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빛 봄 한 가지

남빛 봄 한 가지 / 02.

藍春の一枝

502 by 티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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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탕을 챙긴 일명 ‘포지타노’는 가볍게 대문을 나섰다. 가방 안이 상큼하게 바스락거렸다. 출근시간대라 차량 몇 대가 코앞에 쌩 하니 지나갔다. 자전거를 탄 사람도 가끔 있었다. 대부분 동네 주민이라 이름도 모르고 인사부터 트게 된 시마는 오늘도 사회성을 열심히 발휘하며 걸었다. 현재 시각 오전 7시 45분. 학교까지는 고작 3분 거리였고 교무실까지 들어가는 시간까지 합치면 5분 정도 걸렸다. 전 근무지에 비하면 축복 받은 출퇴근 거리였다.

오쿠타마중학교 교문은 도보에서 이어진 낮은 경사면 위에 작게 있었다. 승용차 한 대가 딱 지나갈 정도였다. 학생들도 선생들도 학교에 들어가려면 이 길을 올라가야만 했다. 출입구치고는 독특한 구조였다. 후문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잠가 두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정문을 이용했다. 어차피 집 방향만 따지면 이 미묘한 오르막이 더 가까운 편이라, 시마는 한적한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몇 걸음 앞에 1, 2학년 국어 담당인 아카미네가 먼저 가고 있었다. 다가가서 인사할까. 잠시 고민한 그는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교무실에 가면 만날 얼굴이었다.

도착한 교무실은 오늘도 소박한 동시에 복닥거렸다.

늘 제일 먼저 출근하는 교장이 하나씩 출근하는 직원들을 반겼다. 그는 아침에 늘 교무실 구석에 있는 회의용 책상 근처에 서서 커피를 마시거나 교무실 내 화분들을 돌보곤 했다. 교사들이 출근을 마치면 간단한 회의를 마치고 수업 준비에 들어갔다. 교무실이 가장 분주하고 정신 사나울 때였다. 수업이 한 번 시작되면 50분 동안 서서 떠들어야 하는지라, 1교시에 들어가는 교사들은 각자 필요한 걸 챙기기 바빴다. 수업 준비물과 수분, 그리고 스트레칭.

오늘은 화요일이라 시마도 1교시에 수업이 있었다. 목을 축인 그는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8시 30분. 여유는 약 10분 가량. 아슬아슬하게 교문을 통과한 몇 학생들이 복도를 질주하는 소음이 울렸다. 녀석들과 다른 의미의 초시계가 돌아갔다. 1교시는 부담과 사명감이 막중했다. 사회 교과는 잘못 가르치면 학생들이 아침부터 단체 수면 상태로 빠져버리기 때문이었다.

“어라, 시마 쌤. 오늘도 사탕 가져오셨네요?”

“아, 네.”

미술 교사가 책상 앞을 지나가다 말고 기웃거렸다. 이거 맛있더라며 몇 마디 칭찬을 하기에 시마는 기꺼이 사탕 두 개를 건넸다. 사양도 않고 받은 미술 교사가 1교시 수고하시라는 인사와 함께 자기 자리로 사라졌다. 목적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1교시 수업을 위해 이동했다. 앞문을 열자 조례가 끝나고 떠들던 아이들이 후다닥 자세를 바로 했다. 자기 자리로 달려가는 학생도 있었다. 그동안 교탁에 선 시마는 인덱스를 붙여둔 교과서를 펼쳤다. 날이 좋아 열어둔 창으로 아침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무 냄새가 그윽했다. 솜털이 빠지려면 한참 더 걸릴 아이들의 말간 얼굴에 형광등 불빛과 볕이 아른거렸다.

한 반에 스무 명 남짓. 학년당 두 개의 반. 내년도 입학 예정자 수도 두 반을 아슬아슬하게 채운다. 오쿠타마중학교는 정년이 보장된 평생 직장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마는 굳이 도심의 엘리트 학교를 포기하고 이곳으로 왔다.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시마 선생님.”

1교시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교장과 맞닥뜨렸다. 체구가 아담하고 묘하게 나무늘보를 닮았지만, 카리스마가 넘치는 베테랑 교사였다. 본 과목이 자신과 같다 했던가. 어렴풋한 정보를 떠올린 시마는 인사하려다 우르르 지나가는 인파에 멈칫했다. 

“교장 쌤이다!”

“안녕하세요!”

1교시가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뛰쳐나온 학생들이었다. 저 멀리서 부장 교사 겸 주임이 복도에서 뛰지 말라며 뭐라 잔소리를 했지만 들은 척도 않았다.

“아이들이 참 밝아요. 그렇죠?”

“아, 네.”

안 듣기는 교장도 마찬가지였다. 머쓱하게 동의한 시마는 주변을 둘러봤다. 복도에 두 사람뿐이었다.

“수업은 좀 어떤가요?”

“괜찮습니다. 진도도 적절해서 잘 따라오고 있고요. 이전에 담당하셨던 선생님께서 정확하게 기록해두신 덕분에 차질은 없을 것 같네요.”

“오키무라 선생님께선 경력이 24년이나 되셨으니까요.”

교장이 흐뭇한 미소를 짓다 곧 가늘게 뜬 눈으로 시마를 바라봤다. 장난스럽달지, 능글맞달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은근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학생이 아니라 시마 선생님에 대해 물어본 거랍니다.”

“네?”

“다행히 즐거워 보이더군요. 안심했습니다.”

자신을 가리킨 시마는 얼떨떨하니 교장을 쳐다봤다. 수업 중에 즐거울 일이 있나? 뭐, 참여율이 걱정보다 높아서 나름 재미있기는 했다. 수업 도중에 첫사랑이나 연애 따위의 사적인 질문을 하는 녀석도 없고-쉬는 시간에는 종종 있었지만-, 대놓고 자거나 지루해하는 녀석도 손에 꼽을 만큼 적었으니 나쁘지는 않았다.

“모쪼록 잘 부탁합니다. 좋은 교사는 언제나 귀한 인재니까요.”

“아, 아뇨. 저야말로.”

그걸 즐거웠다고 할 수 있나. 시마는 속으로 의문을 삼키면서도 교장과 마주 인사했다. 수고하라며 자리를 뜨는 작은 체구가 가까운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얼마 전에 교사들끼리 모여 잡담할 때, 3학년 수학 교사가 교장 선생님 좀 특이하지 않냐며 속닥거리던 게 떠올랐다. 특이한 사람이기는 했다. 보통 교장은 분란의 중심에 있었던 교사를 제 학교에 불러들이지 않는 법이니까.

한숨을 내쉰 그는 교무실로 돌아갔다. 다음 수업이 5교시라 한참 남아 있었다. 그동안 얼마 남지 않은 중간고사 시험 출제를 위해 교과서를 뒤적였다. 시험이 너무 어려워도 문제, 쉬워도 문제라 난이도를 적절히 조절하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이 학교에 온 뒤 처음 출제하는 시험이라 더 신경 쓰이는 것도 있었다. 예전에 근무하던 곳은 PTA에서 입김 좀 센 학부모가 시험 난이도에 일일이 간섭 하려 들었으니까.

점심은 챙겨온 간단한 도시락으로 때우고, 5교시 수업을 마친 다음 퇴근까지 기다렸다. 출근이 이른 만큼 오후 4시 30분이면 퇴근할 수 있었다. 모니터에 비치는 시계를 힐끔거리던 그는 숫자가 정확하게 4:30으로 바뀌었을 때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일어난 교사가 다섯쯤. 모두 담임하는 반이 없는 교사들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봬요!”

각자 인사를 건넨 이들이 학생들마냥 교무실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시마도 그 틈에 끼어 퇴근길에 올랐다. 뿔뿔이 흩어지는 교사들 사이에서 가장 뒤로 빠진 그는 느긋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시험보다 문화제가 가까워서 그런지 몇 안 되는 교실에서 아이들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그게 아니라니까. 좀 더 가련하게!”

그중 지나가던 시마의 발길을 사로잡는 열정이 있었다. 가다 말고 멈춘 그는 뒷걸음질로 돌아가 반쯤 열린 뒷문에 반쯤 기댔다. 저 앞열에서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가련하게가 뭔데?”

“이렇게, 이렇게 쓰러져야지. 백설공주잖아.”

빨간 머리띠를 한 남학생이 백설공주인지 입을 댓발 내밀고 있었고, 감독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몸을 아끼지 않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왕자로 보이는 작은 종이왕관을 쓴 여학생이 박수를 날렸다. 저 여학생이 왕자인 듯했다. 그리고 시커먼 후드를 뒤집어쓰고 바구니를 든,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도 멀대 같이 커다란 그림자.

“와, 연기 엄청 잘하네. 사와다가 백설공주 해야 하는 거 아냐?”

도저히 중학생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목소리에 시마는 기함했다. 아니,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건데?

“아저씨가 뭘 몰라서 그래요. 원래 감독은 연기를 좀 할 줄 알아야 돼요.”

“헤에, 그렇구나.”

멀대 같은 마녀 아저씨가 순순히 끄덕였다. 이쯤에서 제지할 필요를 느낀 시마는 뒷문을 부드럽게 노크했다. 순식간에 이목이 쏠렸다.

“신사숙녀 여러분, 무대 막이 내리기까지 약 30분 남았습니다만.”

“헉! 시마 쌤?!”

“어! 선생님!”

아저씨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한 이들이 비슷하게 그를 불렀다. 애나 어른이나 똑같았다. 고개를 저은 시마는 마녀 아저씨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부키 씨도 참여할 줄은 몰랐는데요.”

“아! 대리예요, 대리. 마녀 역할인 녀석이 오늘 빠졌거든요.”

“흐음.”

콧숨을 내쉰 시마는 학생들을 슬 훑어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딴청을 피우는 녀석, 안절부절못하는 녀석, 그리고 감독인 사와다를 힐끔거리는 녀석까지 다양했다. 아마도 사와다가 빈자리를 대신해 줄 임시 배우로 이부키를 선택해 데려온 듯했다.

“교내에 외부인 출입은 금지된 걸로 아는데.”

“에이, 저 그래도 경찰인데!”

“경찰도 학교 입장에선 외부인이죠.”

딱 잘라 긋는 선에 이부키를 포함한 주범들의 안색이 퍼렇게 물들었다. 으악. 눈과 표정으로 지르는 비명이 얼마나 선명한지. 애써 잡은 무게를 덜어내버린 시마는 피식 웃었다.

“마녀는 호쿠도 선생님한테 걸리기 전에 선생님이 데려갈 테니, 사와다 너는 공주님과 왕자님을 이어주도록. 5시까지는 정리하고.”

“네!”

부장 교사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아이들이 냉큼 끄덕였다. 몇몇 아이들이 몰래, 동시에 대놓고 키득거렸다. 애들이 숨기는 데에 재능이 영 없었다. 백설공주와 왕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걸 확인한 시마는 이부키에게 눈짓했다. 냉큼 바구니를 내려둔 시커먼 마녀가 후다닥 달려왔다. 곧장 뒷문을 닫아준 그는 마녀를 옆에 달고 학교에서 빠져나갔다. 시간이 애매해서 그런지 다행히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우와, 하마터면 혼날 뻔했네. 구해줘서 고마워요, 쌤.”

정문을 벗어나 내리막에 들어서자 이부키가 안도의 한숨을 터트렸다. 그를 힐긋 일별한 시마는 심드렁하게 핵심을 짚었다.

“호쿠도 선생님한테 혼나본 적 있는 것처럼 말하네요.”

“아, 그게… 전에 애들한테 기세에 대해 가르쳐주다가 걸렸거든요.”

“기세?”

“원래 싸움은 기세잖아요? 눈을 이렇게 딱 뜨면서 ‘난 절대 안 져. 두고 봐. 전부 패버릴 테니까.’라고 기합을 딱 넣어주면 어지간한 녀석들은 도망치거든요.”

확 변하는 깡패 같은 인상에 시마는 단조롭고 간단한 감상평을 남겼다.

“혼날 만했네.”

가감 없는 냉혹한 평가에 이부키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뭔가 억울한 눈치였다.

“그렇다고 순순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하? 학교 폭력이라면 신고를…!”

“에? 아니아니, 학교 폭력이라니. 오쿠타마에 그런 게 있을 리가요! 스포츠부에서 유도 단련할 때 자꾸 진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알려줬죠. 싸움은 기세다!”

시마는 처음으로 호쿠도의 편을 들고 싶어졌다. 심각한 문제인 줄 알고 순간 가슴이 철렁했던 제 심정을 백분 반영하자면, 제가 이부키를 한판승으로 넘겨버리고 싶었다. 이러려고 어릴 때 매트에서 그렇게 구른 게 아닌데.

“백 번은 더 혼났으면 좋겠네요.”

“우왓. 너무해라. 애들한테는 엄청 자상하면서!”

“이부키 씨가 학생도 아닌데 왜 그래야 하죠.”

“맞는 말인데 되게 열 받네?! 전 시마 쌤 엄청 마음에 들었단 말이에요!”

“저도 싫다고 하진 않았는데요.”

“그럼 좋아요?”

“음….”

시마의 발이 잠시 멈췄다. 까만 눈을 굴린 그는 곧 다시 걷기 시작하더니, 진지하게 턱을 문질렀다.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덩달아 이부키의 기대감도 서서히 차올랐다.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진짠가? 진짜려나? 시마 쌤이 나를 Like?

“…이부키 씨 같은 녀석들이 한 학년에 하나씩 있죠. 남들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는 녀석들.”

“헉. 제가 그렇게 특별해요?”

“아뇨.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생각을 하긴 하는 건지 모르겠거든요. 예측할 수가 없어요. 바보랄까.”

길게 이어지는 해명에 이부키는 시마의 말을 두 번 정도 곱씹다 비명을 꽥 질렀다. 결국 마지막이 제일 중요한 결론이었다.

“그거 욕이잖아요!”

“아. 다 왔네.”

발을 멈춘 시마가 히죽 웃었다. 아늑한 2층 집이 코앞이었다. 이부키를 돌아본 그는 여전히 시커먼 후드를 뒤집어쓴 그에게 고개를 까닥했다.

“그럼 순경 나리. 다음부턴 애들 노는 데에 끼어들지 말고, 연령대가 적절한 성인과 어울리시죠.”

“쳇. 제가 잡혀간 거거든요.”

눈을 피하면서 끝까지 꿍얼거리는 입에 시마가 픽 웃었다. 여태 그걸 몰라서 놀렸을 리가. 이부키는 경찰치고는 상당히 표정이 솔직한 편이었다.

“알아요.”

눈을 동그랗게 뜬 이부키가 시마를 바라봤다. 정말? 꼭 그렇게 되묻는 듯한 낯이 어딘가 푸르렀다. 아직 한창 학교에 다니는 소년처럼.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시마는 한참 높은 머리에 툭 얹었다. 투박하게 쓰다듬자 후드 아래로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흩어졌다.

“저희 학생들과 어울려주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경찰 아저씨. 하지만 다음부턴 학생 보호에만 힘 써주시면 좋겠네요.”

이부키가 홀린 듯이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툭툭 토닥인 시마는 손을 그대로 내려 흔들었다.

“그럼 이만.”

돌아서는 등이 대문으로 향했다. 간단한 잠금을 푼 그가 집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부키는 그 자리에 서 있다 후드 위를 만지작거렸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어서 그런가. 따뜻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기분보다는 가슴이 더 이상하게 반응했다. 왜 이렇게 뛰지. 달린 적도 없는데. 이번엔 가슴께에 손을 얹은 그는 머리를 가로로 마구 흔들다 몸을 돌렸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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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독창적인 판다

    에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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