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궁주 is dead (2)
철권 무협 AU
빙정은 빙궁의 보물이자 빙공을 쓰는 이들에게는 어떤 영약보다도 가치가 높다고 알려져 있다. 그 이상으로 알려진 정보는 없었다. 얻어가는 정보가 많을수록 경계해야 함이 맞지만, 혼비백산하며 문 안으로 들어가는 장로들의 모습을 보면 시종이 전한 말이 사실이라고 볼 수 있었다.
"장로님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얼어있던 시신이 이제 녹아서 사인을 자세히…."
"얼음이 그냥 녹았다고!? 거짓말하지 말게!"
"예? 당연한 거 아닙니까. 엄청 추운 데에서 들 추운 곳으로 옮겼으니…."
"비키게!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장로들이 맞이하던 사람을 밀치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방 안의 시신은 스쳐 지나갔을 때보다는 혈색이 돌고 있었다. 그때가 서리가 낀 조각상이었다면 지금은 그나마 사람 같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장로님. 서리가 녹으면서 시신의 품 안에 종이 한 장이 발견되었습니다."
조사하던 이가 건넨 종이를 낚아챈 장로가 활짝 펼쳤다. 종이의 글을 읽는 동안 장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중에는 종이를 구겨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 그년이 저주를 날렸구나! 죽어가며 말한 게 저주였어!"
"설마… 1장로, 그 유언을 믿는 건가?! 자네가 먼저 코웃음 쳤으면서!"
"지금 저 종이 다시 펼쳐 보게! 잡것이… 잡것 주제에!"
꾸겨진 종이를 조심스럽게 다시 펼친 장로의 눈이 커졌다.
"'하… 하얀 사신이 눈보라를 이끌고 오리라'라니, 진심인가…?"
"아니 잠깐… 그년이 말한 유언이랑 똑같지 않나! 가장 먼저 심판을 받을 사람은 빙궁주라고!"
"유언이 진짜였다면 그다음 목표는…."
단어가 아닌 고심에 빠진 침음만 방 안에 맴돌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주의를 끌었다. 분노를 가라앉힌 1장로였다. 혼란에 빠진 눈동자가 일제히 그를 향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하얀 사신을 없애버려야 하네. 오늘 북해의 전력을 빙궁에 소집하지. 그놈이 얼마나 강하다한들… 머릿수를 이기진 못할 것이오."
방 안에 모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마주쳤다. 아까와는 다른 결의의 눈빛이었다. 그 광경을 끝으로 레이븐이 방을 나섰다.
멀리 떨어진 건물 지붕에 잠깐 몸을 숨긴 레이븐이 고심했다. 생각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직계와 방계, 빙정의 비밀 그리고 전대 빙궁주의 유언 속 하얀 사신.... 빙궁에 계속 있으면 분명 알아낼 수는 있겠지만 조금만 있으면 경계를 강화해서 드나드는 데에 어려움이 생길 터였다. 조사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레이븐이 빙궁 바깥으로 몸을 돌리려 할 때, 등 뒤에서 무언가가 날라왔다.
소매에 감추고 있는 암기로 쳐내며 뒤를 돌아봤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추적하기도 어려웠다. 다만 쳐낸 것이 적당한 크기의, 서신이 묶여있는 얼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레이븐이 얼음조각을 털고 서신과 함께 도망쳤다. 추적이 오지 않았다. 서신을 전하는 것만 목적임을 확인한 레이븐이 한적한 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접힌 부분을 펼쳐 글을 읽기 시작했다.
[이 글을 보고 있는 이라면 필시 외지인일 테지. 빙궁에 무슨 일이 있었고 무엇이 일어나려 하는지 알고 싶다면 아래의 소재로 오게. 내가 아는 모든 걸 알려주겠네.]
레이븐의 고민은 빠르게 끝났다.
북해에서 가장 바깥쪽, 민가와 설원의 경계에서 레이븐은 노인을 만났다. 단전을 폐했는지 내기는 없었지만, 여전히 장성한 육체를 보아 한때 무림인이었던 것 같았다.
"외지인에게는 매우 뜨거울 수 있네. 조심해서 마시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실 생각은 없었다. 앞의 노인이 얕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설보다는 본론을 말하는 게 나을 것 같군. 뭐가 궁금하나?"
"…전대 빙궁주에 관해 묻고 싶습니다."
팔짱을 낀 채 뒤로 등을 기댄 노인이 입을 열었다.
"잘 알고말고. 내 딸이었으니."
"!!!"
"…내 딸은 방계였네. 하지만 재능이 우수해 궁주 자리를 노릴 수 있었지. 방계 쪽 사람들은 입을 모아 방계의 희망이라 불렀어. 하지만… 어른의 욕심이 아이를 망쳤지. 내 아내는 어떻게든 자식을 궁주로 세우고 싶고 어릴 적에 많은 걸 누리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자랐어. …부모뿐만이 아니라 방계 전체가 말일세. 그렇게 자란 아이가 궁주가 되고 가장 먼저 뭘 했는지 아나? 제 어미를 설원에 버렸어. 아비는 단전을 폐해 내쫓았지."
김이 나는 찻잔을 잠깐 마신 노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직계도 방계도 모두 증오했어. 그래서… 이번 사태를 벌인 걸세."
"이번 사태라면, 빙궁주가 사망한 사건을 말하는 겁니까?"
"진짜로 죽었나? 하긴 그러니까 자네가 여기 온 거겠지. 어떻게 죽었나? 빙정이 숨겨진 빙굴에서 죽었지?"
"맞습니다."
"하, 하…. 그런가…. 그럼, 빙정으로 넘어가지. 빙정이 빙궁주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건 잘 알고 있을 걸세. 그 표현은 정확하네. 진짜 대대로 이어지니까."
"어떻게…."
"빙정의 소유주가 사망하면 시신에 서리가 끼고 얼어붙지. 이윽고 배꼽 부근에서 얼음이 천천히 생겨나며 그 끝에 아름다운 얼음 결정이 피어나지. 전 소유주의 내공을 빨아들여 아름다운 결정을 만들어내는 영약. 그게 빙정일세. 어떤가, 환상이 좀 깨졌나?"
"아니요… 그냥 정보가 많아서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그래, 그러겠지. 나도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 말이 많아졌어."
실실 웃은 노인이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럼, 다음으로 질문할 건… 하얀 사신인가?"
"예, 그것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전대 빙궁주, 아니 내 딸이 남긴 안배지. 사실 하얀 사신은 북해에서 아이들이 함부로 바깥을 돌아다니지 말라고 만든 것일세. 나중에 자라면 하얀 사신이 북해의 자연이라는 걸 깨닫지. 내 딸은… 그런 존재를 만들었네. 하얀 사신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존재를. …그래, 빙궁주가 죽었다면 빙정도 그놈 손에 들어갔겠지. 이젠 진짜 하얀 사신이 되었겠어."
"그런 힘을 만들 수 있는 겁니까?"
"도를 넘은 복수심과 집착이 있다면 만들어지더군."
"그렇다면 전대 빙궁주의 목적은… 설마… 빙궁의 절멸입니까?"
"…그렇네. 처음부터 그걸 목적으로 삼고 잡았어. 자신이 얻은 빙정까지 건넨다는 걸 상정하고."
말이 그이상으로 나올 수 없었다. 증오와 복수의 끝이 가문의 몰살이라고….
"지금쯤이면… 다 끝났겠군. 어느 쪽이든."
"!!!"
"자네가 거기 있었으면 자네도 화를 입었을 게야. 조금은 나에게 감사하게."
레이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도 김이 나는 찻물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는 잘 정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차 한 모금은 마시지."
"별로 좋아하진 않아서."
레이븐이 포권을 취하고 방문을 열었다. 찬 공기와 함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레이븐이 떠나자, 방은 끔찍할 정도로 조용했다. 하나, 이것이 평소의 삶이었다. 숨만 붙은 채로 하루하루 사는 삶. 다만, 지금은 상념에 빠지기 딱 좋은 적막이었다.
처음으로 하얀 사신을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창백한 피부와 검은 머리, 완성된 육체. 등장에도 동요하지 않고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금방 제압할 수 있다는 여유인지 명령을 기다릴 뿐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게... 내 딸의 꿈인가.'
딸이 마지막으로 보낸 서신에서, 그런 글귀가 있었다.
'…하얀 사신.'
그 말에 눈앞의 남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하얀 사신… 아니, 이제 이름을 바꾸지. 세르게이… 드라구노프. 다른 사람이 너에게 이름을 묻는다면 이제부터 그리 말해라.'
그의 눈동자에는 미약한 의문이 담겨있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빙궁을 돌아다닐 때, 거동이 수상하거나 이상한 사람이 있다면 이 서신을 줘라.'
작게 접힌 쪽지를 받은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모든 일이 끝나면 할 것이 있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중원, 중원으로 가라. 북해에 다시 돌아올 생각은 버리고, 중원으로 가서 살고 싶은 대로 살거라.'
'…….'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 반대편의 문을 열고 나갔다. 저 길을 따라가면 빙정이 숨겨진 빙굴에 도착할 것이었다.
노인의 시선이 침대맡으로 향했다. 단도 한 자루가 떨어져 있었다. 딸이 서신과 함께 보낸 물건이었다.
…딸의 꿈도, 북해 땅의 비극도 전했다. 이제 마땅히 써야할 곳에 쓸 수 있었다. 칼 손잡이가 손에 단단히 감겼다.
지붕에도, 길 위에도, 담벼락에도, 피 웅덩이에도, 시신에도 공평하게 눈이 덮었다. 마지막으로 발악하던 1장로도 마당에 내던져졌다.
눈이 온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숨 막힐듯한 지금이 반가웠다.
그렇게 잠깐 고요를 만끽하면 정신이 맑아졌다. 이제 가야 할 곳은.
"…중원."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를 들을 사람은 없었다.
[빙궁주 동사 사건 북해 빙궁 혈사
- 철저하게 준비된 계획으로 주모자는 전대 빙궁주.
- 빙궁주와 함께 빙궁에 상주하던 직계, 방계 절멸. 북해 권역에 대한 통치권 상실.
- 혈사를 일으킨 인물은 '하얀 사신'으로 추정(실제 이름이 아닐 가능성 염두). 흔적이 없고 소재지 불명. 파악이 가능한 것은 빙공을 사용하는 인물.
이상으로 조사를 마칩니다 - 레이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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