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작업물

마리 엘로의 젊은 나날들.

흥선웰동님 커미션. / 공백 포함 72586자.



 

젊다는 것은 무엇인가?

 

젊음, 한창 때, 혈기왕성한 시기, 혹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단어를 붙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젊은’이라는 말을 들으면 특별한 시기를 떠올린다. 그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빛났거나 혹은 열정적이었던 시기를 생각한다. 젊음은 치기, 실수, 아픔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음에 대해 각별히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묻고 싶다. 평범한 젊은이라는 것은 어떤가?

 

언급했다시피 사람들에게, ‘젊은 나날들’이라는 두 개의 단어를 들려주면, 이들은 무언가 특별하고도 활기 어린 이야기들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보통, 몇 가지의 실수나 슬픔을 딛고서 다시 일어나는 일들은 젊을 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평범한 젊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평범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그것은 무난한 것으로 여겨진다. 크게 튀어나오지 않은 것, 평균에 도달한 만큼 준수한 것, 그러나 특별하지는 않은 것. ‘평범한 젊음’이 얼마나 모순적인 단어인지는 여기서부터 알 수 있다. 어찌 젊음이 평범하겠는가? 모든 젊은이들은 특별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으니 말이다.

 

허나 지금부터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참으로 평범하다. 어째서 그러하냐고 묻는다면, 이것이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 있고,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각자의 투쟁을 이어 나간다. 그것은 역사에 남은 위인들 누구나가 그랬고 또 민중 한 가운데의 별 이름 없는 이도 그러한, 사실이다. 그저 사실. 삶은 평범한 것이다. 살아 있음 또한 마찬가지로 평범한 것이다. 누군가는 위대함을 쫓으며 살아가고, 누군가는 자신의 안온함과 부를 쫓으며 살아간다. 나는 그 한 가운데서 그저 자신의 삶에 충실했던, 그 누구보다 평범했던 젊은이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 젊음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가는 것에 충실했을 뿐이다. 모두가 그렇듯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으려 애를 썼고, 이해에서 실마리를 얻었던 사람. 삶이라는 것을 자신의 손에 쥐고서 들여다 볼 줄도 알았으며, 자신과 같이 삶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과 반성을 이어 나갔던 이. 마찬가지로 다른 젊은이처럼 치기 어리고 또 혈기왕성한 한 때를 보냈으나,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에 대해 잊지 않으려 애썼던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그 무엇보다도 평범하고도 위대한 이야기란 그런 것이다. 그녀는 평범한 젊은이였다. 그러나 평범했기에 위대했다. 이것은 마리 엘로에 대한 이야기다.

 

 


 

 

1. 새벽녘 남프랑스.

1. 마리.

 

우리는 마리의 가족들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겠다. 왜냐 하면 모든 이들의 토양은 가장 작은 사회인 가족들에게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대대로 보르도 토박이인 가문이었는데, 그말인 즉슨 마리 엘로의 핏줄을 따라 올라가면 그 오랜 옛날 강건했던 켈트Celts족이 등장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골Gaul족이라고도 불렸던, 지금은 갈리아인들로 더욱 유명한 그 민족들은 이미 고대의 시간 속에 대학을 그 도시에 지을 만큼 번영한 바가 있었다. 잠시 언급해야 할 것은, 마리의 성이 본래는 뒤랭이라는 사실이다. 뒤랭 가家 사람들은 붉은 머리칼에 푸른 눈과 흰 피부를 가진 자신들의 조상을 알게모르게 자랑스러워 했다. 그들은 가론 강이 흐르는 곳 바로 왼쪽에, 거대한 생 탕드레 성당과 혁명 전 지어진 오페라 극장의 사이에 자리잡았다. 생 까뜨린느 거리의 상점가에는 이 층짜리 가게를 내었고 가게 뒤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부의 냄새가 가득한 저택이 자리했다. 향수를 섞은 분수가 솟구치고, 금을 두른 접시로 식사를 하며 저 멀리 페르시아에서 온 식물들을 심어 놓은 정원이 있는 곳. 아마 사람들이 그 곳을 둘러본다면 그 누구라도 저택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마리의 백부는 그 집안을 이끌어 가는 우두머리나 다름없었다. 항구에 배가 정박하면 당당한 몸짓으로 선장과 선원들에게 급료를 지불하고, 자신의 몫을 재빠르게 챙겨 물건들을 사람들에게 되팔았다. 수완 좋은 장사꾼인 그는 강퍅한 몸짓으로 집안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권위가 실제로 나타나는 광경들을 즐기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사람이었다. 독재자라는 개념이 아직 희미했던 때이기에,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뒤랭 가의 왕이라고 불렀다. 그에 반해 마리의 큰어머니는 평생을 침묵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남편이 하는 말에 고개를 숙이고 순종하며 동시에 그의 수족으로서, 권위가 미치지 못하는 집안 구석구석까지 살피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행복한 여왕이라고 불렀다. 과연 그러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 시대에는 아내의 미덕을 순종으로 여겼으니 그리 불렀고 또한 그녀는 그 호칭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 곳곳, 심지어 저 먼 식민지에서까지 들여온 갖가지 와인이나 향신료, 반짝이는 장신구들을 파는 가게에는 총 세 명의 점원을 고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그중 두 자리는 고정되어 있었다. 한 사람은 다 늙어 귀가 성치 않은 질베르 노인이었고, 한 사람은 20년째 그곳을 맡아 보고 있으며 향수 도제徒弟 자격증을 가진 소뉠이었다. 나머지 한 자리의 사람은 시시때때로 바뀌었으나, 마리의 백부는 그 자리를 가족의 이름으로 채우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자리는 뒤랭 가 안의 반푼이 – 이것은 순수히 마리의 백부가 판단한 사항이다. - 들을 위한 훈련소쯤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 아래 권속으로서 집안에 존재했던 마리의 아버지가 들이쉬었던 공기가 어떠했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리의 아버지는 그 자신의 아버지를 본 적이 아주 오래된 사람이었다. 집안은 오래 전부터, 마치 태초부터 그렇게 만들어졌던 것처럼 그의 형에 의해 굴러가고 있었다. 또한 그의 형은 그를 기꺼이 가게에 고용하기로 마음먹을만큼 제 아우를 탐탁찮아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마리의 아버지는 만일 가정을 이루게 되면 가게의 재산을 떼어 주마고 했던 형의 말을 믿고서 여자를 찾아 결혼하였다. 그가 마리의 어머니가 되었다. 마리의 세례 날, 그는 형에게 그렇게 요구했다. 내가 가져야 할 것들을 이제 주실 때가 되었소. 형님. 그 말에 형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게 답했다. 가게에서 조금 더 일하거라. 너는 아직 반푼이야. 세상을 모르지. 함부로 내 재산을 떼어 줄 수 없다. 성당 안에서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일어섰고, 상점의 금고 안 돈을 죄다 긁어내어 뒤랭의 영역 밖으로 발을 뻗었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린 마리는 아버지를 모르고 자라게 되었다. 그러나 기실,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던가? 마리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실감조차 나지 않는 것이었다. 마치 바다 건너에 있다는 새로운 나라처럼. 그곳엔 왕이 없다지? 백부가 비아냥댈 때마다 마리는 분명 아버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왕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나라가 있는데, 아버지가 없이도 자란 자식은 왜 의문의 대상이 되는가? 뿌리가 꼭 아버지에게서만 온 것인가? 마리는 분명 그 질문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존재로서 거기 있는 자신에 대해 집중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였는데, 그 일은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마리의 어머니는 그다지 큰 욕망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그러했다. 왜냐 하면 그녀는 오직 자신의 딸과 자신 한 몸의 안온함을 바랐고, 그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감정과 몸뚱아리를 소모시켜가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뿐인 자식이 그런 자신의 욕망을 돕기를 바랐다. 남편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녀는 뒤랭 가 상점의 세 번째 점원 자리를 오래도록 차지하고 있었다. 그네들은 토박이 가문의 삐져나온 거스러미처럼 자리했으나 제대로 인정받기만 하면 앞으로의 삶이 괜찮을 것처럼 굴었다. 늘 입버릇 삼아 그녀가 마리에게 하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네 백부님이 좋은 남자를 소개시켜 줄 테니 걱정 마라. 인생은 별 것이 아니지만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너도 알 테다. 그러니 얌전히 고개 숙이고 네, 하고 말하는 법을 배워.

 

그 말에 마리가 무어라고 대답했을 것인가?

 

어쨌거나 마리의 어린 시절은, 고성과 욕망의 부딪힘으로 가득했다. 혹자는 그것이 생기발랄한 삶의 무언가라고 칭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저열함으로 가득한 흥정이었다. 상점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따라, 마리는 수sou와 상팀centime을 세는 법을 배웠으며, 옛 화폐 단위들인 금화로 된 리브르livre와 은빛 두니에denier를 구분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쳤다. 마리는 반짝이는 동전들을 좋아했으나, 그것이 어떤 가치를 지녀서라기보다는 그저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것들을 사랑했던 것이라고 칭해야 할 것이다. 사치품들을 파는 코너는 은밀하게 카운터 뒤에 숨겨져 있었고 주로 소뉠이 관리했다. 와인은 질베르 노인이 관리했다. 마리의 어머니는 상점 밖의 좌판과 근처의 노점을 관리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마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같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거리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생기가 있었으나, 그것은 말하자면 강제된 생기였다. 치열함을 아래에 깔고 있는 그런 것들. 삶을 기쁘게 살아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생존과 관련된 – 이를테면 빵을 산다던가 하는 활동에 연루되게 되면 자신들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리저리 따져 보고 재어 보는 일도 서슴치 않게 된다. 마리는 그 투쟁과도 같은 일들을 매일같이 지켜보았다. 해가 뜨면 저 멀리 성당의 꼭대기에서부터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면 거리를 채운 한기가 뒤로 한 발 물러난다. 마리는 시간이 흐르면 몸뚱아리가 따듯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린 아이는 새벽녘의 어둠과 시린 공기를 싫어했지만 햇볕을 사랑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질베르 노인의 귀가 먹게 된 지는 벌써 5년이 지났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청력은 그가 이제까지 할 수 있었다고 믿은 수많은 일들을 불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면 손님이 가게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것과 같은 일 말이다. 가게 문에 달린 왜가리 종이 흔들리면 소뉠은 곧바로 고개를 들곤 했지만 한 구석 와인 진열장을 돌보던 노인은 한참이 지나 손님이 제 곁에 서고 나서야 그것을 알아차리곤 했다. 누군가는 노인이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는 했는데, 그러면 노인은 그 자리에 선 채 다 빠진 이를 드러내며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어린 마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먹지 못하니까 그렇게 웃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마리는 질베르 노인이 그 누구보다 와인을 잘 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것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이 기능하지 못하는 부분을 가졌다고 해서 그 능력까지 폄하되어야 하는지. 그래서 마리는 종종 질베르 노인의 뒤에서 비아냥대는 손님들 앞에 좌판의 판자를 가져다 놓고서 걸려 넘어지도록 만들기도 했다. 손님이 호되게 넘어질 때마다 마리의 어머니는 어쩔 줄 몰라 했으며, 질베르 노인은 그보다 빠를 수 없는 손길로 마리를 들어 안아다 카운터 안쪽에 숨겨 주고는 했다. 그리고 부루퉁한 얼굴의 마리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더러 귀머거리 바보라고 했어요.

 

사람들 눈에 나는 귀머거리가 맞는 걸요.

 

 

마리가 입술을 크게 달싹이며 하는 말을 노인은 쉽사리 알아 듣고는 했다. 노인은 마리의 옷 매무새를 다듬어 주고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 노인은 이 대째 뒤랭 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린 아이들을 퍽 아꼈다. 어린 마리에게 질베르 노인의 손길은 알지도 못하는 할아버지를 생각나게 했다. 그래서 노인이 쓰다듬어 줄 때면 마리는 얌전해지고는 했다. 그 손길 안에 들어 있는 한없는 애정의 크기를 알기 때문에.

 

 

할아버지더러 바보라고 했다고요.

 

아가씨가 보기에 내가 바보인가요?

 

할아버지는 바보 아니에요.

 

그럼요. 아가씨가 볼 때 내가 바보가 아니지요. 저는 제가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답니다. 생 까뜨린느 거리에서 저보다 와인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아가씨도 알고 계시지요?

 

 

마리는 고개를 크게, 아주 크게 끄덕였다. 그럼요. 노인은 그 움직임에 다시 이 빠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것 보세요.

 

 

아가씨도 알고 저도 아는 사실을 한갓 지나치는 이가 모른다고 해서 문제가 될까요? 사실 저만 알고 있어도 상관없는 사실을 아가씨도 알고 계시니까 두 배로 좋은 거지요.

 

할아버지는 욕을 듣는 게 싫지 않아요?

 

안 들리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마리는 여전히, 어린아이가 짓는 불쾌한 표정을 하고서 발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질베르 노인은 그런 마리의 머리를 한번 더 쓰다듬어 주고서, 자신과 오랜 시간 함께했었던 마리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봉봉 사탕 하나 드릴까요, 아가씨?

 

안 먹을래요.

 

기분이 나쁘다고 뭐든 아니라고 하는 것은 손해보는 일이랍니다. 아시잖아요. 저는 괜찮으니 아가씨 기분만 괜찮아지면 좋겠네요.

 

 

마리는 마지못해 노인이 내민 사탕을 받아 들었다. 질베르 노인이 바깥을 살피고서 마리를 안아다 다시 밖으로 내어주었다. 전부 잊어 버려도 상관이 없지만, 아가씨와 제가 알고 있으면 상관이 없다는 것만 기억해 주세요. 한 번 더 덧붙인 노인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마리는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서 다시 좌판의 구석에 앉았다. 그 때의 마리는 몰랐겠지만, 질베르 노인의 말은 오래도록 마리의 머릿속에 남아서 고민 하나를 불러일으켰다. 삶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 말이다. 본질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해라는 것은 결국 세상을 받아들이는 주체인 자신이 강인하게 서 있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일찍이 노인의 형상으로 마리에게 다가왔다. 나도 내 자신을 잘 알아야지. 후에 정말로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마리는 그렇게 되기로 마음먹었다. 어린 아이의 머리로는 아주 크고도 조그만 결심이었지만. 그녀는 모든 아이들처럼 정말로 그렇게 될 힘을 가지고 있었다.

 

 

2. 초승달의 항구.

 

새벽은 모순의 시간이다.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취약성의 시간이다. 그러나 눈을 뜨고서 지키는 자들에게는 강인함의 시간이다. 마리는 새벽에 눈을 뜬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감은 사람이었다.

 

허나 이 말이 그가 모순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마리가 세상의 공기를 가장 먼저 들이마신 시간이 새벽이었으니. 마리는 처음으로 눈을 뜨고, 처음으로 눈을 감은 채 새벽의 모순성을 한껏 만끽했다. 그것은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의 것들을 받아들이는 작업 중 하나였다. 마리 엘로는 새벽의 아이였으며 아직, 아직은 상충하는 것들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론 강이 흐르듯이. 천천히 그 물결처럼 마리는 어딘가로 향해 항해하는 중이었다. 강을 따라 나가면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마리는 알고 있었다. 바다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들어온다. 항구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이다. 마리는 새로운 것들과 오래된 것들이 상충하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가 어찌 될 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등장하게 된다.

 

그 이름은 그랑테르였다. 후에는 대문자 R이라 불리게 되는 이 소년은 보르도의 유명한 와인 장사꾼 집의 차남이었다. 마리의 백부는 종종 이 집안을 방문하여 새로 들여온 와인과 가게에서 내보낼 와인에 대해 흥정하고는 했다. 그가 일종의 자비심을 발휘하여 마리를 대동하고서 등장하면, 그 집안에서는 파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큰 아들 대신 영리한 둘째 아들을 내세우곤 했다. 그 말인 즉슨 집안의 어른들이 흔히 하는 것처럼 예의를 차리고서 그들만의 대화를 나눌 때 마리와 그랑테르는 저절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랑테르에 대한 마리의 첫 인상은 그러했다. “작고, 밤처럼 새까만 머리를 가진, 고집 세어 보이는 어린애.” 그러했다. 어린애! 마리와 그랑테르는 당시 아주 작았다. 어린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집안에서 밀려나 있다는 자신의 신세를 일찍이 깨달은 마리의 조숙함은 그랑테르의 슬픔과 대비되어 묘한 조화를 이루어 냈다. 그랑테르는 어린 아이의 태를 벗지 않으려 애쓰는 축이었다. 어찌하여 그랬냐 하면, 그의 형이라는 사람이 이미 파리 유수의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 중인 유망주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랑테르 집안의 사람들은 장사꾼의 위치에 그럭저럭 만족하는 편이었지만. 뛰어난 머리를 가진 이가 한 명 등장하게 되자 그에게 기대를 걸고서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어쩌면 흥정과 고함을 뒤로 하고서 느긋하고 편안한 권력을 누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 말이다. 그랑테르는 어릴 적부터 집안의 기대를 학습한 편에 속했다. 그 집안 안에서 그랑테르는 어른이라기보다는 귀여움 떠는 막내의 자리에 있었으니. 그래서 일찍이 영민했던 그는 우울한 소년이 되었는데, 그가 일찌감치 어떤 것에 대해 포기한 이처럼 보였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의 형만큼, 아니, 어쩌면 형보다 훨씬 더 영리했고, 철학에 대한 남다른 고민을 벌써 시작할 만큼 조숙했지만 집안에서 그것을 뽐내기에는 어려운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그래서 마리가 – 그랑테르가 나이가 조금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어린 애로 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둘의 첫 만남은 아주 기이하고도 활기찼는데, 시작은 그랑테르의 - 이미 그 당시에 상당히 뛰어난 소질을 보이고 있었던 - 헛소리에서부터였다.

 

 

너, 바다가 어디에서 끝나는 지 알아?

 

 

그 물음에 마리는 윗도리를 만지작거리던 움직임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였다. 알지 못한다는 의사 표현이었으나 동시에 그랑테르가 한 질문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당시의 마리는 누구하고서 대화를 나누는 일을 별로 즐기지 않았다. 그녀가 관심을 둔 것은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탐구하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흔히 그 나이대 즈음의, 그러니까 13살에서 15살 즈음의 소년 소녀들이 꼭 거쳐 나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허나 그랑테르는 이미 아랑곳하지 않고서 말을 이어 나가는 법을 알았기 때문에 마리를 옆에 두고서 떠들기 시작했다.

 

 

바다는 끝이 없다고들 하던데, 나는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믿어. 어떤 강에도 끝이 있는 법이지. 이 항구의 끝으로 가면 에스파냐 왕국과 닿는 땅이 있는 것처럼. 그런데 중요한 건 말야, 어디가 끝인지를 정하는 기준이야. 그건 사람들이 정하는 거고, 우리가 유일하게 거대한 자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실이라고. 바다의 끝을 인간이 정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아.

 

 

마리는 그랑테르의 헛소리를 흘러가게 놔두었는데, 그가 어린아이다운 약간 흥분된 말투로 이어 나가는 모든 것들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마지막 들려온 문장에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호기심에 가까웠다. 그랑테르는 마리가 그제서야 자신의 말에 관심을 두게 된 줄로 알고서 계속해서 의견을 피력해 나갔다. 아니,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그저 장황하게 늘어놓는 데 목적을 둔 헛소리를 떠들어 댔다.

 

 

생각해 봐, 저 바다 건너 새로운 대륙에서는 어쩌면 프랑스가 바다의 끝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런데 우리에게는 인도가 바다의 끝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인간들은 제 중심을 둔 곳은 최우선으로 여겨. 그게 세상의 섭리인거야. 그러니 바다의 끝을 두고서 언젠가 아웅다웅할지도 모른다고. 이 얼마나 저열한 일인지!

 

저열하다고?

 

 

마리는 차분하게 그랑테르에게 물었으나, 그랑테르는 그 질문에 놀랐다. 말 없이 듣고 있던 청자가 갑자기 소리를 내어 물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예상치 못한 상황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정작 마리가 그에게 질문을 한 의도는 별 것이 없었다. 그랑테르가 그녀와 비슷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을뿐더러, 감히 그 사실들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과감함에 놀랐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그랑테르의 말 한 가운데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단숨에 알아차렸음에 있다. 너 참 많이 아는구나. 마리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는 것하고 그걸 이해하는 건 달라. 너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거야? 저열하다는 거?

 

당연히 저열하지! 인간의 욕심과 기대로 거대한 것을 재단하려 들고 있지 않아?

 

거대한 것.

 

그럼, 거대한 것.

 

너 바다를 본 적 있어?

 

 

그 물음에는 마리의 본질적 의문이 담겨 있었다. 어떤 행위에 저열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만큼 바다가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정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마리의 물음에 그랑테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기실 그 또한 바다를 본 적 없기 때문이었다. 마리는 고개를 기우뚱하게 하고서 그랑테르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랑테르는 약간의 수치심에 고개를 내려뜨렸다. 그도 앵무새처럼 떠드는 것과 참으로 이해하고서 떠드는 것의 차이 쯤은 알고 있었다. 바다는 본 적 없어. 소년 그랑테르가 덧붙이자 마리는 사려깊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말 속에 그랑테르의 솔직한 부끄러움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그랑테르 그 자신은 몰랐지만. 마리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래서 그 소년이 떠들어댄 헛소리에 대해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기로 했다.

 

 

내가 본 사실은 아니지만 책에서 읽었어.

 

그래, 그걸 아는 건 대단한 것 같아.

 

그냥 책을 읽은 거라니까.

 

어떤 책인지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빌려 줄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난 글자를 몰라. 그랑테르는 그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랑테르가 마리의 문맹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그러나 소년은 천성이 착해서 죄책감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누군가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랑테르에게 책임감으로 다가온 첫 번째 순간이었다. 앞으로의 삶에서도 그런 순간은 드물 것이었기에 그 소년은 마리에게 굽히고 다가가 친절의 손을 내밀기로 했다.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바다는 되게 넓대. 마리는 그랑테르의 말 한 마디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너, 그냥 책을 읽어서 바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했지.

 

응. 너도 아마 알게 될 거라고 했잖아.

 

그럼 날 좀 가르쳐 봐.

 

내가?

 

 

마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게 될 거라며. 어디 한 번 가르쳐 봐. 그랑테르는 그 말에 잠시 침묵하다가 작게 그래, 하고 대답했다. 잠깐 두 어린 애의 머릿속에는 비슷한 광경들이 스쳐지나갔다. 바다를 알기 위해 글자를 배우는 것. 넘실거리는 물결을 그려 보는 것. 그리고 마리는 결심한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바다를 보러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소년 그랑테르는 울상을 지었다.

 

 

너, 내가 글자를 가르쳐 주는 게 별로인 거야? 네가 가르쳐 달라며!

 

바보야? 책도 읽고, 바다에도 가 보자는 뜻이잖아.

 

 

마리가 차분히 쏘아붙이자 그랑테르는 그새 얼굴을 풀고서 투덜거렸다. 진작 그렇게 말을 했어야지! 그리고 머쓱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랑테르 아미앵.

 

마리 뒤랭, 성은 마음에 안 들어.

 

너희 집 생 탕드레 성당 근처에 있지.

 

응.

 

저녁에 성당에서 만나자. 내가 교본 들고 올게.

 

그래.

 

 

그랑테르는 정말로 글쓰기 교본을 들고서, 당장 그 날 저녁 성당에 나타났다. 마리는 그 날 알파베를 다 떼었고, 자신의 이름을 쓸 줄 알게 되었다. 둘의 글쓰기 모임은 일방적 그랑테르의 가르침에서 점차 지식의 향연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는 마리의 습득 속도가 빨랐기 때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랑테르와 마리가 책을 읽는 태도가 달랐기 때문도 있었다. 첫 대화에서 그랬듯이. 그랑테르는 비판과 회의를 중심으로 했다. 허나 마리는 순수한 의문을 중심으로 했다. 본질에 대한 물음.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의문 끝에 마리가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 그 끈질김에 그랑테르는 혀를 내두르고는 했다. 그 자신도 끈질김으로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데 이골이 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는 자신보다 더한 의지를 가지고서 사실들을 탐구해 나갔다. 천천히, 모든 것을 대조하고 파악하여 이것저것의 틀을 맞추어 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랑테르의 조언과 첨삭에 가까운 헛소리가 일부 도움이 되었으나, 마리에게 습관이 잡히게 된 이후로부터는 파리 날아다니는 소리 가깝게 변해 버렸다.

 

마리는 그 모임을 제법 사랑했는데, 뒤랭 가의 사람들은 그것을 내심 못마땅해 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오히려 마리가 그랑테르와 정기적으로 성당에서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백부와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그녀를 떠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마리는 그것을 아주 못마땅해 했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제의 앞에서 부부의 연을 맹세하는 일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 시간들은 오직 자신만의 세계를 위해 쓰였다. 쏟아지는 지식들을 잘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으로서.

 

 

3. 달 그림자.

 

마리는 그 모임을 이어 나가며 점차 자신이 처음으로 그랑테르에게 내뱉었던 말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 솔직히 들여다보자. 그랑테르에게 있었던 것들이 마리에게도 있었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예를 들자면, 남자라는 사실, 그리고 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사실, 아버지가 아직 그 곳에 있다는 사실. 마지막 것을 마리는 크게 신경을 쓴 적 없었으나 자라면 자랄수록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재단할 때 그 사실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터였다.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달랐다. 그랑테르는 마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마리가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간혹 그랑테르는 감정과 단어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그에게 실망스럽다, 고 말한다면. 그랑테르는 그 안에 담긴 뜻을 알고서 절망이나 비웃음으로 대항할 것이었다. 실망이라는 것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회적 기호나 다름없었고, 저절로 그랑테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태도를 취했다. 마리는 그런 그랑테르를 보며 종종 한심함을 가장한 위로를 건네곤 했다.

 

반대로, 마리가 누군가에게 실망스럽다, 는 말을 들었다면. 마리는 그 말 안에 담긴 그 사람의 저의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편이었다. 물론 이해한다는 것과 용서한다는 것 또한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달랐다. 간혹 마리의 백부가 그녀에게 실망스럽다는 말을 할 때, 마리는 그녀의 백부를 이해했다. 당연히 실망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기는 했지만. 그 너머의 것 또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가게나 가족의 일에 충실하지 않은, 그리고 결혼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자신의 조카가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백부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책임감 하나 없는 가벼운 젊은이로 보인다는 사실을 마리는 잘 이해했다. 백부님은 그렇게 생각하시겠지. 마리는 그것을 이해했으나 용서하지는 않았다. 어째서 그러느냐고 묻는다면, 마리에 대한 백부의 생각이 자신에게 굉장히 부당한 평가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마리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마리는 또한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언젠가부터 마리는 자신의 미래가 항구에 머무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거부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자신의 가족이 있었으나 마리는 가족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또한 마리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의 터전이 있었으나 마리는 새로운 삶을 원했다. 다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마리는 그곳을 훌훌 벗어나 자신만의 바다를 보러 가기를 원했다. 그것은 죄라고 칭해질 수 없는 것 아닌가. 마리는 그래서 백부를 이해했으나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을 이유 없는 죄인으로 만드는 시선들 사이에서 마리는 어린 제 자신이 그대로 자랐다면, 그 시선에 따라 맞추어 살아 나갔으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의 마리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사람들은 새벽을 곧 해가 떠오를 시간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그 시간은 달이 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존재한다. 달은 슬픈 것인가? 독자는 그 질문에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가?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마리는 이렇게 답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달이 슬프냐고 묻는 일이야 말로 슬픈 일이다.

 

마리는 달을 알고 있었다. 매일같이 보는 것이 달이었다. 밤이 되었을 때 막 떠오른 달은 아침이 되면 해의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달이 제 그림자를 마지막으로 비추는 그 새벽에. 마리는 문득 그 생각을 했다. 달의 어두운 부분이 바다라면, 저 곳은 아름다운 곳일 터라고. 당시 달의 표면을 관찰했던 사람인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달의 밝은 부분은 땅일 터이고, 어두운 곳은 물일 터라고 생각했기에 마리도 또한 그렇게 알고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진 저 곳. 마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그 곳에 존재하는 달의 바다. 마리는 새벽을 등에 지고서 거리로 나갈때마다 드넓은 바다와 흰 평원이 가득한 상상의 달을 생각했다. 마리에게 달은 슬프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는 달이 지켜볼 때 태어났었기에. 마리는 달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그 곳에 달의 바다가 존재한다. 그 즈음의 그녀는 이미 자신만의 체계를 갖춘 한 사람의 관찰자이자 이해자였다. 그녀는 세상 모든 것들에 자신의 체계를 덧대어 보는 훈련을 하는 중이었을 뿐. 그녀 스스로 이해하는 법은 오래 전 완성된 터였다. 마리는 이미 자신의 경험들을 모아 이러저러한 분류법에 따라 나누고, 뒤랭 가의 사람들도 모르는 자신만의 수장고를 만들어 자신의 머릿속에 세워둔 터였다. 또한 그 즈음의 그녀는 자주 항구에 나가 배의 돛에 가득 실린 바다의 향기를 들이쉬던 터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저 너머의 무언가를 보게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달 그림자 아래 빛나는 바다를 보고 싶어 했다.

 

마리의 어머니는 마리가 항구로 나갈 때마다 탐탁찮아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의 어머니가 가진 평범한 삶, 안온한 삶에 대한 욕구에 그녀의 딸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내비추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리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때부터 자신의 자식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믿음을 한 구석에 가지게 된 그녀로서는, 마리를 옳은 방향으로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일종의 이기적 환상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작정 자식에게도 이로울 것이라는 흔한 부모들의 착각 중 하나였다. 어쨌거나 마리의 어머니는 마리의 백부에게 – 그 때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 마리의 혼처를 찾아야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자식이 부모의 말에 역성을 들기가 쉽지 않은 때였다. 부모는 자식에게 통보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여도 되었고, 자식은 그 의사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마리가 백부에게 혼처를 물색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미 절반쯤은 결혼에 대한 말이 확정적으로 거리에 나돌고 있었으니, 마리에게 선택권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4. 새벽녘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창 마리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크게 퍼졌을 때. 주기적인 독서 모임 – 의 이름을 빌린 토론이나 다름없는 – 의 시간에. 문득 그랑테르가 그렇게 말을 꺼낸 것이다.

 

 

보르도의 다른 이름을 알지?

 

 

마리는 그랑테르가 와인을 병째로 들이키는 광경을 보고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이후로 그랑테르가 취해 있는 순간들이 부쩍 많아졌다. 아니, 정확히 짚어내자면 그의 형이 파리에서 결투 중 사망한 이후부터. 우울한 소년은 우울한 청년이 되어 전보다 더욱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 그 버거움에 허덕이는 중이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그랑테르가 술에 취해 무언가를 부수거나 제 몸뚱이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었기에 마리는 그저 위협적인 탁 소리를 내며 책을 덮는 것으로 그 한심함을 표현했다.

 

 

초승달의 항구.

 

아니, 다른 것.

 

무얼 말하는 거지?

 

작은 파리.

 

 

마리는 그랑테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서 책상 위로 엎드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 뒤통수를 소리나게 때린 것이다. 그러면 그랑테르는 눈을 치뜨고서 고개를 번쩍 들곤 했다. 마리는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랑테르는 그대로 책상 위에 이마를 댄 채 흘러나오는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 파리로 간다.

 

네가?

 

대학에 가기로 했어.

 

 

마리는 그랑테르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랑테르는 침묵을 지키는가 싶더니 고개를 들고서 그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집안 큰 아들은 내가 되었으니, 의무를 다 하러 간다. 고. 마리는 잠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랑테르가 파리로 간다. 그것은 형식적으로는 더 배우고 더 성장하여 자신의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의무의 이행이었다. 그러나 마리와 그랑테르 모두 그것이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항구를 벗어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기회였다. 마리는 한참 동안,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르트담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라.

 

 

그거 알아, 마리? 파리에는 별 게 없을 테지. 이 도시처럼. 여기가 작은 파리라면 그곳하고 다른 건 크기 뿐이라는 말 아닌가? 나는 파리로 가는 게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바다로 가고 싶어한다는 건 알아. 그런데 바다 너머에는 뭐가 있지? 더 큰 망망대해 말고 무어가 있느냔 말이야. 보르도, 파리, 바다. 어디에도 쓸모 있는 곳이란 없어.

 

언제 출발해?

 

 

마리는 그랑테르가 하는 말을 잘라냈다. 그녀는 그랑테르가 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 자신은, 파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은 – 답할 말이 없다. 마리는 그때까지 파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럴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리의 마음 속 깊은 곳, 그리고 생각의 가장 겉표면에 존재한 그 은근한 무언가가 그녀를 충동질해대고 있었다. 떠난다는 것. 어디론가 간다는 것. 마리는 그랑테르를 바라보며 다시 또박또박 물었다. 언제 출발해?

 

 

새벽에, 동 트기 전에.

 

너희 집 마차를 타고 갈 테지?

 

 

그랑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는 말의 사이로 한 숨도 내뱉지 않고서 와르르 쏟아냈다. 나도 파리로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랑테르는 그 말에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환영하는 얼굴을 지었을 지도 모른다. 길동무라면 네가 나쁘지 않지. 싸우다 보면 파리에 도착해 있을 지도 모른단 말이야. 마리는 그 중얼거림마저 탁 끊어내고서 못박았다.

 

 

마차 짐칸에 자리를 만들어 줘.

 

정말로 가겠다는 거야? 거기를 가도 뭔가는 없어.

 

너, 파리에 가 본 적 있어?

 

 

그랑테르는 잠시 돌렸던 시선을 고쳐 올곧게 마리를 향했다. 어릴 적 마리가 그에게 했던 질문을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가 본 적은 없어. 그랑테르가 조용히 대답했다. 마리가 그렇게 말할 때면, 그랑테르는 입을 다물고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리 말하는 마리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랑테르는 적어도 마리가,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 다시 뒤로 물러났다. 마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짚고 섰는데, 파리에 가지 않고서는 그 곳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마리의 생각이 굳건한 기둥처럼 그녀를 떠받치는 것 같았다. 또 하나의 기둥은 바로 마리 그녀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삶의 기회였다. 이제 모두 상관없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마리는 파리를 향해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날 새벽녘, 마리는 자신의 성을 뜻하는 뒤랭 가의 문장이 달린 단추를 뜯어낸 옷을 걸치고 뒤랭 가의 상점을 몰래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별 것 없는 가방을 들고서 뒷문을 열어제끼고 거리로 나선 마리는 문득 가게 카운터의 동전 몇 개 쯤은 챙겨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다시 돌아섰다. 이때까지 급료도 못 받고 일했는데. 백부고 뭐고 신경 안 써. 마리는 아직 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다가 가게 카운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삐거덕거리는 마룻바닥이 마리의 심장을 쿵쿵 울렸다. 낡은 구둣발이 삐져나온 못에 걸려 마리가 휘청였을 때, 저 멀리 계단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보였다. 질베르 노인이었다.

 

 

아가씨.

 

할아버지.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그가 어떻게 이 새벽에 일어나 가게까지 나올 수 있었을까? 마리는 멍하니 서서 노인이 제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계단을 내려온 질베르 노인은 마리의 행색을 차분히 살펴보다가, 손에 든 초를 카운터 선반 위에 놓고서 마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떨어져 나간 세 번째 단추 자리를 흘끔 보고서, 몸을 숙여 금고를 열었다. 노인은 능숙한 손길로 금화 몇 줌을 세어 주머니에 담았다. 그리고 꼭꼭 묶어 단도리 한 후, 값비싼 촛대 밑에 자리하고 있던 올빼미 모양의 장신구를 하나 빼내어 마리의 외투 겉에 달아 주고서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이 친구가 낮에도 밤에도 눈을 뜨고서 아가씨를 지켜 줄 겁니다.

 

할아버지.

 

다시는 돌아오지 마세요. 새를 보면서 저를 생각하셔도 좋지만. 여기로 오시면 안 됩니다.

 

 

마리는 문득 아버지가 도망칠 때, 금고의 돈을 빼내어갔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질베르 노인은 웃고 있었다. 그리고 주름진 손으로 마리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마리는 주머니를 받아 들고서 노인을 꼭 끌어안았다. 노인은 마주 마리의 등을 토닥여 주고, 가만히 속삭여 주었다. 착하고 또 착한 아가씨. 노인은 자신이 아는 가장 큰 위로를 하나 선보였는데, 이제 더 이상 뒤랭이 아니게 될 아가씨의 손에 사탕 하나를 쥐여주는 것이 그 일이었다. 그리고 손수 뒷문을 열어 마리를 내보내고서, 마리가 저 먼 거리의 끝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곳에 서서 촛불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 마리는 몇 벌 안 되는 옷가지와 살림살이를 챙겨 그랑테르가 파리로 향하는 마차의 짐칸에 올랐다. 길고 긴 여행이 될 터였다. 어쩌면 다시는 보르도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는 짐칸 사이로 비추어 들어오는 달빛으로 알고 있었다. 그건 상관이 없었다. 마리는 자유를 생각하고, 자신이 새로이 받아들일, 또한 받아들여야만 할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덜컹이는 마차에 아랑곳하지 않고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긴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비단 파리로 가는 길 뿐만이 아니라, 마리 그 자신의 생의 길 또한 함께.

 


 

2. 동트는 파리.

1. 1830년.

 

그 당시의 파리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일종의 바다에 가까웠다. 물론 마리가 늘 염두에 두던 아름다운 바다는 아니었으나 썩 나쁘지 않은 바다였다. 조금 더 활기찼으면 좋았으련만. 1789년의 혁명 이후로 파리에는 새로운 물결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새롭게 나타나 사람들을 휩쓸어 가고 있는 움직임들은 겉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안으로 숨어들었다. 대혁명 시대의 숙청과 피를 본 사람들은 공화제라는 것이 우리에게 피해가 될 것인가 아닌가를 꼽아보곤 했는데, 이마저도 학문과 정치에 뜻을 둔 사람들이 고민하는 화두였을뿐이다. 물론 곳곳의 젊은 학생들과 아직 공화제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존재했으나 민중들은 여전히 삶을 살아가느라 바빴다. 민중은 위대하지만 간혹 사려깊은 존재는 아닌데, 마리와 그랑테르가 그 사실을 알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감이 있었다.

 

어쨌거나 마리와 그랑테르는 보르도를 떠나 파리로 올라오게 되었는데, 도착했을 때는 막 해가 뜰 무렵의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센느 강은 새로운 햇볕으로 빛났고 다리 위의 장식물들이 그들을 반겨 주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은 바스티유 광장 근처의 보마르셰 가街에 자리한 작은 하숙집이었다. 부유한 상인 집안의 자식인 그랑테르가 구하기에 딱 알맞은 가격의 방이었으며, 후에 라마르크의 장례식 행렬이 지나가게 될 곳이기도 했다.

 

마리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무일푼의 신세였다. 질베르 노인이 쥐어 준 동전이 있었지만 마리는 그 돈을 쓰지 않기로 작정한 후였다. 꼭 필요할 때, 혹은 자신에게 중요한 순간에 쓰리라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향수 가게 점원 일을 구하고 주마다 급료를 받게 되었지만 집이나 마차를 구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액수였다. 그래서 마리는 당연하게도 그랑테르가 구한 방의 식구처럼 자리하게 되었다. 둘 모두 그 어떤 합의의 과정도 거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었다. 그랑테르가 매일같이 밤 늦은 시간 귀가하게 되는 일이 잦아진 이후로는 거의 마리의 방이 되었지만 말이다. 기실, 그랑테르가 집 안팎을 거두고 챙기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었던 탓에, 그 곳을 쓸고 닦는 이는 마리가 유일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근처는 보쥬 광장이 있었고, 두어 거리 정도를 건너가면 작가 한 명이 살게 될 저택이 나온다. 마리가 그를 만나게 된 것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후의 일이었다.

 

이제 파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두 남프랑스인은 서로의 중요성을 무척이나 실감하고 있는 터였는데. 파리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그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둘 사이의 유대감은 남다른 것이 되었다. 물론 온전히 고향 친구 둘의 관계만 유지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사상에 젖는 일을 지켜보게 된 그랑테르는 종종 마리에게 파리 학생들의 빛나는 머리와 날카로운 지식의 향연에 대한 감상을 털어 놓고는 했다. 그들이 새로운 정치와 나라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모습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마리는 그것들에 관심을 가지긴 했어도 아직까지 이 프랑스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그저 한 귀로 듣고 머릿속에 담아 둘 뿐이었다. 그 때가 1830년이었다. 그랑테르는 막 대학에 진학한 후였고 마리와는 다른 의미의 자유를 찾았다. 그것은 자신을 마음대로 망칠 수 있는 자유였다. 매일 같이 술을 들이켰고 종종 취한 채로 집에 들어와 마리에게 질 좋은 잉크와 향을 사다 주는 행동을 하고는 했는데, 그 즈음 일기를 쓰기 시작한 친구를 위한 선물이었다. 마리는 달가워 하면서도 그가 술 냄새를 풍기며 주정을 시작하면 가차 없이 그를 침대에 눕게 만들었다는 것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종종 술집에서 자신이 만난 학생들의 열정에 대해 감탄하던 그랑테르는 수많은 생각 끝에 자신이 혈기에 물들 만큼 장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결론내리고, 오직 술과 독한 담배, 파리의 음식에 기대어 환락 같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가 그랑테르의 곁에 있었던 이유는 어떤 사건 하나 때문이었는데, 아마도 1830년 7월 혁명에 즈음하여 있었던 일일 것이다.

 

마리는 향수 가게를 그만두기 위해 일자리를 알아보던 참이었다. 고급스러운 손님들을 대하는 것을 능히 잘 해냈지만, 그곳에는 마리가 원하는 삶은 없었다. 그저 상류층 사람들, 그러니까 마리가 보르도에서 끊임없이 만났던 예의 차리는 사람들과 비슷한 부류의 이들만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마리는 자신이 새로운 것을 찾아 파리에 왔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물론 급료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도 있다. 그 날은 마리가 생 미셸 광장 근처의 카페 뮈쟁에 취직하기 위해 마담을 만나고 온 날이었다. 마담은 남프랑스 출신의 또랑또랑한 아가씨를 퍽 마음에 들어 하며 다음 주 쯤부터 학생들이 많이 올 것이라는 말을 했고, 마리는 여기 저기 술병이 늘어지고 음식이 묻은 테이블을 보며 자신이 할 일이 많을 것이라는 대답으로 무언의 약속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마리가 방 안에 돌아왔을 때 그녀를 반긴 것은 코를 찌르는 술냄새였다.

 

 

그랑테르?

 

 

아니, 그보다 무언가 더한 것이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비린내. 생선 비린내는 아니지만 생명의 향이 빠져나간 태가 역력한 비린내. 마리는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탁자 위의 초에 불을 붙였다. 절망한 짐승 한 마리가 한 구석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너, 무슨 일이야.

 

아, 마리 오셨는가. 별 일 아니야. 암. 별 거 아니지. 승리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국왕이 물러난다고 했다고.

 

 

마리는 그랑테르의 말을 들은 채도 하지 않고서 그에게 다가갔다. 승리고 뭐고, 지금 이 피 냄새는 뭔지 설명이나 해. 마리의 그 말에 그랑테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도 맡을 수 있나?

 

장난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맡을 수 있겠다. 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해? 네 몸을 다치게 하는 건 용서할 수가 없다고 했었는데...

 

거리에 피 냄새가 나지 않아? 집에 오는 내내 몸이 떨려서 견딜 수가 없더군. 국왕이 물러난다고 다들 승리했다고 해. 나는 믿을 수 없어. 그것이 어떻게 승리일 수가 있지? 사람의 피를 바쳐 굴러가는 것이 역사인가?

 

그랑테르.

 

 

마리가 조용히 그랑테르에게 다가가 그를 살폈다. 그랑테르는 다친 곳이 없었다. 손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그가 흘린 피가 아니었다. 마리는 가만히 초를 내려놓고서 천과 물을 가져와 그 손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그랑테르는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들이다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려 입을 다물었다. 마리가 왼손을 닦아내려 몸을 틀었을 때, 그랑테르는 가슴을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슬픔을 주체할 수 없으나 크게 울 수도 없어 소리를 삼켜내는 울음을 울었다. 마리는 문득 그가 떨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손을 꽉 붙잡았다.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다. 종종 술을 마시고 눈물을 보이는 것이 그였다지만. 같은 이유로 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리는 그랑테르가 더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자신의 친구가 누군가를 애도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랑테르의 작은 속삭임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다미앙.

 

......

 

나는 아무 믿음도 가지지 않을 테고, 죽음만을 바랄 것이라고 선언했더니 그 친구가 뭐라고 했는 지.

 

이봐.

 

나는 나의 죽음이 다만 한 줄기의 촛불이 되어 세상을 밝히길 바란다고.

 

그랑테르.

 

그 친구가 죽었는데도 해가 떠. 빌어먹을. 거리를 닦고 왔어. 거리의 피를 닦고 왔다고. 시신이 마차에 실려 나가는 것도 봤어. 이게 다 무슨 의미지?

 

 

마리는 저 멀리 햇살이 비추는 것을 보고 눈을 잠깐 깜빡였다. 어릴 적 거리에서 보았던 햇살처럼 따스하고 은애로웠다. 추운 몸을 데워주는 친절한 햇살이었으나 그랑테르는 그것을 저주하는 중이었다. 마리는 그랑테르의 손을 꼭 쥐었다. 네 친구가 죽었구나. 마리가 내뱉자 그랑테르는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울음은 홍수가 되어 터져나왔다. 나는 친구가 죽어 영광을 얻는 일이 무슨 가치가 있는 지 알 수 없어. 그랑테르의 말에 마리는 가만히 그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랑테르, 난 네 입장이 될 수 없어 너를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난 네 친구야. 내가 너를 이해하는 것을 알지.

 

네가 아니면 누가 날 이해하지?

 

그래. 너는 그냥 모를 뿐이야.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것 뿐이야. 그 친구가 자신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 네가 이해한다면 좋으련만. 그래서 슬픈 거야.

 

마리.

 

 

그랑테르는 젖은 눈동자를 두어번 흔들다가 마리의 손을 쥐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생겼어. 하고 쥐어짜냈다. 나는 그 죽음을 몰라. 내 정신은 그것을 알 수 없어. 마리는 친구가, 아니, 어쩌면 자신의 안타까운 오라비이자 스승에 가까운 그가 자신에게 가하는 채찍질을 듣고서 잠깐 숨을 삼켰다. 그랑테르의 연약한 정신은 허공에 떠돌고 있었다. 나는 몰라. 너무 많은 것을 알지만 그 죽음을 몰라.

 

 

그게 죄는 아니야.

 

 

마리가 차분히 답했다.

 

 

어째서지? 너는 늘 말하잖나.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고. 나는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그것은 죄가 아닌가?

 

때로 아는 것이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해.

 

 

그랑테르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마저 닦아내려 천을 집는 마리를 보고 있었다. 다미앙은 어떤 친구였지? 마리는 여상스러운 물음으로 자신의 안타까움을 감추려 해 보았지만 그랑테르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인 채 답해 주었다. 나를 그곳에 끌어들이려 애썼지. 나는 거부했고.

 

 

네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거지?

 

내 말은, 그러니까.

 

 

마리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랑테르가 사다 주었던 향에 불을 붙였다. 피비린내를 몰아내기 위해. 그랑테르의 머릿속에서 그 붉은 액체들이 조금이나마 날아가기를 바라며. 그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 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안다는 건 인지한다는 거에 지나지 않아. 이해는 받아들이는 거지. 그 죽음을 지식적으로, 학문적으로 정리해서 알고 싶은 거야? 그건 네가 알고 있고 네 스스로 세운 지식의 체계와 반하는 사실일지도 몰라. 나는 네가 그런 과정을 견뎌내기에는 연약한 것 같아. 더는 네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기를 바라지. 그러니 그랑테르, 그냥 감정을 생각해 봐. 네가 슬픈 것 말이야. 친구를 잃어 슬픈 거잖아. 네가 모른다고 해서 죄가 아니야. 이해는 사람의 본질을 보는 거야. 그 친구가 어떻게 죽으려고 했는지, 왜 그랬는지. 아직은 몰라도. 언젠가는 네가 알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내게 있어.

 

마리.

 

그래. 그러니까. 그만 해. 네가 그러는 꼴은 수백번도 더 봐왔지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한결같아. 너는 유별나고 독특한 선생이고, 내 친구야. 그러니까 그만 하자.

 

 

그녀는 그 말을 강물처럼 흘린 후 그랑테르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랑테르는 그 손에 제 이마를 대고 울었다. 한참을. 그날 저녁 마리가 마지막으로 향수 가게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방 안에는 빈 술병이 없었다. 다만 잠들어 있는 그랑테르가 있었을 뿐. 그렇다고 후에 그랑테르가 술을 마시는 일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아니다. 마리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그는 그 사건을 자신의 기억과 취기 속에 묻어버린 것 같았다. 허우적대기에는 맑은 정신은 지나치게 위험했기 때문에 그랬을 지도 모른다. 곧 그랑테르는 다미앙의 일을 잊은 것처럼 굴었고, 마리 또한 그가 먼저 감정을 토해내지 않는 한은 그것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1830년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2. 마리와 엘리엇.

 

정착이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니다. 그 곳에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기고, 정해진 자리가 만들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그것은 정착이 이루어져 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파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고 또 자리한 곳이었다. 낯선 곳에서 온 이들은 드물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이 두 남프랑스인에게 그 사실이 아주 괜찮은 쪽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마리는 카페 뮈쟁의 직원 일을 맡아 보기 시작한 뒤로, 착실히 급료를 모아 자신의 집을 구할 수 있었다. 피치 못하게 그녀는 강 건너 생 미셸 가街의 싸고 조그만 하숙집을 구해야 했지만. 마리 스스로 그곳이 혼자 살기에는 더없이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카페 뮈쟁에 손쉽게 갈 수 있었다. 가까운 곳에 소르본느 대학과 리세 루이르그랑이 자리했다. 처음 마리는 루이르그랑이 카미유 데물랭, 앙투안 생쥐스트, 그리고 그 유명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를 가르쳤다는 것을 듣고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이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특유의 냉소가 약간 발휘된 것이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린 외젠 들라크루아 또한 그곳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마리는 그 장소를 퍽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 팡테옹이 자리했는데, 마리는 종종 그 곳에 가서 장 자크 루소와 볼테르의 관을 구경하고는 했다. 프랑스 혁명의 거두 장 폴 마라의 유해가 파내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녀는 그랑테르에게 구경할 권리가 내게 있지 않느냐고 주장하고는 했다. 그랑테르는 여전히 술을 마셨지만, 마리가 뮈쟁에 취직한 이후로는 그곳에 죽치고 앉아 있거나 중앙 시청 근처의 코랭트 주점에서 마시고 난 후 새벽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자신의 집이 생기고, 직장이 생기고, 주점의 마담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형체를 드러내어 그녀의 삶에 자리하기 시작했을 때, 마리는 파리를 자신이 진정 살아야 할 곳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랑테르 또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본디 심어져 있던 땅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옮겨진 나무나 다름없었다. 토양에 적응을 해야 했다. 날씨에도 적응을 해야 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이 곳에서 무슨 종류의 나무로서 취급될 건지에 대한 고민부터 해야 했다. 새로운 장소에서 스스로의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렇게 갑작스러워서, 마리와 그랑테르는 고민으로 밤을 지새고는 했는데, 이때 그랑테르가 받은 도움들은 장소로서 시작된 것이었고, 마리에게는 인물로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조류鳥類의 등장으로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1830년 10월 4일 즈음의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동물과 자연환경의 성인이자 새들에게 설교하였던 것으로 유명한 성聖 프란체스코 축일이었다. 마리는 가을이 되어 늦어진 햇살이 새벽을 몰아내는 것을 보며 자신이 출근해야 할 시간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뮈쟁은 그 시대의 흔한 카페처럼, 점심에는 한 끼 식사 대용의 음식들과 커피를 팔고 저녁에는 술을 팔았다. 마리는 새벽같이 일어날 필요가 없었으나 종종 버릇처럼 그 시간에 눈을 뜨곤 했다. 사람이 적은 거리를 산책하는 것은 그녀 나름대로의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마리는 그 날도 어딘가로 나가 볼까 싶어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질베르 노인이 달아 준 올빼미 모양 장신구가 달린 것. 마리가 집을 구하러 나섰을 때 주변 모두가 입을 모아 그 장신구를 팔면 더 괜찮은 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녀가 기어이 거절했기에 그것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 날따라 아침 햇볕이 좋았다. 마리는 거리에 흩뿌려진 가을의 공기를 들이쉬며 뻐근한 몸을 풀었다. 마리는 보통 향하곤 하던 뤽상부르 공원 대신 센느 강을 건너 반대쪽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시테 섬이나 마레 지구 쪽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마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퐁뇌프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루브르 궁전과 팔레 루아얄이 가까이 있으니 어디서라도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이참에 바스티유 광장 근처의 그랑테르를 방문할까 생각하며, 마리가 다리를 반쯤 건넜을 때였다. 버석거리는 날개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는 까마귀나 작은 새가 날아오나 하여 고개를 들고서 하늘을 보았으나, 곧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알았다. 새 치고는 아주 거대하고 흰 덩어리 하나가 돌바닥 위에 발톱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마리는 흠칫 놀랐으나 곧 처음 보는 새의 모습에 호기심을 가지고서 조심스런 발걸음을 내딛었다. 새는 고개를 들고 부리를 몇 번 딱딱거리다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인간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녕, 너 여기서 뭘 하니?

 

 

마리가 새의 노란 눈동자를 응시하며 같이 고개를 기울이자 새가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고 부리로 깃털을 몇 번 고르고서 마리에게 몇 걸음 총총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마리는 새가 마치 자신의 말을 알아 듣는 것 같은 기분에 흥미로움이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리와 새가 아주 가까워지자 마리는 무심코 손을 내밀었는데, 곧 새가 하는 행동을 보고서 놀라 나자빠질 뻔 했다. 새가 오른발을 들어 그녀의 손가락을 움켜쥐고 흔들었기 때문이다. 너... 마리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새가 다시 부리로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였다.

 

 

반갑수. 해그리드요.

 

너... 이건 뭐야?

 

이거... 이거요? 난 이거가 아니요! 참, 그러고 보니 여기가 프랑스가 맞수?

 

너 말을 할 줄 아네?

 

오, 음, 할 줄 모르는 짐승도 있대? 난 사람 말을 잘 허는 거구. 그, 통성명 하자구 했는데.

 

마리야. 마리. 만나서 반가워? 네 이름이 해그리드야? 성도 있어? 무슨 뜻인데?

 

 

그녀가 얼떨덜한 표정으로 마주 인사하고서 곧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내기 위해 질문을 쏟아내자 새가 끼룩끼룩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농담 좀 하려구 했는데, 여그서는 안 먹히나부다. 그리고 날개를 두어 번 펄럭이고 날아올랐다가 다리의 난간 위에 앉았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예를 갖추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엘리엇 에드워드 엘더스. 보다시피 새구.

 

엘리엇...? 너 바다 건너에서 왔니? 영국식 이름 같은 걸.

 

으응, 그건 아니구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나긴 했수다. 그, 마리, 혹시 집에 고기 같은 거 있남. 멀리 날았더니 허기가 져서.

 

 

마리는 새의 능청스러움에 헛웃음 비슷한 것을 지었다. 엘리엇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커다란 새는 자신도 조금은 민망했는지 마리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깃털을 두어 번 고르며 헛기침 소리를 냈다. 마리는 그 새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 이후 나누어진 일련의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날 처음 보자마자 그런 이야기 하는 거 보니까, 너도 특이한 새구나.

 

암요! 이 천지에 나 같은 새는 없을 걸!

 

네가 사냥을 할 수 있으면 쥐를 줄 수는 있어.

 

생쥐? 시궁쥐?

 

시궁쥐야. 커다래.

 

햐, 좋수다. 내가 잡아 드릴 테니까 데려다만 주쇼!

 

 

해서 흰올빼미 엘리엇이 마리의 집에 입성하게 된 것이었다. 말하는 새. 마리는 엘리엇이 지성을 가지고 엄청나게 많은 것을 –이 시대의 지식인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 없는 것들 또한- 알고 있다는 데 놀랐다. 그리고 엘리엇은 마리가 본질과 이해에 대한 특출나게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서 자신의 거처를 감히 마리의 집으로 정하는 과감함을 보였는데, 마리 또한 이 새를 자신의 곁에 두는 것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왜냐하면 많은 부분에서 그녀와 그 새는 닮았고 또 달랐기 때문이다. 마리는 냉소를 알고 있었지만 엘리엇은 유머를 알고 있었다. 둘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의사소통 방식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이 즈음의 그랑테르에게 엘리엇을 소개시키는 일은 쉬웠다. 그랑테르는 처음 엘리엇을 보았을 때 자신이 드디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환각을 보는 줄 알고서 기이한 기쁨을 드러냈으나, 곧 엘리엇이 정말로 사람의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며 와인 한 병을 새로이 가져올 뿐이었다. 엘리엇이 부리를 딱딱거리며 주정뱅이라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해대면 마리는 깔깔 웃고서 그랑테르의 뒷통수를 때리곤 했다. 엘리엇이 마리를 퍽 좋아라 했다는 사실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 새가 드러내는 친근함의 방식이 농담과 대화였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다른 이들과 말하기보다는 마리와 말하기를 즐겼다. 마리는 엘리엇이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고 싶어 했고, 파리에 익숙치 않은 엘리엇은 그녀와 함께 이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엘리엇은 간혹 아주 냉정하게 굴 때가 있었지만 마리가 그 새를 달래면 곧 태도를 바꾸곤 했다. 곧이어 엘리엇이 카페 뮈쟁에도 드나들게 되자 그랑테르의 두통이 더 늘어났지만 마리는 제 새로운 친구가 집에서 쥐나 잡고 창 밖이나 보도록 무료하게 둘 수 없다며 출근할 때마다 엘리엇을 안고서 등장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물론 마리의 방에서 나타나는 쥐의 수가 현저히 줄어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엘리엇은 마리에게 열두 가지의 이국적 언어로 하는 욕을 가르쳐 주고, 그녀를 헤르미온느라거나 리사 심슨 같은 별명으로 불러대고는 했다. 마리는 곧 그 호칭에 익숙해진 후에 엘리엇에게 장로님이나 조류, 혹은 맹금류 같은 원색적이고 본질적인 별명으로 불러댔다. 둘은 서로를 그렇게 부르는 것을 하루 인사처럼 삼았다. 엘리엇은 기분이 약간 좋을 때면 탐구자 친구, 라고 했고, 기분이 아주 좋을 때면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엘로힘!”이라고. 히브리어로 신을 뜻하는 그 단어가 마음에 들었던 마리는 단어의 앞 글자를 따 성이 될 수 있다면 재미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녀는 아직 마리 그 자체로 살고 있었으나 언젠가 성을 지은다면 참고하리라고 생각하고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것이다.

 

엘리엇은 보르도에서 마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듣고 난 후에 그녀에게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조금 해 주었다. 마리의 백부인 뒤랭 씨에 대한 걸쭉한 욕과 함께. 마리는 제 스스로의 삶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이 새가 서슴없이 그렇게 행동해 대는 것을 보고서, 어쩌면 재미있게 사는 법을 아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삶의 현재성에 대한 작은 도움 하나를 그 새에게서 얻은 것이다. 일상적인 것들, 그러니까 사람을 만나고 부딪히며 또 상처를 받는 것에 대해 농담을 만들고 대화를 나눈 후 훌훌 털어버리는 것. 엘리엇은 알고만 있던 것들의 본질을 탐구하는 재미에 빠져들어, 뭐든 새로운 것을 주워들었을 때면 마리에게로 가서 대화를 시작하고는 했으니. 둘은 괜찮은 오페라 가수처럼 화음을 만들어 낼 줄 알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랑테르는 처음에 그 새의 괴이쩍은 유머 감각, 알 수 없는 언어로 해대는 잔소리와 상스러운 욕을 탐탁찮아 했지만. 마리가 엘리엇으로 인해 깔깔대고 웃는 나날들이 늘어나자 엘리엇을 자신의 친구로 삼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3. 뮈쟁의 마리.

 

마리가 엘리엇이라는 새를 통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였듯이 곧 그랑테르는 일종의 고해소 같은 곳을 찾아 내어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베쎄의 벗들이라고 불린 그 집단들은 마리가 일하는 카페 뮈쟁 뒷방, 공화주의자들의 비밀스러운 기지에 자리했다. 원래부터 그랑테르가 죽치고 앉아 있던 곳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는 뒷방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 따라 다녔다. 주요한 인물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앙졸라스, 콩브페르, 쿠르페락, 레에글 또는 보쉬에, 바오렐, 푀이, 졸리 또는 졸르를리, 즈앙 또한 장 프루베르, 그리고 그랑테르. 그들은 보쉬에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프랑스 출신이었으며 조국을 신성하게 모시는 신전의 사제들이었다. 특히 앙졸라스에 대해 그랑테르가 절대적인 찬양을 늘어놓는 일이 많아지자 마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저 이름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게 될 수 밖에 없었다. 마리는 그곳을 궁금해 했으나, 그곳에 자리한 사람들은 감히 금녀禁女의 구역을 선언하고 있었기에 늘 매서운 눈으로 그네들을 보고는 했고, 심지어 그랑테르조차도 그 구역의 규칙에 순종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어 더욱 더 화를 돋구는 데 일조했다. 후에 그녀가 알아보자 그것은 앙졸라스의 말에 대한 그랑테르의 숭배에서 비롯된 태도였었기 때문에 더욱 실망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그녀는 그 곳에 발을 들이고자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했다. 하루는 마담이 뒷방에 원래 드나들던 직원인 루이종이 감기로 잠시 쉬게 되었다며 그녀에게 뒷방 사람들이 먹고 마신 그릇들을 씻어 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그때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던 마리는 기꺼이 그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리가 들어섰을 때는 한창 조국에 대한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던 참이었는데, 그 한 가운데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쿠르페락이 막, 그건 안심한 생쥐의 회색분자야, 하는 말을 내어놓고 난 이후였다. 마리는 귀를 곤두세우고 그 말을 들었는데, 뒤에 이어지는 그랑테르의 말이 가관이라서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부오나파르트는 여자의 정신을 가졌다는 거지.

 

 

뒤이어 즈앙이 그랑테르를 작게 만류하는 소리를 내었지만 그랑테르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술 냄새를 풍겨가며 헛소리를 시작했다.

 

 

여자란 그런 존재란 말야. 나더러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여자다. 부오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은 자신에 지나치게 심취하는 감정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아. 어때, 내 말에 동의하나?

 

그랑테르, 네가 지나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알지만 일부는 동의한다고 해야겠군.

 

 

쿠르페락이 말을 얹고 나섰다. 마리는 기가 차는 바람에 테이블에 있던 컵을 쟁반으로 옮기는 일을 멈추었다. 뮈쟁 뒷방 토론의 열기가 지나치게 뜨거워진 나머지 그들은 자신이 듣고 있던 말던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자, 봐. ‘여자란 어쩔 수 없다’는 네 말은 글러먹었다. 왜인지 묻는다면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다는 걸 내가 증명해 낼 수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일부는 동의한다고 했으니 그것도 설명해야겠군. 그건 네가 한 말 중 ‘부오나파르트는 자신에 지나치게 심취하는 감정적 면이 있다’는 데에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정신을 일부 가졌다고도 할 수 있겠지.

 

말하자면, 거대한 부분은 그 자신의 오만함이지만, 일부는 여자의 정신이라는 거지.

 

 

하고, 바오렐이 대꾸하자 마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탕 소리가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모두의 시선을 돌렸다. 흔히 논쟁의 도중 말이 끊기게 되면 분위기가 굳어지기 마련이라서, 쿠르페락이 먼저 능수능란한 친밀감을 발휘하여 입을 열었다.

 

 

어, 아직 거기 있었나? 미안하지만 나가 주는 게 좋겠는걸. 우리가 토론 중이라...

 

뭐가 어쩌구 어쩐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너희는 부오나파르트가 여자의 정신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이봐, 마리. 이건 네 이야기가 아니야.

 

내 이야기 맞아. 그러니까 입을 닥쳐 보는 건 어때. 그랑테르.

 

 

마리가 위협적인 태도로 허리에 손을 얹자 그랑테르가 그 입을 다물었다. 아베쎄의 벗들은 풍경 속에 스쳐 지나가기만 하던 그녀의 존재가 갑자기 그 윤곽을 뚜렷이 드러내자 적잖이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것은 거기 존재하던 무언의 질서를 그녀가 대놓고 깨고자 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마리는 뒷방에 존재하는, 일명 ‘여성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규율을 지극히 싫어했다. 마리가 보기에는, 그것은 부당한 것이었다. 평등을 외친다면서? 마리는 뮈쟁 뒷방에서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엘리엇에게 그녀 나름의 의견을 먼저 피력해 보곤 했는데, 엘리엇은 마리의 말이 옳은 데다가 아주 훌륭한 생각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몇 마디 논리를 덧붙여 주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서 쓸 일이 없지만 마리한테는 필요하잖우! 엘리엇은 새답지 않게 인간을 따라하는 버릇이 있어서, 그 말을 마치고서는 마리에게 윙크를 해 보였었다. 마리는 언젠가 반드시 해 두어야겠다는 심산으로 자신의 말을 하나 둘씩 쌓아 두던 참이었기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여자로서 말하는 거지만, 너희들의 생각은 전부 부당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겠지만. 이건 네가 생각하는 수준의 말이 아니야.

 

그럼 무슨 수준이지, 콩브페르? 나도 부오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에 오를만큼 나르키소스같은 오만함을 가졌다는 데 동의해. 너희들의 지식적 오만함과 비슷한 거지. 그런데 그게 어째서 ‘여자의 정신’으로 치환되는 건지에 대해 부당하다고 말하는 거야.

 

 

마리가 그리 차분하지 않은 부루퉁한 태도로 쏘아붙이자 쿠르페락이 앞으로 나서서 마리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 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아직 할 일을 마치지 않아서 말이지. 마리는 대뜸 그 손을 찰싹 때리고서는 다시 특유의 냉소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너희는 이상한 부류야. 왜냐고 묻는다면 너희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설명해 주지. 평등과 자유를 외친다면서 한 쪽으로 기울어진 논리를 펴고 있잖아. 너희들의 평등 속에 여자는 없는 건가? 이제 보니 부정적인 것들은 죄다 여자의 것이라는 말을 즐겨들 하시던데. 그럼 우린 시민이 아닌가? 대혁명 때 거리로 나섰던 여자들을 잊었나보지? 너희 스스로 대혁명의 아이들이라고 칭하잖아. 그럼 너흰 스스로의 본질을 부정중인 건지 궁금한걸.

 

우리는 대혁명의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고, 여자를 부정적으로 비유한 적이 없다. 그게 아니라. 감정적인 면에 대해 말하는 거야. 이건 사실이라고 해야 해.

 

그래, 나도 그걸 말하는거야. 너희들 말대로 감정적인 면이 여자의 정신이라고 치자. 그럼 뭐가 그리 나빠지는 건데. 너희가 이성의 추구자들이라는 건 알아. 그런데 사람이 정말이지 감정 없이 살 수 있어? 그걸 부정적으로 보다니 너희들의 정신이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궁금한걸.

 

 

한 구석에서 그랑테르가 자신의 장황설을 다시 늘어놓으려 입을 열었다. 이봐, 협잡꾼도 때려 잡을 종업원 양반, 그 말을 듣자마자 마리는 쟁반을 왈칵 들어 그랑테르의 머리를 내려쳤다. 내가 조용히 있으라고 했지. 마리는 불을 내뿜을 기세로 뒷방의 한 가운데 당당히 서서 쟁반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고 팔짱을 끼었다.

 

 

네 말에 따르면 우리는 여자의 표상을 부정적인 것에 가져다 붙인다는 건데.

 

 

상황을 관망하던 앙졸라스가 말했다. 잠깐 마리는 그 아름다운 대리석에 그랑테르가 매료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장한다. 마리.

 

어째서인지 이유를 덧붙여 봐.

 

우리가 여자의 표상을 부정적으로 대한다면, 어떻게 어머니 조국의 이름을 부를 수 있지?

 

 

앙졸라스는 손에 든 펜을 내려놓고서 일어나 마리에게로 다가갔다. 마리는 앙졸라스가 파트리아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애인이라고 할 만한 것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여자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군다고 해서, 다른 의미의 대리석이라고도 불렸다. 마리는 잠시 앙졸라스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평소처럼 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는 이 땅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 위한 과정을 매일같이 이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 네가 한 말들이 모두 틀렸다는 건 아니야. 그러나 반론이 있다. 우리가 어머니 조국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너도 알 테지. 마리. 여기 자리한 사람들 모두 조국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위대한 단어인 지 알고 있다. 네 말대로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여자의 표상을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조국에 붙여 부를 수 있지?

 

그건 너희가 진정으로 그 단어를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야. 너희가 알고 있는 것이 뭔지부터 되돌아 보는 건 어때.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앙졸라스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예의 그 심판적 태도를 드러내며 마리에게 물었다.

 

 

너, 나하고 조국에 대해 논할 수 있어?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눈을 돌려 벽에 걸린 공화국 시절의 프랑스 지도를 보는 것이었다. 마리는 그 태도에 잠깐 얼어붙어 서 있었다. 앙졸라스에게는 사람을 압도하고 명령하는 듯한 태도가 있었다. 모두에게 그러했으나 특히 일종의 권위를 발휘할 때 그것은 무시무시한 영향력이 되어 사람들을 덮쳐오기 마련이었다. 앙졸라스의 그 말 -자신과 조국에 대해 논할 수 있냐는 말- 은 곧 마리에게 자신의 사상에 대한 확신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가 어째서 이 비밀 결사의 수장인가에 대한 대답을 내어주었다. 또한 이 땅, 이 프랑스, 파트리아에 대한 혁명적인 이해는 자신이 가장 먼저 염두에 두고 있는 문제이며, 누군가 앞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하나의 이론이 정립되어 있다는 의사의 표시이기도 했다. 마리는 그 한 문장에 담긴 수없이 많은 뜻을 그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뒷방에 들어와 시작된 논쟁에 일종의 흥미를 가지게 된 앙졸라스가 진심으로 자신과의 토론에 응했다는 것 또한 그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가 무조건적인 받아들임과 수긍으로 나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마리는 앙졸라스의 약간 차가운 표정을 바라보다가 뒷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모두가 마리의 대답이 어찌 될지 지켜보고 있었다. 마리는 작게 냉소하고서 앙졸라스에게 대꾸했다.

 

 

그러는 너, 너는 나하고 어머니에 대해 논할 수 있어?

 

 

앙졸라스 또한, 마리가 가진 이해에 대한 능력의 걸출함에 미치지는 않았지만 못지 않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그 말에서 마리의 하고픈 말에 대한 전개를 읽을 수 있었다. 마리는 자신이 여성이라서, 그래서 부당함을 주장한다고 못박았다. 여성이 아니면 그 누가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통찰을 깊이 할 수 있겠는가. 앙졸라스 그 자신은 영원히 알 수 없는 부분 또한 있을 것이었다. 그는 여성이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이 집단의 수장은, 마리와 어머니를 논하는 일은 자신이 온전히 알지도 못하며 이해할 수도 없는 사실을 떠들어 대는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잠깐 침묵하자 마리는 그것이 일종의 적대적 표시가 되어 나타난다면, 이 한 집단의 젊은이들은 정말 글러 먹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짧은 소강 끝에 앙졸라스는 뜻밖에도 팔짱을 풀고 그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니, 나는 너하고 어머니를 논할 수 없다.

 

 

아직은, 앙졸라스가 말을 덧붙이자 마리는 그 손을 마주 잡으며 가볍게 흔들었다. 나 또한 너하고 조국을 논할 수 없어.

 

 

아직은.

 

언젠가 한번, 우리 스스로가 준비되었다고 느낀다면 서로를 부르도록 하지.

 

그래.

 

 

그리고 가벼운 악수와 함께, 마리는 뒷방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일종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존재에 놀라게 된 이들이 많았으나, 곧 아베쎄의 벗들 대부분이 마리에게 익숙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들이 막 소년에서 청년이 된 젊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롭고 진보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지간에 탐구하고 싶어 했기에. 그들에게 있어서 마리의 등장은 어느 정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자 마리와 한 번도 논쟁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베쎄의 벗들이 추구하는 바를 이해할 자격이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일도 일어났다. 물론 엘리엇도 덤으로 딸려 들어왔는데 모두가 그 새의 깃털이 떨어지면 깃펜으로 만들고자 달려들곤 했으므로 가끔 마리가 집안에 떨어진 엘리엇의 깃털을 주워다가 경매에 붙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바오렐과 보쉬에는 도미노 놀이를 하며 딴 돈을 가지고 가격을 올려 대는 부자 노릇을 즐겼으며, 부채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푀이는 남몰래 마리에게 수를 놓기 좋은 부채를 가져다가 뇌물로 주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쿠르페락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마리에게 툭 내어놓고 멋지고 끝내주는 저녁 대접을 해 주겠단 제안을 하자 마리가 혹하는 바람에 열기가 더해지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물론 당사자인 엘리엇이 자신이 벌거숭이가 되는 꼴을 보고 싶냐며 마리에게 우는 소리를 -난 통닭 되고 싶지 않수! 난 올빼미란 말요!- 하고 나서 경매는 드물게 벌어지게 되었다.

 

이후로 종종 토론을 할 때면 마리는 원하는 때 끼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으며, 가끔은 호된 반론과 부드러운 교정의 말을, 가끔은 예의바른 수긍과 진솔한 칭찬의 말을 듣고는 했다. 특히 수장과 그를 보충하는 참모인 콩브페르는 마리의 의견이 날이 갈수록 예리해지는 데 뿌듯함을 느낀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앙졸라스는 늦은 밤이 되었을 때 마리가 그랑테르를 끌어내는 광경을 즐기는 것 같았으나 아니라고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으니 이 청년들 사이에 마리가 훌륭히 녹아들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마리가 그 한 가운데 자리잡아 그들이 쏟아내고 있는 것들, 그러니까 사회, 문화, 정치, 예술, 문학, 회화, 조각, 음악, 법률이나 체계, 혹은 신화, 그리스 철학과 현대 철학등의 문제에 발을 담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인데. 이는 마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사색거리를 가져다 주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앙졸라스에게 약속한 대로 조국에 대한 것을 묻고 이해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벗들은 주로 그녀와 파트리아에 대한 이야기,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을 일과 삼고는 했다.

 

 

4. 누가 민중을 죽였나?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뮈쟁에 드나들며 파리의 코끼리를 제 집으로 삼은 꼬마 가브로쉬가 마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 자존심 센 아이는 도통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는 일이 없었기에 마리는 의아함에서 그 요청을 수락했었다. 그랬더니 대뜸 가브로쉬가 마리를 잡아 끌고서 생 미셸의 빈민가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가브로쉬, 어디로 가는 거야?

 

그러니까, 이해자 씨, 빵 살 동전 좀 있어?

 

 

가브로쉬는 늘상 다 자란 것처럼 굴었는데, 마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종종 그 아이는 마리를 ‘아가씨’나 ‘종업원’ 같은 호칭이 아니라 남자 어른들을 부르듯이 ‘무슈’, 아니면 영어 식으로 ‘미스터’라고 부르곤 했다. 그녀가 크게 개의치 않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 있지. 언제나 있는걸.

 

잘 됐다. 어제 코끼리에서 재운 애들이 있거든. 두 명. 여섯 살이랑 아홉 살.

 

거리에서 만났구나.

 

달리 만날 데가 있겠어? 걔네 부모라는 개자식들이 걔넬 버리고 갔대. 빵 살 동전도 안 쥐여줬단 말이지. 그런데 요새 나도 좀 궁핍해. 지갑들이 워낙 튼튼해야지, 원!

 

가브로쉬, 도둑질은 안 된다고 했잖아.

 

이해자 씨도 그렇게 말할거면 난 뮈쟁에 더는 안 가고 싶어지는걸.

 

 

가브로쉬가 투덜거리며 마리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 꼬마의 집은 거렁뱅이들이 모여 사는 한 켠의 코끼리 동상이었는데. 그것은 나폴레옹이 지은 파리의 흉물이었다. 어쨌거나 마리는 매일같이 생 미셸 빈민가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흉작인데다가 콜레라가 돌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는 요새 뮈쟁 뒷방이 들뜨고 있는 주제들에 대해 생각했다. 혁명과 바리케이드. 1830년의 바리케이드는 승리의 나날을 이끌어냈으니, 뮈쟁의 벗들은 새 세상을 위해 다시 한 번 파리를 붉은 깃발로 물들여야겠다고 계획하고 있었다. 마리는 부쩍 바빠진 그들을 생각하다가, 가브로쉬가 문득 멈춰서는 것을 느끼고 발걸음을 늦췄다.

 

 

가브로쉬, 여기가 네 코끼리 아니니?

 

...

 

왜 그래.

 

돌아가자. 이젠 소용이 없어. 동전 아끼게 되어서 다행이야.

 

 

가브로쉬가 여상한 말투로 휙 돌아섰으나 마리는 가만히 있기보다는 행동하기를 택했다. 유독 흐린 날들이었다. 마리는 저 멀리 수레에 두 작은 몸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일들은 청천벽력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처럼 다가오는 것이었다. 마리가 눈을 몇 번 깜박이며 보고 서 있자 가브로쉬가 다시 마리의 옷자락을 당겼다.

 

 

마리, 오래 보는 거 별로야.

 

저 애들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보면 몰라? 끌려가고 있잖아.

 

왜?

 

지나가던 불량배들이나 경찰들이, 더 묻지 마!

 

 

가브로쉬의 신경질적인 말맺음에 마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고 가브로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은 지갑을 좀 털어 오늘 밤 빵을 살 터이니 마리는 아끼게 된 동전으로 빵을 사라는 말을 건네고서, 또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마리는 잠깐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무관심한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을 보고서 저렇게 느낄 수 있으려면 같은 광경을 얼마나 많이 봐야 할 것인가? 마리는 문득 그 태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별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것임을 알고서 자리에 우뚝 선 채 두 작은 몸뚱아리가 마치 물건처럼 수레에 실려 가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뮈쟁으로 향한 마리는 그동안 나누었던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프랑스는 어째서 불행한가? 그것은 프랑스의 시민들이 불행하기 때문이다. 마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 또한 프랑스의 시민이라고 누누이 강조해 왔던 터였다. 그렇다면 저 아이들도 프랑스의 시민이 아닐 리가 없는데. 민중은 불행할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 누가 결론을 내려 놓았던가? 아무도. 아무도 결론을 내릴 자격이 없었다. 민중 그 자신 빼고서는. 마리는 그것을 알았기에 저 두 아이들의 거리 생활이 이틀 만에 끝나게 된 것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지금 당장 그녀 자신을 빼면 그 누구도 그들을 위해 분노해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마리가 눈물 범벅이 되어 뮈쟁에 도착했을 때 아베쎄의 벗들은 모두 거리 선전을 나가고 난 뒤였다. 잠깐 자신의 물건을 챙기고 있던 콩브페르를 제외하면,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콩브페르가 마리의 얼굴을 보고서 차분한 손길로 손수건을 꺼내 내밀어 주었다.

 

 

무슨 일이야. 혹시 고향에서 안 좋은 소식이라도 온 거야?

 

 

마리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손수건 고마워. 마리가 얼굴을 닦아낸 뒤 돌려주자 콩브페르는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고서 가장 가까이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는 의자를 뒤로 빼고 가볍게 등받이를 두들겼다.

 

 

안 나가봐도 돼?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따라 달라질 테지. 왜 우는지 말해주겠어, 마리?

 

 

콩브페르의 말에 마리가 조심스레 훌쩍이며 의자에 앉았다. 드문 일이었다. 마리가 우는 것이 드물었다는 뜻이고, 콩브페르와 마리가 독대하는 일도 드물었다. 기실 아베쎄의 가이드와 마리는 그다지 들어맞는 성정은 아니었다. 지식에 대한 일종의 확신을 가지고 있던 그와 마리의 신조는 종종 부딪혔다. 둘은 다름을 인정했고, 서로의 생각을 바꾸려 하는 것은 아주 무례한 일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에게 지금은 해결해야 할 질문이 하나 있었다.

 

 

거리에서 수레에 실려 나가는 아이들을 봤어.

 

생 미셸에서?

 

응. 가브로쉬의 코끼리 근처에서.

 

 

콩브페르는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놀랄 일은 아니지만 네가 눈물 흘릴 수 있지. 마리는 숄을 얹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누가 민중에게 그리도 비참한 운명을 주었던가? 마리는 그것을 묻고 싶었다.

 

 

콩브페르.

 

듣고 있어.

 

누가 우리에게 선고를 내리지?

 

우리에게?

 

너와 나 같은 시민들에게. 우리는 독립된 존재였다고 늘 생각해 왔어. 개인과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쨌거나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들이잖아. 인간이니까. 그런데 누군가 우리에게 비참함이라는 선고를 내린 것 같아.

 

 

아베쎄의 가이드가 잠시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침묵에 빠져들었다. 콩브페르의 버릇이었다. 그는 숙고하는 것을 즐겼고 삶에 대해 예찬하는 것도 즐겼지만, 불행에 대해 지적하기를 서슴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으니. 마리가 잠시 자신의 얼굴 매무새를 다듬고 눈물 자국을 지우는 동안, 콩브페르는 무언가 생각을 하고서, 늘상 그렇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건 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짧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어. 네가 원한다면 나는 전부 설명해 줄 참이야. 내가 알고 있는 한 모든 것을 가져다가 말해 줄게.

 

나는 궁금해. 이해할 수 없어.

 

우리가 압제자에 대해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야. 마리.

 

그게 무슨 말이야.

 

너는 방금 내게 민중이 왜 가난하고, 왜 굶주리며, 왜 비참한 지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물은 거지?

 

 

콩브페의 간단한 정리에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는 아주 많은 요인들이 담겨 있지. 예를 들면 역사와 경제 상황 같은 것. 세금이 과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왕이 너무 많은 것을 가져가려 하기 때문이야. 왕은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지게 되었을까? 혈통으로. 우리는 그래서 그를 압제자라고 부른다. 타고난 권력이란 건 없고, 태생으로 사람을 휘두를 수 없어. 민중의 삶이 더 나아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학술적 논의들은 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는 왕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일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거지. 실천하기 위해 애쓰고 있고.

 

 

마리는 고개를 들어 콩브페르를 보았다. 그 청년은 물 두 잔을 떠와 테이블 위에 놓고서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혁명의 시기, 왕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견해,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과거에 머물던 이야기는 다시 현재로 흘러들었다. 얼마 전부터 계속된 흉작과 콜레라에 대해서, 그리고 1830년의 혁명으로 세워진 루이 필리프의 행동이 민중을 배반하고 있다는 콩브페르의 견해와 실제로 거리의 부랑아들, 민중들이 겪는 삶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콩브페르는 정말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지식들을 나름의 비판을 통해 받아들인 뒤 정제한 것을 마리에게 건네주려 하고 있었다. 마리는 콩브페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종종 콩브페르는 그녀의 상태가 괜찮은지에 대해 확인하고서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 물론 그것들은 과거와 현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콩브페르는 대혁명과 7월 혁명을 다시 상기시키며 자신들이 바리케이드와 시위, 그리고 저항에 대해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 청년의 논조는 조곤조곤한 선생님과 같아서, 앙졸라스처럼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사람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데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콩브페르가 공화국 시절의 지도를 가리키며, 조국 프랑스와 우리 어머니, 하고 말을 끝맺었을 때, 마리는 자신이 처음으로 벗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때를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고, 네게 전해 줄 수 있는 건 이게 다야.

 

콩브페르. 바리케이드를 세울 날을 계획하고 있어?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래?

 

라마르크 장군이 콜레라에 걸렸다고 해. 민중들은 그들을 영웅으로 여기지. 횃불을 피우기에 좋은 날이 올 지도 몰라.

 

 

그리고 콩브페르는 뜻밖의 일을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하고서. 마리는 그 질문에 대뜸 그렇게 답했다. 날 ‘생도’라고 부르지는 말아줘. 그 말에 콩브페르는 잠깐 미소를 짓고서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아베쎄의 벗들에게는 특이한 습관이 있었다. 뒷방에 처음 들어온 이들의 사상적인 부분에 대해 들여다 보기 전까지는 진실로 동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얼마 전 뒷방에 입성한 마리우스 퐁메르시라는 청년 또한 ‘생도’라고 불리고 있던 참이었다. 마리는 자신의 사상에 대해 확신을 가져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뮈쟁 뒷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생도라고 부를만한 때가 없었어.

 

너희가 만일 그런 호칭을 붙였다면 거부했을 거야. 하지만 콩브페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줘. 나는 너희들의 친구야.

 

네 의사는 충분히 알겠지만, 마리. 우리는 어쩌면 거리에서 목숨을 잃을 지도 몰라.

 

 

그 말을 하면서, 별안간 콩브페르의 눈은 약간의 슬픔과 엄숙함으로 차오르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었지만. 그들은 늘 정말로 바리케이드를 쳤을 때의 시가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마리에게 다시 되묻는 것은 당연한 절차나 다름없었다.

 

 

정말로 죽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너희를 돕고 싶어.

 

 

마리가 대꾸하자 콩브페르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 알아. 하는 의미에서. 콩브페르는 곧 어색하게 마리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이며 앙졸라스에게 보고해 두겠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리는 재차 힘을 주어서, 콩브페르에게 말했다. 나도 돕게 해줘. 라고. 콩브페르는 고개를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끄덕이고 한 구석에 밀어 두었던 선전물들을 들었다. 그리고 절반을 나누어 마리의 손에 들려 주었다.

 

 

아마 중앙 시청 쪽으로 가야 할 거야.

 

그쪽은 내가 잘 알아. 거기 1년 정도 살았었거든.

 

그래? 그렇다면 네가 길잡이를 해 주면 좋겠네.

 

 

콩브페르가 신사적인 버릇으로 마리 먼저 문을 나서도록 손을 내밀었다. 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거리로 향하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이후에 펼쳐진 것들에 대해서 굳이 설명을 덧붙이자면, 앙졸라스의 연설 후 뜻밖의 마리의 등장에 벗들이 잠깐 놀란 것을 빼면 일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냥 거리를 뛰어 다니고, 다른 소규모 모임들의 우두머리들과 접촉하거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일을 함께 하는 것. 그뿐이었다. 마리는 특히 글 가르쳐 주는 일에 열성적이었고, 종종 가브로쉬도 그녀에게 와서 배웠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아이들에게 책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지만, 그 세상을 이해하는 건 자신들의 몫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1831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3. 자정의 바리케이드.

 

1. 마리 엘로.

 

마리가 뮈쟁의 종업원으로 지내게 된 지 일 년 반 즈음 지났을 때, 아베쎄의 벗들은 1832년을 지나가고 있었다. 열정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고, 여전히 거의 가족처럼 지냈다. 물론 마리와 엘리엇도 빼놓을 수 없는 뒷방의 식구임은 분명했다. 마리는 아홉 명의 청년들과 각기 다른 친구 사이를 유지했는데, 그 중 특별히 오랜 시간을 많이 보냈던 것은 즈앙이었다. 그랑테르와 마리의 사이는 남프랑스에서부터 유지되었던 것이라 각별했지만, 마리는 다른 친구들과 대화하는 일을 즐겼다. 특히 즈앙은 중세에 심취해 있었으며 시를 읽고 화분을 기르는 수줍은 청년이었다. 그러나 대담했다. 즈앙이 수레국화 들판을 산책하기를 즐겼다는 것 또한 마리의 버릇과 묘하게 들어맞는 부분이 있어서, 그 둘은 종종 남들은 모를 섬세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느 날은 그랬다. 마리가 즈앙의 이름에 대해 물어 본 날이었다. 커피 한 잔을 들고서 즈앙 앞에 앉은 그녀가 너는 왜 즈앙이야? 하고 물었을 때, 즈앙은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쓰고 있는 원고를 접어 두고서 마리와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그건 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리고 닮고 싶은 것들을 기리는 내 방법 중 하나야. 너도 내가 중세를 좋아하는 것을 알지?

 

그럼, 너는 신에 대한 질문도 즐기고, 시도 많이 읽잖아.

 

내 이름, 그러니까 장을 중세식으로 발음하면 즈앙이 되거든. 나는 동지들이 나를 그렇게 불러 주는 행위 자체가 나를 존중해 준다는 표시 같아서 좋아해.

 

그으래, 이름이라는 거.

 

 

마리는 턱을 괴고서 생각에 잠겼다. 이름이라는 건 그런 의미를 담을 수도 있구나. 기실 뮈쟁 뒷방의 젊은이들은 말장난과 재치를 즐겼다. 그곳에는 프랑스식의, 또 영국식의 온갖 재미난 언어 유희와 스스로 부르는 수식어들의 재담이 넘쳐났다. 레에글이 보쉬에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과, 예민한 청년 졸리가 졸르를리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된 것도 그러한 행위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마리가 사색에 잠기려는 태도를 취하자 즈앙이 조심스레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나도 질문이 하나 있는데. 물어도 될까?

 

그래, 뭐든지.

 

네 성에 대해서 우리가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내 성?

 

너희는 항구에서 왔다고 했지? 그것 빼고는 말한 적이 없지만.

 

그랑테르한테 물어 봐. 항구도시에서 온 건 분명한 사실이야.

 

사실 나도 항구 출신이야.

 

 

즈앙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청년은 마르세이유의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말하자면, 이 질문, 그러니까 마리의 성에 대해서 묻는 질문은 친근감을 돋우고 싶어 하는 즈앙의 표현이나 다름없었다. 혹시 너희 쪽을 내가 알지 않을까, 즈앙이 덧붙이자 마리는 가만히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있지. 난 내 성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마리가 컵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하자 즈앙이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사실 나도 아버지의 성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

 

하지만 네 이름은 꼭 시에 나오는 것 같은걸. 프루베르. 게다가 너는 플룻을 불잖아.

 

그래, 그건 우연 같은 거지. 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내 성을 들으면 우리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야.

 

 

마리는 즈앙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되뇌이는 것을 들었다. 아버지, 뿌리에 대한 것. 마리는 어쩐 일인지 잘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상 고민하고 싶지 않아 머리 뒤쪽으로 밀어 두었던 것들 말이다. 사실 파리에 오고 나서부터는 아무도 그녀를 아버지 없는 뒤랭 집안의 자식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신경쓸 필요가 없었던 탓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고민하는 일을 멈추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반평생은 나름대로 아버지에게 묶여 있었다. 존재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사실 그 무엇보다 강력하게. 그래서 그녀는 즈앙에게 운을 떼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 집을 떠나셨어, 하고.

 

 

그래? 어쩐 일로?

 

자세히는 알고 싶지 않아서 안 물어 봤지. 그런데 백부님이 거의 쫓아내려는 것처럼 굴었다는 사실만 알아. 난 늘 아버지 없는 아이였어.

 

그거 정말로 슬프다. 너는 그런 수식어를 떼고 보아야 더 멋진 사람인데.

 

 

진실로 즈앙은 그녀의 마음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너의 입장이 될 수 없지만, 하고 덧붙일 정도로 그는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리는 즈앙이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에 대해 묻거나 혹은 과거에 더 잠겨들어가는 일을 원치 않고서 그냥 자신의 현재적인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마리 자신도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취급했는지는 이제 사실 상관이 없어. 나는 너희들에게 마리잖아. 하지만 즈앙, 가끔씩은 그 날들이 떠오르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지? 나는 과거에 붙잡혀 있고 싶지 않아. 그래서 요새 종종 내 성을 지워 버린 게 정말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럼 너는 마리로 충분하겠는걸.

 

하지만 새 이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앙졸라스가 잘 하는 것 있잖아. 선언 말이야. 못박아 두고 선포하는 거야. 나는 더 이상 내 아버지의 그늘에 있는 아이가 아니라고. 나는 홀로 선 존재고 누구나 다 그렇지. 운이 좋게도 결정할 수 있는 환경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즈앙은 가만히 마리가 책상을 두들기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 청년은 잠시간 자신의 친구에게 무엇을 해 줄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즈앙이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자리에 쌓아 둔 자신의 희랍어 사전을 들고 왔다. 그는 시인임과 동시에 거의 동양어 박사였다. 신에 대한 열정이 그로 하여금 히브리어와 희랍어에 대한 탐구를 부추겼던 것이다. 즈앙은 의미를 얹어 부르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이기도 했기에, 마리에게 괜찮은 단어를 찾아 주고자 그런 행동을 한 것이기도 했다. 마리는 대뜸 두꺼운 책을 들고서 자신의 앞에 내려 놓는 즈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오늘 네 성을 새로 짓자. 내가 도와 줄게.

 

날 도와 주는 거야? 나는 좋아. 하지만 이 두꺼운 책은 어디다 쓰려고?

 

이건 말이지, 희랍어 사전이야. 성경에 쓰인 것들. 나는 네가 일종의 신성한 이름을 가져도 좋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마리가 가벼운 웃음을 웃고서 즈앙의 어깨를 톡 쳤다. 즈앙은 그 행동을 일종의 사양처럼 느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사전의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진지한 투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마리, 나는 진심이야. 여기에 거창할 것 없는 단어들도 많지만, 네가 좋은 성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

 

알아, 즈앙. 네 친절을 내가 늘 알고 있지. 너는 사려깊은 사람이야. 네 도움을 받아서 내 성을 지어 보는 게 나쁘지 않을 거라는 거였어.

 

 

그 말에 청년은 함박웃음을 머금는 것이었다. 즈앙의 천성은 착했다. 남을 돕는 일을 기꺼이 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이해했기에 마리 또한 아주 기쁘게 받아들인 것이었다. 즈앙은 짐짓 엄숙한 태도로 사전의 가름끈을 붙잡고 손때 묻은 표지를 넘겼다. 생각해 놓은 것 있어? 즈앙이 물었을 때 마리는 고개를 돌려 창가에 앉아 졸고 있는 엘리엇을 흘끔 보았다. 새는 졸고 있을 때 바보 같은 얼굴을 했기에 그녀는 약간 웃고서 다시 턱을 괴었다.

 

 

엘리엇이 나를 엘로힘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어. 단어가 마음에 들어서 기억해 두었는데.

 

엘로힘? 그건 히브리어네. 신을 부르는 단어고... 사실 ‘우리’라는 뜻도 있어.

 

맞아, 그렇다더라. 하지만 그렇게까지 거창할 필요가 있을까?

 

엘리엇다운 별명인걸. 마리 엘로힘.

 

 

즈앙이 소년 같은 장난투로 말하자 마리가 깔깔 웃었다. 쟤를 처음 본 사람이 나여서 내가 자기 세계의 신 같은 거래. 마리는 즈앙이 자신의 말을 웃음과 진지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즈앙은 엘리엇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동의했다.

 

 

그런데 네가 그 단어는 별로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음, 비슷한 걸로 찾아 볼게.

 

어감이 마음에 들어. 하지만 신이라는 호칭을 쓰는 건 조금 우습기도 하고, 난 신을 별로 믿지 않아서 말이야.

 

좋아, 그러면. 음. 여기 엡실론 부분을 보자. 알파베로 따지면 E인데, 엘로힘하고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이 꽤 많아.

 

 

즈앙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하자 마리가 의자를 끌어당겨 가만히 그 곁에 앉았다. 오후 볕이 조금 따가웠지만 책을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빛이었기에 즈앙은 책에 직접 햇빛이 닿지 않게 하려고 옆으로 약간 움직였다. 즈앙이 눈으로 페이지를 훑어내려가다가 마리에게 어서 골라 보자는 듯 손짓을 했다. 마리는 희랍어를 읽는 법에는 익숙치 않아서 대신 정의들을 읽어내려가기로 했고, 손가락으로 수많은 단어들을 더듬어 내려가다가 가만히 하나의 단어를 가리켰다.

 

 

즈앙, 이건 무슨 뜻이야?

 

어디, 뭐가?

 

여기, 이해하다.

 

이건 엘로εννοώ 라고 읽어.

 

엘로.

 

의미, 의미하다, 이해하다.

 

 

즈앙이 가만히 단어를 읊어 주었고 마리는 그 소리를 들었다. 강렬한 깨달음이라거나, 운명 같은 짜릿함은 없었으나, 그냥 마음에 들었다. 마리는 즈앙이 웃으며 어떠느냐고 묻는 질문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괜찮네. 그녀의 그 말에 즈앙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열정을 두고 있는 부분이 네 이름과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는걸.

 

그렇게 해석을 덧붙여 주는 게 네 몫이야? 만약 그런 거면 너 거기에 재능 있다.

 

재능까지는 아니지만... 만일 네가 내 몫이라고 칭해준다면 기꺼이.

 

 

즈앙과 마리는 썩 괜찮은 과정 하나를 완결지은 사람들처럼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졸고 있던 새가 그 광경을 보고 날개를 퍼덕여 마리의 곁에 앉았다. 뭐 좋은 일 있수? 하고 묻는 엘리엇을 마리는 괜스레 한번 꼭 안고서 말했다. 엘리엇, 난 이제부터 마리 엘로야.

 

 

시인 양반이 도와 준 거요?

 

그럼, 즈앙이 아니면 누가 내게 희랍어를 읽어 주겠어.

 

 

그 말에 즈앙은 수줍게 웃으며 신사들이 하듯 인사하는 시늉을 냈다. 엘리엇은 즈앙과 마리를 뚤레뚤레 보다가 꼭 사람처럼 두 날개로 박수를 쳤다. 멋지구 좋구만! 그 큰 새는 날개를 다시 퍼덕여 모두가 볼 수 있는 뮈쟁의 가장 높은 선반에 올라갔다. 그리고 큼큼거리는 소리를 몇 번 내고서 그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사람들! 여기 새는 나 뿐이니까, 사람들! 마리 엘로에게 박수를 좀 주시라구!

 

 

그 소리에 책상 위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콩브페르가 시선을 올려 엘리엇을 보았다가, 도로 마리에게 눈길을 옮겼다. 엘로, 그거 멋진걸. 콩브페르는 일어나 엘리엇의 지시에 기꺼이 따르기로 한 것처럼 박수를 쳤다. 그 행동에 따라 나머지 사람들도 기꺼이 찬사를 보냈다. 어이, 엘로. 그 성 바꿀 생각은 없나? 내 것도 괜찮은데 말이야. 하고 외치는 사람은 그랑테르의 의도된 헛발질에 마룻바닥에 코를 박을 뻔 했다. 친구가 거쳐 온 과정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그랑테르는 일어나서 비틀대지도 않고 마리에게 향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렸다.

 

 

이봐, 마리. 멋진 걸. 이제는 스승이 필요 없겠어.

 

헛소리 하지 말고, 그랑테르. 네가 내 스승이 아니면 누구지?

 

글쎄, 악우?

 

오랜만에 맞는 말 한다.

 

 

그리고 마리는 그랑테르에게 커다란 포옹을 한번 해 준 뒤 그 주정뱅이의 뒤통수를 한번 때렸다. 맞는 말. 하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랑테르는 제 친구의 말장난 실력이 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약간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호탕하게 웃으며 박수를 쳐 주었다. 이제 주정뱅이 못지 않다는 말과 함께.

 

그래서 마리의 성은 엘로가 된 것이었다. 그녀 스스로 지었으며, 친구들의 도움이 조금씩 얹어져 있다는 점에서 마리는 더더욱 그 성을 자랑스러워 했다. 물론 마담에게 자신을 이제부터 마리 엘로라고 불러 달라고 했을 때 이제까지 네 성을 숨겨 놓았었던 거냐고 이유 모를 잔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마리의 그 이름은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해서, 곧이어 논쟁의 한 과정에 불리게까지 되었다. 마리는 종종 이해하는 것에 대한 특출남을 간직하겠다는 자신의 신조를 되새길 때 자신의 성을 불러 보았다. 엘로. 이해하다. 나는 마리 엘로. 하고서. 그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녀가 꼭 신성하고 멋진 이름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하나의 규칙을 세웠다는 사실은 느낄 수 있었기에, 종종 소리내어 그녀를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다. 마리의 성이 정해지고 나서 그녀가 뮈쟁 뒷방의 이해자로서 강림하는 일이 잦았다는 사실 또한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그 한 해를 보냈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담아가며 우정을 다졌던 것이다.

 

2. 거리로, 거리로!

 

일상은 때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농담을 주고받고 헛소리를 해대는 것은 우리의 목표를 가리려는 일종의 속임수다. 인류는 늘 그 방법을 써먹어 왔고, 아직까지 나쁘지 않게 먹힌다. 그러나 여기서 상기해야 할 것은, 아베쎄의 벗들은 망각이라는 것에 질 만큼 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만큼 구체적이지 못한 젊은이들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혁명을 위해 굴러가고 있었다. 그들은 새로이 만들어진 바큇살들이었다. 역사를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꺼이 한 몸을 희생하고자 하는 사람들. 마리는 그런 사람들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일은 얼떨떨하게 지나갔다. 라마르크 장군이 죽은 것부터. 모든 것은 얼떨떨하게 시작되었다. 환희라기보다는 긴장감 속에서 지나갔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알맞은 내리막길을 만나 그 몸체를 떠밀어대는 사람들의 힘에 의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마리가 그 한 가운데 있었다. 아베쎄의 벗들이 그 한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새벽녘 라마르크 장군의 운구가 지나갈 길에 어떻게 조직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낼 것인지에 대한 회의를 빠르게 마쳤고, 화기와 화약, 그리고 나름대로 방어를 위한 무기들을 정비했다. 뮈쟁의 뒷방은 열기 대신 꽉 조여든 가죽끈 같은 팽팽함이 지배했다. 6월 5일경, 그들은 민중들과 함께 자유와 혁명을 외치며 거리로 나설 것을 결연히 맹세했다.

 

그 날 마리는 엘리엇더러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말을 당부하고서 집을 나섰다. 새는 조국을 알지는 못했다. 그는 프랑스 땅에 애착을 가진 이가 아니었다. 만일 다른 곳, 예를 들자면 저 신대륙 아메리카나 동쪽의 어느 땅에서 사람들이 바리케이드라는 것을 세우고 시가전을 벌인다고 했다면, 새는 하품 한 번을 하고 긴 잠을 잤을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의 엘리엇에게는 마리와 아베쎄의 벗들이라는 존재가 남았다. 지울 수 없으리만치 짙게. 그래서 엘리엇은 당신네들이 싸우러 나가는 것을 가만 두고서 집에 있으라는 말이냐며 펄펄 뛰었다. 물론 마리의 단호한 태도에 굴복하는 체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엘리엇이 나중에 집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며, 다치지나 말라는 말을 건넸을 때만 해도 마리는 자신에게 다가올 일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는 바스티유 광장이 될 것이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각자 흩어져 있다가 모이기로 한 벗들의 약속에 따라, 마리는 샹주 다리를 건너 루브르 쪽에 잠시 머물었다가 바스티유 광정으로 향했다. 모든 것은 아주 빠르게 번개치듯 일어났다. 상기하면 그러한 일들이 하루 반나절만에 벌어질 수 있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일들을 직접 겪어내고, 하루가 또 다른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부추겼다. 라마르크의 운구가 천천히 들어올 때 누군가 모자를 벗자, 그 길의 모든 사람이 모자를 벗었다. 마리는 모자를 벗지 않았다. 저 멀리 기마병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를 제외하고서는 아주 조용한 행진이었다. 애도의 침묵이 깨진 것은 누군가 거리로 뛰쳐나가 붉은 기를 흔들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사람들은 선동에 맞춰 마차를 붙잡았으며, ‘라마르크를 팡테옹으로!’, ‘라파예트를 시청으로!’, ‘자유 프랑스!’ 같은 구호들을 외치며 물결처럼 거리로 터져나왔다. 소요를 진압하려는 시도가 행렬의 맨 앞에서 벌어졌고, 기마병들이 칼을 빼어 들고서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시위대는 잠깐 그 거대한 행진을 멈추었으나, 기마병 중 누군가가 군중 속 노인에게 총을 쏘자, 망치와도 같은 무거운 함성으로 자신들의 앞길을 막는 것을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앙졸라스가 외쳤다, 바리케이드로! 사람들도 그 말을 따라했다. 바리케이드로! 거리로! 민중들은 환호와 열정을 흩뿌리는 사람들의 열기에 동참에 창문을 열고서 의자와 서랍 따위를 던져 주었다. 포석을 들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나무가 반으로 뽀개지고 둔탁하게 부러지는 소리가 온 사방을 채웠지만 모두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다만 그 소음뿐만이 아니었다. 허공에 노래가 떠돌고 있었다. 민중의 노래가. 삽시간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사람들은 무장한 채 역할을 나누어 그 신성한 자유의 탑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마리로 말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의자를 끌어 내어 부수었다. 도끼로 난간을 부수는 것을 돕고 정부군이 몰려온다고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그것은 일종의 신성한 의식이었다. 내 스스로 시민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의식. 마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 있어 이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서, 자신의 동지들을 돕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고 자신에게도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시가전이 시작되어 곧 비무장한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야 했지만 어쨌거나. 아베쎄의 벗들은 그리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체계를 두고서 전투를 지휘했는데, 첫 번째 공격에서는 국민군과 그나마 비등한 결과를 내며 싸우고 있었다. 바리케이드 위로 밀고 올라오는 군인들을 향해 마리우스가 횃불을 휘두르며 화약통을 들이미는 순간에, 마리는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즈앙은 끌려가 죽었다. 저 멀리서 들리는 총상과 외마디 유언을 남기고. 마리는 주점의 한 가운데 앉아 자신도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엘리엇에게 유언을 남겨 주지 않은 것이 그저 미안하다는 생각과 함께. 저격수와 한때의 소요가 지나간 후 앙졸라스가 사람들을 모았다. 내일이면 아마도 더 많은 수의 군인들이 몰려올 터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바리케이드에서 나갈 사람은 지금 나가라고 선언했다. 아직은 밤이었고, 경계가 그렇게 삼엄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또 덧붙였다. 마리는 자신이 그 말에 해당되는 바가 없으니 그저 앙졸라스의 말을 듣고 주변의 누군가, 가정이 딸려 있거나 나이가 너무 적고 또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마음먹었다.

 

누가 그랬던가.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사람이라고. 바리케이드에는 두려워해야 할 사람들이 가득했다. 슬프게도 정말로 모두가 죽음에 대해 고려했다. 아마도 마지막이 될 밤을 생각하며 사색하거나 술병을 돌려 가며 마시고 있었다. 마리는 그랑테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둘러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으나 곧 쿠르페락의 부름에 고개를 돌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앙졸라스가 찾아.

 

나를?

 

 

쿠르페락은 그녀를 뒷방의 한켠으로 안내했다. 금발에 푸른눈을 가진 천사와도 같은 심판자는 가만히 마리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마리도 마주 인사를 건넸다. 피곤한 기색이 짙게 깔린 앙졸라스가 얼굴을 두어 번 문지르고 나서, 낮게, 그리고 단호하게 한 마디를 했다.

 

 

우리는 너를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앙졸라스의 입이 더 열리기 전에 마리가 바닥을 한번 쿵, 굴렀다. 완연한 거부의 표시였다. 그러자 바리케이드의 수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리의 어깨를 부드럽고도 분명히 꽉 붙잡았다. 마리, 이 바리케이드에서 나가.

 

 

내게도 죽을 권리를 줘.

 

그것은 네가 결정하는 일이지만, 지금 우리가 결정한 것은 너를 내보내기로 한 거야.

 

그럼 내가 결정할 수 있게 해 달란 말이야. 내 목숨에 대해서 스스로...

 

마리.

 

 

앙졸라스가 그녀의 말을 잠깐 잘라냈다. 그리고 그녀와 시선을 맞춘 채 말했다.

 

 

우리는 분명히 죽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들 중 한 명을 살려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거야. 그리고 그게 너인 것 뿐이고.

 

내가 여자라서 그러는 거야?

 

 

마리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또 날 너희들의 질서에서 내쫓는 거야? 내가 뒷방에 처음 들어 왔을 때처럼? 날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는데도, 너희는 정말로...!

 

마리 엘로.

 

 

앙졸라스가 다가섰다. 이 이상의 사제는 그녀의 이름을 단단한 바위처럼 숭배하는 목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마리가 여전히 분노에 잠긴 채로 서 있자 굳은 얼굴로 품을 뒤져 펜 하나를 꺼냈는데, 그것은 어느 날 고향에 다녀온 즈앙이 모두에게 기념할 만한 것을 주고 싶었다며 마련해 왔던 선물이었다. 성물처럼 그것을 손바닥에 얹고서, 앙졸라스는 그것을 마리에게 내밀었다.

 

 

너는 우리의 동지다. 그리고 너는 우리의 이해자야. 그래서 그런 거야.

 

앙졸라스.

 

군복을 입어. 콩브페르, 쿠르페락, 마리를 주점 뒤쪽으로 데려가. 빠져나갈 길이 있을 거다.

 

 

마리는 더 이상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에 펜을 들고서 두 사내의 사이에서 속절없이 거리로 향해야만 했다. 군복을 입은 마리가 등을 돌리고서, 자신을 마지막으로 바래다 준 두 동지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멍하니 서서 저 멀리 화약이 터지는 소리를 듣고만 있는 마리에게 콩브페르가 말했다.

 

 

마리, 네가 나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잊지 않을 거라는 것만 알아 줘.

 

 

그리고 콩브페르 또한 품 속에서 동전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즈앙이 네게 전해 달라고 했어. 켈트의 동전이라고. 그 말을 들은 마리는 즈앙의 외마디 비명을 생각하고서 바닥에 주저앉을 뻔 했다. 즈앙이? 마리의 되물음에 쿠르페락이 답했다.

 

 

우리는 너를 동지로서 살리기로 했다. 어서 이 바리케이드를 나가. 그리고 잊어버리지 마.

 

쿠르페락, 제발.

 

네가 우리의 신뢰와 기억들을 저버리지 않을 것을 굳게 믿어. 어서 가.

 

 

그리고 아주 매정하게도. 야속하게도.

 

 

가지 않으면 쏠 테니 등을 돌려.

 

 

하고, 그녀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내 하숙집에 있는 물건을 정리해 줘. 마리.

 

마지막 인사가 이렇게 되어 미안하다. 내가 빌려 주었던 백과전서는 돌려주지 않아도 좋아.

 

 

하고. 인사를 하는 것 아닌가. 마리는 두 벗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묻어나는 결연한 의지가 자정의 찬 공기를 만나 서리처럼 배어나왔다. 마리는 국민군복을 꽉 움켜쥐었다. 한 번도 흘리지 못했던 새벽의 눈물이 멍울이 풀리듯 뚝뚝 떨어져 나왔다. 그녀는 거리를 달려 나갔다. 커다란 군복이 걸리적거렸지만 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뛰었다. 바스티유 광장의 근처에 도착했을 때 마침내 군복의 자락이 발에 밟혔고 마리는 넘어졌다. 아무도 없는 광장에서 그녀는 달이 녹아내리도록 울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바다가 다 마르도록 눈물을 흘렸다.

 

앙졸라스가 그곳에 있었다. 콩브페르가 그곳에 있었다. 쿠르페락, 졸리, 레에글, 보쉬에, 바오렐, 푀이, 그리고 그랑테르가 그곳에 있었다. 엘리엇은 그곳에 없었다. 마리는 그곳을 기억했다. 적어도 누군가 한 사람은, 누군가 한 사람쯤은 기억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들이 모여 마리에게로 닿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지를 믿었다. 그녀가 좋은 이해자이자 전달자가 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를 내보냈으며, 언젠가는 기어이 마리가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어떤 종류의 응답이라도 내어 놓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또한, 그녀가 그들을 원망하고 증오하며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딱 한 단어를 믿었다. 엘로. 이해자. 그녀가 가진 것들을 믿었고, 스스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믿었다. 그것은 동지에게 응당 내어 줄 수 있는 신뢰 중 가장 단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마리의 이름을 기억했다. 마리가 그곳을 기억하듯이. 그들은 이해자를 굳게 믿었다. 후에 마리도 그렇게 되었듯이.

 

 

3. 만일 신이 있다면

 

마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 창문이 활짝 열린 채로,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엘리엇이 사라진 것이다. 마리는 가만히 자정 지나 이슬에 젖은 몸을 뉘이고 잠깐 울다가, 몰려오는 수마에 굴복하고서 잠을 청했다. 마리가 잠을 깬 것은 엘리엇이 날아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오면서였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엘리엇의 날개깃이 붉은 빛으로 물들어 쨍한 파열음처럼 마리의 눈을 찔러댔다.

 

 

엘리엇.

 

다녀왔수.

 

 

엘리엇은 여상스럽게 말하려고 애썼다. 마리는 살아남아 있는 새를 보고서 그가 바리케이드에 다녀왔음을 알았다. 새는 울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큰 몸을 구겨 넣어 아기처럼 마리의 품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내가 봤수. 다들 어떻게 됐는지 내가 똑똑히 봤다구.

 

 

바보 새, 내가 집에 있으라고 했잖아.

 

당신이 거기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우.

 

 

마리가 엘리엇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푸른 마리의 옷에 피가 얼룩덜룩 묻었지만 마리는 개의치 않았다. 대신 치밀어오르는 격한 무언가를 삼키려 애쓰면서 자신도 새를 꼭 끌어안았다.

 

 

다들,

 

우리는 살아 있구.

 

그래.

 

 

엘리엇이 중얼거렸다. 마리는 그것이 일종의 선고라는 사실을 알았다. 다들 죽었구나. 마리는 문득 허공을 바라보며 1830년의 그 날을 생각했다. 그랑테르가 구석에서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던 나날. 마리는 그가 다시는 그런 일에 자신을 내던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랑테르가 결정한 죽음이 견딜 수 없이 슬펐다. 그것은 그냥 친구의 죽음에서 온 슬픔이 아니었다. 수많은 것들이 뒤엉킨 감정의 실타래에서 가장 눈에 띄게 삐져나온 타래는 분노의 몫이었다. 그럴 거면서. 나를 내보낸 건 도대체 무슨 의미야.

 

 

다들 누워 있었수. 자기들이 매일같이 드나들고 떠들던 술집 바닥에...

 

편안해 보였어?

 

 

엘리엇은 마리의 물음에 고개를 들고 가만히 끄덕였다. 마리는 새가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았다. 죽음이라는 것을 하도 많이 겪었다고 제 입으로 떠들어대면서도 새는 슬퍼했다. 마리의 분노와는 다르게, 엘리엇은 이제 남은 것이 없다고, 허망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리는 새의 텅 빈 동공을 들여다보다가 그 몸뚱아리를 꽉 안았다.

 

 

엘리엇. 어디론가 갈 셈이야?

 

아니, 지금 어디로 가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어서. 아무 데도 안 갈거요.

 

그 애들 시신은.

 

가족들이 멀리 있으니 아직 수습되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말이요, 마리. 나는 할 수가 없어. 나는 새잖수. 그래서 내 손으로 눈 감겨 주지두 못하구, 얼굴을 닦아 주지도 못해. 나는 그 눈들이 나를 보지 않구서 저 멀리 떠나버렸다는 걸. 그냥.

 

 

엘리엇이 서러운 소리를 내며 부리를 딱딱거렸다. 마리는 새의 배가 홀쭉한 것을 알았다. 아마 밤새 자지도 않고 어딘가를 날아다니다 온 것인지 몸에는 화약 냄새와 피 냄새, 파리의 들척지근한 거리의 향이 배어 있었다. 마리는 새가 눈을 감고 끄덕끄덕 졸며 잠으로 빠져드는 것을 보고 있다가, 한 켠에 마련된 횃대에 엘리엇을 올려 주었다.

 

 

잠을 좀 자.

 

어딜 가려구.

 

우리 할 일을 하러 가려고 그래.

 

마리,

 

 

엘리엇이 졸린 눈을 다시 한번 뜨고서 마리에게 물었다. 어디 안 갈거지요?

 

 

여기가 내 집이야. 어디 안 가.

 

그러면 됐수.

 

 

하고서, 새는 겨울잠 자는 짐승들처럼 죽은 듯 가만히 있는 것이다. 마리는 엘리엇의 날개에 묻은 피를 두어 번 닦아내어 주고서, 손에 천과 양동이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붉은 햇살이 춤을 추고 있었다. 정오의 따가움이 거리의 피비린내를 만나 왈츠를 추고 있었다. 학살과 죽음이라는 왈츠를. 마리는 역겨운 냄새가 풍겨 오는 것을 알았다. 어젯밤 죽은 이들의 시체가 풍기는 무無의 향. 생명이 떠나 버린 빈 껍데기가 오로지 육체의 냄새를 풍겨대는 그런 것. 산산이 부숴진 바리케이드를 보았을 때 마리는 주저앉아 부러진 깃대를 끌어안고서 웅크렸다. 눈을 감았다 뜨면 이 모든 것이 꿈처럼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포석과 기둥에 물든 피를 닦고 있었기에 마리 또한 오래 주저앉아 있지는 않았다. 할 일이 있지. 그러나 그것은 결연한 결심이라기보다는 그저 악에 받친 생존 욕구에 가까웠다. 너희들이 날 살렸으니까 할 일을 할게, 그런 것이었다. 마리는 유리창과 가구들이 모두 부숴져, 아주 작은 광장처럼 시신들이 늘어선 곳에 발을 내디뎠다. 꼬마 가브로쉬가 누워 있었다. 아베쎄의 벗들이, 열을 지어 누워 있었다. 마리는 바오렐의 상처 많은 손을 닦아냈다. 콩브페르가 뜬 눈을 감겨 주고 졸르를리의 옷에 묻은 것들을 지우려 애를 썼다. 예리한 날이 꿰뚫은 가슴팍은 얼룩진 피로 물들었고, 총탄이 찢고 지나간 상처들은 채 아물지 못할 것을 아는지 흉물스럽게 벌어져 있었다. 마리는 입을 꾹 다물고서 기어이 그 상처들을 모두 닦아냈다. 살아남은 자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그들도 알았겠지? 마리는 되물으려다 소용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만두었다. 바리케이드가 세워질 때만 해도 그들에게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어 보였는데.

 

마리는 그랑테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유리병 조각과 총탄 자국이 가득한 계단을 올라 뒷방으로 향했다. 아래층에서 국민군들이 몰려와 쑥덕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폴론이라고 불리는 폭도를 처형했다, 여기 누운 자들이 주동자다, 이 바리케이드는 실패했어. 그녀에게 삿대질처럼 쏟아지는 이야기들. 마리는 그 사람들의 말을 감당해야 할 이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훔쳤다. 아직 너희들을 위해 울지 않을래. 하는 마음으로.

 

허나 때로는 결심을 깨뜨려버리는 순간들이 오기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

 

그랑테르가 거기 있었다. 마리는 눈을 감고 벽에 머리를 기댄 그가 총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마디 말이라도, 농담이라도 꺼내 줄 수 있도록 살아 있었으면 좋으련만. 마리는 오랜 시간 자신과 함께한 벗의 가까이 다가갔다. 바로 옆에는 여덟 발의 총탄을 맞은 앙졸라스가, 혁명의 붉은 기를 쥐고서 예수처럼 못박힌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마리는 그랑테르와 앙졸라스가 잡고 있는 손을 보고서, 그랑테르에게로 다가가, 나머지 한 손을 붙잡고서. 어제 자정을 지난 새벽에서 그랬듯 울었다. 수많은 원망이 쏟아져 나와 그녀의 가슴을 쾅쾅 때려대고 있었다. 왜 그랬어, 나한테 그러지 말았어야지, 너는 행복해? 그랑테르의 표정이 전에 없이 편안해 보였기에, 마리는 약이 올랐다. 악에 받쳐 그랑테르에게 욕을 해댔다. 빌어먹을 자식, 개 같은 놈, 네가 아니면 누가 내 스승이냐고 했잖아. 멍청한 새끼. 그리고 그가 끝내 자신의 태양 옆에서 스러지기로 했다는 결정의 용감함에 대해, 또 울었다. 이러기 위해서 죽었을까? 내가 우는 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니? 마리는 그랑테르에게 묻고 싶었다. 허나 아베쎄의 벗들 모두가, 후에 만일 자신들의 동지 마리 엘로가 살아남는다면 울 것은 염두에 두었으나 증오를 안겨 주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랬다. 마리도 알고 있었다. 마리도 그 사실을 이해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였으니까. 이제 세상에 손꼽힐 정도로 남은 존재였다. 아베쎄의 벗들이 어떤 존재들이였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 마리는 그들이 왜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조국에게 바치기로 했고, 왜 항복하여 구차한 목숨을 유지하기보다는 그저 꽃잎처럼 스러지기를 택했는지 이해했다. 그러나,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르다. 마리는 그들을 이해했으나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들을 기꺼이 알고 이해하고 껴안을 것을 믿고서 바리케이드에서 내보냈던 친구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리는. 그들의 이해자는. 그 잔해 한 가운데서. 심장이 부서져라 가슴을 내리치며 울었다. 원망과 탈력의 울음. 그리고 제게 남은 삶이 있다는 것에 대한 슬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그 모든 것을 다 토해내고자 했으나 감정이 목구멍에 걸려 넘어오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마리는 헛구역질을 하다가 다시 울었다. 소화시키려면 아주 오래오래 걸릴 것들이 그녀에게 남아 있었다. 1832년의 바리케이드에서. 이미 다 부서지고 찢겨진 것들만 남은 그 곳에서.

 

 


4. 다시, 파리.

1. 삶과 죽음이 교차할 때.

 

삶은 흘러간다.

 

매정한 말일지 몰라도 살아 있는 한 시간은 끝없이 흘러간다. 마리는 일자리를 잃었다. 카페 뮈쟁은 곧 도시 재정비 사업을 위해 철거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상관없었다. 사실 그녀는 아주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물론 그 ‘바쁨’이라는 것은 생기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마리는 어릴 적 골목에서 보았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생존에 악다구니 치던 사람들. 비록 그것은 빵과 먹을 것에 대한 것이었고, 지금 그녀는 잔인하디 잔인한 생의 한 가운데 던져져 있었지만. 마리는 그것을 생각했다. 바쁘게 돌아다니던 사람들, 파리의 한 가운데 세워졌던 바리케이드에 대해 잊은 것처럼 구는 이들. 그러나 그녀만은 잊지 않은 사람이었다. 마리는 아홉 명 친구들의 집을 들러 그들의 짐을 정리해 고향으로 보내고, 유언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대로 행하기 위한 도움들을 구했다. 앙졸라스의 부모님이 빠르게 아들의 흔적을 지워내어 돌아갔을 때 마리에게 남은 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쥐어 준 펜이었다. 콩브페르의 백과전서를 비롯한 책은 마리의 방 한 켠에 쌓이게 되었다. 쿠르페락이 하숙집에 남겨 두었던 시계와 지팡이들은 이리저리 나뉘어져 그의 고향으로, 그리고 마리와 쿠르페락이 알던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경찰이 푀이에 대해 물으러 왔을 때 마리는 그녀가 아는 한의 정보를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푀이는 무연고자들을 위한 묘지에 묻혀야 했다. 청년 졸리의 의학 서적들은 파리 대학에 기부되었다. 몇 권은 마리와 엘리엇을 위해 남겨졌다. 바오렐은 춤 교본을 마리에게 남겼다. 보쉬에는 불운이 드디어 자신을 떠나게 된 사실에 대해 기뻐하는 시 한 편을 자신의 책상에 남겨 주었는데, 마리는 그 시를 자신이 가장 아끼는 책 앞에 끼워 두고서 때때로 들여다보았다. 즈앙, 그리고 즈앙은 친절하게도 잘 말린 수레국화 꽃이 끼워진 희랍어 사전을 그녀에게 남겼다. 세상이 보기에는 아주 사소하고 별 것 아닌 흔적들만이 남았다. 책 한 켠에 쓰여진 서명이나, 지팡이에 새겨진 문구 같은 것들. 그것들을 빼면 이제 그 물건들은 누군가에게 돌아가거나 버려지곤 했다. 그리고 그랑테르, 그랑테르는 어딘가에 숨겨 두었던 돈뭉치들과 편지 하나를 남겼다. 마리는 차마 그 편지를 열어 볼 수 없어 구석 어딘가에 쑤셔넣어 놓고서 얼마간 잊고 지내기로, 그렇게 결정했다. 그의 방에는 몇 가지 악보들과 그림들, 그리고 살림살이들만이 있었다. 옷가지들을 가지고 나가 파리 교외에서 태우면서 마리는 매캐한 연기에 눈물을 조금 흘렸다. 그가 늘 입고 다니던 청록색 조끼는 엘리엇이 태우지 말라고 부탁한 덕에 엘리엇의 횃대 한 켠에 남았다. 마리는 종종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그들이 남긴 것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그러면 엘리엇이 다가와 마리를 위로해주고는 했다. 마리와 엘리엇. 사람과 새는 그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마리는 종종 뮈쟁에 드나들던 샌님 하나를 알고 있었다. 뤽상부르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마주친 적도 있었다. 사랑에 빠진 돈 주앙이라고 그랑테르가 말하곤 했었지. 분명 그도 바리케이드에 있었고, 횃불을 들고서 국민군을 협박하는 대담함을 보여 주었다. 그의 이름은 마리우스였고, 시가전 중 사라졌다. 마리는 그가 분명 죽었을 거라 생각했으니 어느 날 아침 뤽상부르에서 아가씨 한 사람과 함께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그를 마주쳤을 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퐁메르시.

 

안녕, 마리 엘로.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와 악수를 청했을 때 마리는 가만히 그 인사를 받아들였다. 괜찮아 보이네. 마리가 말하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내 약혼자 코제트야.

 

안녕하세요. 마드모아젤.

 

 

마리가 고개를 숙이자 아가씨가 약간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친구분이신가요? 하고 물어 오는 그 상냥한 목소리에, 마리는 그냥 지나가다 몇 번 본 사이에요. 하고 답했다. 마리우스는 그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변화 없는 얼굴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약혼자구나.

 

내일 모레, 생 폴 생 루이스 성당에서 곧 결혼해.

 

그래.

 

너도 와 준다면... 좋겠어. 마리.

 

 

마리우스 퐁메르시와 코제트 외프라지. 마리는 청첩장을 받아 들고 눈을 크게 떴다. 결혼하는구나. 마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침 자신들이 뤽상부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날 이후로 처음 진심을 담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축하해. 그 말에 코제트가 마리의 손을 꼭 붙잡으며 기다리고 있겠다는 인사를 건네 주었다. 그들이 마리의 뺨에 입을 맞추고 다시 공원을 산책하기 위해 오솔길로 접어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자, 마리는 가만히 서서 청첩장을 손에 꼭 쥐었다.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용케 살아나 결실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그곳에 자신이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마리는 결혼식에 부디 축복이 깃들기를 기도했다. 앞으로 살아나갈 삶들이 그들에게 조금 더 친절하기를 바라며.

 

눈이 오는 나날들이 돌아왔다. 버텨낸다고 언급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어쩌면 엘리엇은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겨울이 와 거의 모든 흔적들이 지워져가고, 사람들의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져 갈 때쯤 엘리엇은 매일같이 어딘가를 날아다니다 돌아왔다. 한 번은 마리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세상이 담요를 덮어주는 날 나도 어딘가 가려고 한다고. 마리는 엘리엇이 날개를 가진 짐승이기에 어디론가 날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그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마리는 엘리엇이 반복해서 하는 말들을 들었다. 밤이 되면 그 새는 자장가나 기도문처럼, 그런 말들을 읊었다.

 

 

나는 이제 궁금한 것이 없수. 알아 무얼 해.

 

걔네들을 용서하지 못하겠어.

 

나도 그렇수. 그런데 나는 어쩌면 당신보다도 훨씬 더 연약한 존재인가봐. 인간이 아니라 새라서 그럴까.

 

엘리엇. 너는 새 중에 가장 똑똑한 새잖아.

 

예전에 당신이 아는 것하구 이해하는 것하구 다르다고 했을 때는 몰랐었는데, 이젠 알겠수. 똑똑한 건 하등 소용이 없어.

 

 

엘리엇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자 하는 중이었다. 얼마든지 즐겁고 신나게 살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새의 신조는 바리케이드와 함께 무너지고 없었다. 마리는 그 변화를 알고서, 아주 끈질기게 새에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살아 있어. 하고.

 

 

살아 있어 무얼 해.

 

너 꼭...

 

그랑테르 같은 소릴 한다구. 나도 알우. 하지만 정말로 그런 것을 어떡해.

 

화가 나지 않아? 왜 나를 살아남게 한 건지 묻고 싶지 않아?

 

아냐, 나는. 나는 살아남은 게 아니구 도망친 거요. 마리.

 

 

그러고서 새는 대화를 단절하고 잠처럼 보이는 죽음을 연습하고는 했다. 마리는 엘리엇이 언젠가 떠나 버릴 것이라는 말을 반복할 때마다 힘을 주어 말했다. 엘리엇, 어디 가지 않기로 했잖아. 그러면서 새에게 그날 아침 했던 약속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엘리엇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리가 외프라지 양과 퐁메르시 씨의 청첩장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늘상 그렇듯 새벽쯤 집으로 들어와 자신의 새가 괜찮은 지 알아보려 그 이름을 불렀을 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던 저녁이 있었다. 방 안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으나, 생명의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엘리엇이 앉아 있어야 할 횃대도 조끼 하나만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새는 마리에게 글 하나를 남기고서 떠나간 것이다. 편지는 고이 접혀져, 마리와 엘리엇이 밤을 넘겨가며 이야기를 하곤 했던 책상의 위에 놓여져 있었다. 마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비뚤비뚤한 엘리엇의 서명을 보고서야 정말로 자신의 친구가 어디론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작은 발톱 자국과 잉크 흘린 것들이 점점이 남아 있는 종이. 얼마 전 다 닳은 발톱으로 돌아왔던 엘리엇을 알았기에 마리는 새가 오래 전부터 그 글을 숙고하며 써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 위에 엘리엇이 써 놓은 것은 마리와의 생활이 얼마나 즐거웠느냐에 대한 고해성사, 그랬다. 고해성사였다. 당신은 나를 이해할테지요, 그렇지요? 우리는 연주자와 무용수처럼 달랐지만, 당신은 나의 친구니까. 나를 이해하지요, 마리? 엘리엇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나는 떠납니다. 나를 어디에서 찾느냐고 묻는다면 나폴레옹의 동상을 찾아 오라구 말하겠어요. 그리고 새는 한 치의 떨림도 없는 필체로 그렇게 써 놓았다. 늘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친구 엘리엇이.

 

그 즈음 새는 탑 아래 앉아 있었다. 죽음을 기다리며. 마리는 외투를 집어 입고 자신의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눈치채고서 시린 손을 불며 거리를 뛰어나갔다. 새벽녘 어둠이 조금씩 물러나는 그 거리에서, 센느 강이 새로운 햇빛으로 빛나는 순간에, 마리는 광장에 다다랐다. 눈발이 날려 그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찬란한 도시, 죽음의 도시 파리를 비추는 동틀녘의 눈부심 아래서, 새는 날개를 접고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엘리엇.

 

 

마리가 불러 보아도 대답은 없었다. 새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엘리엇, 이 바보 새야.

 

 

다시 한 번 불러 보아도, 새는 끄덕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리는 마침내 새가 고된 삶을 마무리짓고서 자신이 있었던 곳으로 돌아갔음을 알았다. 그것은 엘리엇의 결정이었다.

 

 

뭐가 그리 급했어.

 

 

겨울 바람이 마리의 손마디를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의 몸뚱아리를 끌어안았다. 서서히 쌓이기 시작한 눈이 그녀의 옷을 젖게 만들고 있었지만 마리는 그것 또한 상관하지 않았다. 버석거리는 깃털 사이로 뼈마디가 부딪쳐 와 마리의 품을 찔러대고 있었다.

 

 

뭐가 그리 급해서,

 

 

뒷 말은 기어이 나오지 못한 채. 흰 깃털 위로 눈물방울이 굴러 떨어지고. 마리는 친구를 잃었다. 엘리엇이 떠났다. 더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붙잡으려 애를 썼지만 이 고집 센 새는 그저 자신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일. 마리의 가슴이 찢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아니, 아마 모두가 그것이 얼마나 아픈 일인지 몰랐다. 죽도록 아프고 또 괴로운 일이었으니. 마리는 엘리엇의 다 닳은 발톱과 버스러지는 깃털을 쓰다듬으며 오래오래 울었다. 저 멀리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왔는데, 마리는 문득 오늘이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결혼식 날이었음을 깨달았다. 날 고르는 것 한번 기가 막힌다. 엘리엇. 마리는 만일 새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면, 자신의 장례식이 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하다는 농담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엘리엇은 정말로 그러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영혼이 떠난 몸은 가볍고 가벼웠다. 종종 함께 파리를 산책하던 때 자신이 안고 다니던 새의 무게가 아니어서 마리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갈 거면 좋게 갈 것이지. 굶고 다니고, 추운 날 새벽에. 그러나 그것 또한 엘리엇의 선택이었다. 창공을 날던 날개를 접기로 한 것. 그리고 그 날, 그 겨울날 눈 오는 탑 아래서 눈을 감기로 한 것. 새는 지혜의 상징처럼 굴었고 유머를 사랑했으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일에 사족을 못 쓰는 짐승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눈을 감고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내린 것이었다. 성당의 종소리가 세 번째 울릴 때 즈음에 마리는 엘리엇을 안고 일어났다. 너도 내게 살아남음에 대한 몫을 지우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접힌 날개에 대한 애도를 가지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마지막 안식을 돌보아 주기 위해 일어섰다.

 

 

2. 침묵.

 

마리는 오래도록 새를 원망할 것을 다짐했으나 자신이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원망이라는 것이 자신에게 별 소용이 없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기에 그랬다. 새는 고운 천에 싸여져 이틀 정도 마리의 방 안에 있었고, 마리는 엘리엇을 위해 작은 땅이 있는 집 하나를 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 질베르 노인이 자신에게 쥐여주었던 금화 주머니를 풀어 생 폴 생 루이스 성당과 보쥬 광장 가까이에 정원이 딸린 작은 집 하나를 샀다. 정원 가장 양지바른 곳에 엘리엇을 묻어 주고, 마리는 찬 겨울 흙을 몇 번 도닥이고서 일어섰다. 홀로 남아, 홀로 이 집에. 늘 익숙한 파리에서 낯선 자신으로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리는 그 날 늘상 엘리엇의 횃대에 걸려 있던 그랑테르의 조끼를 끌어안고서 잠을 청했다. 꿈에서라도 그에게 화를 낼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야속하게도 그랑테르는 한 번도 마리에게 찾아오지 않기로 결심했는지 얼굴을 비추지는 않았다. 죽은 이들은 마리에게 위로를 건네지도,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 마리는 끝없는 거리를 달리는 악몽을 꾸었으며 또 자신의 손이 붉은 피로 뒤덮이는 광경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기도 했다. 종종 길고 긴 산책을 나가 혼이 빠진 사람처럼 파리를 걷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 즈음의 마리는 육 개월 이상 침묵의 기간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는데, 오래도록 수많은 말을 나누던 친구들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녀가 대화를 시작할만한 기운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마리의 산책이 유독 길어지던 여름날, 마리는 그 즈음 성행하기 시작하던 몽마르트르 언덕의 주점들과 화가들의 카페 쪽을 돌아보고 오던 참이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친 마리는 집 근처의 광장에 다다라 조금 쉬기로 마음먹었다. 벤치 한 켠에 앉아 붉은 벽돌집들이 노을에 비춰져 더욱 붉게 타오르는 광경은 어딘지 모르게 평안했기에. 마리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감상할 수 있었다. 침묵은 오래도록 유지됐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는.

 

 

마드모아젤, 여기 앉아도 될까요?

 

 

그는 서른 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신사였다. 부유한 집안 자식이거나 그 스스로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는 차림을 하고서, 예의 바른 태도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리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 그가 벤치 옆의 빈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했다.

 

 

종종 산책 나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 사십니까?

 

네. 근처에 집이 있어요.

 

 

마리는 오래 목소리를 내지 않아 약간 어색한 것 같은 느낌으로 짧게 대답하고서 붉은 벽돌 집을 바라보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신사는 그녀가 담고 있는 이야기가 궁금한 듯 싶었다. 그래서 마리의 무관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실례지만 무슨 일을 하시죠?

 

왜 물으시는 건지 여쭈어도 될까요?

 

저는 글 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인지라,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요.

 

제 이야기는 별 것이 없어서 들려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사람들은 좋은 결말을 보통 더 좋아하지 않나요?

 

 

그 말에 신사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며 부정을 표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벌써 결말을 내셨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으니까요.

 

죽음을 말하는 거라면 동의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산책 중인 살아있는 사람 아닌가 해서.

 

 

신사는 나름의 유머를 담아 말하려고 한 것 같았다. 마리는 그 말의 저의에서 신사가 삶에 대해 어찌 생각하고 있는 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은 살아 있고, 당신의 이야기가 나는 궁금하다. 마리는 무언가에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 하면 그랑테르와 아베쎄의 벗들이 그러했기 때문에, 엘리엇과 가브로쉬를 비롯한 이들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래서 마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신사에게 다시 물었다.

 

 

살아 있는 건 무슨 의미를 주나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가 희망을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숨쉬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하시려는 건가요?

 

그럼요. 의미란 것은 중요합니다. 인류가 존재한다는 데에 매일같이 감사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 스스로가 가진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야하지 않을까요. 저는 이 거대한 도시가 어떻게 굴러가는 지 부분을 보고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들이 모여 전체가 된다는 것 또한 이해하고 있지요. 한 사람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줍니다. 결국 개인에서부터 도시가 시작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우리의 삶이 희망이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죽은 이들도 도시의 부분이자 전체라 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신사는 그 즈음에 잠깐 생각에 잠기는 것 같았다. 마리는 그가 말하는 말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덧붙인 문장들에는 기이한 끌림을 느꼈다. 개인에서부터 전체가 시작된다는 것. 마리는 전체를 위해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던 시절을 추억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제 다 끝난 이야기인데. 싶은 생각에서. 신사는 마리의 얼굴을 두어 번 살피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얼마 전에 저는 수많은 생명의 끝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마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에 잠기고 싶은 이유가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파리는 거대합니다. 프랑스는 그보다 더 거대하죠. 세상은 얼마나 더 크겠습니까. 한낱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 안에 작아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일 테지요. 죽음이라는 것이 구원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작은 존재를 너무 정확히 인식해서 그런 것일 겁니다. 죽는다는 것은 한 인간 생의 끝이지요. 그렇지만, 제가 말한 바와 같이. 도시는 개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촛불과 같은 영감을 밝혀 준다면, 그래서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럼, 죽은 이들도 도시의 한 부분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지요.

 

제가 아는 사람과 비슷한 소리를 하시네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리는 신사를 보았다.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말들이었다. 익숙하고, 또 친근한 것들. 마리는 문득 자신의 이름이 이해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스스로 지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온전히, 홀로 지었는가? 마리는 그 한 단어에 담긴 것들을 떠올렸다. 이해자의 포석을 놓아 준 것은 질베르 노인이었다. 그녀가 이해자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해주고 기꺼이 세상으로 같이 나가자고 한 이는 그랑테르였다. 그녀를 자기 세상의 신이라고 부른 이는 엘리엇, 마리의 새 이름을 위해 기꺼이 희랍어를 읽어 준 사람은 즈앙이었고, 자신이 결정한 것에 기꺼이 박수를 보내어 주던 콩브페르가 있었다. 아베쎄의 벗들은 그 이름을 불렀다. 마리는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삶을 살아가면서, 혹은 일상을 지내면서 수많은 사소한 요소들이 스쳐가는데 그 모든 것의 짐을 질 필요가 있을까? 예를 들면 흰비둘기를 보면서 엘리엇을 생각하는 것, 저 멀리 울리는 노트르담의 종소리를 들으며 쿠르페락과 논쟁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 같은 일들 말이다. 마리는 이름 하나에만 담긴 거대한 인연의 그물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마리는 스스로의 이름을 불러 본 지 퍽 오래 되었던 터였다. 마리는 자신이 홀로 살아남은 것에 있어서 큰 책임을 느끼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그 누가 친구들의 죽음 앞에서 책임을 짊어지지 않을 수가 있으랴. 그녀는 그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마리는 그저 사람일 뿐이었다. 대단하다기 보다는 그냥 살아 있는 사람의 존재였다. 어쩌면 그녀는 한켠으로 잊으려 노력하다가 전부 잊어 버릴까 두려웠던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를 제외하면 또 다른 이해자가 있을까?

 

 

하지만, 무슈. 죽음을 너무 오래 짊어 지면 안 되겠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누군가의 죽음에 영향을 받는 일은 있겠지만 말이에요. 우리가 거기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는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요. 동의합니다.

 

 

신사는 마리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코트 왼쪽을 톡톡 쳤다. 장신구가 예쁘군요. 마리는 문득 자신의 외투에 올빼미 장신구가 달려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생각납니다. 신사가 말을 꺼내자 마리 또한 가볍게 웃었다.

 

 

지혜의 상징 같은 건 아니지만요.

 

밤을 지키는 파수꾼이기도 하고.

 

제게 이 장신구를 주신 분은 이 친구가 밤이고 낮이고 눈을 뜨고 저를 지켜봐 줄 거라고 말씀하셨었는데.

 

마드모아젤의 수호 성인 같은 느낌이 듭니다.

 

 

마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두 개의 보석이 박힌 올빼미 브로치가 그녀의 왼쪽 심장 위에 달려 있었고, 신사는 그것을 가리키며 당신 또한 지혜로운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마리는 신사의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것도 좋지만, 저를 이해자라고 불러 주세요.

 

이해자요?

 

네, 나는 이해자로 살고 싶어 내 이름을 새로 지었습니다. 마리 엘로에요.

 

그것 참.

 

 

그리고 신사는 마리가 내민 손을 가볍게 잡아 흔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제 이름은, 때마침 골목에서 들려 오는 고함 소리에 마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저런, 하고 신사가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일어섰다.

 

 

저희 집 쪽인 것 같은데요.

 

가 보셔야겠네요.

 

대화 즐거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즐거웠습니다.

 

 

신사는 중절모를 살짝 올려 마지막으로 예를 갖춘 후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마리는 잠깐 자리에 앉아 신사와의 대화를 복기했다. 도시와 개인, 나와 너, 친구들, 역사, 그리고 이야기. 일기를 쓰기 시작한지 일 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써 본 적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는 옛날의 자신이 어떠했는지 문득 돌아보고 싶어졌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3. 해가 뜨고 있단다.

 

그 날 새벽은 마리에게 중요한 날이었다. 마리는 일 년이 넘게 내버려두었던 친구들의 짐이 가득한 방에 들어가 자신의 옛 일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른이 된 이가 아이 시절의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것들을 재확인하고자 하는 행동과도 비슷했는데, 마리는 처음 파리에 올라왔을 때부터 시작할 참이었다. 들쑥날쑥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어떤 시기를 거치고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랑테르와 파리에 처음 올라와 도시를 누비고 다니던 때의 한껏 고양된 글은 그녀를 남몰래 웃음짓게 했다. 센느 강변에서 그랑테르를 끌고 엘리엇과 함께 소풍을 나갔던 날의 일도 있었다. 그녀가 뮈쟁 뒷방에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전, 수많은 분노와 짜증, 그리고 나름대로의 생각에 대해 정리해 놓은 뒤죽박죽인 노트도 거기에 있었다. 콩브페르와의 대화, 마리가 깨달은 것들과 즈앙의 친절함, 아베쎄의 추억들도 거기에 있었다. 마리는 처음으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날의 일기를 상세히 읽다가 자신이 생각보다 가르치는 일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곤한 날 자신의 농담에 웃던 앙졸라스의 웃음, 쿠르페락의 넉살과 함께 했던 멋진 저녁 식사, 바오렐의 힘자랑에 대거리를 하던 나날들, 걱정과 함께 졸르를리가 자신의 감기를 보아 주러 왔던 때도 있었다. 보쉬에의 불운에 맞서 보자고 온갖 미신을 동원했던 날도, 푀이의 저녁 근무를 위한 도시락을 건네어 주던 때 푀이가 들려주었던 감사의 인사도 그 곳에 적혀 있었다. 마리는 꾸준히, 꾸준히 자신의 행적을 기록해 온 것에 대한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어쩌면 다시 떠올리기 위해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을지도 모르는 그 소중한 것들. 마리는 그랑테르가 사다 주었던 종이와 향이 아직 남아 있는지 보기 위해 상자 안을 뒤졌고, 그것들을 꺼내 와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새벽이 지나가고 있었다. 마리는 새벽의 아이였다. 달을 보며 바다를 꿈꾸곤 했었다. 마리는 그 시절의 자신에게 바다보다 더 멋진 것들을 찾을 테니 더 일찍 그곳을 벗어나라고 조언해 주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허나 지금의 자신을 보라. 마리는 창문으로 들이치는 달빛을 보며 촛불을 켰다. 그랑테르가 사다 주었던 향을 하나 피웠다. 방 한 켠 덩그러니 놓인 횃대에 눈길 한번을 보내고, 그녀는 글을 쓰기 위해 펜을 잡고 잉크병을 열었다.

 

무어라고 쓸까.

 

마리는 잠깐 고민했다. 텅 빈 종이에 무언가 괜찮은 것을 적어야 한다는 일종의 압박감이 왔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마리는 옅은 크림색의 종이 위에 펜촉을 대고 단숨에 써내려갔다.

 

‘나는 이해자다.’

 

잡아끌지 않아도 다음 문장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그들을 이해하지만, 용서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썼다. 마리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 자신이 쓴 문장을 읽어보았다. 소리내어서. 사실을 명확하게 하듯이 힘을 주어 읽었다. 나는 이해자다, 그들을 이해하지만, 용서하지는 못했다. 고. 마리는 적어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로 그러했다. 때때로 떠올릴 때 불 같은 배신감과 일종의 미움이 솟구칠 정도로 그들을 이해했다. 그것은 마리가 이해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새벽 달빛 아래서 마리는 천천히 자신의 감정에 대한 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 긴 밤이 그녀의 곁에서 지키고 서 있었다.

 

글을 쓰던 마리는 잠시 졸음에 빠졌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익숙한 술냄새가 풍겨왔고 마리는 그것이 그랑테르임을 알았다. 마리는 자신이 일종의 환상을 보고 있음을 눈치챘고, 얼마든지 그랑테르를 때려도 되겠다는 생각에 우선 소매를 걷어올리려는 준비를 했다. 물론 저 멀리서 그랑테르가 팔을 벌린 채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알았을 때, 마리는 가만히 그 포옹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랑테르는 안녕, 이라거나 잘 지냈나, 같은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냥 마리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이고 웃어 보일 뿐이었다.

 

 

좋으니?

 

 

마리의 물음에 그랑테르는 고개를 저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널 많이 불러댔는데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저런, 못 들었나보지. 주정뱅이란 원래 그러니까.

 

너는 죽고 나서도 주정뱅이인가보구나.

 

 

그 말에 그랑테르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네 꿈속이니까. 네가 기억하는 나인 거지. 마리는 성큼 한 발자국 다가가 그랑테르의 머리칼을 잠깐 쓰다듬었다. 검은 더벅머리. 그랑테르가 가볍게 웃음지었다.

 

 

잊어버리지 않는 게 다행이지 뭔가.

 

네가 널 어떻게 잊어버려.

 

알아, 알아. 농담이야. 차라리 잊는 게 낫지 않겠어?

 

 

마리는 잠깐 꿈 속 그랑테르의 얼굴을 보았다. 늘 그랬던것처럼 초탈한 웃음을 짓고, 약간 술기운이 오른 그 얼굴.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어.

 

그럼 기억하면 되는거지. 아닌가?

 

너는.

 

마리, 내가 널 찾아온 건, 너도 나를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 알아 둬.

 

그랑테르.

 

 

그랑테르가 눈을 깜박여 윙크를 한번 했다. 그는 마리가 자신의 무덤에 찾아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아아, 이 얼마나 자비로운가! 그 말을 듣고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마리는 손을 크게 휘둘러 생전 그랬던 것처럼 그랑테르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랑테르가 아야, 하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 다시 낄낄댔다.

 

 

어이, 여전한걸.

 

막상 보니까 꺼지라고도 못 하겠어서 약이 올라.

 

괜찮아. 나는 네가 잊는다고 해도 원망은 안 하지만, 뭐, 네가 잊을 수 없다니까 말해 두는 건데. 기억하는 건 의외로 쉬워.

 

 

그 말을 마치고서 그랑테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리의 두 손을 모아 꼭 붙잡고서 웃어 주었다. 네 은사이자 악우가 전하는 말이야. 마리는 그랑테르의 얼굴을 보다 북받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못난이처럼 보인다며 다시 약올리는 그랑테르 덕에 마리는 얼굴을 가리지도 않고 그랑테르의 등을 마음껏 때리며 울 수 있었다. 너무한다고, 네가 그립다고, 그렇게도 말했다. 마리가 몇 번 더 그의 팔뚝을 때리고 나서야 그랑테르는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봐, 마리.

 

 

왜.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

 

해가 뜨고 있으니까 이제 일어나. 마리 엘로.

 

잠깐만, 그랑테르. 잠깐만...

 

 

그리고서 그랑테르는 마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포옹한 뒤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 아닌가. 용서하지 못한다고 죄는 아니야. 라고.

 

마리는 그렇게 꿈에서 깨어났다.

 

그랑테르의 말처럼, 정말로, 정말로 저 창 밖에는 해가 뜨고 있었다. 마리는 뺨에 붙으려 하는 종이를 떼어내고서 고개를 들었다. 향은 다 타 재가 되었고 새벽은 물러나고 있었다. 마리는 그랑테르가 쓰다듬었던 머리를 한번 매만지고서, 외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센느 강변으로.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강은 저 너머 떠오르는 붉은 해를 품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물결과 온기를 담은 햇살. 마치 새로운 해를 본 것처럼 낯설은 그 빛. 마리는 눈을 두어번 깜박여 남아 있던 눈물을 털어냈다. 이러려고 날 부른 거야? 마리는 물었다. 대답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마리는 새로운 해를 저주했던 그 때의 그랑테르를 떠올렸다. 3년 전의 그랑테르. 그 때 옆에 있었던 것은 자신이었다. 마리는 왜인지 모르게, 이번에는 그랑테르가 자신의 곁에 있어 주고자 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그랑테르의 무덤에 발길을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잠깐 미안함을 느꼈다가, 다시 결심으로 바뀐 감정을 손 안에 꼭 쥐었다. 나를 부르러 왔구나.

 

마리는 그 날 오래도록 해를 보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과 결심이 그녀를 따라 왔다. 일기를 계속해서 써야 하겠다는 것과,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교실을 열어야겠다는 것. 그리고 친구들의 무덤을 방문해야겠다는 것. 그렇다고 마리가 그들을 용서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언젠가는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러나 그녀는 그들을 이해했다. 파리에 완연한 해가 떠올랐을 때. 마리는 잠시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살아낼 것이었다. 마리는 살아 남은 이해자로서의 몫을 다하는 것을 생각했다. 오래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처럼,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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