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아이(Ai)

안녕, 아이(Ai) 05

안녕, 아이(Ai)

나의 바다 by 라마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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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U404 이부키 아이 x 시마 카즈미

* 이부시마 교류회 M-TRIP에 낸 글입니다.

* 시점은 원작 이후로 원작과 무관하며 내용은 허구임을 밝힙니다.

*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 2018>에서 일부 모티브를 따왔으나 모르셔도 읽는데 무방합니다.

* 내용 중 캐릭터의 죽음에 대한 암시가 나옵니다. 읽기 전 주의바랍니다.

* 아이(Ai) : 히브리어로 폐허, 멸망

* 2023. 03. 10 개장판 업로드

 

“발이 빠른 것도 네 능력이야?”

“아니. 그건 이 ‘몸’의 능력이야! 멋지지?”

“그래, 그래.”

“시마아! 영혼이 없다니까, 그러네!”

앞서가는 이부키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어쩐지 상상이 가서 시마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 뒤로 꿍얼거리는 이부키의 투덜거림이 뒤따랐지만, 오히려 시마는 안심됐다. 이부키는 이부키다. 어제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언제나 이부키는 이부키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다른 능력은 없어? 총알도 튕겨낸다거나, 날아다닌다거나?”

“에에? 그런 건 영화에나 있을 법한 거지!”

“외계인이라며?”

“외계인이라고 다 그런 능력이 있는 건 아니라고! 시마짱 완-전 편견 마인이야!”

“오~ 이부키 순사 부장님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대단한걸?”

“아이짱을 뭐로 보는 거야, 시마!”

“야생 들개 바보 외계인?”

“너무하잖아아악!”

알 수 없는 소리가 울리는 곳에 시마와 이부키의 만담 같은 대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체로 시마의 목소리는 평이했고, 이부키의 목소리만 들쑥날쑥했다. 중점 밀행 도중의 차 안에서와 같아 단조로운 시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듣기 좋아 이부키는 입술을 삐죽일 뿐 더 말을 얹지 않았다. 그게 애써 시마의 안에 피어오르는 불안을 덮으려는 거라도.

“바다네.”

“바다지~”

통로를 빠져나오자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그들이 나온 곳은 까맣게 보이기만 할 뿐 어딘가로 이어졌다고 보긴 어려웠다. 통로라기에 어느 한 곳으로만 이어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가 보다. 다시 앞을 보면 시마의 눈엔 새파란 하늘 아래 검푸르게 빛나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어딜 둘러봐도 둘이 딛고 있는 땅을 제외하면 온통 바다였다.

“여기에 있어?”

“아니. 여기로 올 거야.”

이른 시간부터 오래 걸어 힘들었던 둘은 대충 튀어나온 바위 위에 걸쳐 앉았다. 울퉁불퉁해 편하진 않았으나 지진 다리를 쉴 정도는 됐다. 주변이 온통 바다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들이 사는 나라와 먼 곳이라서인지 뺨을 살랑이는 바람이 시원했다. 덥진 않았지만 시원한 바람에 피로가 조금 덜어졌다. 바다만큼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마는 고개를 돌려 제 옆의 쪽빛을 바라봤다.

“이부키.”

“응?”

“지구가 멸망한다면 고백할 거라고 했잖아.”

“그랬지?”

“만약….”

궁금함을 가지고 저를 바라보는 연한 색 눈동자를 차마 바라보지 못한 시선이 바다 어딘가를 바라봤다. 눈이 시릴 만큼 반짝이는 윤슬에 거침없이 튀어나오려던 말을 시마는 겨우 목 안으로 삼켜냈다. 아직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더라도 들을 자신은 없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아직은. 조금 더 나중에.

“응? 응? 뭔데, 뭔데?”

“멸망을 막고 나면 뭐 할 건가 해서.”

“음~ 글쎄. 시마는?”

“내가 먼저 물었잖아.”

“이번엔 시마가 먼저!”

지난번 질문에 시마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신에게 넘겼으니 이번엔 자신도 그럴 거라며 이부키는 시마에게 답을 미뤘다. 원래 하려던 질문을 피해 그냥 던졌던 거라 시마라고 생각해둔 답이 있을 리 없었다. 멀거니 바다를 보며 시마는 내일을 상상해봤다. 큰 문제가 없다면 내일은 당번 근무였다. 8시 15분부터 17시 15분까지. 중점 밀행 차를 타고 이부키와 도쿄 어딘가를 돌아다니며 무전이 울리는 순간을 기다리다가 부르면 달려가겠지. 사건을 조사하고 다른 관할로 넘기고 다시 중점 밀행을 하고의 반복. 끝나면 보고서를 쓰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쉬거나 술을 마시러 갈지도 몰랐다.

“술 마시러 가도 좋겠네.”

“제3의 집으로?”

“뭐, 그렇지. 저번에 보관해둔 술도 남았으니까.”

“맞아~ 절반 넘게 남았었지?”

“응. 오랜만에 연어소금구이에 먹어도 좋을 거 같네.”

“아~ 맛있지!”

그 맛이 떠올랐는지 이부키의 발이 작게 동동거렸다. 맛있는 간식을 기다리는 개가 떠오르는 모습이라 시마는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했다. 언젠가 먹었던 닭꼬치도 맛있었다고 신나게 떠드는 이부키를 보며 큼큼 목소리를 다듬는 척 웃음을 넘긴 시마는 이제 네가 답변할 차례라며 손을 잡아당겼다. 지난번처럼 이부키는 바로 답하지 않고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마가 그랬던 것처럼 멀거니 바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시선을 마주쳐왔다.

“시마 네 집에 가서 잘래. 시마랑 같이.”

마주친 눈이 사르륵 호선을 그리듯 접혔다. 자주 보던 눈웃음이었는데 도통 시선을 떨어뜨릴 수 없었다. 박제된 나비처럼 시마의 시선에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과 바다와 이부키의 미소가 박혔다. 그래서 이부키가 말한 답이 바로 인식되지 못했다. 뒤늦게 과부하가 풀린 뇌가 이부키의 말을 인식하고 분석한 뒤 그 뜻을 전달하고 나서야 시마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뭐?”

“시마 네 침대 무지무지 폭신폭신했단 말이지~”

“하아?!”

“완~전 후와후와한 기분이었다고?”

“…됐습니다!”

“에에에!? 어째서어어어!”

불쑥 치솟았던 기대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시마는 어쩐지 울 것만 같아 귓가에 크게 울리는 소리를 핑계로 귀를 막으며 시마는 속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염불을 외었다. 물론 시마의 손목을 잡아 내린 이부키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이부키의 눈을 바라보지 않으려 했다. 지금 시선을 마주치면 애써 눌러 둔 질문을 꺼내버릴 것 같았다. 그건 시마에게 정말 최악이었다.

“시마아아.”

“안되는 건 안 돼.”

“이번엔 손님 방에서라도 잘 게! 응? 응?”

“왜 꼭 내 집이어야 하는데?”

“시마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결국 지고 마는 건 시마였다. 어떻게든 해달라며 초롱초롱 빛나고 있을 눈도 피했고, 살짝 울상일 얼굴도 피했는데 어리광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들리는 건 피하지도 막지도 못해서. 또다시 쌓여버린 마음이 시마를 흔들어서. 이번에도 결국은,

“…손님 방에서 자는 거야.”

“응! 조용히 잘게!”

저 해맑은 웃음에 졌다든지, 좀 더 좋아하는 사람이 힘든 거라든지 하는 것들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산책을 약속받은 개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렴 어떠냐 싶어지기도 해서. 어쨌든 시마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 한숨 같은 웃음을 터트리고 마는 것이다.

“침대가 좋은 거면 매트리스라도 좋은 걸로 바꿔.”

“비싸. 무우우지이이이이 비싸아아아아.”

알아보긴 했었는지 제 월급으론 아무리 모아도 못 사는 가격이라서 꿈만 꾸었다는 이부키의 얼굴은 누가 보면 화났나 싶어질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시마야 잠을 자는 게 돈보다 중요하단 생각에 가장 좋은 매트리스로 산 거였지 보통은 꿈도 못 꿀 가격이긴 했다. 그 보통에 시마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자연스럽게 싱글 사이즈 매트리스 가격이 얼마쯤 되는지 생각해 보던 시마의 눈에 크게 요동치는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이부키도 뭔가 느꼈는지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봤다.

저 먼바다에서 무언가 다가왔다. 거대한 몸 일부가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잔잔하던 바다 표면이 파도가 치듯 크게 출렁였다. 반짝이는 윤슬이 뱀의 비늘처럼 요동쳤다. 딛고 있는 땅 위로 파도가 넘실대며 새하얀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아이(Ai).”

[날 부른 게 너인가.]

“맞아.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불렀어.”

새까만 고래의 눈동자가 이부키를 눈에 담았다. 어딘가 죽어버린 눈과 닮아 있었다. 저 눈에 생기가 담겨있던 때를 이부키는 알았다. 그리 멀지 않던 과거. 이부키가 아직 이부키가 아니었을 때. 그땐 저 눈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걸 이부키는 알았다. 고래는 ‘우리’이고, ‘우리’는 고래이니 다시 반짝일 수 있다고 이부키는 믿었다.

“‘우리’는 이 별이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

[너와 저 인간 말인가.]

“시마도 바라고 있긴 하지. 그러기 위해서 같이 온 거니까.”

[아니라는 뜻이군.]

“너도 알고 있잖아, 아이(Ai). ‘우리’는 원래 하나의 존재였으니까.”

[…기억하고 있다.]

죽어버린 눈에 과거의 기억이 맺혔다. 고래의 모습도, 고양이의 모습도, 사람의 모습도 아니었던 때가 있었다. 이 별에 막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저 하나의 덩어리에 불과했었다. 여럿이 모여있는 하나의 덩어리, 아이(Ai). 멸망을 부르는 존재. 그게 그들이었다.

[‘우리’는 멸망을 부르는 존재다.]

“그랬지. 하지만 그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어.”

[뭐?]

“난 낳아준 부모도 관심조차 주지 않는 아이의 몸에 들어왔어. 주변 모두가 이 아이는 거짓말을 일삼고 가난하니까 도둑질하는 아이로 몰아갔지. 크면 분명 폭력단에 들어갈 거라고 수군거렸어. 그래도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지금은 형사가 됐어. 나쁜 놈들을 잡는 형사.”

시마는 무덤덤하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이부키를 가만히 바라봤다. 언제나 그랬다. 상처가 아닐 리 없는데도 이부키는 과거의 상처를 포장 하나 하지 않고 보여줬다. 동정도 연민도 바라지 않고. 그저 그 상처도 나라는 걸 보여주듯.

“<나비>는 말이야, 도둑고양이라고 불렸어. 배고파서 쓰레기 봉지를 뒤지면 돌이 날아오거나 발길에 차이기도 했어. 그러다가 한 노인에게 주어져서 이름을 받고, 사랑도 받았어.”

[그게 무슨 상관이지?]

“상관있어! ‘우리’도 바뀔 수 있다는 거니까!”

[‘우리’는 이미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살아오며 지나온 모든 별을 멸망시켰다. 그게 바뀔 수 있다고 믿나?]

“응, 믿어.”

이부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이미 고민은 멸망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아침에 끝났다. 이 별의 멸망을 바라지 않는 울음소리를 들었을 땐 늦지 않을 수 있단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파트너인 시마도 함께 달릴 거라고 해줬다. 망설임이 있을 수 없었다.

“그거 알아? 소리는 같은데 뜻이 다른 단어들이 세상엔 아주 많다는 거. 예를 들면 ‘우리’를 부르는 아이(Ai)는 어딘가에선 폐허나 멸망이라고 불러. 하지만 내 이름인 아이(藍)는 쪽빛이라는 의미야. 그리고 어딘가에선 덜 자란 어린 존재를 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랑을 뜻하기도 해. ‘우리’는 비록 멸망이지만 다른 뜻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그러길 원한다면.”

‘우리’가 그러길 원하다 면이라니. 고래는 이 별의 멸망을 원했기 때문에 멸망을 불렀다. 내일이면 고래가 부른 멸망으로 인해 이 별 위에 존재했던 인간도 문명도 사라진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가 바란다니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원하지 않는다.]

“슬퍼했잖아.”

[뭐?]

“이부키!!!”

지켜보고만 있던 시마가 붙잡을 틈도 없이 이부키는 바다로 몸을 던졌다. 놀라 뛰어내리려는 시마를 향해 괜찮다고 손짓한 이부키는 고래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헤엄쳐갔다. 고래는 이부키가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그 자리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조금 뒤 고래에게 가까이 다가간 이부키는 바다 위에 둥둥 뜬 채 고래에게 손을 뻗었다. 차갑고 미끈거리는 피부 위로 조금 뜨거운 체온이 닿았다.

어두운 바닷속을 흰 붓으로 선을 그어내듯 하얀 고래가 유영하며 사라져갔다. 어딘가 서글프고, 절규하는 듯 울리는 울음만 남겨두고.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둠 속. 사방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의 끝을 슬퍼하고, 멸망을 막을 수 없음을 절망하는 울음이었다. 조금 전 고래의 울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울음이었다.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고래는 제가 슬퍼했음을, 슬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부른 멸망이 지척에 다가온 후에야.

[‘너’는 들었던 건가.]

“나는 귀가 좋거든.”

그리고 발도 빠르다며 환하게 웃는 이부키의 모습이 고래의 죽어버린 눈에 박혔다. 닿은 손을 통해 보인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찰나였으나 이부키가 겪었던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어떻게 이리 웃을 수 있는가. 고래의 시선이 땅 위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부키를 바라보고 있는 작은 인간을 향했다. 그럼에도 웃는 건 저 작은 인간도 다르지 않았다. 인간이라서인가 아니면 그들이라서인가.

[‘우리’가 달라진다 해도 이 별은 곧 죽는다. 그건 변하지 않아.]

“그건 모르는 거야.”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이 별을 인간들이 죽이고 있다는걸.]

“그건…!”

“6년 230일.”

[뭐?]

“기후 위기로 인해 이 지구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죠. 6년 230일. 예전에 확인한 거니 지금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시마는 언젠가 뉴스에서 봤던 시계를 떠올렸다. 뜬금없어 보일 정도로 적혀있던 6년 230일. 뒤이어 앵커가 ‘기후 위기 시계’라며 설명해주던 내용에는 이제까지 시마가 크게 신경 써본 적 없던 내용이 흘러나왔다. 점차 올라가는 기온과 그에 따라 올라오는 해수면의 높이부터 저 먼 곳에 있는 아마존의 위기까지 알려주던 앵커는 인간으로 인해 지구가 죽어가고 있다고 경각심을 일깨워주며 일상에서 바꿀 수 있는 부분을 알려주고 뉴스는 끝났다. 그 뒤로 시마도 알게 모르게 바꾸려 노력했다. 그가 하는 걸 궁금해하는 이부키에게도 알려주면서.

“당신 생각처럼 우리 인간들도 마냥 손 놓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인간들이 더 많지만 앞으로 충분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지구의 폐라 불리는 아마존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 유출된 기름으로 오염된 바다를 되돌리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걷어붙이고 도움을 주러 달려가던 사람들, 어차피 나올 쓰레기라면 조금 더 빠르게 분해되게 하자며 연구하는 사람들, 생각 없이 버리는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일회용품 줄이기를 실천하는 개개인들.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아주 많이 있다.

“살아있으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죠. 지금과는 달라질 기회도 충분히 있습니다.”

“시마 말대로야. 아직 이 별엔 희망이 있다고? 그게 아무리 작고 희미하다고 해도 희망은 희망이야. ‘우리’가 마음대로 없애버릴 수 없는 거지.”

“물론,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신조차도 예견하지 못하는 게 미래니까요.”

“응응. 그런 거라고!”

어깨를 으쓱이며 누군가 들으면 신성 모독이라 외칠 말을 시마는 서슴없이 내뱉었다. 이부키는 여전히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채 웃으며 시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 모습이 퍽 웃겨 고래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커다란 웃음소리가 푸르게 빛나는 하늘 아래, 넘실대는 파도를 타고 가득 울려 퍼졌다.

한참 웃던 고래를 넘실대는 파도에 휘청이는 이부키를 제 머리로 들어 올려 땅 위로 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시마의 손을 잡고 다시 땅 위에 오른 이부키는 바닷물이 짜다고 투덜거렸고, 시마는 바다에 빠졌으니 당연한 거라고 일축했다. 정말 세상에 둘도 없을 만담 콤비였다.

“이제 달라졌어?”

[…조금은.]

“좋았어!”

[그런데 멸망은 어떻게 막을 거지?]

“당신이 멈출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아니. ‘우리’는 멸망을 부를 수 있지 막을 순 없다.]

“막아본 적이 없는 것뿐이지. 해보지 않고는 몰라!”

고래를 만나면 멸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마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고래의 말대로라면 멸망은 내일 지구에 찾아올 테고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거니까. 하지만 뚝뚝 떨어지는 물을 짜내던 이부키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결코 끝이 오지 않을 거라 믿는 얼굴로.

[방법이 있는 건가.]

“응! <나비>가 모두를 설득한다면 ‘우리’는 멸망을 막을 수 있어!”

[그렇군.]

“이부키.”

“응?”

“정말로 막을 수 있어?”

새까만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 뒤에 가려진 애정도 얼핏 보였다. 이부키는 시마의 걱정이 무엇을 향해 있는지 잘 알았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이부키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그건 이부키가 시마 카즈미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정해져 있는 거였으니까.

“응! 막을 수 있어!!”

<나비>는 익숙하게 어둠 속을 사뿐사뿐 걸어갔다. 한 줌 빛도, 이정표도 없는 곳이지만 <나비>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곳은 그들의 의식 속 가장 깊숙하게 자리 잡은 곳. 여럿인 그들이 하나일 수 있는 이유.

“우냐아앙~”

[안녕, 아이(Ai).]

[안녕, 아이(Ai).]

.

.

.

.

[안녕, 아이(Ai).]

[안녕, 아이(Ai).]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부르듯 높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곳곳에서 화답하듯 다양한 언어의 인사가 들려왔다. 그들의 이름은 아이(Ai). 이곳은 모든 아이(Ai)의 의식이 모이는 심연이다.

고래와 이야기를 마치고 둘은 다시 통로를 통해 돌아왔다. 처음 들어왔던 관사 근처의 골목으로 빠져나오자 시간은 어느덧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다. 통로를 막 들어갔을 땐 젖어있던 이부키의 옷과 신발도 어느새 다 말라 있었다.

“으아~ 얼른 씻고 싶어!”

“따뜻한 물 가득 채운 욕조에 몸 좀 담그고 싶네.”

“흐아! 생각만으로도 좋아!”

기지개를 쭈욱 켜고 옷에 남은 소금기를 탁탁 털어내던 이부키는 시마의 중얼거림에 상상해보곤 어서 몸을 담그고 싶다고 발을 굴렸다. 비록 관사는 좁아 욕조가 없어도 샤워기는 있으니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는 건 가능했다. 얼른 돌아가 세탁기에 옷을 넣고 몸도 욕실로 넣고 싶었다.

“가자, 이부키.”

“응응. 잘 가, 시마.”

“응?”

“에?”

당연히 자기 집으로 같이 갈 줄 알았던 시마는 이부키의 인사에 놀란 눈으로 이부키를 바라봤고, 이부키는 어서 가 씻을 생각만 하다 시마의 말에 잠시 버퍼링 걸린 컴퓨터처럼 멈췄다가 곧 잔뜩 시끄러운 표정으로 시마를 바라봤다.

“나 시마 네 집에 가도 돼?”

“내 집에서 잔다고 했던 건 너잖아.”

“그건 멸망을 막고 난 후….”

“싫으면 됐어.”

“에에에!!! 잠깐, 잠깐!! 시마아아!”

제가 뱉고도 놀랐던 시마는 새빨개졌을지도 모를 얼굴을 숨기기 위해 먼저 골목을 벗어나려 움직였다. 덥석 양손으로 제 손을 잡고 놔주지 않는 이부키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집으로 가 이불을 팡팡 치며 스스로 적립한 흑역사를 지우려 애썼을지도 몰랐다.

“놔, 이부키.”

“나도 시마 네 집에서 자고 싶어! 그런데 오늘 꼭 준비해둬야 할 게 있어서 그래. 응?”

“알았으니까 놔.”

“진짜지?”

“그래!”

끝끝내 시마의 대답을 받아낸 이부키는 꽉 붙잡은 시마의 손을 놔주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살짝 욱신거리는 손을 문지르며 시마는 흘끗 이부키를 바라봤다. 역시나 표정은 여전히 시끄럽게 히죽 웃고 있었다.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시마는 괜히 목덜미를 문질렀다. 손바닥으로 확연하게 열이 느껴졌다.

“시마, 정말로 따로 준비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럼, 먼저 가볼게~”

“이부키.”

이번엔 먼저 가려는 이부키를 시마가 붙잡았다. 붙잡은 후에도 한참 말이 없었다. 해야 할 말을 골라내듯, 한참. 그러다 어쩌면 내일 멸망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지난 3년 동안 그랬듯 그들은 출근해서 차를 타고 중점 밀행을 하며 초동 수사를 하거나 범인을 쫓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어제오늘 겪은 믿기 힘든 일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믿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게 그저 긴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내일 끝나면 할 말 있으니까 같이 가.”

시마가 땅을 딛고 서 있는 이 모든 순간이 현실이어서. 그 현실에 이부키가 있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언젠가 당연하지 않을 순간이 올 수도 있어서. 그 순간이 오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었지만, 생각보다 괜찮지 않을 거 같아서. 시마는 오랜 생각의 끝을 맺기로 했다.

“내일 봐, 시마.”

“내일 봐, 이부키.”

관사를 향해 뒤로 걸어가며 이부키는 긴 팔을 붕붕 흔들었다. 위험하니 제대로 걸으란 말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웃으며 조심히 들어가라 소리치는 이부키에 결국 시마는 먼저 뒤돌아 맨션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이부키가 한참을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고래와 이야기를 마치고 둘은 다시 통로를 통해 돌아왔다. 처음 들어왔던 관사 근처의 골목으로 빠져나오자 시간은 어느덧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다. 통로를 막 들어갔을 땐 젖어있던 이부키의 옷과 신발도 어느새 다 말라 있었다.

“으아~ 얼른 씻고 싶어!”

“따뜻한 물 가득 채운 욕조에 몸 좀 담그고 싶네.”

“흐아! 생각만으로도 좋아!”

기지개를 쭈욱 켜고 옷에 남은 소금기를 탁탁 털어내던 이부키는 시마의 중얼거림에 상상해보곤 어서 몸을 담그고 싶다고 발을 굴렸다. 비록 관사는 좁아 욕조가 없어도 샤워기는 있으니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는 건 가능했다. 얼른 돌아가 세탁기에 옷을 넣고 몸도 욕실로 넣고 싶었다.

“가자, 이부키.”

“응응. 잘 가, 시마.”

“응?”

“에?”

당연히 자기 집으로 같이 갈 줄 알았던 시마는 이부키의 인사에 놀란 눈으로 이부키를 바라봤고, 이부키는 어서 가 씻을 생각만 하다 시마의 말에 잠시 버퍼링 걸린 컴퓨터처럼 멈췄다가 곧 잔뜩 시끄러운 표정으로 시마를 바라봤다.

“나 시마 네 집에 가도 돼?”

“내 집에서 잔다고 했던 건 너잖아.”

“그건 멸망을 막고 난 후….”

“싫으면 됐어.”

“에에에!!! 잠깐, 잠깐!! 시마아아!”

제가 뱉고도 놀랐던 시마는 새빨개졌을지도 모를 얼굴을 숨기기 위해 먼저 골목을 벗어나려 움직였다. 덥석 양손으로 제 손을 잡고 놔주지 않는 이부키만 아니었다면 그대로 집으로 가 이불을 팡팡 치며 스스로 적립한 흑역사를 지우려 애썼을지도 몰랐다.

“놔, 이부키.”

“나도 시마 네 집에서 자고 싶어! 그런데 오늘 꼭 준비해둬야 할 게 있어서 그래. 응?”

“알았으니까 놔.”

“진짜지?”

“그래!”

끝끝내 시마의 대답을 받아낸 이부키는 꽉 붙잡은 시마의 손을 놔주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살짝 욱신거리는 손을 문지르며 시마는 흘끗 이부키를 바라봤다. 역시나 표정은 여전히 시끄럽게 히죽 웃고 있었다.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시선을 돌리며 시마는 괜히 목덜미를 문질렀다. 손바닥으로 확연하게 열이 느껴졌다.

“시마, 정말로 따로 준비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알았어, 알았어!”

“그럼, 먼저 가볼게~”

“이부키.”

이번엔 먼저 가려는 이부키를 시마가 붙잡았다. 붙잡은 후에도 한참 말이 없었다. 해야 할 말을 골라내듯, 한참. 그러다 어쩌면 내일 멸망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지난 3년 동안 그랬듯 그들은 출근해서 차를 타고 중점 밀행을 하며 초동 수사를 하거나 범인을 쫓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어제오늘 겪은 믿기 힘든 일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믿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게 그저 긴 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내일 끝나면 할 말 있으니까 같이 가.”

시마가 땅을 딛고 서 있는 이 모든 순간이 현실이어서. 그 현실에 이부키가 있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언젠가 당연하지 않을 순간이 올 수도 있어서. 그 순간이 오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었지만, 생각보다 괜찮지 않을 거 같아서. 시마는 오랜 생각의 끝을 맺기로 했다.

“내일 봐, 시마.”

“내일 봐, 이부키.”

관사를 향해 뒤로 걸어가며 이부키는 긴 팔을 붕붕 흔들었다. 위험하니 제대로 걸으란 말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웃으며 조심히 들어가라 소리치는 이부키에 결국 시마는 먼저 뒤돌아 맨션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이부키가 한참을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이부키는 꿈을 꾸지 않는다.

늘 그랬듯 잠이 든 이부키는 새까만 어둠 속에 있었다. 오늘은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사방이 어두워 길이 없는 곳이지만 이부키는 길을 알고 있었다. 거침없이 긴 다리가 쭉쭉 뻗어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엔 이부키의 감을 찌르는 수많은 의식이 있었다. 지구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의 또 다른 그들이었다. 각자의 모습까진 보이지 않았어도 다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의식 공유란 그런 거니까.

“정말 모였네.”

[네가 모이랬잖아.]

[확신이 있어서 모이라고 한 거 아닌가.]

“응? 그렇긴 한데, 정말 들어줄 거라곤 생각을 못 했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에 흐린 눈으로 보던 <나비>와 고래는 이어지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의식이 공유되어 엿본 이부키의 지난 삶이 그리 평탄치 않음을 안 탓이었다. 볼을 긁적이며 웃는 이부키에게 다가간 <나비>가 하얀 앞발로 긴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의아함에 쭈그려 앉던 이부키는 냅다 자기 다리 위로 올라온 <나비> 탓에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응? 으응?”

[왜. 뭐.]

[확실히 편하군.]

“응? 뭐야, 뭐야?”

어느새 <나비>와 비슷한 크기로 작아진 고래마저 이부키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자리 잡았다. 다리에서 느껴지는 체온과 머리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에 터진 웃음이 어둠 속에 울렸다. 이부키가 아닌 그들이 들었던 웃음소리였다.

“다들 멸망을 막을 생각이지?”

[그래서 내가 널 찾아갔던 걸 잊은 건 아니지?]

“잊지 않았어.”

[나도 멸망을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다네.]

어둠 속에서 지난 세월을 얼굴에 그대로 간직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희끗희끗 센 머리와 주름진 눈가와 달리 꼿꼿하게 선 몸은 흘러가 버린 세월과 달리 정정해 보였다. 노인은 여전히 새파란 눈으로 이부키를 일별하다 어둠 속 어딘가를 바라봤다. 무언가를 그리는지 시선은 멀었다.

[리사가 사랑했던 것들이 아직 이 별에 많이 남았거든.]

“많이 사랑했나 봐.”

[...맞아. 그녀가 떠나기 전에 많이 말해주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야.]

“말하지 않아도 알았을 거야! 때론 보이지 않는 게 알려주거든∼”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지만 이부키는 시마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투덜거리면서도 이부키가 말한 바를 할 수 있는 한 들어주는 점에서, 다정한 배려에서 아주 많은 사랑을 느꼈다. 이부키가 그러했듯 노인이 사랑한 리사라는 사람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웃고 있었어?”

[그래. 웃고 있었어. 아주 행복한 듯이.]

여느 날처럼 눈 떴던 아침. 노인은 그의 품에 안긴 채 고요한 리사를 처음 봤을 때 깨달았다. 그의 사랑이 세상을 떠났음을. 사랑하는 많은 것을 두고 영영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음을. 노인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슬픔 속에서도 울 수 없었다. 떠나버린 사랑이 너무도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 끝이 아프지 않았다는 게, 힘들지 않았다는 게 노인에겐 그나마 위안이었다.

[리사가 없으면 떠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떠나질 못했어. 어느새 세상에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이 많아졌어. 아직 이 별에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있어. 그러니 난 지킬 거라네. 내가 가진 모든 걸 걸어서라도.]

“똑같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 이 땅에 살아있거든. 멸망이 올 때까지 같이 달리자고 해준 사람!”

[굉장한 사람이군.]

[아까 같이 왔던 그 사람?]

“맞아!”

어둠 속에서 무겁게 잠겨가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그때의 웃음소리처럼 한 줄기 빛이 내린 듯했다. 긴 세월 살아온 삶에 찾아온 사랑처럼. 색이 입혀진 것처럼.

[나도. 있어. 지킬 것.]

[이 별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사랑하게 됐으니까.]

[왜 태어났는지 여전히 몰라도 이 별이 좋아. 좋아졌어.]

[영원하지 않아서 지키고 싶단 생각은 처음이야.]

[지키고 싶어. 언젠간 사라진다고 해도.]

[벌써 지기엔 아쉬워. ‘그‘의 말대로 기회는 아직 있으니까.]

조용히 어둠 속에 머물러 있던 다른 존재들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길고 긴 방황 끝에 초록별에서 알게 된 것이 많았다. 살아간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한 치 앞을 모르면서도 나아간다는 것, 짧은 삶 속에서 제 목숨만큼이나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 세상은 그저 까맣고 하얗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도. 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수많은 별과 생명을 한 줌 먼지로 만들고 나서야.

[그러니 어떻게 지킬 수 있는지 말해주게나.]

“음- 거창한 계획은 없어.”

[뭐?]

[하지만 멸망을 막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 멸망을 막을 수 있어. ‘우리’가 막을 거야.”

계획이 없단 말에 이런 멍청이를 믿고 있었던 스스로에 한심해하던 <나비>는 뒤이어진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존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부키는 너무 오랜 시간 떨어져 버린 그들과 의식을 재차 공유하며 생각하는 바를 털어놨다.

“‘우리’는 아이(Ai)잖아. 멸망을 부르는 아이(Ai). ‘우리’가 멸망을 부를 수 있다면 ‘우리’도 멸망일 수도 있잖아?”

[‘우리’가… 멸망….]

“항상 이상했거든. 태어난 이유도 모르면서 멸망을 부르는 건 어떻게 알았던 걸까-하고. 고민하다 보니까 어쩌면 ‘우리’가 멸망이라서 부를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

[공명을 말하는 거야?]

“응. 맞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명제였다. ‘우리’도 멸망이기에 멸망을 부를 수 있다. 그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아이(Ai)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태어나 눈을 떠 하나에서 여러 갈래의 의식으로 갈라진 뒤에도, 우주를 방랑했을 때도, 지나온 별에 멸망을 부르면서도 의식해본 적 없던 부분이었으니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모든 게 달라진다. 멸망은 결국 ‘우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확실히….]

[그게 맞는다면 막을 수 있겠군.]

[다만 그렇게 되면 ‘우리’도 사라질 수 있어.]

“알고 있어.”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이부키에 <나비>와 고래는 심란해졌다. 고래는 그저 바다를 떠돌았을 뿐이니 사라져도 상관없었다. 그의 죽음을 깨달을 이도, 슬퍼할 이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부키에겐 있었다. 그와 함께 찾아와 고래를 설득했던 당당한 인간이.

[하지만 괜찮겠나?]

“응?”

[난 고양이라 내가 사라져도 수명을 다했다고 생각할 테니 괜찮을 거야. 하지만 넌?]

[나도 이만치 늙었으니 괜찮아. 다들 내가 리사를 따라갔다고 생각할 테니까.]

이부키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바를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이부키와 달리 그들 대부분 지금 삶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언제 떠나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부키에겐 아직 많은 이들이 남아있었다. 시마와 여전히 단절 상태인 가마 씨와 4기수 사람들과 키쿄 대장, 하무쨩, 그리고 유타카까지. 이부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별에, 이 땅에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특히 시마에겐 무려 6년 만의 파트너였다. 이부키가 10년 동안 오쿠타마에서 순경으로 지냈을 때도 파트너가 있었다. 경찰은 순경이어도 2인 1조가 의무였으니까. 하지만 시마에겐 파트너가 없었다. 현장도 없었다. 6년을. 그러다 이부키를 만나 4기수로 3년을 함께 뛰어다녔다. 결코 그 시간이 작을 수 없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시마는 괜찮아. 잘 지낼 거야.”

이부키는 믿었다. 시마를, 시마를 사랑하는 키쿄 대장을, 진바 씨를, 코코노에를, 유타카를, 그 외의 수많은 사람을. 그들이 비어버린 틈새를 채워줄 거라고. 다 채우지 못해도 괜찮았다. 지난 3년간의 그들도 그리 완벽하게 맞지 않았으니까. 모나거나 찌그러진 부분이 있어도 두 사람은 그저 서로를 믿고 함께 달려갔으니까. 그렇게 살았으니까. 앞으로 이부키가 없더라도 그 일상은 변함없을 것이다. 이부키는 이미 멸망이 온 걸 깨달았을 때부터 시마의 일상을 지키기로 정했으니까. 누군가 미련하다고 해도 그게 이부키의 사랑이었다.

“그러니까 내 모든 걸 걸고 지킬 거야.”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에 모든 아이(Ai)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도 그랬으니까. 존재를 걸고서라도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살아 숨 쉬는 이 푸른 별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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