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terflies in my stomach.
루스벤, 이안테, 그리고 존 폴리도리.
Come on, oh, let me take you there.
Let me take you there.
-Led Zeppelin, Kashmir.
런던의 새벽이 희부옇다. 저기 저 멀리 다가오는 달이 손짓한다. 여기 영원히 머물자. 영원히. 나와 은빛 춤을 추며 행복하자. 내가 너를 다정히 안아 줄 터이니. 나와 함께 여기 머물자. 안개와 구름 속에.
나의 이안테.
손짓한다. 아름다워라. 루스벤. 뱀파이어, 피조물. 그리고 사랑. 존은 그 손짓을 보고 서 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루스벤은 기다린다. 이안테가 자신이 뻗은 손을 붙잡아 줄 것을 알고 있기에. 눈가가 새로운 눈물로 젖기 직전에 존은 그 손을 붙잡는다. 루스벤이 손등을 감싸 들고서, 입술을, 가벼이. 나비 날갯짓만큼 가벼이 올려 두었다 내려놓는다.
안녕.
안녕.
인사가 오간다. 존이 웃는다. 아니, 이안테가 웃는다. 그가 웃으면 루스벤도 따라 웃음짓는다. 고개 들어 자신의 사랑을 마주하는 그 얼굴을 보라. 창백함 속 피어나는 분홍빛 애정. 들러붙은 새벽 한기를 몰아내는 미소. 존은 현기증에 비틀거린다. 루스벤이 그를 느리고 단단한 손길로 붙잡는다.
좀 앉지 그래. 존. 그러다 쓰러지겠어.
이안테는 루스벤의 품 안으로 감싸 안아진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을 내맡긴 채 안겨든다. 루스벤은 자신의 사랑을 안고서 그를 소파 위에 뉘인다. 길게 늘어진 몸은 작은 숨을 쉰다. 마치 자신이 헐떡이는 것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양. 그래서 루스벤은 기꺼이 제 무릎 위에 그 머리를 올리고, 다정한 손길로 뺨을 감싼다. 나의 이안테. 존은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서 루스벤을 시선 안에 둔 채 말을 흘려낸다.
루스벤.
그래. 나야.
문득. 늘어진 몸에서.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던 그 몸 안에서 작은 움직임이 맥동하는 것을 존은 눈치챈다. 무언가 움직이고 있어. 존은 손을 들어 가슴 위에 얹는다. 루스벤은 그 손이 한참 동안 심장께에 머물다가,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몸짓은 많은 것을 말한다. 존이 배 위에 손을 얹자 루스벤은 눈을 깜빡인다. 뺨에 댄 손바닥에 작은 웃음소리가 퍼진다. 이안테가 웃는다.
뱃속에 나비들이 있는 것 같아.
나비들이 날갯짓을 하는 것 같아?
존이 고개를 끄덕인다. 가득 찼어. 이제 이안테가 고백한다.
작은 날개들이, 나를 간질여대는 것 같아. 부드럽게, 상냥하게...
너무 간지러운 것 같으면 한두 마리 잡아줄까?
루스벤의 손이 존의 배 위에 얹어진다. 존은 그 실없는 말에 웃는다. 새벽이 웃음의 시간이었던 때가 언제이던가. 존이 웃으면 루스벤도 웃는다. 서늘한 손가락들이 배 위를 더듬어내렸다가 거둬진다. 그 손길에 존은 숨을 토해낸다. 그토록 차가운 손이 닿았건만. 내내 품고 있던 한기들은 숨 한번에 뱉어내지고, 이제는 나비 날갯짓이 그를 가득 채운다. 그것은 떨림이다. 그것은 심장이 조심스레 움직이는, 들키고 싶지 않으나 어떤 경우에는 기꺼이 들키고 싶은 비밀인지라. 존은 고개를 돌려 여전히 제 뺨을 감싼 그 다정한 손에 입을 맞춘다.
괜찮아.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어.
그럼, 나 때문에 나비들이 날갯짓을 하는 건가?
루스벤이 고개를 기울인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러나 무겁지 않은 투로. 미소가 올라앉은 얼굴로 그가 존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린다. 이안테와 루스벤은 다시 한번, 같은 순간에 웃음소리를 흘려낸다. 그 작은 웃음들 또한 나비 날갯짓처럼 이 새벽을 채우고 있을 터이다.
그럴거야.
그건 너무 확실하지 않은 대답인걸.
확실하지 않은 질문을 한 건 너야. 루스벤.
아, 이안테.
웃음과 함께 길고 흰 손가락들이 존의 눈을 덮는다. 눈이 가려져도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다른 손 한 쪽이 자신을 여전히 감싸고 있다는 사실이리라. 루스벤은 조심스레 그 손을 올려 땀에 젖은 존의 머리칼들을 쓸어넘긴다. 존은 여전히 루스벤을 보고 있다. 이안테의 고백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비들이 내 뱃속에 있는 것 같아. 루스벤은 그 말을 들었다. 창백한 얼굴 속 피어나는 작은 애정들. 루스벤의 차례다. 그가 무언가를 말한다.
사랑은 나비와도 같다던데.
일순, 무언가 존을 스쳐 지나간다. 오랜 수심에 짓눌린 눈매가 천천히 되살아난다. 존은 눈을 감는다. 루스벤이 손을 내려 다시, 존의 배 위에 얹었을 때. 존은 루스벤의 손을 붙잡는다. 존은 그 사랑스럽고도 엄숙한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에, 뺨에, 잠시 두었다가, 목덜미에, 숨길 위에 얹는다. 루스벤이 눈을 깜빡인다. 존이 그러했듯. 그저 놓아 두는 것이다.
사랑은 자유로운 새와 같은 게 아니고?
존이 되묻는다. 천천히, 물 속에 가라앉는 닻처럼. 존의 눈꺼풀이 온전히 내려갔다. 그 눈가에 무엇이 깃드는지 루스벤은 안다. 여상스러운 말의 탈을 쓴 채 튀어나온 문장에는 흉터가 배어 있다. 사랑은 자유로운 새와 같아서. 아무리 애써도 길들일 수 없네. 붉은 매혹이 그를 다치게 했었더라. 누구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만큼 선명한 흉터들이 말 속에 묻어 있기에. 루스벤은 그저 제 손으로 그 숨길을 붙잡지 않겠다는 듯 떼어낼 뿐이었다. 존은 몸을 떤다. 잠시 그의 정신은 불결한 환상 속을 헤메이던 때를 떠올리고, 바이런의 얼굴이, 그 웃음이 스쳐 지나간다. 루스벤이 고개를 숙인다. 쉬이.
이안테.
고작 자유로운 새가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거야. 하지만 만일, 사랑이 정말 자유로운 새라면, 루스벤. 만일 그렇다면...
존.
그 이름 속에는 무언의 몸짓이 곁들여진다. 루스벤의 입술이, 다시 한번. 이번에는 존의 이마 위에 가볍게 올라앉았다 떨어진다. 나비 날갯짓처럼.
새도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어. 존.
작은 새일지라도?
만일 어떤 사람이 새의 깃털에 베일 만큼 연약하다면, 그만큼 무르고, 그만큼 여리다면.
존이 눈을 뜬다. 루스벤의 눈동자가 그를 보고 있다. 새벽, 흐리고 아름다운 은빛을 담은 눈이.
그렇다면, 새도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지.
......
고작 새가 당신을 다치게 한 게 아니야. 만일 사랑이 자유로운 새와 같다면, 그 사랑은 당신을 다치게 할 이유가 충분했던거야.
루스벤은 한 손으로 존을 가볍게 토닥인다. 나의 이안테. 나의 아름다운 이안테. 손끝으로 그를 달래며, 다시 젖어드는 눈가를 닦아낸다. 존은 고개를 돌린다. 루스벤의 눈은 그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새와 같은 사랑을. 갈망하여도 잡을 수 없는 것을. 그래서 그는 두려워한다. 이안테가, 그리고 존이. 그들은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림자는 본디 끈질기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존이 몸을 일으킨다. 그는 이제 따라붙은 그림자와 마주한다. 그것은 루스벤이며, 또한 거울 속의 자신이며. 조지 고든 바이런이다. 그가 한때 사랑했던 얼굴이다. 루스벤은 그 눈을 바라본다. 떨리는 눈동자를 올곧게 마주한다. 그림자는 자신이 그림자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존, 네가 나를 만들어냈고.
루스벤이 팔을 뻗어 존을 감싸안는다. 그 어떤 저항도 따라붙지 않는다. 지친 몸에게 내어 줄 수 있는 것이 한기 가득한 몸뚱이인지라. 루스벤도 눈을 감는다.
너를 사랑하니까.
....
침묵. 그리고 긴 침묵. 피조물, 그리고 사랑. 루스벤이, 그가 이안테를 끌어안고, 천천히 등을 쓸어내릴 때. 그때서야 존은 다시 울 수 있었다. 서러움이 굳어 만들어진 울음소리는 작다. 너무도 커다란 그 슬픔을 토해낼 수가 없어서. 그래서, 존은 헐떡인다. 끅끅대는 소리로, 아이처럼 운다. 뱀파이어의 매혹은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그러나 그림자가 온전히 빛을 끌어안기로 결심할 때에는 더 이상 그림자라 부를 수 없다. 빛일 뿐이다.
너무 많이 울면 안 좋아. 응?
알아, 알아...
그것은 울음을 그치라는 신호가 아니다. 그 어떤 명령도, 그를 휘두르려는 저의를 담은 간교한 속삭임도 아니다. 토닥이는 손길처럼 와 닿는 위로인 것이다. 서러운 사랑. 마음은 그저 존재할 뿐이었을진대. 이다지도 어려워서야. 이다지도 차가워서야. 루스벤의 손가락들이, 손바닥이, 그리고 눈길이. 그를 수천 번도 더 쓰다듬을 것처럼 내려앉는다. 지치지도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만큼, 그곳에는 닿아 오는 애정들이 있는 것이다. 루스벤이 존의 이마에 다시 입을 맞춘다. 차가운 입술이 그리도 다정하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벨벳처럼 보드라워 그 누구도 다치게 할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이안테. 루스벤이 다시 고백한다.
내 사랑은 나비와도 같아.
그 목소리처럼 보드라운 고백. 나비 날갯짓 같은 작은 설레임. 마음 속을 간질이는 상냥한 날갯짓들.
지금 너는 연약하고, 여린 심장으로 뛰는 아름다운 영혼이니.
루스벤의 손이 존의 심장 위에 얹어진다. 존은 루스벤의 가슴에 뺨을 기대고, 그 품 안에 다시 안긴다. 흐린 존재 속에서 들려오는 심장 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뱀파이어에게도 심장이 있었던가. 존은 루스벤의 손가락이 자신의 가슴께를 톡톡 두들기는 움직임만을 느낀다.
너를 다치게 하지 않을거야. 내 사랑은 자유로운 새가 아니라. 자유로운 나비라서.
부드럽고, 상냥하게?
부드럽고 상냥하게.
되묻는 물음에 돌아오는 답 한 마디로도 충분한 때가 있다. 이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다. 모든 종류의 사랑에는 답이 필요하다. 돌아오는 답 한 마디. 그것으로도 충분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랑은 그 때를 놓친다. 어떤 사랑은 일부러 답을 내어놓지 않는다. 이안테에게는 되돌아오는 답이 있다. 루스벤의 말이.
루스벤.
그래, 이안테.
왜 네 사랑은 나비일까.
존이 루스벤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든다. 다시, 이안테가 자신의 사랑이자 피조물을 마주한다. 루스벤의 눈가는 이안테의 얼굴을 마주한 기쁨으로 물든다. 그리고, 그가 웃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건.
날 사랑하지?
널 사랑해.
루스벤의 웃음에, 존 또한 웃는다.
알 것 같아. 루스벤.
어디 대답해줘. 듣고 싶어 안달이 나는데.
이안테가, 존이. 루스벤을 끌어안는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먼저 닿아 오는 손길임을 루스벤도 잘 알고 있다. 그는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받아 안는다. 존이 가라앉은 숨을 내쉰다. 차분하게, 웃음을 담아 그가 말한다.
널 조금 더 안달나게 해도 될까?
그럼, 물론이지. 하지만 이안테, 너무 오래 그러진 마.
알아. 사실 내게는 남을 안달나게 하는 재능이 없어.
루스벤의 손가락이 존의 얼굴 위에 닿고, 그 손끝이 선을 그리며 눈가와, 입매를 더듬는다. 존은 그 움직임을 따라 가벼이 내뱉는다.
내가 나비인거지.
루스벤의 손끝이 멈추었다. 존이 몸을 뒤로 살짝 무르고서, 루스벤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든다. 그 눈길 속에 담긴, 예정된 놀라움, 그리고 기쁨. 그저 한 순간 보기만 해도 팔랑이던 나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날아가서. 별들처럼, 낮의 별들처럼 하늘을 수놓을 것 같은 섬세한 기쁨. 존은 그런 감정을 보고 있었다.
내가 나비이기 때문에, 네 사랑은 나비와도 같은 거야.
작가라서 그럴까. 당신은 그런 재능이 있어.
네 사랑은 나비와도 같아. 그리고 나는,
너는 내 사랑이고.
그래. 존이 끄덕인다. 그건 두 가지 의미를 담은 말인 거지. 두 뺨이 작은 흥분으로 붉게 물든다. 사랑스러운 나의 이안테. 루스벤이 말하면, 존은 그 말에 답하듯 얼굴을 기울여 루스벤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댄다. 두 얼굴이 가까이 와 닿는다. 숨결들이 얽힌다. 다정한 손길들이 서로를 쓰다듬는다. 심장 위를, 눈가를, 뺨을.
내가 나비인 거야.
그래, 내 사랑. 너는 나비야.
꼴 보기 싫은 나비이긴 하겠지.
아냐. 존. 너는 아름다워.
루스벤의 손이 존의 심장 위에 다시 얹어진다. 다독이는 손길과 함께, 말이 그 박자에 맞춰 무게를 담고 내려앉는다. 너는, 아름다워. 존. 그리고 덧붙여진다. 그리고 자유로워 질 거야. 그 말에 존은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그에게 입을 맞춘다. 차가운 입술과 뜨거운 입술이 맞닿는다. 그러나 입맞춤의 열기는 그대로일 것이다. 한껏 끌어안은 손길처럼. 더 가까이 닿고자 하는 살결들처럼.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얕게 가빠진 숨 사이로 존이 되뇌인다.
카슈미르의 나비처럼?
연인들의 대화는 작은 암호를 담고서, 저들만의 함의와 장난스러운 말장난을 얹어 오간다. 오로지 둘 사이에 존재하는 우스운 공놀이 같은 것. 그러나 즐겁기 짝이 없는 것. 이안테와 루스벤은 말장난을 한다. 서로 암호를 던지고, 잡아낸다.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루스벤이 짧게 존에게 다시 입을 맞춘다.
아직은 아니야.
왜 그럴까.
여긴 카슈미르가 아니니까.
이안테는 고개를 기울인다. 그 뺨에 당연하게도 루스벤의 손이 얹어진다. 쉴 새 없이 따라오는 손길에 마음껏 자신을 내맡겼을 때에는 그 어떤 말도 혀 끝에 걸리지 않는다. 그것 또한 하나의 자유다. 사랑 위에 있을 수 있는 자유. 매혹과 구속이 아닌 것.
카슈미르에 가면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럴 거야. 이안테. 정말로, 온전히 자유로워 질 테지.
거기에는 빛이 가득하다던데. 루스벤.
알고 있어.
피조물, 뱀파이어, 그리고 사랑. 루스벤. 존은 루스벤의 흐린 존재를 제 손으로 더듬는다. 그림자. 은빛 존재. 희부연 어둠을 어깨에 지고, 새벽 한기를 품은 존재. 그런 존의 손을 루스벤이 붙잡는다. 손 끝에 입을 맞춘다. 천천히, 수를 세듯 하나씩.
그곳에 가면 나는 햇살이 되겠지. 빛과 뒤섞여 사라질거야. 온전히 햇살이 되어서.
뱀파이어는 빛을 모르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나는 널 사랑하기에 빛을 알아.
내가 널 만들어냈고.
그래. 루스벤의 눈길이 문득 아래로 떨구어진다. 존은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할 지는 알고 있다. 그는 더 가까이 루스벤에게 다가간다. 그를 끌어안는다. 이제 나비 날갯짓은 울렁이는 감정이 된다. 실체가 되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다. 온전히 잠길 수 있을 만큼 안온하다. 위험한 감정의 파도 대신에, 존은 그 다정한 순간에 잠겨들기로 했다.
함께 카슈미르에 가자.
......
나는 나비가 되고, 너는 햇살이 되어.
존.
우리는 자유로워지는 거야.
이제 루스벤이 몸을 떤다. 그가 속삭인다. 이안테. 그리고 존은 고개를 젓는다. 존. 존 폴리도리. 품에 안긴 뱀파이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존.
네 사랑은 나비와도 같아서. 나를 상처내지 않을 테지. 루스벤. 내 사랑.
함께 카슈미르에 가면 너는 진정 자유로워질거야. 아무 것도 너를 붙들어 두지 못해. 존. 새 같은 사랑도, 불길한 환상들도, 몽유병도, 단도를 든 너 자신도, 뱀파이어마저도...
아.
존이 탄식한다. 루스벤이 고개를 든다. 그 탄식에 잠깐 존의 얼굴에 내려앉은 어둠을 견딜 수가 없었는지, 그는 손을 들어 제 사랑의 뺨을 쓰다듬는다. 나의 존.
너를 잃기가 싫은데.
아쉬운 거 알아. 나도 그래.
루스벤.
나 여기 있어.
네가, ... ... 자유로워지고 나서도. 나를 사랑할 거지?
온전히 빛에 뒤섞여 사라지고 나서도, 햇살이 되고 나서도. 그러니까 말하자면 영원히. 어쩌면 존의 삶이 끝나더라도. 그 물음 속에 담긴 수많은 함축된 언어들을 루스벤이 모를 리가 없다. 마음은 그저 존재할진대. 어찌 그 곳에 다정함이 따라 붙지 않으랴. 그것이 루스벤의 역할이었다. 피조물, 그리고 사랑. 루스벤은 존의 가슴께에 다시 손을 얹는다. 천천히, 그가 뒤로 밀어내는 움직임에 존은 저항하지 않는다. 소파 위로 길게 뉘어진 몸 위로, 루스벤이 자신의 몸을 겹친다. 입술이 맞닿아 온다. 차가운 손, 그보다 뜨거운 숨결들. 느리게 갈망하는 움직임을 드러내면 기꺼이 화답하는 입술. 한참 동안 루스벤은 이안테에게, 아니, 존의 입술에 애정을 쏟아붓는다. 숨이 차올라 자신의 어깨를 쥐어 오는 손길을 감싸고. 루스벤은 존의 눈가에, 작게. 나비 날갯짓 같은 입맞춤을 남긴다. 존이 숨을 고를 때까지, 루스벤은 기다린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대고서. 이제 그가 속삭인다.
존, 내가 햇살이 되면, 널 더 많이 사랑할 거야.
왜 그럴까.
나는 그림자에서 해방된 것일 테니.
목덜미에는 생명의 향기가 자리한다. 루스벤은 숨을 들이쉰다. 살결에 맞닿은 입술이 움직일때마다 다시 뱃속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시작하는 것만 같아서. 존 윌리엄 폴리도리는 눈을 감았다.
나는 자유로워지는 거야. 그러니, 널 더 많이 사랑할테지. 존. 그럴 거야. 약속할게. 그림자가 아니라 빛으로 살게 해 주었으니까. 내 사랑. 나의 작가.
카슈미르에 가자. 루스벤.
그래, 같이.
카슈미르에 가서, 함께 자유로워지자.
루스벤이 몸을 돌려, 존을 끌어안는다. 소파 위에 함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연인들이 누워 있다. 존이 중얼거린다. 너와 나, 우리 모두 해방을 찾아 가는 거야. 네 사랑은 나비와도 같아서. 나를 자유롭게 해 주겠지. 나는 언젠가 새 같은 사랑을 견디어 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작게 속살대던 목소리들이 잦아든다. 숨이 고르게 변해간다. 존은 눈을 감고 잠 속으로 한정 없이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루스벤이 그를 토닥인다. 쉬이. 편안하게, 잘 자. 그 말에 떠오른 미소는 그 어떤 노을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존이 온전히 잠들었을 때, 루스벤의 창백한 뺨 위에 작은 눈물 방울 하나가 굴러내려간다. 그가 잠든 존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입술을 댄 채 있던 루스벤은 고개를 든다. 피조물, 사랑, 그리고 뱀파이어는 잠든 자신의 작가이자, 사랑에게. 짧은 말 한 마디를 남긴다.
네가 자유를 찾아서 기뻐. 존.
저기 멀리, 볕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원히 머물자 손짓하던 달은 자리를 비운다. 은빛 춤도, 다정한 끌어안음도. 어쩌면 자리를 비운다. 분명한 것은 영영 가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안개와 구름은 머물 곳이 못 되기에. 이제 자리를 비킨 것 뿐이다. 존 윌리엄 폴리도리는 볕 아래 머물 것이다. 빛 아래에. 태양과 생명 아래에. 그는 이제 다정한 금빛 햇살을 두르고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카슈미르의 나비들처럼. 이제 존 윌리엄 폴리도리는 진정 자유롭다. 모든 것에서. 진정으로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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