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지, 소녀, 마법

 이른 아침에 일어나니 그녀가 어려져 있었다. 소파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잠든 모습이 퍽 안쓰러워 살포시 안아들어 침대에 내려주려다, 그제서야 그 앳된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작고 여린 몸에, 곤히 잠들어 발걸음을 내딛는 동안 품에 낯을 파묻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머리를 슬며시 쓰다듬어 주고는 침대에 눕혔다.  

 역시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는 깨우지 않는 편이 좋겠지. 아침이 이른데다, 나 또한 아직 잠이 덜 깨어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이 광경이 비현실적이었다. 

 어려진 그녀는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그럼에도 퍽이나 앳된 외모에, 안그래도 가벼운 몸이 더욱 가벼워져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귀여운 외모에 품 가득히 끌어안고 예뻐해주고 싶은 마음 뿐이었건만 그러다 깨어나면 퍽 당황할까봐 애써 참아낼 수 밖에 없었다.  

 어릴 적부터 사는 것이 고되어 평범의 소녀들 같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지 못했던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고등학생 무렵 부터는 자신도 일을 해야 했다던가. 그래서 오늘만큼은 어린 그녀에게 최고의 날을 선물해주라는 신의 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만약 꿈이 아니라면 예쁜 곳에 데려가 하루 종일 좋은 기억만 쌓아주고 싶었다. 소녀의 옆에서 잠들 순 없는 노릇이라,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쪽잠을 잤다가 그녀가 일어나기 직전에나 겨우 깨어났다. 허리가 뻐근해서 비척거리며 발걸음을 옮겨 간단하게 토스트나 해 주었다.  

 그녀는 일어나자 모르는 천장과 집과 사람에 놀라 오늘이 며칠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몇 번이고 물었다. 나는 날짜는 온전히 알려주었지만,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답변을 꺼렸다. 아는 사람이라 둘러대었을 뿐이다.  

 그녀를 식탁에 앉히고 노릇하게 구운 빵 위에 과일잼과 계란후라이를 얹어 주었다. 잠도 덜 깨고 상황파악도 덜 된 참에 작은 턱을 오물거리며 먹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반숙 좋아하시는 줄은 어떻게 아시고." 

 "밥 자주 같이 먹었으니까." 

 "… 맛있어요." 

 "잼은 네가 만들었어." 

 "어쩐지 맛이 익숙하더라." 

 웅얼거리듯 뱉어낸 말에 웃음이 새었다. 이후로는 놀러 가자며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그래도 외출이라고 예쁘게 꾸몄지만 그럼에도 어린 티가 나서 무척이나 귀여웠다. 남의 옷을 막 입어도 괜찮느냐 물었지만 입을 사람이 없는 옷이라 괜찮다 답했다. 어차피 네 옷이라는 말은 하지도 못 하고.  

 별다른 망설임 없이 유원지로 향했다. 많이 놀란 눈치였지만 그럼에도 즐거워하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웠다. 같이 놀이기구를 타고,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평소엔 전혀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이렇게나 응석꾸러기일 줄은 몰랐는데, 마치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느 소녀와 다를 바가 없어 보여 귀여웠다. 사실은 아내의 어린시절을 보는 것 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기념품점에선 동물 머리띠를 씌워주곤 퍽 귀여워 한참을 웃다가 자긴 어린아이가 아니라며 도로 내려놓기에 귀여운 키링이나 하나 사서 손에 쥐여주었다. 귀여운 것이 좋다며 환히 미소짓는 표정.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나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알까? 

 저주라는 상황과는 상반되게도, 무척이나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오래 걷는 것도, 사람 많은 곳도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행복하다면 나도 괜찮았다. 웃는 모습을 더 보고 싶다. 하루 종일 애정 어린 눈빛으로 즐거워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우리 둘의 사이에 관하여 질문했고, 나는 그럴 때마다 그냥 아는 사람이 둘러대었다. 납득은 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구태어 더 묻지는 않았기에 나 또한 생각하다 말기를 몇 번.  

 이 상황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지만 그럼에도 괜찮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태 본 어떤 모습보다 밝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동한다. 그녀는 오늘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까? 아니면 어려진 그대로 시간이 흐르게 될까. 어느 쪽이건 그녀가 행복하다면 별로 상관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지만. 개인적인 이기심이 그녀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이렇게 행복한 것을 본 적이 없는데도, 여태 네 행복만을 바랐는데도 그랬다. 모순이다.  

 그녀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보니 하루가 눈 깜짝할 새 지나가 버렸다. 하루의 마지막은 대관람차에서 보내기로 했다. 마주 앉아서, 그녀는 반짝이는 창 밖을 바라보고,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본다. 불꽃놀이며 퍼레이드며 반짝이는 모든 게 조명인가보다. 그녀의 눈이 형형색색의 별을 담은 듯 빛났다.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란, 이렇게나 아름다운 것이던가. 그녀가 어린 나이에 포기했어야 할 평범한 일상과 행복, 그리고 웃음. 어두운 표정 뿐이던 사진만 보다 이렇게 밝은 표정을 보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내가 아는 그녀는 은근히 감정을 절제하는 모습을 늘 보였다. 이런 밝은 모습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 

 "저기요." 

 얼마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녀가 문득 내게로 시선을 옮긴다. 부르는 목소리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며 가만 눈을 마주본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보석 같고, 하얀 피부는 마치 조각 같다. 눈을 두어 번 정도 느릿하게 깜빡였다. 경청하고 있다는 표시, 그리고 무언의 응답. 

 "키스하면 이 마법도 풀리지 않을까요?"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순간 마음이 동했다. 품 안으로 가득히 끌어안고 사랑한다 해주고 싶다. 입술을 얹는 것 만으로 이 저주가 풀린다면 몇 번이라도 해줄 수 있다. 그녀가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과연 내가 여기서 입맞춤을 해 주는 것이 옳은가? 그래도 이 상태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앞으로 이 소녀에 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살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를 애써 자리에 앉히기를 두어 번. 너는 지금도,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 반한 것일까. 네 말에 나는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살살 저었다. 하루 종일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무의식에 손을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지만, 그건 내 마음일 뿐 네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녀가 내게로 다가온다면 거부하지는 않으리라. 그저 기쁜 마음으로 순간을 느낄 것이다. 모든 순간의 그녀에게 사랑받았다는 행복을 느끼며. 이 사이는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고, 필연이었던 것이라 믿을 것이다.  

 "왜, 동화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키스하면 저주도 풀리잖아요." 

 "…어린애가." 

 취향도 한결같지, 그 말은 삼켜내었다. 문득 내게 자신의 모든 순간이 나를 사랑할 것이라 말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할 말을 잃고 실소나 흘리고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것이던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피했다. 이런 초라한 사람이 뭐가 좋아서 그녀는 몇 번이고 내게 반하는 걸까 궁금했다.  

 의식도 못 하는 새 그녀가 몸을 슬며시 일으켜 내게로 낯을 들이밀었다. 여전히 짐짓 고개를 돌린 채로 시선을 피했다.  

 "나 봐줘요." 

 그녀가 그리 말하고는 뺨에 손을 얹어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익숙한 구도다. 따스한 체온이 뺨으로 닿아오자 눈을 슬며시 감아버렸다. 이 순간이 끝나면 그녀는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인가. 여전히 불확실한 것 투성이였지만, 곧 그녀가 제 입술로 내 입술을 꾹 덮쳐누르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무력이다. 운명의 장난에 빠져버린 무능한 인간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내게 신이고 세상인 것이리라.  

 숨이 섞이고 체온이 이어진다. 그녀의 뜻대로 이 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이렇게나 바라고 원하고 있는데 어떻게 도망칠 수 있겠는가. 귓가에서 들려오는 불꽃놀이의 폭음이 웅웅거리며 울렸다. 선명히 들리는 것은 오로지 섞여드는 숨소리 뿐이었다. 그녀의 손 위로 살포시 내 손을 포개고 꼭 맞잡았다. 눈을 뜨는 것이 두렵다.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으면 어쩌지. 걱정이 속을 가득히 메운다. 

 마침내 입술이 떼어내 질 적에야 감은 눈을 느리게 떴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내가 아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는 것만 같았다. 그에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돌아왔네." 

 "다행스럽게도." 

 "취향이 참 한결 같던데." 

 "다정하게 챙겨주고 예뻐해주는데 안 반하고 배겨요?" 

 "또 내 탓이라 이거군."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네가 이렇게나 사랑스럽지 않았다면 나도 네게 모든 것을 바치기라도 하듯 사랑해주고, 다정하게 굴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서로에게 빠져들었을까. 세상에는 운명이라는 게 정말 있는 모양이야.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겨 꼭 안은 채 짧게 입술을 얹었다 떨어졌다. 입술을 얹기 전 찰나 선명히 보인 표정은 행복한 미소였다. 

 "바보 같으니라고." 

 여전히 품에서 놓치 않은 채로 귓가에 살며시 말을 뱉고선 고개를 푹 숙였다.  

 내겐 이 품만이 다정이었듯, 네게도 내 품이 애정이자, 상냥함이길 늘 바라고 있었다. 오늘로 그 바램이 확실하게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느낌이라 기분이 붕 뜨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나 바보같이 사랑할 수가 있을까.  

 "당신이 예뻐해주면서 그렇게 말하면 곤란한데."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리 말하고서는 내 손을 잡고 관람차에서 내렸다. 곧 유원지가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그녀의 손에 이끌리다시피 하며, 멍하니 그 작은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작고 여린 몸이지만 그럼에도 위태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신기했다. 달라진 것은 전혀 없는데 모든 것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오늘 어린 너는 행복했을까?" 

 어느새 도착한 놀이공원의 입구에선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렸고, 폐장시간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나는 이 손을 놓으면 그녀가 그대로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 처럼 꼭 붙잡은 채 그렇게 말을 뱉었다. 

 "평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을 거에요. 고마워요." 

 환하게 미소짓는 표정에 순간 소녀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그러나 오늘 종일 본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애정이 가득한 눈빛, 나를 사랑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거대한 사랑이다. 

 "앞으로도 자주 데리고 와 줄게." 

 그러니 앞으로도 내 곁에서 행복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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