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집 짓기.
클리프 우드하우스.
But it came easy, darlin'.
As natural as another leg around you in the bed frame.
모든 사람은 죽음을 맞는다.
생과 죽음은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처럼 혈족이다. 거대함의 굴레 속에서 서로에게 묶여 지쳐 버린 두 초월적인 힘들. 그 모순점의 간극을 다루어 보고자 하는 불행할진저. 그것이 인류 태초부터 시작된 철학자들의 비극이었다. 나누어 보고자 하는 이들은 간혹 쓰거나, 토해내거나, 작은 유리 너머로, 나무 너머로 죽음과 생의 은밀한 사랑 나누기를 지켜보지만. 해체를 바라는 이들만이 세상에 있지는 않은 법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그것을 스스로 묶기 위하여 매듭을 짓는다. 그것을 자신의 상징 삼고, 나약한 인간의 삶과 그토록 거대한 자연 너머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부분이 되어 주기를 바라 보기도 하는 것이다. 짝 지은 그들의 공존 아래 태어난 것이 곧 바로 생명체인 그 자신이라는 것을 알며.
클리프 우드하우스는 죽음을 겪을 적에 꿈 부적을 만들었다. 위대한 거미 여신이 아이들의 머리맡에서 지켜 보아 주기를 바라며 따라 만들었다는 거미집의 매듭처럼. 그렇게 이것과 저것을 연결지어 하나의 그물로 만들고. 자신의 토템 삼아 머리 맡에 걸어 놓는다. 창조와 종말. 삶과 죽음. 영혼과 육신. 모든 것은 그물과 같이 이어져 있으며. 자신은 그 안에 고작해야 작은 매듭 하나 밖에 되지 못할 이라는 것을 되새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남의 죽음을 이용해 자신의 악몽을 붙잡는 거미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그가 기어 들어간 동굴의 가장 깊은 곳 겨울잠자리에는 수많은 죽음이 걸려 있다. 손바닥만하게 변한 거대함 속에 그는 손톱만큼 작은 구슬 하나를 달아 둔다. 떠나보낸 이가 그토록 작아질 때에만 그는 죽음이라는 것을 수용했다. 회색곰의 귀보다 작은 꿈 부적 안에 든 상실.
어느 날엔가 그는 그 작은 거미집 매듭 안에 달 구슬의 크기를 알지 못해 헤메인 적 있었다.
엄폐물을 붙잡지 못했던 손이 히코리 나뭇가지를 구부린다. 둥근 것은 세상이며. 두려움에 떠는 몸뚱이를 처음으로 감싸 들었던 손가락이 검은 양털 실로 거미집 무늬를 묶는다. 그 그물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되고. 생명 빠져나간 눈을 바라보았던 동공은 그 끝자락에 자리한다. 죽음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막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마치 우리가 잠에 들었을 때 악몽에게 습격당하는 것처럼 무력하게 그것에 덮여 들고. 모든 이들은 당해내지 못하고 허리를 꺾으며 피를 토한다. 클리프 우드하우스가 보아 왔던 죽음들은 그랬다. 군복 입은 자들에게 간혹, 죽음은 손님처럼 그저 찾아오는 것이다. 내쫓을 수 없다. 그것이 모든 죽음의 수순이므로
그가 어린 눈의 병사를 감싸 들었을 때 모든 것은 멈추었다. 매듭을 짓기 위해 실을 둘러 쥔 손도 그대로 멈춘다. 죽음 속에서 모든 것은 느리다. 고통스럽게도. 하얗게 질린 손마디가 팔을 긁어대고. 두려움과 절박함에 몸부림칠 때 클리프는 그를 짓눌렀다. 온 몸으로. 두려움에 휩싸여 죽음을 마주하도록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자신의 죄가 될 터이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온 몸으로. 상사님, 그 병사가 불렀다. 클리프는 그 손을 받아 잡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뒷목을 붙잡아 끌어안고서 이마를 댄다. 병사가 자신의 부상을 보지 못하도록. 그는 모든 것을 잠시간 가려 보려 애썼다. 무서워요, 어린 아이처럼, 솜털처럼 떨리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이 기른 이들 중 가장 어렸던 병사의 눈 위를 덮었다. 그리고 스스로가 아는 가장 엄숙한 노래를 부른다. 깃발 노래. 나의 일족들이여, 보라. 우리 깃발이 저 하늘에 걸려 있누나…… 에둘러 그는 애도를 표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병사는 다시 한 번 소리내었다. 오빠, 나 무서워. 죽음을 맞으려 검은 양털 실 쥔 손은 그대로이다. 매듭은 지어지지 못한다. 손 아래 눈꺼풀이 더 이상 힘을 찾지 못하고. 그가 폐 끝에 걸린 숨을 이끌어 토해낼 때 클리프 우드하우스는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저기, 저 곳에 걸린 채로. 죽음의 바퀴소리마저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산들바람에 흔들리는구나. 품 안에 있는 이는 떨기를 멈추었다. 울지도, 웃지도 않고. 자신의 오라비가 용감하라 일렀던 말을 두 눈동자에 떠올린다. 자신이 아는 가장 거대한 사람의 팔 안에서 그와 이마를 맞댄 채 숨을 내쉰다. 클리프 우드하우스는 말한다. 괜찮아. 자신의 막내 여동생에게. 어릴 적 잠자리에 들기 전 불러 주었던 때처럼. 음율을 소리낸다. 다시 한 번. 나의 일족들이여, 보라……
그 순간에서야 모든 것은 다시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는 기어이 매듭을 짓는다. 깃발 노래를 세 번 불러 주지도 못한 채 잃어버린 이를 생각하며. 그 과정 속 지나치게 작았던 자신을 만들어 놓는다. 그것은 사죄다. 모든 것은 에둘러 표현된다. 축소된다. 장례식에서 무어라 추도사를 해야 할까. 그것은 과장되어지는 과정 중 하나이다. 죽음의 양면이 이토록 거대하니. 클리프 우드하우스는 차라리 자신의 손바닥보다 작게 거미집을 지어 그 안에 상실을 가둬 놓고자 하였다. 이제 구슬 하나만이 자리하면 모든 것은 마무리될 터이다. 늘 구슬을 담아 두던 서랍을 더듬었다. 손톱 끝에 짚히는 색색의 유리 구슬을 만지며 그는 크기를 가늠하였다. 무엇을 이 곳에 두어야 할까를 생각한다. 곧, 자신의 상실의 크기에 대해 가늠해 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너무도 작고, 초라하지 않은가.
어떤 상실은 구슬 하나로 축소될 수 없다.
그는 생각한다. 붉은 옥수수 씨앗보다 작은 구슬은 달 수 없다. 그 애는 내게 그렇게 작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개암나무 씨앗보다 큰 구슬은 달 수 없다. 그토록 거대한 죽음을 이 곳에 달아 둔다면. 나는 그 꿈 부적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한 잠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클리프 우드하우스 그 자신이 과연 잠들기를 바랐을 것인가. 알 수 없다. 그는 기어이 구슬을 달지 않았다. 적절한 크기를 찾지 못하여. 아니, 어쩌면 축소시킬 수 없는 상실을 마주해 버린 탓에. 빈 자리를 남겨 두고 그는 매듭만을 지었다. 이토록 거대한 세상 앞에 자그마했던 자신만을 표상하여 올려 두었다. 그것이 그의 사죄가 될 터였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겨울잠자리 가장 깊은 곳, 침대의 머리맡에 그것을 걸어 둔다. 그 아래 점박이 곰이 웅크린다. 작은 깃털을 생각한다. 자신의 여동생을. 클리프 우드하우스는 거미집 부적의 아래에 깃털조차 달지 않은 채로 두었다. 그에게 거미집 짓는 일은 상실을 지나칠 때마다 하는 통과의례나 다름없었으므로. 완성하지 않았다. 그가 상실을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에. 구슬도, 깃털도 없이. 그저 둥근 세상과 검은 양털 실로 얽힌 세상 모든 것들만이 덩그러니 남게 된 것이다. 지금의 그 자신처럼. 그는 밤 새 거미집을 지으며 무엇이라도 붙잡아 보려 했으나 아무 것도 붙잡을 수 없었으며. 떠나보내고자 하였으나 아무 것도 떠나보낼 수 없게 되었다. 그에게 깃발 노래를 불러 줄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맞는다.
불변할 명제. 인류가 나고 진화해 번성하기까지 단 한 사람도 비껴간 적 없는 영원의 문장. 상실의 모체. 그러므로 어느 하찮은 이는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여 보고. 지식 있는 자는 탐구하며. 절박한 자는 휘두르고 부조리한 자는 수용한다. 상실을 다룰 줄 아는 자는 적다. 다루기 위해서는 살아내야만 한다. 그것은 인류의 또 다른 영원의 문장이 되리라.
이제 막 살아야만 할 삶의 첫 걸음을 내딛은 이가 조용히 울기 시작했을 때,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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