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들.

상담자, 요제프 콘라트.

Time-traveler File No. 063

찾아오지 않는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은 한정적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내담자들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요제프 콘라트Josef Konrad 


콘라트Konrad라는 성은 고대 게르만어에서 왔다. 훌륭한 조언자, 혹은 과감한 조언자를 뜻한다.  

이름 요제프Josef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이모가 지어 준 것이다. 후에 카프카의 소설 <성>을 읽고서, 주인공 요제프 K. 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 

188cm, 90kg. 큰 키와 두툼한 뼈대, 그에 맞게 붙은 근육과 살. 그를 처음 마주한다면 마치 벽과 같은 위압감을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은 쏘아보는 듯한 강렬함을 주고, 두드러진 광대뼈와 움푹 들어간 눈 주위로는 검은 기운이 들러붙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라앉은 다정함이 표정에 드러난다. 

버릇처럼 1920년대 옷을 차려 입는다. 둥근 깃의 클레릭 셔츠, 슬리브 가터, 조끼와 트위드 재킷으로 갖춰진 쓰리피스 수트에 회중시계 줄이 늘어진 것을 가장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날이 추울 때면 가죽 장갑과 오버코트를 갖춘다. 모자는 거의 쓰지 않으며, 안경 또한 오랫동안 글을 들여다 봐야 할 때에만 착용한다. 동시에, 외출을 할 때에는 늘 가죽 홀스터를 차고, 애용하는 권총인 독일제 발터 PPK를 꽂고 다닌다.  

성채 안의 삶. 


출생지는 프로이센, 뉘른베르크.

현재의 독일 바이에른 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뉘른베르크 토박이 상인 집안 출신의 아버지와, 주장에 따르면 호엔촐레른 가家의 뉘른베르크 방계 집안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미 지어진 부副에 구시대적 계급의 명예가 더해진 것이다. 그 결합이 단단한 성채를 더욱 더 단단하게 만들었으며, 자신은 그 안에서 태어난 셈이라고 늘 말한다. 정력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 그리고 귀족적이고 소극적인데다가 꿈에 젖어 있던 것 같던 어머니 사이에서 그는 그다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대가족 사이에서 자랐다. 여동생이 넷, 남동생이 둘. 그는 자신의 가족들을 사랑했다. 아버지를 빼면. 아니, 어쩌면 아버지를 빼고 모든 가족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일곱 남매의 맏이이자 콘라트 집안의 장남으로서 요제프에게는 요구되는 것이 많았다. 그 집안은 말하자면, 요제프의 아버지가 세운 자신만의 단단한 성채와 같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에게 자신이 요구하는 자격 요건을 충족하여 더 나은 아들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요구했고, 어머니는 언제나 그런 그를 감싸거나 가끔씩은 아버지를 옹호하는 행동을 하는 데에 그쳤다. 아버지의 성격은 늘상 변화무쌍했으며, 큰 자식인 요제프가 가끔은 집에 찾아온 손님들, 혹은 동생들, 때로는 어머니의 방패막이 역할까지 해내야만 했다. 그는 일찍이 성숙해졌으며, 아버지를 견디기 위해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당연하게도 아버지는 그런 요제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집 밖으로 내쫓음으로서 아들의 순종을 얻어 보려 하기도 했으나.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요제프는 늘 그 성채 밖으로 탈출할 꿈을 꾸고 있었다. 

모국어는 독일어. 영어와 프랑스어를 말할 줄 알며, 간단한 라틴어를 쓸 줄 안다. 

정신의 학자. 

요제프는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그 즈음 그는 첫 시간여행을 겪은 뒤였는데, 2차 세계대전 후의 파리가 그 장소였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학문과 실존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더불어 사르트르와 카뮈라는 실존주의의 거물들이 새로이 되살려낸 작가 프란츠 카프카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지니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새로운 학문인 정신분석학을 접하게 되고, 오스트리아의 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책과 강의를 열성적으로 따라가나 곧 그의 이론과 스스로 결별한다. 그리고 스위스의 학자 카를 융의 이론에 빠진다. 배움의 시기 동안 아도르노, 벤야민을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도 깊히 빠져들었다가 곧 다시 자신을 가장 매료시켰던 정신의학과 심리학이라는 학문에 집중한다. 

그가 가장 가까이 두고 지냈던 이론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아들러의 이름이 나오리라. 보수적이고 단단한 분위기에서 자란 요제프가 모든 것을 성과 연관짓는 프로이트에게 거부감이 든 일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특유의 반항성과 문학적 기질 때문에, 실제로 그는 융의 상담기법을 가장 많이 체화하고 있는 편이었다. 상징에 대한 거침없는 해석과 꿈에 대한 파고듬은 결국 그가 한때 프로이트를 추종했으며 말년의 융처럼 집착적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그는 또한 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늘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정신의학자였으며, 정신의 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중요시 여긴 것은 이론의 실제 적용 방식이며, 내담자와 만나는 시간이었으리라.

요제프는 내담자와 가장 느긋한 방식으로 대화하기를 선호했다. 독립된 상담실, 긴 소파, 손에 든 공책과 한 켠에 놓여진 안경. 때로 그는 내담자에게 신선한 레몬즙을 탄 물에 설탕을 섞은 것을 건넨다. 너무 많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입버릇처럼 티슈의 발명은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일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그 과정을 진정으로 좋아했으며, 충분히 즐길 만큼 사랑했다. 

영원한 손님. 

언제 어디서든간에, 그는 머무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 또한 그만큼이나 빠르게 결정되었다. 그것은 요제프 자신이 세상 어느 장소에든 자신의 성채를 짓고 싶지 않다는 결심을 한 탓이리라. 그는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가족의 관계에 대해 성찰했으며, 자신을 정신분석하기를 강박적으로 행했다. 요제프는 장남으로서, 그 스스로가 아버지와 닮았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일종의 과민함, 통제적 성향, 편안하지 않을 때 튀어나오는 타인을 향한 공격성 같은 것들 말이다. 그는 만일 한 곳에 오래 머무르게 되면, 추악한 자신이 드러날까 두려워했다. 

요제프에게는 강박이 있었다. 그것은 불안에서 비롯된 현상임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던 일이 그에게 태생적 불안정을 안겨 준 것이다. 그래서 요제프는 오로지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 안에서만 안정을 찾았다. 상담자-내담자의 관계는 철저히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되므로. 그는 누군가를 통제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통제했다. 늘 단정히, 온 몸을 가리는 옷을 입었으며 주변을 자신만의 규칙에 맞춰 정리해 두었다. 누군가 그 규칙을 망가뜨렸을 때에는 분명 그도 절망을 느꼈으리라. 자신이 침해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요제프는 아버지의 공격성을 닮고 싶지 않았기에, 모든 침입에 그저 그의 가장 큰 무기인 냉정한 다정함으로 응대했을 뿐이다. 

그는 익숙한 환경을 바라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긴장을 늦출까 두려워 그랬던 것이다. 요제프 콘라트는 끊임없이 내담자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게 누가 되었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뉴욕의 이탈리안 마피아를, 맨체스터의 항구 노동자를 상담했으며 벨라루스의 무용수와 프라하의 작가를 내담자로 두었다. 상담자라는 이름은 그에게 반드시 필요했다. 추악해지지 않기 위한 그만의 규칙이었다.  

벽 안의 벽.

이지적이고 차분한 말투를 쓴다. 평소에도 상담할 때의 말투 그대로를 유지하여, 가끔 그의 내담자들 중 일부가 일상 속에서 그를 마주했을 때 매우 꺼리게 되거나, 매우 친근하게 느끼는 일도 일어났다. 이 또한 의도적 통제에 가까웠으니. 그와 가깝게 지낼 만큼 그 벽을 넘어간 이들은 경쾌하게 활기찬 바이에른 사투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그가 부르는 오페라 아리아를 감상할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그것 또한 요제프 자신이 남들에게 공개하고자 만들어낸 하나의 벽과 같았지만 말이다. 

다른 면에서, 그는 철저했다.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습관적 거짓말을 하는 행동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여행자의 특성 상 그는 이리저리 꾸며 내는 데에 익숙해져야 했으며, 사실 그의 아버지를 통해 이미 그것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상담자로서 충실하고 훌륭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그를 사람으로서 알게 되면 발견할 수 있는 특징들 중 하나였다.

그는 남들과의 관계에서 벽을 세우지 않았으나, 자신의 안에 벽을 세웠다.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성채 안에서 자란 요제프는 그것을 배웠으며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남들로부터 젊은 사람이 늙은이처럼 군다느니, 기계적 다정함이라느니, 가까이 느꼈으나 배신당한 기분이라느니 하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은 요제프를 아프게 했으나 그 또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다른 방법은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굴었던 것이다. 요제프 콘라트는 일부 성장하지 못한 부분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을 철저히 숨기고자 했다. 

흉터들.

프란츠 카프카, 

그의 첫 내담자. 요제프는 상담자로서의 윤리를 지키기 위해서 카프카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들을 자신의 가슴 속에 묻어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요제프는 카프카를 사랑했다. 그의 글과, 그의 세계와, 그의 삶이 요제프에게는 일종의 구원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규칙을 깨고 지나치게 카프카와 오래 교류하게 되었다. 그는 카프카를 만나며 오히려 그 자신이 심리적 치료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즈음 아버지에게 일부 문학적 편지를 써 보내기까지 한다. 카프카가 폐결핵에 시달리며 요양원들을 돌아다닐 때 그도 그 곁에 있었으며, 그 불행한 영혼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그림자를 지고 세상을 떠나는 것도 지켜보았다. 요제프는 끝까지 카프카가 치료되어 나아지지 않았음에 대한 죄책감을 진다. 그 이후 그는 내담자와 자신의 관계를 더욱 강력하게 통제하기 시작했다. 카프카의 이름이 악몽처럼 남아 그의 상담 세계에 상징으로 들러붙어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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