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의 연인들
ㅍ님 실제 커미션 / 내용 지정 / 1차, GL
실내의 연인들
241110 ㅍ님 커미션
창밖으로 무음이 쌓였다. 발코니 난간에 겹겹이 포개어진 흰 층을 보고서 N은 고개를 돌렸다. 겨울의 단점이라면 숱하게 꼽을 수 있겠으나 조용한 계절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눈은 꽤 괜찮은 흡음재였으니까. 추위와 눈은 문을 굳게 닫도록 만들었고, 사람들을 집 안으로 들여보냈으며, 저 바깥의 모든 ‘제 것이 아닌’ 소음으로부터 그를 차단했다. 대단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도 일 년의 일부 정도는 기꺼이 수용할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상념 사이로 커피 머신이 작동의 완료를 알린다. N의 손이 테이블을 가볍게 한 번 두드렸다.
밀크 저그를 적당한 위치에 배치하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깔끔히 스팀한 우유를 커피 위에 붓는다. 종류는 가리지 않는다지만 오늘처럼 창문 틈새로 냉기가 새는 날에는 따뜻한 음료를 마실 필요가 있었다. 꽉 찬 머그잔을 들고서 소파로 다가가면 작게 들려오던 TV 소리가 확연히 선명해진다. N은 한쪽 자리에 걸터앉으며 입을 열었다. 컵 안의 내용물이 흔들렸다.
“그렇게 재밌어?”
물음 뒤로 상투적인 문장을 읊는 연예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뻔한 광고 CM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그대로 대답이 돌아왔다. “아뇨, 그다지.” 대꾸하는 M의 어조는 평탄했다. 그 말에 괜히 N도 TV 화면으로 눈길을 한 번 던진다.
“꽤 열심히 보고 있길래.”
“딱히 볼 게 없어서요.”
“그럼 꺼도 괜찮잖아.”
“커피 내리시는 동안에는 방해 안 하려고 했어요.”
M이 제 몫의 잔을 흔들어 보인다. N의 것과 대조적으로 3분의 2쯤 비워진 안에서는 얼음이 이미 반쯤 녹아 있었다. 추운 겨울날 N는 홍차를 타 마시지도, 그 안에 얼음을 가득 넣지도 않았으니 순전히 M을 위한 음료였다. 그렇다고 커피를 즐기지 않는 M이 라떼를 능숙하게 내리기도 어려우니 최소한 방해는 하지 말자는 겸허한 심리였으리라. 정작 집주인은 그런 기특한 일을 바라지는 않았다는 사실만이 작은 미스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N은 눈을 도르르 굴렸다.
일찍 해가 저문 겨울날의 바깥은 이미 흑백이다. 조용한 실내에 M이 함께 있다는 사실은 N을 달갑게 했으나,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 마냥 존재만으로 만족하기가 어려웠다. 추워. 작게 속삭이자 M이 곁으로 조금 더 붙어 앉는다. N은 다시 기뻐진다.
너는 춥지 않아? 저는 과장님만큼 체온이 낮은 것도 아니니까요. 별 무게 없는 이야기들이 부유한다. 두 사람의 대화 사이사이로 TV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렸다. 그들의 목소리도, 기계음도 십수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맴돌다 사라진다. 바깥의 소리 또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함박눈에 파묻힌다. 유리된 공간이 꼭 하얀 격리실 같다고, N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단절이 싫지 않았다. 연결의 차단이란 으레 완벽하고 오롯한 보존을 의미하므로. 광고가 끝난 채널에서는 이제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남성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진다. 금일, 전국적인 강설이……이시카와 현을 비롯한 지역에서는 도로 정체가……. 어쩌면 아무래도 좋은 소식들. 바깥의 이야기. 라떼 잔이 달칵, 하고 낮은 테이블에 놓였다.
“M.” 부름에 M이 이쪽을 본다. 앞서 그의 시선은 짧게나마 창문을 향해 있었다. 까만 밤하늘을 보면 바깥에 눈이 얼마나 쌓였는지 대강 유추가 가능했다. 그들이 있는 지역에는 폭설이 내리지 않았으니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어느덧 라떼는 반이 비워졌고 얼음은 모두 녹았다. 밤은 충분히 깊었다. 그러나 N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손을 뻗는다.
“오늘은 가지 마.”
그냥 여기에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는 살살 달래는 것 같기도, 시무룩하게 보채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은 춥고, 눈이 많이 내리고, 이 집은 한 사람에게 조금 넓으니까. 그는 제 연인을 조금 조르고 싶었다. 그건 비단 귀갓길이 염려되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들 인생에는 여백이 많다. 한 사람의 인생을 다른 사람으로 완전히 채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었다. 여백이 발에 채는 이 공간도, M이라는 사람이 있으면 조금은 해소될 것만 같았다. N은 단순히 빈 구석을 채우려 드는 게 아니었다. N은 ‘M’을 그득그득 채워보길 원한다. 물론, 그것이 고작 하룻밤만으로 되지는 않겠으나. 그는 이따금 궁리한다. 내내 저 안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 심해를 어떻게든 인생의 곳곳에 넣을 수 없을까. 그럼 단순히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사람’을 향유한다는 행위가 달성되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해. 그러니 함께 있어줘. 삼십여 분 넘게 달려야 할 빙판길은 미끄럽잖아. 분명 한참 막힐 거야. 어두운 밤에는 사고가 날지도 몰라…….
N이 차가운 몸을 감싸 안는다. M은 눈을 깜빡였다. 그의 연인은 이따금 투정하는 어린애 같은 면이 있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받아주어야 적절할지는 그 역시 아직 모른다. 다만, 그래도. 곁을 내어주는 건 으레 사람을 원하는 가장 태초의 방식이라서. M은 대답 대신 N를 마주 안았다. 닿은 체온이 차츰 미지근해졌다. N은 눈을 감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
창밖으로 눈이 쌓여간다. 그러나 창 안의 그들과는, 무관한 겨울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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