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

[솔부] 나의 바다

나의 노래, 나만의 너

248 by 사금

퇴고X - 요소 주의

아주 먼 옛날, 인어는 인간을 보고 첫 눈에 반한다. 하지만 외사랑임에 슬퍼했다. 어떻게 해야 인간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궁리하던 인어는 좋은 수를 떠올렸다. 자신의 노랫소리로 인간을 홀리는 것. 그렇게 인간을 손에 넣은 인어는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깊고 깊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해 속으로. 하지만 인어는 인간이 물 속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차마 알지 못했다. 그렇게 바다가 인간의 심장을 삼키고, 인어는 오래도록 울며 절망했다. 그리곤 인어는 수면 위로 올라와 인간을 위한 노래를 영원히 부르짖었다.

/

언제 어디서나 바다가 보이는 시골 마을. 나는 어머니를 따라 이곳에 왔다. 유명 작가인 어머니는 나를 낳고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하셨다. 그래서 요양차 이 마을에 왔지만, 정이 들어버린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갓난아기와 함께 새로이 정착했다. 늘 그렇듯, 사람들은 남의 집 사정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물어보기 일쑤였다. 주로 남편의 부재나 양육 능력에 대해서. 하지만 간섭이 아닌 유의미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을 어머니는 잘 아셨다. 실제로 주민분들은 홀어머니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고, 이따금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나를 돌봐주시기도 했다.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로 나의 무료함을 달래주셨는데, 그중에는 어디에나 있는 자잘한 미신부터 고유성을 띠는 전설도 있었다. 특히 내 흥미를 끈 것은 인어에 관한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바다를 좋아하던 나는 바다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눈길을 주게 됐다. 한때 해양학자를 꿈꾸던 나로선 넘겨듣기 힘들 정도였다. 하도 졸라대는 나 때문에 어머니는 인어 전설을 동화책처럼 읊어주시곤 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으레 평범한 어린아이들처럼, 인어를 만나보고 싶었다. 바다를 헤집어 다니는 인어는 얼마나 아름다울지. 또 그 노랫소리는 얼마나 감미로울지. 과연 인어와 사랑에 빠진 인간은 어떤 마음이었을지도 궁금했다. 한창 호기심이 넘치던 소년은 어머니와 마을 어른들에게 매달려도 그럴싸한 답조차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어린아이의 마음을 자극하는 계기가 됐으리라. 그 당시 내가 인어를 볼 수 있었던 건 고작 애니메이션이나 동화책이 전부였다. 다들 알 법한 빨간 머리의 인어공주는 제 모든 것을 바쳤으나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물거품이 된다. 나는 마을 전설 속 인어를 떠올렸다. 이 인어도 물거품이 되었을까? 나는 그가 잘 살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잘 살아서 새 사랑을 찾길 바랐다. 이왕이면 같은 인어로. 힘든 과거를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길 빌었다.

물론 지금은 인어가 한낱 전설이라는 것을 안다. 아직 그런 것에 푹 빠져있으면 철없다는 소리를 들을 나이였다. 나는 바다 노을을 좋아했다. 노르스름한 바닷물에서 어릴 적 들었던 신비로운 존재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을 즐겼다. 그날도 나는 여느 때처럼 바위 위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이 바위는 집 근처 바닷가 구석에 있는 작은 절벽과 이어진 것인데,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아 나만의 명당으로 삼아왔다.

나는 그날따라 유난히 붉은 노을에 취해 늦게까지 머물러 있었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려던 찰나, 어디선가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누군가 절벽에 기대어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가까이 다가간 순간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사람’이긴 했다. 다만 물고기의 하체를 가진. 그것은 인어였다. 나는 인어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다. 마을 어른들께서 입술이 마르도록 말씀하셨던 전설에 대해서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바위 뒤에 숨어 인어가 나를 발견하지 않도록 숨죽이기만 했다.

나는 단언한다. 인어의 노래를 들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를 사랑하고 말리라. 인어가 노래를 끝마치고 모습을 감출 때까지, 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에게서 귀가를 닦달하는 전화가 걸려 올 때까지 진정하지 못했다. 인어는 아마 나를 보지 못했을 테다. 그의 노래를 훔쳐 들었다는 사실 이전에 인간에게 호의적인지조차 알 수 없으니, 일단은 존재를 숨기는 것이 좋을 듯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인어의 노래는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저녁 식사를 하고 방에 들어와 숙제를 하면서도, 잠시라도 그것을 지우기 위해 이어폰을 꽂아봐도, 하다못해 게임을 해도 세이렌의 목소리는 나를 자꾸만 심해 속으로 끌어당겼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들고 와도 그 음색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무언가에 이 감정을 덧대기란 그 어떤 난제보다도 어렵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내일도 인어가 올까? 그곳에서 또 노래를 불러줄까? 나는 생애 처음 기도를 한다. 인어를 다시 만날 수 있길. 부디 나를 다시 홀려주길.

나는 매일 인어를 기다렸다. 인어는 종종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났다. 정해진 주기가 있는 건 아닌 듯했다. 매일 기다리다 보면 하루는 나타나 얼굴을 비춰주었다. 인어가 부르는 노래는 어떤 가사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마 내가 모르는 국가의 언어거나 인간의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따라 부를 수 없는 영어 노래조차 잘 듣고 즐기지 않는가. 남들이 본다면 차라리 녹음하라 할 테다. 나라고 그 생각을 안 했겠는가. 그러나 파도와 바람이 깔아주는 반주까지 완벽히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현장에서 들어야 하는 이유와 같다. 현대 문물로는 마치 별을 직접 움직이는 듯한 음색을 감당할 수 없다.

남몰래 인어를 사모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날도 바위 뒤에 숨고서 기다리고 있으니, 인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숨죽여 노래를 듣고 자리를 뜨려는데 별안간 인어가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지 않는가. 처음에는 우연히 방향이 겹친 줄 알았으나 인어와 시선이 마주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놀라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그걸 본 인어가 손을 뻗는 순간 서둘러 몸을 일으켜 도망쳤다. 나는 그대로 집까지 달렸다. 사색이 된 얼굴로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 있던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며 땀을 닦아주셨다. 그 짧은 거리를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이마는 식은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병원에 안 가도 되냐며 재차 물어오는 어머니를 뒤로한 채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한동안 바다에 가지 못했다. 그렇게 들켰으니 아마 인어도 오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인간에게 호의적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노래를 몰래 훔쳐 들었다고 화가 나진 않았을까? 내 꿈에 찾아와 저주를 내리지 않을까? 정체 모를 공포심이 머리를 휘저었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열감보다는 몸이 축축 처지고 무기력한 기분이었다. 머리가 잠겨 아무런 기능도 할 수 없었다. 간혹 어머니가 찾아와 열을 재거나 미음을 먹여주셨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앓으니, 눈앞이 조금 개운해진 듯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바다에는 갈 수 없었다. 이대로 끝임을 단정지어서 그런 걸까. 인어의 노래가 듣고 싶어 미칠 것 같았지만 그만큼 발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된통 아픈 이후로 자꾸만 멍해지는 아들 때문에 어머니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옴짝달싹 못 하다 겨우 하시는 말씀이, 내가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단다. 요즘은 바다에 가지 않으니 사고를 당할 걱정은 덜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하셨다. 확실히 통 기력이 없어 분위기가 처져 있긴 했다. 하지만 심각하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니 나는 내가 상사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내가 인어와 사랑에 빠졌다고? 정확히는 인어의 노래겠지만. 짝사랑도 상대 나름이지. 이건 분명 금단현상일 테다. 잊으려고 노력하면 나아지겠지. 안이한 생각을 한다.

그렇게 괜찮아질 거라며 자신을 다독였지만, 문득 마지막으로 노래를 듣고 싶어졌다. 새해 기념으로 단절을 결심했지만 정작 미련이 남아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는 마음과 같았다. 이번에는 늘 몸을 숨기기만 하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바람조차 여전한 바다는 나에게 매서운 파도를 보냈다. 발이 닿을락 말락 아슬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나는 첨벙이는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저 멀리서 무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인어임을 단번에 알아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뻔뻔하게 다시 찾아온 꼴을 우연히 봤겠지. 역시 화를 내러 온 걸까? 그래서 정말 나에게 저주를 내리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어에게 사과의 말을 전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인어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몸을 물렀다. 인어가 어떤 의도로 다가오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가 주먹을 휘둘러도 군말 없이 맞아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래도 피하고는 싶지 않은가. 이왕이면 그가 온화하여 내 사과를 잘 받아주면 좋겠다.

이제 우리는 서로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하지만 인어는 나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나를 방심시키려는 속셈이 아닐까? 허튼짓을 하면 호되게 당할까봐 눈치가 보여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고요한 파도 속에 일방적인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쯤 되면 인어가 먼저 입을 열어주지 않을까 생각이 들 즈음, 그는 성큼 다가와 내 발목을 턱 잡아챘다. 나는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속수무책이었다. 그저 차가운 바닷물이 내 몸을 옭아매지 못하도록 발버둥 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 인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나를 죽이려는구나. 자연스럽게 낙담하는 순간, 부유하던 인어는 내 얼굴을 붙잡고 대뜸 입을 맞췄다. 공기 방울 같은 것이 강제로 넘어가면서 꽉 막힌 호흡이 순조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수영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 빼고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저 어리둥절한 나를 보는 인어가 있을 뿐. 인어는 내가 가라앉지 않도록 손을 꼭 잡아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러운 와중에 인어가 입을 열었다.

인간 아이야.
그러고 보니 나는 인어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는 게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평소에 내는 목소리는 노랫소리와 다를 테니.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다와 공명했다. 내가 들어온 미성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갑자기 끌고 와서 미안해. 내 숨을 나누어줬으니 한동안 괜찮을 거야.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인어는 처음부터 날 알고 있었다고 했다. 대체로 인간을 믿지 않지만, 나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아서 가만 놔뒀다고 한다. 조용히 노래만 듣고 돌아가는 내 모습에 점점 경계심을 거뒀고 조심히 마음을 열고 있었단다. 매우 중요한 순간임에도, 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가령 내가 어떻게 인어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지. 인어는 어떻게 인간의 말을 구사할 수 있는 건지. 아니면 그가 내뱉는 언어가 인간의 것이 아니고, 내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게 된 것일지도 모르지.

내 노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아. 인어는 화내지 않았다. 저주를 내리지도, 나를 죽이려 하지도 않았다. 나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속이 울렁거려 참을 수 없었다. 눈물인지 뭔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그동안 몰래 들어서 미안해. 네 노랫소리를 우연히 들었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잊을 수 없었어.
계속 듣고 싶었어. 인어는 내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정말 기뻐 보였다. 양손을 잡고 세차게 흔들기도 했다. 자신의 노래를 좋아해 준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이런 소리를 마다하다니. 전부 귀가 어떻게 된 모양이지. 나야말로 인어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얼마나 그렸는지. 지독하게 중독된 나를 알아주길 바랐다.

한참을 서로만 갈구하던 우리는 인어가 나누어준 숨이 동나고 나서야 헤어질 수 있었다. 인어는 나를 바닷가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천천히 멀어졌다. 모습을 바로 감추진 않았다. 뭍에서는 인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노래는 예외인 듯싶었다. 입이 짧게 벙긋댄다. 아마 잘 가라는 말을 하나보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인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사라졌다. 그제야 내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대강 털고 옷자락을 꾹 쥐어짰다. 어머니에게는 발을 헛디뎠다고 둘러대면 될 테다. 휴대폰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철퍽이는 신발을 벗어든 채 집으로 향했다.

역시나 어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셨다. 덕분에 추위에 덜덜 떨리는 몸이 조금 따듯해졌다. 짭짤해진 옷가지들을 들고 끊임없이 구시렁대시는 어머니를 뒤로한 채, 나는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끝마치고 노곤해지니 자꾸만 눈이 가물거렸다. 아늑한 침대. 소중한 침대. 나는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서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겼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남모를 비밀에 기뻐했다. 마치 언젠가 보았던 핏빛처럼…인어의 눈동자에 비친 붉은 노을. 아니 노을보다 더 짙은. 함부로 마주하면 순식간에 빠져버릴 듯한 심해. 나는 알 수 없는 바다의 밑바닥. 나는 잠에 들기 직전까지도 그와 견줄 법한 온갖 수식어를 떠올려본다. 마음에 인어를 가득 담고, 그 어둡고 또 붉은 색을 곱씹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우리의 바다에 인어와 함께 있는 꿈. 그는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지만 매우 행복해했다. 우리는 서로를 놓지 않았다.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그날 이후로 인어는 매일 나타났다. 나는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바다를 찾았다.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이야기했고, 인어는 종종 노래를 불러줬다. 내가 들어온 것과는 다른 노래였다. 아름답기는 매한가지라, 나는 취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로에게 점점 빠질수록 나는 일상을 잃었다.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니 친구들과도 소원해졌다. 하루 종일 잠식되어 그만이 유일하고 진정한 행복인 것처럼 굴었다. 어머니는 그 변화를 분명 알아채셨으리라. 하지만 아무 말씀도 없으신 걸 보면 으레 겪는 사춘기처럼 생각하시는 듯했다.

나는 종종 꿈을 꾸었다. 우리의 바다에 인어와 함께 있는 꿈. 그는 나를 매번 다른 이름으로 불렀지만 매우 행복해했다. 우리는 서로를 놓지 않았다. 그렇게 깊숙이, 더 아래로….

나는 인어에게 꿈에 대해 말했다. 인어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곤 별거 아닐 거라며 주제를 넘긴다. 나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인어는 은근히 나를 더 붙잡아두려고 했다. 친구가 떠날까 봐 초조하고 두려운 게 아니었다. 정말로 붙잡아두려 할 뿐이었다.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여러 핑계를 대며 나를 더 오래 머물게 하거나, 평소보다 더 일찍 만나기를 종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하루는 나를 붙잡는 인어를 밀어내다 말다툼이 일어났다. 나라고 헤어지고 싶겠는가. 그렇지만 인어만큼 가족도 중요했다. 어머니의 생신을 맞아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날이었다. 늦으면 안 된다며 일어나는 나를 인어는 절대 놔주지 않았다. 곤란해하는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지. 그가 그깟 핏줄이 나보다 더 중요하냐고 소리치자, 나는 기어이 인어를 뿌리쳤다. 잠시 정신이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눈이 멀었어도 이러진 말걸. 하지만 인어가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아마 내 삶에서 그를 떼어낼 수 없을 텐데. 별것 아닌 일로 그를 잃는 건 싫었다. 다행히 내 기분 하나로 어머니의 생신을 망치진 않았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다짐했다. 내일 인어와 제대로 이야기해야겠다고.

다음날 인어는 나타나긴 했지만, 잔뜩 토라진 얼굴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그를 겨우 설득하여 대화에 성공했다. 인어는 인간과 달라 핏줄에 애정을 가지지 않는다고 했다. 짝을 이루고 번식을 해도 자식을 별개의 개체로 인식할 뿐. 인어는 감정이 섣불러 말실수를 한 것 같아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사실 자신도 마음이 좋지 않았단다. 울상인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또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인어에게 가족이란 존재에 대해 설명했다. 솔직히 인어는 이해가 안 간단 표정이었지만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히 이해시키기란 불가능한 것 같아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 후 인어는 내 앞에서 말을 고르곤 했다. 적어도 의식은 해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는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우리의 바다에 인어와 함께 있는 꿈. 인어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눈앞이 깜깜해지고, 폐가 부풀어 오르고, 심장이 터질 때까지.

눈이 번뜩 뜨였다. 식은땀을 흘렸는지 이불이 푹 젖어있었다. 하지만 이 기분이 버겁지 않아 이상했다. 평소 이상한 꿈을 꾸면 인어에게 곧잘 이야기했지만, 오늘은 못 해줄 것 같다.

바다에 가는 발걸음은 늘 가벼웠지만 오늘은 마음마저 가벼운 기분이다. 벌써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다. 보여줄 것이 있다며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보자는 인어의 부탁이 있었다. 쌀쌀한 바닷바람이 몸을 툭툭 치고 간다. 약속 장소도 조금 달랐다. 이번에는 바닷가에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먼저 도착한 나는 털썩 주저앉아 인어를 기다렸다. 뭘 보여주려는 걸까. 저 수면 위에서 튀어나와 재롱이라도 부리려 하나 장난스러운 생각이 든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 아이야.
처음엔 헛것을 들은 줄 알았다. 인어를 향한 내 마음이 너무나 각별해 기어이 환청까지 듣나 했다.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인어였다. 다만 생선 꼬리가 아니라 두 다리를 가진 채. 나는 인어의 다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인어는 아직 서툰 움직임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발이 꼬여 넘어질 뻔한 찰나에야 나는 벌떡 일어나 인어를 잡아주었다.

너와 함께 모래를 밟아보고 싶었어.
인어는 부끄러운 듯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나는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는 수많은 말을 꾹 삼킨 채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어느 정도 다리에 익숙해진 인어와 뛰어다니기도 하고, 바닷물을 튀기며 장난치기도 했다. 그렇게 풋풋한 연인처럼 한때를 즐기다, 갑자기 인어가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며 어느 곳을 가리켰다. 높은 절벽이었다. 자신은 언제나 바다를 올려다보기만 하니, 한 번쯤은 반대가 되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나와 인어는 바다를 넘어섰다. 저 먼 수평선까지 한눈에 보이는 절벽 위. 그 밑으로는 파도가 힘차게 부딪힌다. 인어는 밤바다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그런 인어를 기분 좋게 바라봤다. 인어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풍경이니 신기할 법도 했다. 시골이라 그런지 깨끗한 밤하늘에 별이 차르르 쏟아졌다. 인어가 내 손을 살며시 잡아 오며 고맙다고 말했다. 손가락이 얽히고, 우리는 바닷바람 속에 갇혀 서로 뿐인 것처럼 굴었다.

인어는 아예 몸을 돌려 날 끌어안았다. 양팔로 허리를 감아 빈틈없이 달라붙는다. 부드러운 체온이 당연하면서도 낯설었다. 나는 잠시 당황했으나 굳이 떨쳐내진 않았다. 순수하게 놀랐을 뿐이다. 아무래도 나는 뭐든지 서투른 나이고, 애정이 담긴 신체 접촉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그의 등에 손을 올려 가볍게 안았다.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거지? 인어가 물었다.

응. 나는 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대답했다.

인어는 행복한 웃음을 흘렸다. 이미 단단한 포옹이 더 굳세졌다. 우리는 맹세했다. 절벽 끝에서. 무심코.

서로를 끌어당긴 몸이 기우뚱,

하늘이 뒤집히고,

바다에게 잡아먹힌다.

그 일련의 순간에도 인어는 날 놓지 않았다. 내 안의 모든 숨이 빠져나갈 때까지도. 내 눈이 다시는 떠지지 않을 때까지도. 바다가 내 심장을 삼킬 때까지도. 꼭 끌어안은 채 깊숙이, 더 깊이, 바다조차 닿을 수 없게, 가라앉았다.

이제 헤어지지 말자, 한솔아.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커플링
#솔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