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걸음
유현유진 2429
“빨리 떠나자~ 야이 야이 야이 야이 바~다로~”
“기분 좋아 보이네.”
“그럼, 바다잖냐! 여행 가는 것 같고 좋은데.”
“그런 말 할 때야 지금? 형 또 위험하게 도망치고!”
“뭐! 지금 여기서 또 도망쳐줘?”
“형! 달리는데 문을 열면 어떡해!”
바다를 낀 기다란 도로에 빨간색 스포츠카가 달리고 있었다. 멋들어진 신형이 무색하도록 두 사람은 중앙선을 넘나들 정도로 싸워댔다.
둘만이 이 세계에 남겨진 이후로 쭉 이어진 싸움이었다. 본능을 조금씩 내보이는 한유현과 그런 한유현을 가만두지 않고 도망치는 한유진. 사람도 없겠다 실력을 발휘해 여기저기 잘만 쏘다니던 한유진이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잡혀버렸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도망친 곳 주변에 바다가 있음을 알게 되어 둘이서 오게 된 것이다. 한유현은 차를 골라 운전대를 잡고 뻔뻔하게 노래까지 부르는 형을 어이없이 쳐다보았다. 지금 노래가 나오느냐……로 다시 시작된 말싸움은 끊이지 않고 참새떼처럼 조잘조잘 이어졌다.
*
“아깝다. 차 예뻤는데.”
새빨갛게 반짝이던 차는 앞이 잔뜩 구겨진 채 하늘 위로 짙은 연기를 피워내고 있었다.
“형, 위험하니까 내려가자.”
“여기서 네가 제일 위험하거든.”
한유진은 투덜거리면서도 앞서 걷는 동생의 뒤를 따랐다.
도로에서 조금 내려가자 시원한 바람과 함께 드넓은 바다가 펼쳐졌다. 태양 아래 빛을 받아 부드럽게 움직이는 바다는 탄성을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다.
바다는 관광지로 이름이 꽤 높았던 듯, 해안가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과 숙박업소들이 과거의 영광을 짐작하게 했다. 모래가 자박자박 밟히는 곳에서 그 모두를 바라보던 한유진은 새삼스레 회상에 젖는다.
한유현의 입시가 끝나면 길게는 아니더라도 둘이서 바다를 보러 가려 했었다. 결국은 오게 됐구나.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바랐던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이루어진 지금 이 순간이, 한유진은 싫지 않다.
“형.”
차분해진 한유진을 알아챘는지 동생은 가만히 형을 불러온다. 언제나 제게 기민하게 반응하는 녀석이었다.
“너 수능 보고 나면 바다에 가려고 했었어. 던전 때문에 가지는 못했지만……지금 왔으니 됐지. 어쨌거나 왔으니 놀아야지! 가자!”
“형은 튜브를 끼는 게,”
“그놈의 과잉보호! 안 죽는다 안 죽어. 뭣하면 네가 구해!”
한유진은 한유현의 손을 낚아채어 모래사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새의 깃털처럼 보드랍게 파이는 모래들, 나란히 두 줄로 이어지는 발자국들……형제는 아이처럼 웃었다. 기다란 팔과 다리를 마음껏 휘두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한유진이 한유현에게 달려들자 둘 다 바닥에 엎어진다. 온몸에 모래가 묻고 엉망이 된 모습임에도 마주 보며 신나게 깔깔거렸다. 그곳은 형제만의 세상이었다. 길게 불어오는 바람이 몸에 붙은 먼지를 떼어내 주며 지나갔다. 바닷가에서부터 불어오는 무형의 바람은 힘을 가진 채 형제의 몸을 통과해 속에 묻혀있던 것들을 날려버리는 듯했다.
발치에 물이 찰박거리고 하얀 포말이 발목을 적셨다. 모래를 잔뜩 묻힌 채로 둘은 물장난을 쳤다. 얕은 물에서 발장난을 치고 어릴 때처럼 서로에게 물을 뿌리는 데에 열중하느라 온몸이 푹 젖는 줄도 몰랐다.
얼마나 놀았을까. 문득 고개를 돌리니 해가 지고 있었다. 맹렬히 이글거리며 내뿜어지는 적금 빛의 열기……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눈 안쪽까지 뜨거워지는 듯했다.
한유진은 위험하더라도 빛과 파도가 일렁이는 곳까지 가보고 싶다. 그 물속으로 잠겨 들어가고 싶다. 지금도 재미있었으나 이왕 바다에 왔으니 좀 더 즐기고 돌아가고 싶었다. 한유진은 걸음을 옮겼다. 수심이 위험스레 높아진다.
“형!”
뒤에선 겁먹은 듯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유진은 뒤돌아 웃었다.
“맨날 뭐가 그렇게 무서워선……괜찮아. 이젠 그러지 않아도 돼.”
말과 함께 한유진은 한유현을 끌어안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세상이 뒤집힌다.
물속에서 한유현은 한유진을 꽉 끌어안았다. 안돼, 안돼. 본능적으로 그를 자신에게 가두려 들었다.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손끝에서 불꽃이 튀는듯했다.
그때 한유진이 한유현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주 보는 시선 속에서 형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웃고 있었다.괜찮아.음성대신 쏟아져 나오는 거품들. 그러나 부글거리는 물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만은 생생히 들려오는 듯했다.
그제야 한유현은 팔의 힘을 조금 느슨히 푼다. 주변으로 하얀 방울들이 무수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유진은 흔들리고 이지러지는 방울들 속에서 몸을 붙인 채 다시 개구지게 웃는다. 그의 얼굴에는 어린 웃음이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유를 찾은 한유현은 그 웃음을 본다. 형의 얼굴에 걸린 진실로 즐거운 미소를.
물을 투과해 들어오는 강렬한 햇빛은 형의 얼굴에 짙은 생명력을 남겼다. 장난칠 때마다 일렁이는 빛과 공기 방울들 속에서 잘게 부서지는 형의 웃음……시간은 느리게 흐르며 하나하나의 연속된 장면이 망막에 새겨진다. 한유현은 이 순간을 영원히 박제하고 싶다. 또는 지금의 형을 삼켜 녹여내 자신과 함께 흐르게 하고 싶었다. 모순된 욕망은 웃는 한유진의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사그라지고 만다.
우주 같은 물속에서 둘은 느린 춤을 추듯 몸을 물살에 맡기고 있었다. 물고기 하나 없는 바다였다. 그 아득하고 먹먹한 공간 속에서 형제는 오히려 안정을 얻는다. 둘만의 공간을 얼마나 바라왔던가. 흐르는 물살과 함께 불안과 두려움은 시시각각 멀어져갔다.
어쩌면. 한유현은 생각한다. 어쩌면 형의 말대로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형을 온전히 믿고, 형은 자신을 알고 받아들여 주는 것……그러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한유현은 알고 있다. 형은 대화를 시도했고 자신은 무시해 왔었다. 이제 이 오랜 불통을 깨트려야 할 때가 왔음을 느낀다. 형제는 던전 밖의 형제와 다른 결말을 맞았고 새로운 시작선 위에 서 있다. 7년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한유현과 한유진은 함께 해나가야 할 것이다. 함께라는 것이 한유현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공포는 그에게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한다. 남은 것은 함께 디딜 첫걸음뿐.
한유현은 팔로 단단히 형을 끌어안고서 수면위로 천천히 비상한다. 물 밖으로 나온 형제의 앞에는 여전히 황금빛 태양이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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