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아이(Ai)

안녕, 아이(Ai) 06

안녕, 아이(Ai)

나의 바다 by 라마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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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U404 이부키 아이 x 시마 카즈미

* 이부시마 교류회 M-TRIP에 낸 글입니다.

* 시점은 원작 이후로 원작과 무관하며 내용은 허구임을 밝힙니다.

* 영화 <지구가 멈추는 날, 2018>에서 일부 모티브를 따왔으나 모르셔도 읽는데 무방합니다.

* 내용 중 캐릭터의 사망이 나옵니다. 읽기 전 주의바랍니다.

* 2023. 03. 10 개장판 업로드

D Day.

멸망이 찾아와도 태양은 떴다. 하루의 시작이던 러닝도 끝마치고 출근 준비를 마친 이부키는 말없이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엔 웃지 않아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로 인해 제법 사나운 인상이 비쳤다. 자세히 보면 날카로운 눈 밑이 조금 새빨갛게 부어있었다. 지난밤의 여파였다. 일어나자마자 얼음으로 찜질을 해줬는데 부기가 덜 빠져있었다. 부디 선글라스로 가려지길 바랐다.

힐끗 손목시계를 확인한 이부키는 집안을 빙 둘러봤다. 어제 집에 도착한 후로 줄곧 정리해둔 덕에 집안은 깔끔했다. 누가 본다면 곧 이사 간다거나 아니면 어딘가로 떠난다고 생각할 만큼 꽉 채워져 있던 집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꽤 흡족한 얼굴로 마무리 점검까지 한 이부키는 미리 꺼내둔 운동화를 신었다. 지난번 시마에게 사준 것과 색만 다른 똑같은 운동화였다. 시마는 다른 운동화를 신고 나올 테지만. 상관없었다. 이건 이부키의 자기만족이었으니까.

“읏-차! 그럼, 가볼까!!”

모든 준비를 마친 이부키는 기다란 몸을 쭉 기지개를 켠 뒤 뒤돌아보지도 않고 집을 나섰다. 망설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시마~”

“좋은 아침.”

분주소를 들어오는 시마를 향해 먼저 출근한 이들이 인사로 맞이했다. 유난히 툭 튀는 인사는 역시나 이부키였다. 이부키를 일별한 시마는 언제나처럼 캐비닛에 가방을 넣은 뒤 제자리로 향했다. 그 뒤를 어느새 졸졸 따라온 이부키가 막 내린 커피 한 잔을 들고 따라왔다.

“자, 시마.”

“어. 고마워.”

“별말씀을! 어제 잘 잤어?”

“응. 넌?”

“아이짱 컨디션 완-전 최고!!”

“그래, 그래.”

후후 불어 적당히 식은 커피를 한 입 마시며 오늘의 일정을 확인하던 시마는 웬일로 뒤이어 붙는 사족이 없이 조용한 이부키를 바라봤다. 그 어느 때보다 와글와글 시끄러운 얼굴로 이부키는 아래를 보고 있었다. 시마가 신고 온 운동화를.

“뭔데.”

“응? 아냐, 아냐. 오늘 엄청, 잘 달릴 수 있을 거 같아서!”

“하아.”

벌써 피곤해지는 감각에 마른세수하던 시마의 눈에 문득 이부키의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요로 보나 모로 보나 시마의 운동화와 색만 다를 뿐 똑같은 운동화였다. 기가 찬 새까만 눈이 시선을 들어 이부키를 바라보자 히죽 웃는 얼굴만 보였다. 정말이지 한 대 때리고 싶은 얼굴이었다.

“너….”

“오는 동안 발 안 아팠어? 뒤꿈치가 자꾸 걸리적거린다거나?”

“…없었어.”

“다행이네~ 신발이 불편하면 하루가 힘들잖아!”

굉장히 흐뭇한 표정으로 시마의 발에 꼭 맞는 운동화를 바라보는 이부키에 시마는 혀를 찰 뿐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얹어 봤자 시마만 손해였다. 그저 남은 커피를 마시며 시선이 아래로 가지 않게 다른 곳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래봤자 이미 머리 한편에는 색만 다른 운동화 두 켤레가 나란히 자리 잡아버렸다.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아 애꿎은 파일철만 뒤적여봤다.

“오늘은 고토구 관내 중점 밀행이래.”

“봤어.”

“시마.”

“왜.”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사람들부터 대피시켜야 해.”

가까이에 있는 시마만 들릴 정도로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이부키답지 않게 만약을 이야기했다. 파일을 보는 척하던 시선이 이부키를 향했다. 언제나처럼 웃고 있는 얼굴. 그런데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깜박. 다시 붉은 등이 켜졌다.

“건물 안으로 대피하는 것보단 지하로 대피시키는 게 좋아. 지진대피소 같은 곳. 큐짱이나 키쿄 대장에게 미리 언질 주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네.”

“넌?”

“응? 나도 당연히 같이해야지. 그냥 미리 말해두는 거뿐이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그래.”

깜박, 깜박. 점멸하는 붉은 등이 경고했다. 무엇을 경고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부키에 대한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마주한 시선에서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항상 투명하게 생각하는 바를 알려주는 연한 눈동자는 오늘만큼은 무엇도 알려주지 않았다. 꾸욱.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알려주지 않는다면 알아내면 된다. 그건 시마가 항상 해왔던 일과 다를 바 없었다.

“가자, 이부키.”

“응. 오늘도 잘 부탁해, 시마!”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이상을 가지고 오늘도 기수 404, 출발합니다.

오전 9시. 기수 404 차는 기바 공원에서 고토 구청을 지나 고토 운전면허시험장 방면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근무 시작 후 지금까지 무전은 조용했다. 마치 폭풍 전 고요 같단 생각을 했으나 이부키가 운전에 집중하고 있기에 시마는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멸망을 막을 방법. ‘우리’. 아이(Ai). <나비>. 하얀 고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를 나열하던 시마의 지나치게 좋은 머리는 가장 믿고 싶지 않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깜박, 깜박, 깜박. 붉은 등이 빠른 속도로 점멸한다. 때마침 사거리 신호가 주황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차가 멈추자 시마는 잠시 말을 골랐다. 애써 침착하게 묻기 위해서 별안간 목을 가다듬었다.

“이부키.”

“응?”

“멸망을 막을 방법이라는 게….”

-경시청 각 국. 긴급 보고. 도쿄 상공으로 미확인 비행물체가 빠르게 접근 중이라는 보고. 모든 경찰은 대기 바랍니다.

신의 농간일까? 우연처럼 질문이 끝맺기 전에 다급한 목소리로 무전이 울렸다. 무전이 끝나자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멸망이 지구에 도착했다. 두 사람의 머리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하나. 멸망을 막는 것. 빠르게 사이렌을 켜 차 위에 올린 시마는 핸드폰을 꺼내 코코노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사이 이부키는 뒤에 차가 없는 걸 확인하곤 차를 뒤로 빼 방향을 바꿔 차를 몰았다.

-시마 씨?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코코노에! 무슨 일인지 묻지 말고 당장 사람들을 지진대피소로 대피시켜야 해!”

-네? 그게, 무슨….

“부탁할게, 코코노에! 시간이 없어!”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다음에 설명해주세요.

“고마워, 코코노에.”

갑작스러운 요청에 당황해하던 코코노에는 다급한 시마의 목소리 뒤로 들리는 사이렌 소리와 조금 전 도쿄 상공에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미확인 물체에 대해 받았던 보고를 떠올렸다. 상관관계가 없는 듯 보였지만 혹시 몰랐다. 404의 두 사람은 항상 코코노에가 예측하지 못한 일을 잡곤 했으니까 두 사람을 믿는 수 밖엔 없었다.

감사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은 시마는 곧장 키쿄 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똑같은 내용을 전했다. 키쿄도 다급한 목소리로 전하는 시마에 궁금함은 눌러둔 채 더 사정을 묻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답을 줬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조심해, 시마.”

“네. 대장도 조심하세요.”

이젠 그들의 대장이 아니지만 키쿄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후 문득 바라본 창밖이 흐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껴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술렁이는 심장을 대신해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부디, 아무런 문제 없이 이 하루가 지나가기를. 키쿄는 바라고, 또 바랐다.

시마는 마지막으로 진바와 통화를 한 후 처음 만난 날처럼 거칠게 운전하는 이부키를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무슨 생각 중인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그동안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유독 거슬렸다. 때마침 울린 무전에 못다 한 질문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거슬렸다. 넌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이부키? 난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누군가 속 시원하게 알려주면 좋겠다고 시마는 생각했다.

“이부키, 어디로 가는 거야?”

“바다. 바다가 보이는 곳.”

어쩐지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했다. 도쿄만 마리나. 3년 전 그들이 악몽에 취해 깨어났던 곳이었다. 시마의 심장이 두근두근 불안한 음으로 뛰었다. 왜 하필이면 지금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는 걸까. 결국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괜히 주먹을 쥐었다 펴며 애써 불안을 지워내던 시마는 차가 멈추자 이부키를 바라봤다.

“시마,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해. 지하가 있다면 되도록 지하로.”

“넌?”

“멸망을 막아야지.”

이부키는 여느 때처럼 씨익 웃었다. 언제나 보면 같이 웃게 되던 웃음이 왜 오늘은 이토록 불안한지. 오늘도 잘 돌아가는 머리는 그 이유를 쉽게 도출해냈지만 시마는 그 이유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 원망하게 될 것 같아서. 자신도, 다른 누구도 아닌 세상에 대한 원망을 마구 쏟아낼 것만 같아서.

“그러니까 시마, 같이 달리자!”

“…그래.”

이 한마디에 물에 탄 솜사탕처럼 사라져 설탕물만 남아버렸다. 그게 서러워 울고 싶었지만 시마는 부러 웃어 보였다. 이미 상황은 그가 어찌할 틈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시마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코코노에와 키쿄 대장과 진바 씨에게 부탁했듯이. 시마도 시마라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이부키가 이부키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듯이.

둘이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시끄럽게 사이렌이 울렸다. 긴급히 지진대피소로 이동하라는 방송이 뒤따라 울렸다. 코코노에와 키쿄가 떠올라 둘은 웃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 각자의 일을 할 차례였다,

“늦지 마, 이부키.”

“응! 우리는 이번에도 제시간에 맞출 거니까!”

“가자.”

시마의 말이 떨어지자 이부키는 바다 쪽을 향해 달렸다. 가면서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향해 대피하라고 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부키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시마는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경찰임을 밝히고 대피를 도왔다. 반복적으로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방송에 불안해하던 시민들은 경찰이 나서서 대피를 돕자 안심하며 대피하기 시작했다. 간혹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도우며 대피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큰 소리로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시마를 도와 대피할 곳으로 안내하기도 했다.

“여긴 제가 안내할 테니 따라가세요.”

“네?”

“아까 저쪽으로 달려가던 분, 파트너죠?”

“네, 맞습니다.”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대피를 돕던 시민의 말에 애써 눌렀던 욕심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같이 달리고 싶었다. 앞서가는 이부키의 등을 바라보며 그의 발에 맞춰 빨간 자전거를 타고 쫓아가고 싶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이부키의 옆에 있고 싶었다. 뾰족한 가시처럼 솟아난 욕심이 시마의 마음을 여기저기 찔러댔다.

“…괜찮습니다. 그 녀석이 할 일과 제가 할 일이 따로 있으니까요.”

“하지만….”

“늦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우선 사람들을 대피시키죠.”

그럼에도 시마는 형사라서. 단 한 명이라도 제시간에 구하기 위해 달리는 기수라서 참았다. 어쩌면 후회가 남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뒤따라가지 않았다. 이부키가 할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선 시마가 할 일을 끝내야 했다. 색만 다른 운동화를 향해 달리려는 발끝을 꾹 누르며 시마는 한 명, 한 명 조심히 대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 끝날 때까지 시마는 아른거리는 등 뒤를 따라 달려가지 않았다.

이부키는 바다 앞에 있었다. 새파란 바다를 앞에 두고 이부키는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의 시간을. 오늘의 시간을 내일로 이어갈 수 있게 할 순간을. 시마의 일상을 지킬 수 있는 순간을. 오랜 시간 흩어져 살아가던 그들이 하나가 될 순간을.

아이(Ai)가 되면 이부키 아이(伊吹 藍)는 사라지겠지만 괜찮았다. 한데 마음이 온통 수런수런 시끄럽게 굴었다. 이부키는 언제나처럼 제법 제 감정을 잘 감췄다. 시마 앞에서도 의연한 척 마지막까지 같이 달리자고 하지 않았는가? 하고 싶었던 말은 끝내 전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시마에게 잔뜩 남겨두었으니까. 그거면 됐다고 덤덤히 굴었다. 그랬었다.

“이부키-!”

“시마…?”

침잠해가던 눈이 익숙한 목소리에 크게 떠졌다. 뒤돌아보니 멀리서 뛰어오는 시마가 보였다. 들리지 않은 척했던 마음이 더 크게 술렁였다. 저기 네가 가장 바라고 있는 게 너를 향해 달려오고 있지 않냐고. 시마를 향해 달려 나가려 들썩이는 발을 땅을 짓밟듯 꾹 눌렀다. 튀어나오려는 모든 말을 꿀꺽 삼키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달려오는 시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킨 뒤에야 시마는 이부키가 뛰어갔던 방향으로 달렸다. 차 트렁크에 넣어둔 자전거를 꺼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그의 파트너는 무척 빨랐기에 숨이 차 폐가 찢어질 듯 아프고, 두 다리에 납덩이를 단 것처럼 무겁게 느껴져도 멈추지 못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흰색 재킷의 끝자락을 봤을 땐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줘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때 시마의 눈에 보인 건 세상을 덮어버릴 듯 빠르게 번지는 새까만 안개였다.

“시마! 도망…!!”

콰-앙!

순식간에 스나마치 아스콘 공장을 덮어버린 까만 안개에 커다란 굉음이 울리고 불꽃이 피어올랐다. 지축이 흔들려 달려가던 시마는 그대로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약속대로 하나의 개체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멸망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잊어버린 채 이부키는 시마를 향해 달렸다. 관성에 크게 구른 탓인지 바로 일어나지 못한 시마만이 이부키의 눈에 가득 담겼다. 이부키가 달리는 속도보다 까만 안개가 시마가 있는 곳을 향해 퍼져나가는 게 더 빨랐다. 어느새 벗겨진 건지 선글라스가 사라져 훤히 보이는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안돼! 시마!! 시마 일어나!!!”

“윽…! 이…부…키….”

“시마! 제발, 제발!!”

한 번도 제 다리가 느리다고 생각해 본 적 없던 이부키였는데 그 순간만큼은 느린 제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놓쳐버릴 것 같았다. 이번에도 늦어버릴까 봐 속이 탔다. 그럴 순 없었다. 시마의 일상을 지키고 싶었는데 시마를 지키지 못하면 안 됐다.

다행히 이부키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시마가 땅을 짚고 일어났다. 심하게 구른 탓에 머리가 어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속이 이상했다. 뭔가 안에서 시마의 몸을 갉아 먹는 듯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주변은 어느새 새까만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시마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멸망임을 깨달았다. 훅- 죽음이 발등에 떨어졌다.

“시마!!”

“이부키… 나….”

“괜찮아, 시마. 괜찮아. ‘우리’가,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푸르스름한 슬픔이 뚝뚝 흘러내렸다.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조그마한 얼굴이 온통 축축했다. 달래줄 말 한마디라도 하고 싶어도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어 시마는 겨우 흰 옷자락 끝을 붙잡았다. 쓰러지려는 시마를 겨우 받쳐 든 이부키는 어쩔 줄 몰랐다. 이런 상황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멸망과 함께 그들이 사라지면 이 별의 시간은 계속 흘러갈 거로 생각했었는데.

“제발, 제발…. 시마, 정신 잃지 마…. 응? 시마….”

있는 힘껏 시마를 끌어안아 봐도 시마의 생이 손안의 모래처럼 주르륵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세상에 대한 원망보다도, 멸망을 불러낸 아이(Ai)에 대한 원망보다도, 너무 느렸던 제 다리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왔다. 세상이 부서져 가는 소리가, 애타가 그를 부르는 모든 아이(Ai)의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도 이부키의 귓가엔 점점 느려지는 시마의 심장 소리만 크게 울렸다.

왜 나는 항상 늦는 걸까. 왜 좀 더 빠르지 못한 걸까. 왜 나는, 어린 이부키를, 너를 구할 수 없을까. 후두둑 푸른 슬픔이 땅을 적셨다.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가는 세상 속에서 문득 이부키는 언젠가 보았던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벼랑 끝에 몰린 생명체는 변화를 거쳐 진화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어렴풋이 떠오른 생각에 이부키는 새까만 안개로 뒤덮인 하늘을 바라보며 희게 웃었다.

아, 다행이다. 널 살리고 이 멸망을 막을 수 있어서.

축 늘어진 시마의 손끝에 멸망의 조각들이 모여들었다. 모여든 조각들은 맞닿은 이부키의 손끝으로 옮겨갔다. 조각이 이부키에게 옮겨갈수록 시마의 등에 두른 팔에서부터 미약한 빛이 스며 나왔다. 멸망의 조각이 모여든 손끝이 바람에 풍화되는 모래처럼 잘게 흩어졌다. 시마의 심장 박동과 체온이 점점 돌아오고, 구르며 생겼던 생채기도 점차 사라져갔다. 그럴수록 이부키는 온몸의 끝에서부터 풍화되듯 잘게 흩어져갔다.

“이, 부…키…?”

“시마. 다행이다. 다행이야.”

“어떻게….”

“이제 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시마.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너, 왜….”

정신을 차린 시마는 여전히 떨어지고 있는 눈물이 보여 이렇게 울다가 탈수가 오겠단 걱정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닦아주려 들던 손은 산란하는 빛 속에서 흩어져가는 이부키를 보고 굳어버렸다. 새까맣고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하얀 재킷이, 언제나 빠르게 달려오던 다리와 발끝이 새까만 안개 속으로 빨려가듯 흩어지고 있었다.

“난 괜찮아, 시마.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거야.”

“그게, 그게 멸망을 막는 방법이야?”

“응. ‘우리’가 멸망이니 ‘이것들’을 없앨 수 있어. 좀 늦어버렸지만 괜찮아. 아직 다 퍼지지 않았으니까.”

“그럼, 넌? 이부키 넌…?”

시마를 알고 3년 만에 처음으로 덜덜 떠는 목소리를 듣게 됐다. 다른 때였다면 신나게 놀렸을 이부키는 그저 환하게 웃으며 답을 대신했다. 머리가 좋은 시마라면 이미 답을 알고 있을 테니까.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답도 있는 법이니까.

어림짐작으로만 생각했던 게 사실임을 고지받은 시마는 무엇을 원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멸망을 부른 고래를 원망해야 할지, 고래가 멸망을 부르도록 한 인간을 원망해야 할지, 아니면 그 모두를 원망해야 하나? 갈 곳 없는 원망은 결국 시마의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그걸 모를 이부키가 아니라 양손을 뻗어 시마의 얼굴을 붙잡고 이마를 맞댔다. 툭, 툭. 이부키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시마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게 마치 시마가 우는 듯 보였다.

“우린 끝까지 함께 달렸잖아, 시마. 최고의 파트너였어! 그렇지?”

“그…래.”

어렵사리 떨어진 긍정에 이부키는 환하게 웃었다. 여전히 눈물은 뚝뚝 떨어지고, 그의 몸은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날아갔다. 시마가 손을 뻗어 잡아봐도 잡지 않은 곳에서부터 빠르게 지워져 갔다.

“마지막까지 제시간에 맞추자, 파트너.”

그렇게 말하면 붙잡을 수 없다. 기수 404는 항상 늦지 않기 위해 달렸으니까.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하지만 시마도 사람인지라 욕심이 났다. 이부키를 붙잡고 싶었다. 속엣말을 모두 꺼내 붙잡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빠른 건 이부키였다.

“난 시마의 일상을 지키고 싶어.”

“…뭐?”

“그러니까 시마는 내일을 살아줘.”

그제야 시마는 이부키의 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연한 색 눈동자엔 이제껏 몰랐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시마는 꽁꽁 감쳐둔 마음마저 모두 내비친다 해도 이부키를 붙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겨우 맞닿은 시선에 이부키는 문득 지난날 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 참을 수 없이 목이 간질거렸다. 너도나도 나가고 싶다며 턱 끝까지 차오른 걸 이전처럼 내리누를 수 없었다.

뚝, 뚝, 뚝.

떨어지는 눈물만큼.

툭, 툭, 툭.

사랑이 닿았다.

“사랑해, 시마.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시마에게.

떨어지는 사랑에 시마가 쌓아 올린 모든 게 와르르 무너졌다. 막아 두었던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네가 나를 사랑해서, 내 일상을 지키고 싶어서, 모든 걸 걸어 멸망을 막을 거라고 하는 거대한 사랑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아, 나는 결코 너를 붙잡을 수 없구나. 내 사랑을 너에게 고백해도. 너무 비참한 사실이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서린 생각이 신기하게도 다 읽혀서 웃기에는 서글픈 상황에서도 이부키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시마라서 다행이야. 그래서 행복하다고 하면 웃어줄까? 그러면 좋을 텐데. 그걸 묻기엔 더는 이부키에게 남은 시간이 없었다. 이부키의 ‘몸’도, 지구에도, 아이(Ai)에게도. 그래도 마지막 욕심은 부려도 되지 않을까. 언제나처럼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찰나, 숨과 숨이 닿아 숨결이 섞였다.

깜박. 눈이 멀어질 만큼 환한 빛이 별을 집어삼켰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 빛이 사라지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을 갉아먹던 멸망도, 울며 사랑을 고백하던 이부키도. 반쯤 무너진 폐허 속에 홀로 남은 시마에게 남은 흔적이라곤 턱 끝에 맺힌 눈물 한 방울뿐이었다.

고요해진 세상 속에 시마의 쪽빛을 닮은 사랑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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