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

放浪 by 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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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은 인간의 뇌를 먹었던 만성적인 질병이었다. 사람이란 존재는 태생부터 짊어지던 잇자국 하나 때문에 그것을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이론 하나를 근본으로 고립된 공간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던 불안한 우리들은 고질적으로 발병했던 질환을 앓고 있었다. 공통된 사람으로 눈을 깜빡이고 손을 잡았던 감각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의 흉터를 알았다.


  일말의 정이 사람의 다리를 어떻게 붙잡는지는 알고 있었다. 생의 미련이 되어 목을 녹이고 원망의 한마디조차 지르지 못하게 할 양날의 칼처럼 말이다.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약속이 그러했다. 선의의 거짓말로 아마 없을 나중을 기약하고 인공적인 희망을 남겨 악착같이 사람의 생을 연명하게 하는 것은 꽤 이기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스스로 헤엄쳐 다시 도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는 말에 잔인하지 않냐는 말은 침묵만을 일게 만들었다.



 예측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약속하는 건 한심하다는 생각 안 해?



 감정에 따른 규율과 원칙으로 나아가는 네겐 약속이란 단어가 구멍이 크게 난 그물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너만큼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사람 정엔 꽤 쉽게 발을 들였다. 시답지 않은 일엔 언제든 붙잡고 있는 손을 놓아버릴 수 있었던 너와는 확고하게 달랐다. 운운하는 그것이 너와 나의 첫 번째 차이였을 것이고, 규칙에 대해 이야기하며 양극단을 오가는 나와는 다르게 중도를 지키며 절대적인 맹신을 외면하는 것은 너와의 두 번째 차이였을 것이다. 사람이 서로의 관계에서 차이를 가지면 보완할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너와 나의 거리는 손을 뻗을 만큼 썩 가깝지도, 그렇다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멀지도 않았다. 불완전한 중간지점에 서서 너를 바라보는 것은 지루했으나 어쩐지 무의식의 걱정이라도 되는 듯 네 발자국 하나까지 훑고 있었다. 거리감 있는 사람에게 행할 행동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내 고증 같은 행위들을 이상하게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네게 맞추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것이라고 보긴 애매했다. 차이가 있었던 다른 사람이었지만 어쩐지 나는 너를 가늠하고 네가 볼 수 있는 곳에 서있으려 했다. 고증적인 행위가 발하는 일말의 배려라고 치부했다. 눈칫밥 먹으며 도망치던 시절이 완전히 연소된 것은 아니었는지 사람을 바라보고 마음을 뚫어보는 것은 여느 능력자들과 비견을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눈치가 빠르니까 잘 알아주는 점이 좋아. 그대로 있어. 



 그런 말이 현재의 너를 얼마나 존재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멜레아그로스의 장작을 일컬으며 잿더미가 되기 전에 불꽃으로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결과와 동기로 나누었을 때 너는 여전히 그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은 많이 바뀐다는 말과 함께 일일이 분리할 수 없다면서 뱉어낸 네 문장에 강라일의 깊이를 보고 있다 말했다면 너는 어떤 말을 했을지 새삼스럽게 궁금하던 날들이 있었다. 정이란 것의 쓸모를 입에 올리며 치를 떨던 네 표정에서 어떤 이중적인 변화가 나올지까지 생각하던 나는 견고한 너를 흉터 가득한 손에 쥐어보고 싶었다. 모든 것을 드러내면서도 숨기는 사람들에게 일관적으로 느꼈던 치기 어린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은 존재들에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치부를 드러내고 기어이 상대의 진짜 모습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네게 습관처럼 뱉었던 차이를 알고 이해한다는 말과는 모순이 될 법하다 느꼈다. 역설을 말하면 행위도 역설을 따라간다고, 사람은 모두 역설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바라보는 것은 모순이란 단어를 사람이란 존재에 자연스레 끼워 맞추었다. 너와는 일관된 거리로 서로 일관된 사람으로 살아간다 싶었는데 정작 네 발치를 멍하니 바라본 그날부터 나는 네게 어떤 모순이 되고 싶다는 꿈같지도 않은 꿈을 꾸었던 걸지도 모른다.





 무모하고 무쓸모하게 발화하는 것에 대해서 모든 게 다 타들어갈 때 즈음 남은 재는 모두 바람에 흩날릴 것 같았다. 미련과 후회만이 남아 살아가는 것에 이를 악물고 달렸던 나는 새장을 보았을 때 불필요할지도 모르는 희생에 대해 상기했다. 멀쩡해보이지만 날 수 없는 두 날개로 얇은 두 발을 내딛는 것이 도박과도 다름이 없어 불길로 뛰어든다면 분명 살점 하나조차도 남지 않겠지만 아마 누군가 봐준다면 네가 그 자리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소되어 허무하게 대기로 퍼져 네 목구멍에 들어가면 적어도 견고했던 네 속 깊숙하게 파고들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으니까 사람은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너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인지, 움직이고 네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닌 형식적인 글자나 행동양식만이 네 주변에 남아있는지,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색안경을 벗어도 볼 수 없는 것에 제 눈을 원망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명예스럽든, 불명예스럽든 불쾌감의 차이만을 말하며 두려움으로 귀결되는 걸 들었을 때 나는 네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 새삼 많구나 싶었다. 우리 친구지? 그럼 친구지. 짧고 간결한 그 대화로 우린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친구였다면 당연하게 공유해야 할 짐들이 없었으니 말이다. 꼴에 배려랍시고 능력 사용으로 흐릿해졌을 네 시야에 색안경 하나를 씌워놓는 것은 네 눈가를 타고 그다지 곱게 뻗어나지 않은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수고했다는 한마디보다도 내겐 더 확실한 의사 표현이었을 것이다. 가오나 잡는다는 실없는 농담은 명명한 친구에 대한 당연한 언어유희였고 제 등이 얇다는 티엠아이를 드러내는 것은 당연하게 네게 등을 보일 미래의 나를 나타냈다. 친구라서 티엠아이도 다 알려주냐는 말은 새삼스러운 거리가 있었으나 일정한 너와 나의 간격을 조금을 좁힐 수 있었지 않나 생각했다. 나는 네가 제 색안경에 지문 하나를 남겼을 때 분명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손을 뻗어도 잡지 않았던 것은 네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믿었다. 여전히 우리 거리는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가벼운 연락으로 네가 여전히 내가 준 것을 버리지 않았다고 깨달았을 때 너를 좀먹은 감정은 뇌의 어디까지 파고드나 싶었다. 감정에 따르는 규칙, 그놈의 단어는 여전히 너였고 나는 그것으로 제 눈에 다시 씌워 돌려주려는 행동 하나가 아직까지도 거슬렸다. 그것만 너와 나의 관계를 움켜쥐고 있었다면 우리 관계가 어디로 보내질지 대충 가늠이라도 할 수 있었건만, 네 사적인 공간까지 쿨하게 보여주면서 마치 아직까지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내게 보였을 때 난 널 위해 챙겨왔던 진통제나 붕대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역설, 모순, 완벽 세 가지 단어로 구성된 대화를 기억하지만 네 방에서 나는 내 공간을 두고 너와 벽을 친 채로 사색에 빠졌다. 그리고 모든 것을 두고 후다닥 나왔을 때 나는 그것을 꽤나 후회하고 있었다.


 우리는 먼 길을 서로 떠났다 생각하며 나는 결국 너를 떠나보냈다. 내 마지막에 네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한순간이었고 나는 네 마지막의 머리칼 하나조차도 보지 못했다. 비릿한 것을 내 위장에 담았을 때 속을 쥐어 짜내 모든 것을 뱉어냈다. 역겨움보다도 음울한 감정에 시달리며 눈물길 없는 눈물을 마음에 모았다. 그리 바람처럼 사라진 네게 나는 어떤 원망도 가질 새 없이 슬픔만이 남았다. 우울한 새벽엔 미련처럼 네 방문을 서성이며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내 잔재에 대해 괜한 아쉬움을 표했다. 제여망의 죽음에 일조한 네 행동에 잠깐이나마 분노했지만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이 자리에 있는데 너라고 그 상처가 없을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그것은 네 감정에 따른 행동이었다고,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느꼈을 오랜 증오 같은 것을 이해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를 이해했지만 결국 우리는 더 좁힐 사이가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으로 나는 내 얼굴에 빈 공간을 만들었다.


 죽음으로 도착하는 장소가 꼭 재회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서로가 같이 죽었어도 다른 곳에 멀리 있을 수도 있었도 서로 다른 시기에 죽었어도 같은 곳에서 만날 수도 있는 기구한 운명에 대해 혀를 찼다. 신을 믿지 않았고 인간의 노력을 믿었지만 그것 하나 인간의 바람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은 항상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던 상황에 대한 체념이었을지도 모른다. 안녕, 나중에 봐. 그 한마디를 상기하면 목이 먹먹했다. 문드러져서 녹아내리는 성대로 네 이름 석 자를 입에 올리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었다. 살아서 차라리 서로의 목에 칼이라도 겨눴으면 덜 미련이 되었을까, 씁쓸한 웃음으로 쓰러져가던 나를 기억한다. 다음 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어쩌면 끔찍하고도 헛된 희망 같은 것을 가슴에 품었다. 간절하면 그 생에 너를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눈물없는 눈을 감았다. 네가 없었기에 울 수 없음은 참으로 다행이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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