이공윤은 어의,…라고 하는게 맞을지 궁금한데 내의원의 의원이 아니라 방의라고 바깥에서 의술이 뛰어나다고 초빙되어서 왕가의 진찰을 맡게 된 사람임. 실록과 승정원일기, 천의소감을 보면 경종이 원래 삼다를 계속 복용하다가 증세가 낫질않고 설사가 나니까 이공윤의 건의로 계지마황탕을 복용하게 된거임.

이공윤은 약을 잘못 쓴 죄로 극변에 정배되었다가 도배로 바뀌고, 나중에는 육지로 나와 살다가 죽었는데 역시 을해옥사에 와서야 역률이 내려졌음. 민진원은 한때 이공윤이 과격한 주장을 하긴 했어도 독한 약을 쓰자 한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며 감형해도 되지 않나요 했지만 영조는 불손한 태도 (경종 다 죽어가는데 혼자 어디가서 드러눠있었다함…)를 문제삼아 정배를 풀어주지 않았음. 하지만 끌어와 국문해야한다는 주장에는 ‘역적이라 하는 건 지나치다’며 더 심한 형벌을 내리는 건 거부함. 소론도 노론도 이공윤의 처벌을 주장했는데 왕이 죽은 후에는 으레 있는일이라 특별할건 없는듯…. 후에 영조는 무신란이 일어났을 때부터 그의 역심을 의심했다며 영조 31년 역률로 때림. 아마 영조가 삼다를 쓰자는 걸 반대한 게 세제였던 자신을 의심한걸로 비춰진건 아닌지 아니면 일기나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이 있었는지 궁금함.

3. 경종의 건강

경종이 세자시절부터 건강이 안 좋았는지는 모르겠음… 숙종실록이나 경종실록에선 ‘친모인 장희빈이 왕명으로 자결하고 앓기 시작했다’ 식으로 얘기한 걸 보면 안좋긴 했던듯. 경종이 오랜기간 아팠다는건 노론은 물론이고 소론도 부정하지는 않음. 다만 그 아픈것이 세제 책봉을 서두르고 시좌를 부탁할 정도였나? (공식적으로 노론측에서 먼저 대리청정을 주장한 적은 없긴 함 ㅋㅋㅋ 이건 나중에 신임옥사 페이지에 더 자세히…) 그 정도를 두고 서로 역적이니 마느니 싸웠다고 생각됨.

경종 3~4년 즘에는 건강이 진짜 안좋았는데, 종기가 생기거나 잇몸이 땡땡 부어서 밥을 못먹거나… 머 병의 종류는 다양했음. 경종이 처방받았던 약을 봐서 간질에 의한 발작도 겪었다는 주장도 있고, 어디서 봤는진 기억이안나는데 <단암만록>에서 묘사된 경종의 모습 —갑자기 웃고, 툭하면 실금하고, 머리는 빗질을 안해서 때가 꼈다는 등—도 간질에 의한 증상일수도 있다고 하는 한의사 글도 있었고, 아기 때에는 온몸이 갑자기 뻣뻣해지는 병을 겪기도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는 말을 하는 기사도 있어서… 내가 직접 찾아본 1차사료들이 아니라 뭐라 하기 어려움. 간질을 앓았을 수도 있겠다~ 식으로 생각하고 있음.

앓고 있던 병이 간질이던 아니던 (아마 여러 종합적으로 안좋은 건강상태였다고 생각됨), 경종은 이미 근무태만 상태였음. 경연을 자주 안 열어서 경연 좀 열라고 자주 간언이 올라오고 (근데 이건… 경연 진짜 많이 연 영조도 들었던 소리임…정조도 들었을걸… 어느정도는 흘려듣는게 좋은), 상소문을 받아만 두고 답을 안 내려서 경종 4년 실록에는 이때까지 처리되지 않았던 상소문 70개가 도로 내려졌는데 그중 하나가 4대신은 목을 베어야함! 하는 김일경의 상소였던걸로 봐서 적어도 2~3년전 상소가 여태까지 처리 안 되고 있던것임. 어떤 중요한 상소들만 모아둔거라면 일부러 처리하지 않은거라고도 하겠는데 ‘잗단 상소도 많았다’라는 걸로 봐선 상소들이 그냥 무시된 거임…

아무튼 경종은 다방면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사실 조선왕들 자체가 그렇게 안 건강했던것 같기도… 노론은 이렇게까지 안 좋았던 경종의 건강상태를 소론이 의도적으로 숨겨 결국 독살설이 나도니는 거라고 주장해 이광좌와 조태억을 역적이라고 한거고, 급소는 왕실의 가까운 사람인 심유현이 끼어있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비명횡사했다고 주장했음. 영조 1년 김일경 등을 토죄하고 내는 성명문? 반교문? (뭐였는진 까먹었다…)에 ‘선왕의 건강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라는 것을 끼우느냐 마느냐로 당시 집권당인 노론과 지방으로 밀려나있거나 소수였던 소론이 충돌했었음. 영조는 처음엔 허락했다가 소론의 반발때문에 거둔걸로 기억하는데, 그 후에도 꽤 길게 소론의 입장을 고수함. 소론들은 글타쳐도 영조는 왜 경종이 심하게 아팠다는 게 알려지는 걸 꺼려했을까…

창경궁 환취정. 경종이 죽은 장소임. 사진출처는 아래:

노론측의 주장은 ‘경종과 노론은 잘못없고 경종이 아픈 틈을 타 적신(소론)들이 난리를 쳐 신임옥사가 일어난거다’임. 탕평책을 생각하는 영조에게서 이런 맥락으로 볼 때 경종이 신축년부터 몸이 안좋았다는 건 결국 노론에게 몰표를 주는 행위기도 하고, 경종이 아파서 신하들의 의견만 좇앗다는 건 결국 자신의 건저문제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했기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함. 영조에게 경종은 적어도 자신을 지켜주는 것에 대해선 능동적이고 단호해야했으니까… 왜냐, 그래야 자신이 정당한 후계자가 되니까… 노론의 압박으로 만들어진 가짜 후계자가 아니라 효종의 혈맥으로 온리 경종과 영조만이 남은 상태에서 후계자를 고른다면 다른 떨거지가아니라 당연히 자기여야하니까~! 그리고 이건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전주이씨 아닌 애들이 말 얹을게 아니고 왕실어른인 대비와 임금인 형이 결정할 일이니까…! 경종과의 우애를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닌가 싶음.

경종의 몸이 아팠다는 걸 공개하는 게 말년에만 해당되는 얘기였으면 소론들도 굳이 공개를 반대하진 않았을텐데, 노론은 의도는 위에 쓴 주장의 공식확정이었기 때문에 소론은 목숨걸고 반대하느라 무신란 때 더 어색한 장면 연출되어버렸다고 생각됨. 노론이 이광좌를 역적이라고 지목한 데에는 많은 사항이 있었지만 이 당시 약방 도제조로 의약청을 설치하지 않아 바깥사람들이 경종의 건강상태를 모르게 했기 때문에 결국 무신란이 일어난거라고 주장하는 게 큼. 감란록을 만든 송인명은 영조 1년 경종의 몸상태를 교문에 포함하자는 민진원의 얘기에 반대하고 그를 탄핵했지만 무신란 이후로는 아;; 민진원은 이걸 걱정했던거군요ㅋㅋ; 라고 했을 정도로 이 주장은 효력을 잃고맘… 을해옥사에 와서는 경종의 병 어쩌구가 천의소감을 통해 널리 알려졌는데, 그 전에 알린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음. 적어도 감란록에서는 없었는듯…

4. 마치며…(마치 기승전결이 있는 글인척하기…)

경종독살설은 급소에게 중요한 명분이 되는 동기이자 루머여서 영조 31년인 을해옥사까지도 현역으로 일하고 (아무래도 재밌으니까) 지금까지 살아남은 설이지만 실제 일어났을 가능성은 낮음. 영조가 경종을 죽일 이유같은 건 안 다뤘는데 그건 진짜 보는 시점에 따라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 할수 있을것같아서…. 경종이 영조의 유일한 비빌언덕이었기 때문에 죽일 이유는 없었다는 건 영조가 경종의 죽음—즉위 사이에 무슨 일을 당할수도 있다는 전제하에 생기는 동기같음. 왕이 되고 난 뒤면 대체 누가… 대놓고 개긴단 말인가…(하지만 반란이 일어나긴 했네요…머쓱!) 하지만 경종이 죽은 타이밍 역시 영조에게는 불리하기 짝이없음. 김일경은 물론이고 유봉휘나 이진유, 박필몽 같은 준소들이 아직 주요관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영조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소론정국 몰아내자~! 했던 이의연이 죽도록 맞은것만 봐도 살벌했다고 봄. 자신에 대한 서포트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영조는 김일경과 목호룡을 역적으로 단정하고 죽인 뒤 환국을 감행해서 을사환국으로 노론 정권이 들어섬. 김일경 무리를 역적으로 처단한 건 결국 아직 소론이 힘을 차지하고 있을 때여서 영조 입장에선 어느정도 도박이었을지도 모르겠음. 하지만 전제국가에서 그게 어느정도의 도박이었느냐?에 따라서 경종의 죽음이 영조에게 도움이 되었냐 아니느냐가 갈린다고 생각함.

경종독살설이 당시에도 유명하고 신빙성있다고 여겨진 건 삼수의 옥 사건 때문이라고 생각됨. 이미 그런 시도들이 있었고 김성궁인을 아직 잡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잔당이 남았다고 생각하기도 쉽고. 삼수의 옥이랑 김성궁인은 경종 독살설이랑 연결되는 중요한 사건인데 적지않은 이유는 너무 길어져서+자료를 많이 못봐서… 나중에 생각 정리해서 쓸 기회 있으면 쓰겠거니…

영조는 자신이 쓴 무함을 벗기 위해서라도 경종과의 우애를 강조했는데 그중 한 일화는 주변사람이 말리는데도 경종이 ‘내 아우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싶어 오는데 왜 말리느냐’ 라며 고집을 부려 동궁에 종종 행차했다는 건데, 천의소감에 나오는 말이지만 이 전에도 (영조 15~16년 즘인듯) 영조가 당시 동궁에 있었던 신하를 가리키면서 ‘얘네도 있었으니 알거다. 나 세제일때 황형께서 종종 와서 글읽는 소리를 듣고 또 직접 읽어주시느라 그 옥음을 직접 들을 수 있었는데~’ 운운했던걸로 봐서 실제 있었던 일일 가능성은 높은듯. 다만…뭐 얼마나 쓸말이 없었으면 이런 지나가는 일화를 끌어다가 우애를 증명하냐 싶어지긴 했음…하지만 뭐…소극적이고 스스로 ‘말을 자주 더듬어 말하기 힘들다’고 하고 감정표현이 적었던 경종으로서는 최대한 끌어모아 애정을 표현한걸수도 있겠군요….


여기저거 노트 여러군데에 적느라 흩어진 자료들이랑 적어두지도 않은 생각들 잊어버리기전에 모아서 적어뒀는데 산만하게 적어둬서 더 헷갈리게 생겻네… 적어놓고보니 영양가도 없군… 아니 이거 와중에 갑진년부터 을해년까지 어떤 루머가 언제 퍼졌는지 정리하는거랑 경종의 병세를 밝히는 것에 영조도 반대했던 이유 적으려고 시작한 포스팅인데 사족만 존나 길어져서 그냥 천의소감 2024버전됨 ㅅㅂ 아ㅋㅋㅋㅋㅋㅋㅋㅋ 준노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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