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포기한 시리즈 - 발렌타인 편
현제유현TS 오메가버스 AU
부엌의, 결코 좁지 않은 조리대 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재료들을 한유현은 천천히 훑어보았다. 곱게 선을 그리는 우아한 눈매가 살짝 좁혀지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깊은 검은 색 눈동자 안으로 푸른 빛이 스쳐지나갔다. 확, 다 태워버릴까.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러기에는 집 안이고, 무엇보다 이 사태의 원흉인 동거인이 아주 당당하게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오빠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 게 아니라면 실력 행사는 뒤로 미뤄 놔야 했다. 한유현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는 동거인의 이름을 불렀다.
"박예림."
"왜요, 길짱님아."
"이게 다 뭔지 설명해봐. 지금, 당장."
아니면 집에 무슨 일이 나든 다 태워서 치워버릴 테니까. 한유현의 어깨 위로 이린이 쏙 튀어나와 혀를 날름거렸다.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는 이린의 모습에 박예림의 정령인 산호 역시 모습을 드러내 서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예림은 허리에 손을 짚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발렌타인 초콜릿을 만들 거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거라면 일단 그 사람의 신상명세부터 말해."
"뭐래! 그런 거 아니거든!"
목까지 새빨개진 박예림이 목소리를 높여 항의했다. 한유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 앞에 팔짱을 꼈다.
"발렌타인 데이는 여성이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라고 알고 있어. 갑자기 발렌타인 초콜릿을 만들겠다는 건 네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뜻 아니야?"
"아닙니다! 아오, 진짜, 우리 길드장님, 상식 업데이트 좀 하세요! 세상에는 우정 초코, 의리 초코라는 개념이 존재한답니다! 응? 한유현 혹시 아저씨에게도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 준 적 없어?"
"없는데."
연인 관계의 기념일이라는 인식이 있어 굳이 챙기려 들지 않은 점도 있지만 2월 7일이 한유진의 생일이고 발렌타인 데이는 2월 14일이다. 일주일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부모는 한유현에게 그 어떤 관심도 없었고, 용돈을 따로 챙겨주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한유현은 오빠의 생일에 꼬박꼬박 모아놓은 얼마 안 되는 용돈을 거의 다 써서 발렌타인 데이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부모가 사고사 한 이후는 더욱 더 그런 것에 낭비할 돈이 없었고, 각성 이후로는 생일조차 한참동안 제대로 축하해 주지 못 했었으니 발렌타인 데이는 말할 것도 없다.
"허얼. 이건 진짜 놀랐다. 아, 잠깐. 아저씨에게도 안 줬을 지경이라면 세성 아저씨에게도?"
"준 적 없어."
이전에는 연인 사이이긴 해도 이런 기념일까지 챙기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었고 무엇보다 날짜 맞춰 만나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그건 크게 차이가 없어서 두 사람이 그나마 간신히 챙기는 기념일은 기껏해야 서로의 생일 정도가 고작이었다. 한유현의 말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박예림이 식탁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식탁을 탁탁 두드려 한유현에게도 앉으라고 말했다.
"길드장님아, 이 기회에 상식 업데이트 좀 합시다. 좀 앉아봐요."
한유현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일단 순순히 박예림과 마주 앉았다. 불을 짧게 토하는 것으로 불만을 표출한 이린이 한유현의 몸 안으로 기어들어가 숨었다. 박예림의 곁에서 의기양양해 하던 그의 정령은 무심한 한유현의 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겁먹은 얼굴로 숨어버렸다. 한유현에게는 위협의 의도는 없었지만 기질 자체가 크게 상반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박예림이 톡톡 식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있잖아, 한유현. 확실히 네 말대로 발렌타인 데이는 여성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 맞긴 해. 그런데 제과 회사의 상술 때문에 세상에는 이 날에 애정 관계가 아니어도 의리 초코나, 우정 초코 같은 것을 선물하는 풍습이 생겼거든?"
"일종의 사회적 예절 같은 거란 말이지?"
"그렇죠. 물론 강제적인 것은 아니고, 주는 거야 마음대로지만 호의를 가진 사람에게 호의를 표현하는 것은 좋은 일이잖아. 게다가 한유현 너는 애인도 있잖아. 세성 아저씨가 받으면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도 그렇지만 성현제도 먹는 것에는 까다로운데."
그 남자가 오빠가 만들어 준 거라면 몰라 내가 만든 것을 먹을 것 같진 않다. 미간을 좁히는 한유현을 속터짐인지 안타까움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박예림이 식탁을 쾅 내리치며 선언했다.
"아, 됐어! 만들거야! 아저씨랑, 애들 거랑, 현아 언니나 소영 언니, 노아 오빠 같은 친한 사람들 몫을 다 만들 거니까 한유현도 도와! 아저씨에게 가장 먼저 발렌타인 초콜릿 주는 것은 양보해줄테니까! 하는 김에 세성 아저씨 것도 만들어서 주고!"
"......알았어."
영 납득은 안 되지만 이미 재료를 이렇게 대량으로 사들여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오빠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수단의 일환이라면 못할 것도 없고, 하는 김에 겸사겸사 성현제의 몫까지 만드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받을지 말지는 그 남자가 알아서 정하면 될 일이니까. 한유현은 조리대 위를 가득 채운 재료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kg 단위의 초코와 밀가루, 버터, 설탕, 말린 과일, 견과류 등. 개중 마음에 드는 건 몸에 좋다는 견과류 종류 뿐이라고 생각하며 한유현은 박예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저것들로 뭘 만들 생각인데?"
"이거! 그나마 제일 쉬워 보이더라!"
박예림이 조리대 위에 놓여 있는 재료들 사이에서 책을 하나 가지고 와 식탁 위에 펼쳤다. 그가 펼쳐 보인 페이지에는 브라우니 케이크 레시피가 실려 있었다. 식도락에 그 어떤 관심도 없는 한유현이었지만 그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만들기 쉬운 초콜릿 요리라는 것은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기본에만 충실하게 만들어도 초심자 중의 초심자인 그들도 어떻게든 할 수 있어 보였고, 재료에 약간 변형을 줘 색다른 맛을 만들어 내는 것도 그리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딱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어서 한유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버터랑 설탕의 양이."
"길드장님아, 이건 달콤하고 맛있는 것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랍니다."
"바로 며칠 전에 오빠 생일이라고 그 핑계로 케이크 먹었는데."
"세성 아저씨가 삼단 케이크 들고 왔을 때 한유현 너 불 지를 뻔 했지......."
애들이나 다른 사람도 먹어야 하니까 이 정도 양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한유진이 말린 덕분에 정말로 불 나는 것은 피했지만 성현제는 그날 내내 연인에게 외면당했다. 그리고 한유진은 성현제가 가져온 호화 케이크는 정말 딱 한 조각만 맛보고, 동생이 오빠의 건강에 대한 걱정을 가득 담아 주문한 건강 쑥떡 케이크를 보이지 않는 눈물과 함께 씹어 삼켜야 했다. 사실 어쩌다 가끔 단 것을 먹는 것은 한유현도 그렇게까지 엄하게 체크하진 않지만 한유진의 생일과 발렌타인이 일주일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한유진이 깨작깨작 여전히 군것질을 즐긴다는 것은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박예림은 양손의 엄지와 검지를 들어 사각형을 만들어 보였다.
"어차피 줄 사람이 많아서 한 사람 당 이 정도 크기가 될 것 같은데, 이거면 괜찮지 않을까?"
"뭐, 그 정도라면야. 만들고 포장하는 것까진 돕겠지만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나눠주는 건 네가 해."
"네에."
박예림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몇 안 되는 가까운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한유현은 여전히 위압감이 느껴지는, 접근하기 어려운 상대다. 경외하는 길드장에게서 직접 발렌타인 초코 같은 것을 받았다가 숨도 못 쉬고 기절할 것 같은 해연 길드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고. 무엇보다 만들자고 주장한 것이 박예림이니까 나눠주는 것도 그의 몫이 되는 게 맞았다.
"브라우니를 만들 생각인 것은 알겠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만?"
"음, 일단 기본적인 것을 만들어보고 괜찮으면 다른 걸 응용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렇겠지."
선뜻 고개를 끄덕인 한유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꽃으로 깨끗하게 할 수 있지만 일부러 물을 틀어 손을 깨끗하게 씻은 한유현을 보며 박예림이 히죽 웃었다. 그는 한유현이 일부러 저렇게 인간다운 면을 보여주는 것을 사실 꽤 좋아했다. 살아 있다는, 같이 살아 간다는 것을, 백마디 말보다 더 확실하게 전해주는 것 같아서 솔직히 좀 기쁘기도 했다.
조리용 저울 위에 보울을 올리고 영점을 맞춘 한유현이 정말 싫다는 얼굴로 버터를 그 안에 투하했다. 도마와 칼을 꺼내 초콜릿을 다지기 시작하는 그의 곁에서 박예림은 냄비에 물을 담아 불 위에 올렸다. 물을 끓이고, 초콜릿을 녹이는 것은 두 사람 다 마력으로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한유현이 일일이 손을 쓰고 있어서 박예림도 그에 맞췄다. 계량을 끝낸 초코와 버터를 중탕해 녹이면서 박예림은 곁에 선 한유현에게 물었다.
"불로 확 녹이면 되지 않아?"
"베이킹은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망치기 쉬워. 너나 나나 초심자니까 레시피의 지시대로 하는 게 제일 좋아."
"응? 한유현이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박예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유현은 한유진이 관련된 것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습득하고 있는 지식이 이상할 정도로 편중되어 있는 원인이 그것이라는 것은 박예림도 이제 잘 알았다. 그리고 베이킹은 한유현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한유진을 위한 건강빵이라도 굽겠다고 하면 예외지만.
"성현제."
"아, 역시."
확실히 가능성 있는 게 세성 아저씨 외엔 없긴 하지. 박예림은 곧바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밀가루, 베이킹 파우더, 설탕 등의 재료를 개량하고 곱게 체를 친 것을 한유현이 그에게 내밀었다. 박예림은 그것을 녹은 버터와 초코에 섞어 넣었다. 초코와 설탕, 버터가 녹아서 섞이는 달콤한 냄새에 박예림의 뺨이 느슨하게 풀어지고 저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다만 곁에서 다른 작업을 진행 중인 한유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이렇게 건강에 안 좋아 보이는 걸 왜 오빠에게 먹여야 하냐는 생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박예림은 모른 척 시치미 뚝 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애인이라고 세성 아저씨가 너한테 뭐 이것저것 만들어 먹이긴 했나보네. 한유현 안 먹을 줄 알아서 안 만들 것 같았어."
"안 먹었어."
보울 속의 재료를 열심히 섞던 박예림의 손이 딱 멈췄다. 부릅 뜬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는 그의 시선에 틀에 녹인 버터를 바르던 한유현도 손을 멈추고 박예림을 돌아보았다.
"왜?"
"그, 설마, 세성 아저씨가 널 위해 만들어 놓았는데 너 입도 안 대고 그랬던 거야?"
"성현제가 날 위해 요리를 했던 적은 없는데."
담담하게 대답하며 한유현은 박예림의 손에서 보울을 가져왔다. 녹인 버터를 꼼꼼하게 바르고 유산지까지 깔아놓은 틀에 반죽을 채워 넣은 뒤 통통 두드려 공기를 뺐다. 미리 예열을 해놓은 오븐에 틀을 넣고 온도와 시간을 설정한 뒤, 고개를 들자 입을 딱 벌린 박예림의 얼굴이 보였다. 그게 왠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한유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둘이, 사귀잖아."
"그렇지."
"그런데 세성 아저씨가 널 위해 요리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박예림의 말에 한유현은 기억을 되짚었다. 성현제가 그의 앞에서 요리를 한 적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사이클 파트너 계약을 맺었던 날에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면서 갑자기 베이킹을 시도했던 것이 한 번, 삼단 트레이의 애프터 눈 티세트라는 것을 한 번 차렸을 때 한 번. 그리고 그건 두 사람이 연인이 아직 아닐 때의 일이었다. 연인 관계가 된 뒤에는 만들어준 적이 없었다. 만들어줄 기회가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성현제가 이 집에서 요리를 한 적이 몇 번 있긴 한데 그건 한유진을 위한 것이었고, 한유현을 위한 일은 아니었으니.
"일단, 오해가 없도록 말을 하자면."
"응."
내용에 따라선 당장 한유진에게 달려갈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박예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성현제에게 화내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걱정을 끼치거나 자신의 특이성 때문에 본의 아닌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유현은 성실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 무렵 나랑 성현제는 그냥 사이클 파트너였지 연인 사이가 아니었어. 날 위해 요리를 해줄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단 소리야. 성현제는 그때 자기 기분 전환과 심심풀이를 위해 베이킹을 했고, 내게 먹이기 위해 만든 게 아니었으니 내가 굳이 먹어줄 이유도 없지. 연인 관계가 된 뒤에는, 너도 알다시피 그럴 만한 여유가 별로 없었잖아."
박예림은 한유현이 스무살 넘은 뒤에나 성현제와 사귀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 연인 기간이 그보다 더 길다는 것은 여전히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두 사람 다 바빴기 때문에 사이클 관리를 겸한 밀회를 가질 때는 식사 외의 다른 일들을 우선으로 하는 게 보통이었다. 한유현의 설명에 박예림이 그건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도 성현제도 식사는 우선 순위가 낮은, 필요성이 그리 높지 않은 행위야. 그러니까 성현제가 굳이 날 위해 요리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하아아아아아아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박예림이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새빨갛게 빛을 내고 있는 오븐 문에 퍽 머리를 박는 것을 한유현은 그냥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았다. 한유현 같은 화염 저항이 있는 건 아니지만 박예림은 S급 각성자고 저런 평범한 오븐의 열기에 화상을 입거나 할 일은 없었다. 차라리 오븐의 문을 더 걱정하는 쪽이 맞았다. 한유현은 사용한 도구들을 대강 정리했다. 손등을 타고 기어올라온 이린이 재료의 부산물들을 불살라 삼켜 도구들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다. 한 번 만들었기 때문에 대강 요령은 기억했다. 이번에는 견과류를 넣은 브라우니를 만들 생각으로 호두와 아몬드를 챙기며 한유현은 말을 이었다.
"요리를, 그러니까 식사를 챙겨 주는 것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은 알고 있어. 오빠가 내게 맛있는 걸 먹이고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고, 나도 오빠가 맛있는 걸 먹고 즐거워 하는 것을 보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럼 세성 아저씨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좋아하니까 사귀는 거잖아. 세성 아저씨가 해준 요리를 먹을 생각은 여전히 없는 거야?"
아몬드를 얇게 슬라이스하던 한유현은 잠시 손을 멈췄다. 둘이 같이 있으면 요리할 여유나 식사를 할 일 자체가 별로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박예림은 아직 미성년자였고, 한유현은 자신이 성현제와 주로 하는 일에 대해 미성년자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점을 접어둔 채 박예림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설명의 말을 생각해보았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조금 곤란했다.
잠시 고민하던 한유현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호두를 담은 봉지를 박예림에게 내밀기만 했다. 박예림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순순히 몸을 일으켜 호두를 받아들었다.
"어떻게 하면 돼?"
"안에 넣을 거니까 적당한 크기로 부숴. 가루로만 만들지 마. 부순 뒤에 물로 한 번 데치고 구워서 쓰는 쪽이 좋다고 해."
"그럼 물로 데치는 것까지는 내가 할 테니까 굽는 건 한유현이."
한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슬라이스한 아몬드를 접시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그 옆에 부수고 데쳐서 물기를 제거한 호두가 놓였다. 이린이 작게 불을 내뿜어 두 견과류를 적당히 좋은 수준으로 구워주었다. 버터와 초콜릿을 중탕해 녹이고 가루를 체치는 작업을 다시 진행하는 사이 박예림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한유현 너는 일단 그렇다고 칠게. 너 특이한 점이 많다는 건 나도 아니까. 그런데, 있잖아. 세성 아저씨는?"
"성현제가 뭘?"
"세성 아저씨는 호의를 가진 사람에게 뭔가 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아저씨한테 툭 하면 간식이라던가 사오는 것도 그렇고. 사실 너한테 요리 같은 것도 해주고 싶은데 네가 싫어할 줄 알아서 참고 있는 거 아닐까?"
"......성현제가?"
"내가 생각해도 좀 아닐 것 같긴 해. 그런데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게 있다고. 지금 너랑 세성 아저씨가 연애를 하고 있는 판인데,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 있겠어!?"
한유현은 박예림의 말에 대한 논리적인 지적을 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이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성현제는 자기 마음대로, 내키는대로 하는 인상이 강하지만 사실 절제를 잘하는 편이고, 자신이 호의를 가진 사람이 상대라면 배려 같은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남자였다. 대체로 일방적이고 자기 기준이라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걸 호의나 배려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리고 세성 아저씨도 네가 만들어준 요리를 먹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할지 모르잖아?"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왜? 너 요리 잘 하잖아. 한유현이 요리에 뭐 이상한 것을 넣을 리도 없고. 이번에 발렌타인 초콜릿 만들어주면 세성 아저씨도 기뻐하지 않을까?"
"내가 집에서 가족들을 위해 만드는 거랑 성현제를 위해 만드는 게 같을 수는 없잖아."
"뭐가 달라? 결국 다 기반은 애정인데."
"......."
한유현이 미간을 좁혔을 때 오븐에서 띵, 알람음이 났다. 박예림이 확 표정을 바꾸며 한유현을 재촉했다.
"어서, 어서 꺼내봐. 응?"
하아. 한숨을 쉰 한유현은 오븐의 문을 열고 빵틀을 꺼내었다. 구워지면서 폭신하게 부풀어오른 빵에서 코끝이 마비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달착지근한 향기가 났다. 아주 싫다는 표정이 되어버리는 한유현과 달리 박예림은 기대에 들떠서 발이 바닥에서 동동 떠올라 있을 지경이었다.
"원래는 하루 정도 이대로 식혔다가 먹는 게 맛있다고 하는데 맛 보기 하면 안 되겠지?"
"안 돼."
박예림의 말을 딱 잘라 거절한 한유현은 식힘망 위에 틀에서 꺼낸 빵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깨끗하게 손질한 틀에 이번에는 호두를 넣은 반죽을 붓고 그 위에 슬라이스한 아몬드를 장식처럼 흩뿌렸다. 다시 한 번 오븐이 세팅되는 동안 박예림은 미련을 못 버리고 다 구워진 빵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걸 보며 한유현은 문득 지금 집에 없는 조카들을 떠올렸다.
"......한별이 오면 냄새 맡고 난리가 날 것 같은데."
"헉, 맞다. 어쩌지?"
보통 집이라면 애들 손이 잘 안 닿는 높은 곳에라도 올려두겠지만 이 집의 아이들에게 높이란 그리 큰 의미가 없다. 한결, 한설은 어른스러워서 안 된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들어주겠지만 한별은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도 냄새에 홀려 그 사실을 잊어버릴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한설은 동생이 원하는 거라면 다 들어주려고 하는 버릇이 있어서 말리긴커녕 같이 사고를 칠 것이다. 한결은 어영부영하다가 거기에 휘말릴 거고. 잠시 고민한 한유현은 금방 결론을 내렸다.
"완성된 것들은 해연 기숙사 내 사택에 옮겨놓지. 내일 포장 작업 하러 와. 나머지도 빨리 구워서 치우자. 애들 오기 전에 냄새 지워서 증거인멸 해둬야지."
"네, 길드장님!"
***
띵. 알림음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손에 든 선물 상자를 가볍게 고쳐쥔 성현제는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발을 내딛었다. 어린 마수들의 놀이터도 겸하고 있는 도담의 널찍한 옥상 정원은 그보다 먼저 도착한 손님들 때문에 벌써부터 떠들썩 했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한 성현제를 맞이한 것은 한결을 품에 안은 한유현이었다. 어른스럽게 구는 평소와 달리 새끼 코알라처럼 양팔 양다리로 고모에게 찰싹 달라붙은 한결이 성현제에게 낼름 혀를 내밀었다. 너는 사람들 앞에서 고모에게 이렇게 못 하지. 약오르지. 딱 그런 표정이어서 성현제는 웃음을 삼켰다. 성현제를 많이 닮은 그를 한유현이 안고 있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그것까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직 어린애다워서 귀여웠다.
그리고 조카와 성현제 사이의 그런 기싸움을 알 리 없는 한유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왔습니까."
"응. 초대해줘서 고맙네."
뺨에 키스하고 싶었지만 가까운 곳에 감이 좋은 S급, A급의 상급 헌터들이 있었다. 바리케이트마냥 한유현에게 찰싹 달라붙은 한결도 있었고. 다른 건 몰라도 그가 한유진에게 일러바치면, 그래서 한유현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그건 좀 곤란했다. 성현제는 한유현이 마중 나와준 것으로 우선 만족하기로 했다.
"이쪽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도착했습니다."
걸음을 옮기는 한유현의 곁으로 나란히 다가서자 한결이 싫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아서 성현제는 싱긋 웃어주었다. 한유현의 앞이라 성현제 싫다고 평소처럼 소리칠 수 없는 한결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한유현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성현제와 처음부터 한유현을 가장 많이 사랑하고 있었던 한유진의 영향을 받아 태어난 탓에 한결은 한유현을 고모들 중에서 가장 좋아했다. 그 탓에 착한 아이인 척 구는 것도, 얌전해지는 것도, 내숭을 떠는 것도 한유현 앞에서는 한 3배 정도 증가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한유현이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좋게 보이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그런 아이가 귀여워서 성현제는 손을 뻗어 한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청 싫은 얼굴로 도리질을 치는 한결을 추슬러 안으며 한유현이 성현제를 나무랐다.
"애 괴롭히지 마십시오."
"귀여워 해주는 건데."
"싫어하잖아요."
성현제가 한결의 머리에 손을 대지 못 하도록 고쳐 안아주며 한유현은 그의 손에 들린 상자로 시선을 주었다. 조용히 가라앉아 있는 검은 눈에 희미하게 불만스러운 기색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본 성현제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내 공주님이 만족할 만한 선물일테니 걱정 안 해도 된다네."
"......기대해보죠."
널찍한 테이블이 차려진 옥상 정원 안쪽 공간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가볍게 손을 들어 성현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나와 있는 와인과 샴페인 병을 발견한 한유현이 스산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문현아를 보았다.
"문현아 헌터."
"이건 전부 무알콜!! 아, 물론 도수 있는 것도 가져왔지만 그건 나중에 애들 없을 때 따로 챙겨줄 테니까."
"필요 없습니다. 인벤토리에서 꺼내지 말고 그대로 가지고 돌아가세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딱 잘라 말하며 한유현은 품에 안고 있던 한결을 내려주었다. 한결은 살짝 아쉬워하는 표정이긴 했지만 한유진도 있는 곳에서 성현제가 가장 좋아하는 고모에게 뭔가 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듯, 별 말 없이 동생들 쪽으로 뛰어가 어울리기 시작했다. 한유현은 당연히 한유진의 곁으로 향했고, 성현제도 집주인에게 인사하기 위해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한유진의 곁에서 무알콜 샴페인을 마시며 재잘재잘 떠들고 있던 박예림이 활짝 웃는 얼굴로 성현제에게 손을 저었다.
"세성 아저씨, 어서 오세요. 선물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보다는 내 선물이 환영받는 것 같은데. 서운해라."
능청을 떨며 성현제는 손에 들고 있는 선물 상자를 내려놓았다. 한유진이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선물 상자를 보며 말했다.
"에이, 성현제 씨의 센스를 믿고 있으니까 그러는 거죠. 뭔데요? 수제품? 아니면 성현제 씨 전속의 쇼콜라티에가 만든 세상에서 하나 뿐인 초콜릿 같은 거?"
"아무리 나여도 전속 쇼콜라티에까지 두고 있진 않다네. 그리고 이번에는 수제품도 아니고."
성현제의 손이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손짓 몇 번으로 포장을 깔끔하게 해체시킨 그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한유진이나 박예림이 기대하고 있었던 초콜릿이 사용된 과자류가 아니라, 아주 건강에 좋아보이는 호밀빵과 신선한 야채를 사용한 샌드위치, 무가당 요거트, 깨끗하게 씻어서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손질한 신선한 과일들, 바삭하게 구운 견과류를 듬뿍 사용한 저당 그래놀라 바 등, 어쨌든 몸에 좋아 보이는 먹거리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게 뭐냐고, 배신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한유진과 박예림에게 성현제는 아주 당당하게 대답했다.
"단 것만 가득하면 질릴 것 같아서. 공주님? 마음에 드시는지요?"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부터 확 얼굴을 밝혔던 한유현이 그 물음에 성현제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표정근의 움직임은 적었지만 입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었다. 한유진이 상대가 아닌 상태에서 이 정도의 반응은 거의 만면에 활짝 미소를 띄운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마음에 엄청 든 것 같다고 성현제가 나름 만족하고 있을 때 한유현의 얼굴이 불쑥 다가오더니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에 입맞춤을 남겼다.
사방에서 숨삼키는 소리, 기침하는 소리, 뭔가를 뿜는 소리가 들렸다. 성현제도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얼어붙었지만 한유현만 태평했다.
"당신이 지금까지 우리 집에 가져온 것 중 가장 마음에 듭니다."
한유진에게나 보여주는 방긋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해 성현제에게 추가타를 먹인 한유현이 빙글 몸을 돌렸다. 코앞에서 동생이 외간 남자에게 뽀뽀하는 꼴을 보게 된 한유진이 목까지 시뻘겋게 물들어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지만 한유현은 드물게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우유 가져올게, 오빠. 무알콜이라지만 그 샴페인 단 거잖아. 그만 마셔."
오히려 약간 화난 기색으로 그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려 훌쩍 걸어가버렸다. 이 사태를 좀 떨어진 곳에서 강소영이나 노아 등과 놀기 바쁜 애들이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성현제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유진을 보았다.
"유진아."
"......왜요."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던가."
"내가 어떻게 알아, 이 인간아! 지금 당장 쏴버리고 싶은 거 참고 있거든요!? 어디 감히 시집도 안 간 내 동생에게!"
한유현은 내 연인이고, 먼저 입맞춘 것도 한유현인데. 혀끝까지 치민 반박의 말을 성현제는 꿀꺽 목구멍 안쪽으로 삼켰다. 한유현의 반응이 평소와 확실히 다른 게 이상했다. 자신이 가져온 게 마음에 들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한유진이 있는 곳에서는 연인에게의 애정 표현은커녕 눈조차 다른 곳으로 잘 돌리지 않는 그가 이렇게까지 하게 한 이유가 분명 있었다. 빠르게 주위를 훑어본 성현제가 미심쩍어하는 시선으로 한유진을 보았다.
"유진아."
"이번엔 또 뭐!"
".......초콜릿 얼마나 먹었나? 오늘."
안쓰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성현제가 꺼낸 그 물음에 한유진의 입이 딱 다물렸다. 곁에서 같이 신나게 먹었을 박예림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여기 있는 거 최소한 종류별로 하나씩은 다 먹은 것 같은데."
돈이 많고, 그래서 손이 큰 편인 문현아, 강소영 등의 여성진이 사온 초콜릿 양은 꽤 상당한 수준이었다. 단 걸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다고 한유진의 간식 섭취량에 꽤나 신경을 쓰는 편인 한유현이 마음에 들어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온 문현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샴페인 치울까?"
"단 음료는 일단 다 치우는 게 좋겠군. 가져왔다는 술도 꺼내지 말게나. 술병 째로 불타 재도 안 남게 될 것 같으니."
"아니...... 그래도 가져온 사람 성의가 있는데 최소한 맛은 봐야......."
"오늘 공주님이 만들어준 브라우니도 먹지 않았나?"
박예림이 오전부터 신나게 도담과 해연 사람들에게 조각 크기로 포장된 브라우니를 나눠주고 다닌 덕분에 인터넷에 기사까지 떴을 지경이었다. 헌터들 사이에서는 이미 진작부터 도담 사육소 집으로 초콜릿 등의 부재료가 대량으로 공급되었다는 소문까지 돌았기 때문에 성현제도 대강 속사정은 짐작하고 있었다. 성현제의 물음에 박예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브라우니는 의리 초코로 만든 거고요, 아저씨 몫으로 한유현이 만든 건 당연히 따로 있죠. 단 거 많이 먹으면 안 좋다고 만드는 거 질색하더니 아저씨 전용으로는 알아서 레시피 조사해서 혼자 다른 거 싹 만들어 내놓는 게 진짜 여우....... 만렙 불여우......."
"아하."
"사진 있는데, 볼래요?"
동생 자랑할 일이 생기자마자 부활한 한유진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다양한 각도로 찍힌 동글동글한 트러플 초콜릿 사진을 보여주는 한유진은 이것을 받았을 때의 기쁜 기분을 떠올린 것처럼 살짝 들떠 있었다.
"우리 유현이가 손재주가 좋긴 해요. 이런 것도 레시피 좀 조사해보는 것으로 뚝딱 만들어 내니까. 맛도 엄청 좋았어요!"
"초콜릿의 식감을 살리는 데에는 온도 조절이 중요하지. 공주님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잘 했을 것 같긴 하군."
"그렇죠? 누구 동생인지 참 재주도 좋아요."
"그리고 이거 먹고, 박예림 양이 준 브라우니도 먹었을 거고, 여기에 소영이나 문현아 헌터가 가져온 초콜릿들도 먹고. 추측인데 도담이나 해연 직원들이 의리 초코라고 준 것들도 먹지 않았나? 그리고 그 덕분에 최소 한 끼는 건너 뛰었을 것 같은데, 맞나?"
"......감시 붙여놨어요?"
"한유현이 무려 한유진 앞에서 내게 입맞춤하는 폭거를 저지를 정도라면 그 정도는 했을 것 같아서."
백마디 말보다 더 확실한 표정으로 그 추측이 정답임을 대답해준 한유진이 슬쩍 눈을 돌렸다. 아이고, 소장님아. 문현아도 나직히 탄식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 다가온 송태원도 이건 편을 들어주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현제가 상자에서 무가당 요거트를 꺼내 스푼과 함께 한유진의 앞에 놓아주었다.
"공주님의 마음이 가득 담긴 초콜릿을 받고도 모자라 다른 사람들의 초콜릿까지 받고 다닌 욕심 많은 한유진 군에게는 이걸 드리지. 그건 그렇고 한동안 도담 사육소 집의 간식 반입이 엄격하게 제한될 것 같군."
"아, 역시?"
S급이라 간식 제한의 대상이 되는 일이 별로 없는 박예림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술이니 간식이니 이것저것 사들고 놀러오는 일이 종종 있는 문현아가 동정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한유진을 보았다. 성현제는 은근슬쩍 기대하는 눈길을 보내오는 한유진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 문제에 관해선 철저히 공주님 편이라네."
"뽀뽀까지 받았으니."
문현아가 히죽 웃으며 덧붙인 말에 송태원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기침을 했고, 한유진이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성현제는 그 손에 스푼과 요거트 그릇을 쥐여주었다.
"몸에 건강한 걸 먹고 있으면 공주님의 화가 좀 가라앉지 않겠나."
"......이거 전혀 달지 않은데요. 요거트는 원래 달고 그런 거 아니었어요?"
"무가당이라서. 그래도 무지방은 아니라서 잘 음미해보면 고소하고 진한 맛이 날 걸세. 내가 제빵할 때 쓰는 브랜드 제품이라 품질은 확실히 보장되어 있고."
그때 한유현이 우유와 컵을 담은 소반을 들고 돌아왔다. 성현제가 쥐여준 무가당 요거트를 우울한 얼굴로 떠먹고 있는 한유진을 보고 눈매를 살짝 누그러뜨린 한유현이 컵에 우유를 부어 주며 말했다.
"샌드위치도 먹어, 오빠. 저 설탕 덩어리들 먹는다고 저녁도 걸렀잖아."
초콜릿을 향한 분노와 적의가 당사비로 그득 담긴 목소리에 한유진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발렌타인 챙기자고 신나게 판을 벌렸던 박예림도 어색하게 웃었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한유현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내년에는 내가 제대로 챙길 테니까 올해는 여기까지 해. 슬슬 애들 재울 시간이니까 그건 나한테 맡기고. 박예림. 도와."
"네에."
그 자리에 모여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개만 까닥여 인사를 한 한유현이 박예림을 데리고 아이들이 놀고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현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한유진의 앞에 놓고 앉았다. 문현아와 송태원도 제각각 의자를 챙겨와 앉았다. 이건 이제 어른끼리 맘편히 놀라는 한유현 나름의 배려라는 것 정도는 이제 그들도 알 수 있다. 물론 자주 있는 건 아니고 엄청나게 드문 일이긴 하지만.
자리에 앉아 한유현이 가져다 놓은 우유 잔을 손에 들며 성현제가 말했다.
"공주님이 대강 한유진 군의 속셈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 같은데."
"유현이도 길드장이니까요."
한유진이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이번에 해연이 발렌타인 이벤트를 준비한다는 것은 물밑으로 은근히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간 매입한 적 없던 초콜릿 같은 부재료를 잔뜩 주문해 사들였으니 소문이 나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내내 이런 일에 관심이 없던 한유현이 이번에는 박예림을 거들어줬다는 이야기까지 바깥으로 흘러나갔으니 기회라고 생각해 나쁜 마음을 품은 놈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해연이나 도담 사람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요. 아무래도 험한 일과 거리가 먼 일반 직원들은 경계심이 약하잖아요. 나쁜 놈이 이용하려고 드는 것도 눈치 못 챌 가능성이 높을 거고. 다행이 저는 독과 저주, 양쪽 다 L급 저항 스킬을 갖고 있으니 제가 한 번씩 손을 대놓으면 집에 둬도 안전하니까요. 예림이나 아이들이 저렇게 신나하는데 거기에 물 끼얹는 짓 하고 싶진 않았어요. 예림이한테는 유현이가 나중에 넌지시 주의를 줄 것 같고요."
"예림이가 그런 면에서 경계심이 낮은 경향이 좀 있지."
문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박예림은 각성 직후부터 한유진을 후견인으로 삼아 해연의 보호 아래에 있었다. 게다가 보호자인 한유진이 L급 독 저항, 저주 저항을 갖고 있었던 탓에 해연 길드를 세우는 과정에서 여러 험한 일을 겪은 한유현에 비해 외부 반입 음식물 등에 대한 경계심이 낮은 편이었다. 한유현이 주의를 줘서 던전 공략 등의 일을 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지만 이런 사생활에 관련된 이벤트에선 종종 방심해서 허점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었다.
성현제가 가져온 야채가 가득 들어간 샌드위치를 우물우물 씹어 삼킨 한유진이 말했다.
"기쁘고 맛있어서 잔뜩 먹은 것도 있긴 해요. 유현이가 원체 금욕적이었던 탓에 이런 거 챙기고 싶어도 못 했다고 하는 해연 사람들이 제법 있더라고요. 제 손을 한 번 거친 거라면 유현이도 먹을 수 있고. 아, 소영 씨가 가져온 초콜릿 무스 맛있던데요. 성현제 씨가 소개해준 브랜드라면서요? 별이도 달고 부드러워서 좋아했어요. 애들 생일에 아예 그거 크게 한 판 주문할까 싶은데 나중에 소개 좀 시켜주세요."
"기꺼이 그러고 싶네만."
성현제는 아이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더 놀고 싶다고 칭얼거리는 한별을 안아드는 한유현에게 닿았다. 신나게 뛰어 놀아 가벼운 흥분 상태인 아이를 능숙하게 토닥여 진정시키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한유진을 돌아보며 활짝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공주님 허락부터 받고 그러도록 하지."
아주 당당하게 연인의 비위부터 맞추겠다고 선언하는 성현제의 모습에 한유진이 입을 딱 벌렸다. 문현아가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리고, 송태원이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와중 한유진이 엄청나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 사랑한다며! 사랑이 식었어!"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나온 가벼운 웃음소리가 옥상 정원을 뒤덮었다.
***
집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한유현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11시 30분. 예상보다 빠른 걸 봐선 자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메시지 확인을 하고 그대로 차를 돌린 게 분명했다. 날짜가 바뀌자마자 그냥 귀가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역시 메시지를 조금 늦게 보낼 걸 그랬다. 한유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성현제가 거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파에 앉아 있는 한유현의 모습을 확인하고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가 손에 쥔 휴대폰을 들어보이며 푸념했다.
"이런 서프라이즈는 이제 없을 줄 알았는데."
"저도 없을 줄 알았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연인 관계가 된 이후, 딱 한 번 성현제의 생일날 그런 메시지를 남긴 적이 있었다. 오빠와 화해한 뒤로는 그냥 같이 생일 파티에 참석하게 되어 그럴 일이 없어졌지만. 이번에도 박예림이 초콜릿 선물을 해보라고 열심히 등을 떠밀지 않았다면 그런 메시지를 또 남기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한유현은 인벤토리에 넣을 수 없어 그냥 들고 온 작은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당신 겁니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성현제가 쇼핑백을 열고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손바닥 크기의 정사각형 상자 안에 사각형의, 파베 초콜릿 네 개가 들어 있었다. 성현제는 고개를 들어 한유현을 보았다. 평소보다 약간 크게 뜨인 눈이 지금 그가 꽤 놀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직접 만든 건가?"
"먹지 않아도 상관은 없습니다. 연인 사이라면 그런 거 챙기는 것도 예의라고 박예림이 말해서."
"먹을 건데, 유현아."
안 먹을 리가.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는 성현제의 표정에 한유현은 손가락 끝이 약간 간지러운 것 같은 기분을 받았다. 오늘 오전, 자신이 준 트러플 초콜릿을 받고 기뻐하는 오빠를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게 낯설고 어색했다. 이 기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한유현은 살짝 눈을 내리깔며 화제를 바꿨다.
"오늘 도담 집에 들고 온 선물을 신경 써준 거 고맙습니다."
발렌타인 데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준비해 온 선물이 전부 다 초콜릿이 사용된 음식이었음을 확인했을 때는 정말 그대로 파티고 뭐고 다 갖고 돌아가라고 하고 싶었다. 한유진이 원하지 않을 걸 알았기에 참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강 그런 속사정을 짐작하고 있었을 눈치 빠른 남자는 한유현의 감사에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한유진 군의 상냥함은 그의 장점이긴 하지만, 그 탓에 무리하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지."
주위 환경이 안정되어서 이전처럼 무모한 짓을 하진 않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을 상대로는 여전히 자기가 약간 손해 보는 위치에 있는 편을 택하는 버릇이 남아 있었다. 그건 쉬이 고칠 수 없는 그의 천성이라 어쩔 수도 없었다. 작게 한숨을 쉬는 한유현의 앞에서 성현제가 초콜릿 한 조각을 집어들었다.
하얀 손가락에 갈색의 코코아 파우더가 묻어나는 것을 한유현은 약간 이상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옅은 색 입술 사이로 초콜릿이 사라졌다. 눈을 감고 혀에서 녹아내리는 초콜릿의 맛을 보고 있던 성현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정한 빛을 머금은 눈이 한유현을 보았다.
"맛있어."
"......그렇습니까."
그럼 됐다. 연인으로서의 사회적 의무는 다한 셈이니 박예림도 나중에 뭐라고 하진 않겠지. 목적을 달성했으니 돌아갈 생각을 하며 인사로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그에게 성현제가 초콜릿을 내밀었다. 내내 초콜릿 냄새에 시달려야 했던 한유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싫습니다."
"기왕 가져온 김에 한유현의 손으로 먹여줬으면 더 좋겠군."
"더 싫은데요."
싫다고 말하면서도 한유현은 성현제가 내민 초콜릿을 한 조각 집어들었다. 이런 일에 관심이 없긴 하지만 연인 사이의 이벤트라는 것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제 나름 예측이 가능해졌다. 정말로 본의는 아니었지만.
한유현이 집어 내민 초콜릿이 성현제의 입술에 닿았다. 새빨간 혀가 입술 사이로 빠져나와 핥듯이 초콜릿을 입 안으로 끌어당겼다. 코코아 파우더가 묻은 손가락을 감싸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한유현은 움찔 몸을 떨었다.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기며 손바닥에 입술을 묻으며 성현제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키스하고 싶은데. 유현아."
사실은 도담 집에서 만났을 때부터 계속 키스하고 싶었다고 속삭이며 성현제는 한유현의 몸을 잡아당겼다. 손짓 한 번으로 뿌리칠 수 있는 그 손길을 한유현은 거절하지 않았다. 테이블을 넘어 성현제의 무릎 위로 이동해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만족스런 얼굴로 자신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의 입술에 그의 타액으로 젖은 검지를 지그시 눌렀다.
"당신이 초콜릿 먹기 전이었다면 해줬을 겁니다만, 지금은 싫습니다."
브라우니를 만들기 시작한 날부터 오늘까지 초콜릿에 지긋지긋하게 시달렸다. 한유진의 몸에 안 좋아서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정말로 초콜릿 그 자체를 싫어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진심으로 질색하는 한유현의 표정에 성현제가 눈초리를 축 늘어뜨리며 짐짓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양치하고 오면 해주나?"
"그리고 앞으로 한 달동안 우리 집에 단 것 절대 반입 금지. 오빠가 졸라도 들어주면 안 됩니다. 한결이나 한별, 혹은 박예림의 부탁이어도 안 됩니다."
"그 외에는?"
성현제가 절실한 척, 키스를 허락 받을 수 있다면 간이라도 내어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크고 뜨거운 남자의 손이 허리를 은근하게 쓸어내리는 것을 의식하며 한유현은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스륵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남자의 하얀 얼굴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자 연한 색의 입술 사이에서 초콜릿의 냄새가 났다. 한유현은 박예림이 말해준 한 달 뒤의 또 다른 이벤트를 떠올렸다. 제과 업계의 상술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걸 왜 일일이 챙기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한 달 뒤에 다시 건강에 나쁜 설탕 덩어리들에게 시달리게 될 것은 거의 기정사실인 셈이다. 성현제는 물론이고 오빠가 발렌타인 초콜릿의 답례를 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 한숨을 삼킨 한유현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연인의 입술에 닿기 직전, 뚱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화이트 데이 답례는 달지 않은 게 좋겠습니다."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