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밤의 사람

放浪 by 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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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에 고독함을 끼워 넣는다. 세월이 묵을수록 희미해져 가는 이름은 본연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에겐 남은 단어가 없다. 과거의 활자들을 고통스레 뜯어낸 채 새로 채운 자음과 모음은 단순화된 개체를 일컫는다. 그리 ■■■이 지워진 자리엔 마법사만이 홀로 남았다. 단정한 머리 위에 큰 모자를 뒤집어쓰고 땅에 끌리는 망토를 몸에 둘렀지만, 맨바닥을 밟는 족지는 도드라진 뼈와 근육을 그대로 드러낸 채 발자국을 남겼다. 독이 발린 화살을 기다리듯 흉이 낭자한 아킬레스건을 보이며 마법사는 무의미한 발소리를 냈다.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습한 온실에서의 첫 만남으로 출력되는 자막은 새로운 칭호에 덩굴을 엮었다. 가시 따위 없는 매끈함에도 불구하고 칭호라는 두 글자로 사지를 단단하게 엮은 줄기들은 자아조차도 옭아매는 것만 같았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뒤에야 가지는 공백 속에서 마법사는 맨발에 대치되는 유리구두를 새벽 밤의 눈에 처음 담았을 때를 회상했다. 지나간 장면들을 되새김질하며 마법사는 허상의 깃털을 뽑아 그 끝에 다 썩어가는 제 검은 피를 찍었다. 움직임 없는 혈관처럼 흐릿하게 바래지는 세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며 반듯하게 쓴 날짜 아래로 마법사는 첫 번째 얼굴을 적었다. 일종의 희망이었다. 평면 속에선 똑같은 아침과 밤이 흘렀지만 순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빛 삼아 미약한 입체성을 만들었다. 제 행성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책 한 구석에 자신이 아는 언어로 적어내리는 문장들이 새로운 기억의 흔적처럼 남았다. 번복하는 행위는 습관화된 노력처럼 긴 시간을 이어나갔다.

 

 

 순간의 길잡이는 팔을 들어 오독한 결말을 가리켰다. 똑같은 문장이 계속해서 겹치는 이유는 자신이 무엇을 발판 삼아 서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무지였다. 점점 쌓여가는 빈껍데기의 산이 인식 범위 내에 들어왔을 때 마법사는 주어진 사명에 임하는 것을 더 이상 기록하지 않았다. 아는 것이 힘이 될 수는 있지만 위안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천체의 흐름을 읽어가듯 이해하고 나아감의 첫 단계를 무사히 거친 것 같다는 생각은 그저 무력한 피조물에 대한 깨달음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마법사는 무너지는 잔해들 속에서 다시금 똑같은 장면을 재연했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컷신은 무한히 거듭했지만, 돌이킬 수 있는 희생은 없었기에 마법사는 기다림을 거두었다. 낙원으로 인도할 수 없는 영혼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발목을 가려 구속구를 채웠다.

 

 

 


 

 

 

 " 미안하다고 안 해도 돼요. 찾아올 테니까, 꼭 같이.. 나가요. 여기서. "

 

 

 마법사는 그 말로 뒤돌아 성으로 향하는 이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안온한 미소에 타인을 위함이 다분했다. 제 무감한 표정과 사뭇 대비되는 그 얼굴을 마법사는 몇 번이고 곱씹었다. 익숙한 기꺼움에 대해 자격을 논한다. 중요한 건 그거잖아요. 당신이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거, 귀를 맴도는 배려에 고개가 무거워진다. 제 아래 또렷하게 존재하는 그림자들을 보며 처음으로 느낀 외면이었다. 목울대를 타고 올라오는 바람과 발목에 채워진 의무가 충돌하여 혼돈만이 자리 잡는다. 숨을 내뱉고 나른한 눈꺼풀을 두어 번 들었다 올려야 현실을 깨닫는다. 감싸는 손길이 오래도록 떨어진 찻잔엔 냉기만이 남았다. 마법사는 차가워진 홍차를 마저 목구멍 너머로 들이켰다.

 

 

 붉은 머리칼의 잔상이 밤안개에 모조리 흩어질 때 즈음 마법사는 찻잔을 정리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찰박거리는 맨발의 소리와 함께 멈춰버린 음악소리를 다시 흉내 내며 가보제 안을 천천히 방랑하는 발걸음은 은은한 달빛과 어울러 걸었다. 몸에 익힌 춤사위는 발끝에 모여 관객 없는 무도회를 자아낸다. 달빛은 여전히 그리운 이의 형상으로 변모한다. 고독을 머금은 채 팔을 뻗어 빛을 쥐면 탄듀, 데가제, 디벨로페 … 씁쓸한 날갯짓이 허공을 가른다. 싸늘함이 뺨에 닿으면 뚝 떨어지는 사유함은 과거의 글자들을 헤집었다. 난파된 배 위에서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처지에 이미 유폐된 일자를 회고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었으나, 마법사는 또 다른 앎을 갈구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청산해야 할 업은 산더미 같은데 새삼스레 제 책임을 회피하고 싶다는 무언의 독백엔 무의식적인 이기심이 넘실거렸다. 네게 명분이 어디 있겠니, 그 아이만 온전하면 되는 거 아니야? 마법사는 침묵했다.

 

 

 다소곳하게 모은 손가락 사이로 새벽의 공기가 감돌았다. 그로부터 기인한 차가운 감각에 모방하던 선율이 끊기고 빛으로 선을 그은 형상마저 사라지니 마법사는 그제야 딱딱한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다리를 모아 외로운 덩어리처럼 그 사이에 턱을 올려 뚜렷한 달을 바라보았다. 나는, 읊조리다가 이래도 되는 걸까, 이어나간다. 침 바를 새 없이 움직이는 마른 입술 사이로 물기가 흘렀다. 마법사는 비뚤어진 제 모자를 벗어 내려놓곤 굽은 등을 펴 두 손으로 망토를 열어젖혔다. 느릿한 움직임은 세심하게 닿을 곳을 찾는다. 선선한 바람에 팔랑이는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가며 헐렁한 틈을 벌리면 금이 간 가슴이 한눈에 보였다. 마법사는 조각난 제 흉부를 갈라 맹수의 머리를 꺼냈다. 진득한 검은 피가 명주실처럼 이어지다가 끊긴다. 요동치는 핏덩이 대신 자리를 꿰차고 있던 단단한 짐승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닦아내는 반동에 짤랑이는 소리는 적막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울렸다. 마법사는 얼추 제 모습을 찾은 열쇠고리를 그러쥐곤 모은 두 다리에 고개를 파묻었다. 서서히 침전하는 몸으로 잠기는 사색이 오래도록 시간을 붙잡았다.

 

 

 " 너는 내게 많은 기회를 주는구나. "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마침표가 찍힌다. 닫은 시야 속에서 마주한 황색의 눈동자가 목도한 육지와 같다. 맞닿는 시선으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온다. 제 맨발을 적시는 것들에 대해 쓰라린 통증을 느낀다. 욱신거리는 아킬레스건을 살피면 어느새 화살 하나가 꽂혀있다. 깨져버린 구속구는 어느새 저 멀리 떠내려간다. 심연에 갇힌 순간의 길잡이는 이내 방향을 바꾼다. 틀린 화살표를 고쳐 낯선 행성에 떨어진 어린 양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마법사는 파묻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차가워진 몸을 일으켜 빈 의자에 앉아 붉게 물든 미로를 바라보았다.

 

 

 " … 무사히 와줘. 나는 여기서 기다릴게, 솔아. "

 

 

 마법사는 ■■■을 모른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기엔 이미 먼 곳을 더 나아갔기 때문이다. 다만 기록은 여전히 남아있다. 유일무이한 것을 떠올리는 별은 선함의 가치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득한 것들을 종래에 밀어두곤 우선순위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마법사는 새로운 족쇄를 더욱 단단하게 채웠다. 마법사는 올곧은 끝을 점지했다. 다른 의미의 기다림을 새기고 제 벗의 등을 생각했다. 끊겨 보이는 길에 소중한 사람을 위한 빛무리를 둔다. 공허한 가슴에 심장 대신 채워진 어린 추억을 되감으며 마법사는 보랏빛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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